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야후 블로그 히스토리어
황제를 매료시킨 여인 왕소군
중국에서는 4대미인 으로 춘추전국시대의 서시(西施), 한나라때의 왕소군(王昭君), 위촉오시대의 초선(貂嬋), 당나라때의 양귀비(楊貴妃)를 든다.
그런데 이들 네명의 공통점이라면 역사에 한결같이 부정적인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다는 것이다. 서시는 오왕부차를 유혹하여 끝내 나라를 패망하게 하였으며, 왕소군은 흉노족에 끌려간 비련한 여인으로 묘사되며, 초희는 여포를 파멸로 몰고갔으며, 양귀비역시 당현종으로 하여금 주색에 빠지게 하여 나라를 위태롭게 만들었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그것이 과연 여인들의 잘못이라고 할 수 있을까? 특히 왕소군에 대해서는 대부분 고국을 등지고 끝내 흉조족의 땅에서 쓸쓸하게 목숨을 거둔 가련한 여인으로만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지극히 중국적인 관점에서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과연 그녀가 흉노족땅에 끌려간 것이 불행한 일이었을까?
중국의 유명한 고전시인 이태백은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
불행했던 한여인
왕소군은 서한(西漢)말기 지금의 호북성 자귀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그녀는 빼어난 용모로도 잘알려 있지만 한편으로는 비파를 매우 잘 연주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녀의 집은 그리 넉넉한 형편이 아니었고, 18세의 나이에 한(漢) 원제(元帝)의 후궁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그녀와 함께 궁녀가 된 여인도 수천여 명... 나라일도 운영해야 되었던 황제로서는 그 많은 여인들의 용모를 일일히 살펴볼 수 없었기에, 화공 모연수(毛延壽)에게 한 사람 한 사람의 초상화를 그려 바치게 했다
그래서 많은 궁녀들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화공에게 자신의 모습을 예쁘게 그려달라고 뇌물을 바쳤으나, 왕소군(王昭君)은 집안이 빈천하여 뇌물을 바치지 못하였다. 이에 화가난 모연수(王昭君)는 그녀의 용모를 아주 평범하게 그린 다음 얼굴 위에 큰 점을 하나 찍어 버렸다.
그러니 한원제의 눈에 그녀의 초상이 눈에 띌리 없었고, 그 후 왕소군은 5년간이나 궁녀신분에 머물러야 했다.
하지만 그녀의 운명은 전혀 다른 곳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당시 흉노(南匈奴)의 선우(單于- 흉노족의 왕을 뜻함) 호한야(呼韓邪: 재위 BC58~ BC31)의 형 질지골도(支骨都)는, 동생이 선우가 된것과 친중국정책등에 반발하여 북흉노를 성립시켰다. 이때 한나라가 북흉노를 정벌하고 질지골도를 죽이자, 호한야는 황급히 모피와 준마 등 많은 공물을 가지고 장안으로 와서 원제에게 매우 공손하게 문안을 올렸다.
이를 크게 기뻐한 원제는 성대한 연회를 베풀어 호한야(呼韓邪)를 환대하자, 호한야(呼韓邪)는 원제에게 황제의 사위가 될 것을 청하였다. 한나라는 흉노제국의 묵특선우와 일종의 불가침 조약을 맺은 후, 전통적으로 황실여인들을 보내왔다. 흉노제국이 과거보다 약하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강력한 궁기병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원제는 이런 제안을 거부하기 힘들었다.
호한야의 제안을 수락한 한 원제는, 호안야를 접대하기 위해 궁녀들중 총애를 받지 못한 미녀들을 불러 화려한 연회를 열었다. 한나라의 다채롭고 매력적인 문화를 보여주어, 그를 좀더 한문화에 동화시키고자하 하였던 의도도 있었다.
그러나 호한야를 매혹시킨 것은 한나라의 호사스런 문화가 담긴 연회가 아니라, 황제의 총애를 한번도 받지 못한체 연회장의 무희로 나왔던 한궁녀였다. 바로 왕소군이었던 것이다.《후한서(後漢書)》에 의하면, 그녀는 후궁이 된 뒤 몇 년이 지나도 원제가 찾아주지 않았기 때문에 흉노에게 출가하기를 자청하였다고 한다.
그녀를 보자 마자 호안야는 한원제에게 다음과 같은 제안을 하였다..
"황제의 사위가 되기를 원하지만 꼭 공주가 아니라, 저 궁녀들 중 한 명을 택해도 좋습니다."
가장 큰 고민거리중 하나인 황실공주 착출문제를 이렇게 쉽게 해결할 수 있다니, 한원제는 즉시 호안야의 제안을 수락하였다. 그런데 호안야가 선택한 왕소군의 용모를그제서야 직접 눈으로 확인하자, 한원제로서도 크게 후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황제로서 한 번 내린 결정을 다시 번복할 수도 없었다.
연회가 끝난 후 원제는 궁녀들의 초상화를 다시 대조해 보았다. 그런데 왕소군(王昭君)의 그림이 본래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데다 얼굴에 커다란 점까지 그려져 있지 않은가? 결국 모연수(毛延壽)는,황제를 기만한 죄로 참수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천하절색의 왕소군을 잃은 아쉬운마음까지 달랠 수 없었다. 결국 한원제는 호한야에게는 혼수가 준비되지 않았다는 핑계로 3일간 혼례를 연장 시켰다고 한다.
그리고 한원제는 왕소군(王昭君)을 미앙궁(未央宮)으로 불러 사흘 밤 사흘 낮동안 정을 나누었다고 한다.
날아가는 기러기도 날개짓을 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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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후 왕소군(王昭君)은 흉노족 차림으로 단장을 하고 미앙궁에서 원제에게 작별을 고하였으며, 원제는 그녀에게 소군(昭君)이라는 칭호를 내렸다. |
전하는 말에 의하면, 왕소군(王昭君)이 한나라의 수도 장안을 떠나던 날, 말위에 앉은 채 비파로 슬픈마음을 연주하고 있었는데, 마침 남쪽으로 날아가던 기러기가 아름다운 비파소리를 듣고 말위에 앉은 왕소군(王昭君)의 미모를 보느라 날개 짓 하는 것도 잊고 있다가 그만 땅에 떨어져 버렸다고 한다. 여기에서 왕소군(王昭君)을 일러 "낙안(落雁)"이라고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흉노족은 미개한 북방민족이란 선입견이 당시 사회전반에 팽배해 있었고, 한나라의 전통적인 교육을 받으며 자란 왕소군은 흉노족 여인이 된 다는 것 만으로 큰 불행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와 3일간의 동침은 오히려 한원제에게 독이 되고 말았다. 그녀가 흉노의 여인이 된지 3개월만에, 한 원제는 왕소군을 잊지 못하다가 끝내 사망하고 말았다고 한다.
그리고 호한야역시 노쇠하였던 탓에, 둘 사이에이도지아사(伊屠智牙師)라는 아들을 낳았지만 왕소군과 혼인 2년만에 사망하고 말았다. 이때 왕소군의 나이 불과 24세였다. 그런데 다음 혼인 상대자가 호한야의 장자 복주루(復株累)였다. 한나라의 문화에 익숙했던 그녀로서는, 친자는 아지지만 복주루의 여인이 된다는 것이 그리 좋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복주루가 선우의 직위를 계승하자, 흉노의 예법에 따라 복주루는 아버지의 모든 권한 심지어는 후궁들까지도 그대로 계승하게된다.
흉노의 여인 왕소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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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선우 복주루는 왕소군을 더욱 아끼고 사랑하여 부부간의 금슬이 매우 좋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
복주루는 왕소군과 11년 딸 둘도 낳으며 행복한 부부생활을 하였지만, 왕소군의 나이 35세에 사망하고 말았다. 이후 왕소군은 혼자 생활하였으며 언제 사망하였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일설에는 그녀의 사망연대를 왕망정권성립과 결부시켜, 그녀의 죽음역시 비극적인 것으로 해석하려 한다.
그러나 왕망정권성립이 과연 그녀에게 별다른 의미가 있었을까? 후한서에 전해지는 이야기처럼 평생 궁녀로서 황제의 은총만을 바라는 삶보다는, 보다 자유로우며 주목받을 수 있는 흉노족의 삶을 그녀는 더 원하였을 것이다.
더구나 장성한 아들은 왕이되고 딸들은 모두 명문귀족집안으로 시집을 보냈는데, 그 삶이 불행한 것인가? 또 그녀가 원하기만 하였다면 선우에게 간청하여, 고국에 한두번쯤은 방문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는 진정으로 흉노족의 삶에 만족하였으며, 한나라에서보다 더 큰 행복과 자유를 느꼈을 것이다. 또한 북방흉노족과 한나라 간의 평화관계를 상당기간 이어주었다는 면에서, 역사적으로 볼 때도 그녀의 삶은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그녀는 아름다운 미모뿐 아니라, 평화의 사절로서도 그이름 처럼 흉노의 땅에서 충분히 빛나는 삶을 산 것이다.
**** 왕소군 사후
왕소군의 아들 축일왕 계열은 그 세력이 점점 강성해진 후 동한(東漢)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서쪽으로 서쪽으로 진출하여, 게르만족의 대이동을 야기시켰고, 이것은 결국 로마제국의 붕괴로 이어졌다. 유럽대륙의 흉노계열 국가로 알려진 헝가리의 선조가 바로 이들이라고 한다.
중국 내몽고 후허호터에 있는 중국4대미녀 중 한명인 왕소군의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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