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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아의 힘
1894년 무렵 경복궁 연못에서 고종과 명성황후가 참석한 가운데 주한 외국인들의 스케이트 모임이 열렸다. 당시 조선을 방문했던 영국 기행가 비숍 여사는 이날 풍경을 '조선과 이웃나라'에서 전하고 있다. 명성황후는 내외의 법도 때문에 향원정에 발을 드리워 바깥에선 안 보이게 하고 안에서 관람했다고 한다. 황후는 난생처음 보는 놀이에 흥겨워하면서도 남녀가 사당패들처럼 손을 잡았다 놓았다 하는 모양을 보고는 망측해했다.
▶ 당시는 스케이팅을 '발로 얼음을 지치는 놀이'라는 뜻에서 빙족희(氷足戲)라고 불렀다. 우리보다 30년쯤 앞서 스케이트가 전해진 일본에선 스케이트를 '얼음 놀이'(戲遊)라고 했다. "남녀가 손을 잡았다 놓았다 했다"는 걸 보면 명성황후가 보았던 스케이팅 중엔 피겨도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한국인들에게 피겨가 본격적으로 알려진 것은 1924년 '피규어 스케잇 구락부'(FSC)가 생겨난 이후다. 그나마 8명의 창립 회원 중에 여성은 없었다('한국 피겨스케이팅 100년').
▶ 피겨는 1864년 미국 발레 교사 잭슨 헤인즈가 스케이트로 왈츠를 춘 것이 효시라고 한다. 피겨 안무가 니콜라이 모르조프는 "피겨는 시(詩)와 같다"고 했다. 활자의 나열이 시가 아니듯, 회전·점프의 기교만을 피겨라 할 수는 없다. 선수가 음악에 몰입하고 그 혼신의 몰입이 표정과 몸짓으로 나타나 관중의 마음을 움직일 때 피겨는 완성된다.
▶ '피겨퀸' 김연아가 2009-2010 국제빙상경기연맹 피겨 시니어 그랑프리 1차대회에서 여자 싱글 부문 역대 최고 점수로 우승했다. 김연아의 우승은 피나는 연습에서 나오는 기술이 바탕이 된 것이다. 하지만 그의 최대 무기는 역시 풍부한 감성과 표정 연기다. 깜찍하고 장난기 어린 몸짓, 카리스마 가득한 눈빛, 때론 냉정하고 때론 위엄 가득한 표정을 짓는 데 따라 관객은 가슴을 풀었다 조였다 한다. 브라이언 오서 코치는 "김연아는 '록산느의 탱고'를 추면서 경기장의 공기까지 탱고로 만들어낸다"고 말했다.
▶ 사람들의 너무 많은 기대가 19세 소녀에겐 부담이 되기도 할 것이다. 그걸 이겨내고, 실수를 하면 오히려 만회하는 정신력이 김연아의 또 다른 힘이다. 라이벌 아사다 마오와의 이번 대회 점수 차는 36.04. 이제 김연아의 라이벌은 김연아 자신이다. 피겨의 변방에서 태어나 세계의 스타로 자리 잡은 김연아가 넉 달 뒤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또 한 번 기쁜 소식을 전해주길 기대한다.
- 김태익 논설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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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 시즌'의 출발은 화려했다. 김연아(19·고려대)가 2009~2010시즌 ISU(국제빙상연맹) 피겨 스케이팅 그랑프리 시리즈 1차 대회에서 우승했다. 김연아는 18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프리 스케이팅에서 133.95점을 받아 전날 쇼트 프로그램(76.08점)과 합쳐 210.03 점으로 금메달을 걸었다. 210.03점은 본인이 3월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하면서 세웠던 종전 세계최고기록(207.71점)을 2.32점 끌어올린 것이다. 이로써 김연아는 내년 2월 캐나다 밴쿠버 동계올림픽 우승 전망을 밝게 만들었다. 2006~2007시즌 시니어 무대에 데뷔한 이후 네 번째 시즌을 맞이한 '피겨 퀸'은 완성형에 가깝게 진화하고 있다. 실수가 거의 없을 만큼 숙련된 점프, 자신감을 바탕으로 한 예술성은 이미 경쟁자들의 추격을 멀찌감치 따돌렸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 ▲ 김연아는 2000년대 세계 여자 피겨 스케이팅계에서 가장 압도적인 지배력을 갖춘 선수로 성장하고 있다. 현 채점 제도에서 김연아의 '210점'을 넘길 수 있는 선수는 김연아밖에 없다는 외신들의 찬사가 쏟아졌다./연합뉴스
■이젠 자신과의 싸움
김연아가 18일 프리 스케이팅에서 얻은 133.95점은 2007년 러시아 그랑프리에서 얻었던 종전 역대 최고점수(133.70점)를 뛰어넘었다. 김연아는 "전광판을 보고 너무 놀라고 멍했다가 기분이 좋아졌다"고 말했다. 실수는 딱 한 번 했다. 이날 두 번째 연기 과제(전체 12가지)였던 3회전 점프를 시도하지 못해 0점에 그쳤다. "스케이트 날에 뭔가 걸리는 느낌"이 들어 점프할 타이밍을 놓쳤다고 한다. 그런데도 역대 최고점이 나왔다. 실전에 강한 '강심장'답게 금세 평정을 되찾고 나머지 연기 요소에서 모두 가산점을 받을 만큼 뛰어난 기량을 선보였기 때문이다.
특히 첫 번째 과제인 '3회전―3회전' 연속 점프는 기본 점수 10.0점에 가산점 2.0점이 붙어 무려 12.0점이었다.
남자 톱 랭커 수준의 빠른 스케이팅과 공중회전, 긴 비거리, 깨끗한 착빙은 여전히 독보적. 다른 여자 선수들은 3회전―3회전 콤비네이션 점프를 구사하는 데 애를 먹는다. 김연아는 주니어 시절부터 교과서적이었던 점프를 꾸준한 훈련으로 몸에 거의 완벽하게 익힌 덕분에 점프 구성을 조금씩 바꾸더라도 빠르게 새 프로그램에 적응한다. 목표로 삼은 215점도 충분히 가능해졌다.
■김연아가 하면 '브랜드'
'김연아표 연기'는 해마다 화제를 낳는다. 이번 쇼트 프로그램이었던 '007 제임스 본드'도 마찬가지였다. 주로 남자 선수들이 시도했던 영화 '007'의 테마 음악 메들리를 특유의 감각으로 해석해 큰 호응을 이끌어 냈다. 우선 8가지 연기 과제에서 감점 없이 모두 가산점을 받는 무결점 연기(클린 프로그램)가 깊은 인상을 남겼다. 지난 시즌 커다란 호평을 받았던 '죽음의 무도'와는 또 다른 매력으로 관객을 매혹시켰다.
브라이언 오서 코치는 시즌 전 '죽음의 무도'를 뛰어넘는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데 부담을 느꼈다고 한다. 하지만 '본드 걸'의 이미지뿐 아니라 '여성 본드'의 느낌까지 가미한 '김연아의 007'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자신감을 얻었다.
미국 작곡가 조지 거슈윈의 피아노 협주곡 F장조를 주제로 삼은 프리 스케이팅에선 '종달새의 비상', '미스 사이공', '세헤라자데' 등 그동안의 프로그램에서 받은 영감을 살렸다. 안무가인 데이비드 윌슨은 '팔색조' 같은 김연아의 감수성과 표현력에 대해 "내가 선수라면 김연아와 경쟁하기가 무서울 것 같다"고 말한다.
김연아는 19일 전지훈련지인 캐나다 토론토로 돌아간 뒤 다음 달 13일부터 열리는 그랑프리 5차 대회(스케이트 아메리카·미국 레이크 플래시드)를 준비한다. 이변이 없는 한 시리즈 전체 성적 6위 이내에 들어 '왕중왕'을 가리는 파이널(12월·일본 도쿄)행 티켓을 따낼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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