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8월 26일 중앙일보 /이정재의 시시각각
국장(國葬)이 끝났다. 그는 갔다. 꿈결같이. 운명이 대중검자라 이름한 이. 한 자루 검으로 일세를 종횡한 뒤 세상의 끝을 본 사람. 살아서는 무림의 희망으로 불렸고, 죽어서도 민초의 별로 일컬어질 이름. 무림실록은 그를 이렇게 기록할 것이다. (1997년 ‘대권무림’이란 정치풍자물을 1년간 연재했다. 당시 대선판을 무협에 패러디했는데, DJ에게 붙여준 별호가 대중검자였다. YS는 공삼거사. 85년 세월 대중검자가 살아냈던 대한민국은 또 하나의 무림이었는지 모른다. 창칼과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이 글은 DJ의 서거를 맞아 무협체로 풀어쓴 조문이다.)
대중검자의 성명절기는 바람검법이다. 호남 무림에서 한번 검을 쳐내면 순식간에 전국 무림이 바람에 휩싸이곤 했다. 호남 무림의 패권을 오래도록 놓지 않아 호남제일존으로 불린다. 바람검법은 공삼거사의 참계도(斬鷄刀: 닭의 목을 치는 칼)와 함께 강호 이절로 불렸다. 공삼의 참계도란 이름은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참계초식에서 따왔다.
검자가 주판을 놓고 상인의 길을 떠나 무림에 입문한 건 나이 서른의 일이다. 그로부터 17년이 흐른 무력(武歷) 71년 당시 지존인 박통과의 비무(比武: 무공을 겨룸)로 세상에 큰 이름을 떨쳤다. 첫 도전이었지만 박통의 가슴을 서늘케 한 끝에 아깝게 패했다. 위기는 그때부터였다. 그의 재도전을 두려워한 박통의 살수가 도처에서 덮쳤다. 검자는 8년 세월을 숨죽이며 지내야 했다. 무력 79년, 박통이 부하의 암습으로 죽자 그에게도 기회가 온 듯했다. 그러나 검자를 기다린 건 독두광마(禿頭光魔) 전두(剪頭)의 또 다른 살수였다. 그는 필사의 위기를 넘어 미국으로 도주했다. 검자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판관의 입만 봤다. ‘사형’의 사자를 발음하려면 입이 가로로 벌어져야 한다. 판관의 입이 가로로 벌어지는 순간, 절망이 덮쳤다. 그러나 죽음을 겁내 군부와 타협할 수는 없었다.”
그에게 죽음보다 더한 좌절이 찾아온 건 무력 92년. 세 번째 무림지존 도전에서 공삼거사에게 패한 직후였다. 그는 검을 꺾고 은퇴를 선언했다. 당시 그의 심경을 담았다는 시구절이 전한다.
“장부 나이 삽십에 주판 놓고 검 들어(丈夫三十 去盤握劒)/ 무림에 뛰어들어 천하를 세우려 했네(出師武林 以立天下)/ 걸음걸음이 칼산이요, 곳곳이 검숲이라(步步刀山 處處劍林)/ 한번 떠난 민심은 영 돌아오지 않네(民心一去不復返)/ 백 가지 생각, 천 가지 궁리가 소용없으니(百謨天慮爲無爲)/ 기운 다하고 힘 빠져 나갈 길 보이지 않네(氣盡力絶無出路)”
검자에게 민심은 모든 것이었다. 그는 민심을 얻는 자가 최후의 승자가 된다고 믿었다. 민심이 떠난 아픔은 죽음의 공포보다 그를 더 절망케 했다. 그러나 ‘흙먼지를 말고 다시 일어난(捲土重來)’ 검자는 무력 97년 제15대 무림지존에 올랐다. 네 번째 도전 끝이었다. 지존좌에 오른 검자는 대중경제공과 햇볕초식을 창안했다. 환란으로 망가진 경제는 대중경제공으로 다스렸다. 북풍은 햇볕초식으로 상대했다. 역대 무림지존 중 북풍을 감싸 안은 이는 검자뿐이었다. 다만 햇볕초식에 이은 무차별대북황금살포공은 두고두고 강호의 시빗거리가 됐다. 무력 2009년 지병이 악화돼 서른일곱 날의 투병 끝에 숨을 거뒀다. 기축년 팔월 열여드레날, 강호는 공식적으로 그의 사망을 선언했다.
검자의 공(功)을 말하는 이는 그를 일러 민주무림의 구성(救星)이라 하고, 과(過)를 말하는 이는 무림 분열의 수괴라 하나 모두 과장된 것이다. 벌써 그의 이름을 잇고자 하는 이들이 서로 공명을 다투고 있다 하나 또한 부질없는 짓이다. 검자의 바람검법은 수많은 세월 수련과 인고가 필요하다. 검자 외엔 달리 익혀낼 자가 없다. 호남무림에서 “검자 이전 검자 없고, 검자 이후 검자 없다”는 얘기가 나오는 이유다. 무릇 그를 잇고자 하는 이는 헛된 욕심과 다툼에 앞서 삼가는 법부터 배워야 할 것이다. 검자가 마지막 남긴 것도 화해와 용서가 아니던가.
이정재 중앙SUNDAY 경제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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