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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박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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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박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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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2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는 울릉도를 방문한 뒤 도동항에서 작은 경비정에 올라 앞바다에 떠 있는 함정으로 떠났다. 풍랑에 경비정이 뒤집히려 하자 해군 참모총장이 "뛰어내리자"고 외쳤다. 박정희도 바다로 뛰어들었다. 그는 흠뻑 젖은 채 학동항으로 옮겨 경비정을 탔고, 줄사다리로 함정에 오를 때도 파도가 덮쳐 비틀거렸다. 연이어 위기를 넘긴 그가 말했다. "이래서 국가원수가 울릉도를 방문한 적이 없는 모양이군."(조갑제 '박정희의 결정적 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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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1961년 5월 16일 새벽 한강 인도교를 넘던 쿠데타군이 다리 북단 헌병들의 총격에 막히자 소장 박정희는 차에서 내려 걸었다. 총알이 옆으로 쌩쌩 날아가는데 상체도 숙이지 않았다. 그는 "총알이 사람을 피하는 것이지, 사람이 총알을 피할 순 없다"고 생각했다. 1974년 광복절 경축식장에서 아내가 저격당한 지 2분 만에 대통령 박정희는 다시 연단에 섰다. "여러분, 하던 얘기를 계속하겠습니다." 그는 5분 넘게 연설문을 끝까지 읽고는 "감사합니다"라며 고개 숙여 인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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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박정희의 어머니는 며느리를 둘이나 본 마흔넷에 딸과 함께 임신한 것이 부끄러웠다. 아기를 지우려고 간장을 사발째 마셨고 장작더미에서 뛰어내렸다. 박정희는 뱃속에서부터 평생 죽음과 등을 대고 살았다. 1949년 군 내부 남로당 숙군(肅軍) 때는 사형을 구형받았다. 그는 일기에 충무공 말씀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則生 必生則死·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를 써두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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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1977년 박정희는 대구사범 시절 일본인 은사를 만나 "언제나 죽을 각오가 돼 있다"고 했다. 총으로 권력을 잡았기에 그 총구가 자기를 겨눌 것이라 각오하고 살았다. 침대 발치에 카빈 소총 두 자루를 세워놓고 자던 그가 1979년 가을 카빈을 치웠다. 한 달 뒤 10월 26일 궁정동에서 그는 가슴에 관통상을 입고 "나는 괜찮아"라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 배석했던 여성은 그가 "체념한 듯 담담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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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박정희는 "가난은 내 스승이자 은인"이라고 했다. "가난이라는 스승 밑에서 배운 수백만 동문이 있는 이상 쉴 수도 후퇴할 수도 없다"며 경제개발을 밀어붙였다. 가난과 죽음은 그의 두 동력원(源)이었다. 박정희는 1965년 이승만 영결식 조사(弔辭)에서 "실정(失政)이 박사의 애국정신을 말살하지 못한다. 박사의 민족을 위한 생애 중 일부분일망정 전체가 아니다"라고 했다. 그 조사가 새삼스럽게 들리는 요즈음이다. 어제가 박정희 30주기(周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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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오태진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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