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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글(펌)

뼈 속 까지 엔지니어 - 전 현대 중공업 사장 민계식

 

[엔지니어열전⑥]한국 조선의 R&D 선장 민계식 현대중공업 상담역

모친이 45세에 낳은 늦둥이…"형누나들의 꿀밤이 날 키웠다"
미국 유학시절 식당·주유소·선착장·운수회사서 막노동 경험
대우·현대가 모두 탐낸 인재…논문 280편, 특허 300건 낸 천생 공학자
기술력 바탕 제조업서 16.7% 이익 창출 신화…"경영은 상식이다"

 

조선업계의 해외 학회나 행사에 작은 체구의 백발 아시아인이 나타나면 모든 주목이 그에게 쏠린다. 시끌벅적한 분위기 속에서도 그가 입을 열면 그의 말 한마디를 놓치지 않으려 주변이 조용해진다. 그가 바로 ‘닥터(Dr.) 민’으로 불리는 민계식 전 현대중공업 회장. 그가 낸 280여편의 논문은 여전히 다른 연구자들에게 무수히 인용된다.

 

그가 2011년 경영일선에서 물러나자 중국의 조선업계에서 그를 가장 먼저 찾아왔다. “최종월급의 3배를 주겠다”며 영입 제의를 한 것. 그는 연구 뿐 아니라 경영에서도 탁월한 성과를 냈는데 그가 CEO로 재직한 10년 사이 현대중공업은 매출액 기준으로 다섯 배 이상 성장했다. 특히 사업의 다각화와 기술혁신을 바탕으로 2010년 16.7%의 이익률을 기록한 것은 신화에 가깝다. 당시 ‘제조업의 이익률은 4%가 한계’라는 기업전문기관의 평가가 있었고, GE가 금융‧제조업을 합쳐 기록한 6% 이익률이 대단히 높은 편에 속했다. 조선업에 막대한 투자를 하는 중국으로선 ‘CEO 민’을 잡는 것이 중요한 과제였다.

그러나 그는 중국의 좋은 조건 대신 국내 대학을 택했다. KAIST 대학원과정의 해양시스템공학전공에서 강의 제의를 해와 수락했더니 아예 정규 과정이 만들어졌다. 최근엔 일주일 중 절반을 대전에서 학생들을 가르친다. 경영을 하면서도 연구를 꾸준히 이어갔던 덕에 큰 어려움은 없다.

 

그는 “공학자로서의 내 철학은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내가 창의적으로 즐겁게 일하는 것인데 경쟁국에 기술전수하며 즐거울 리 없다”면서 “또 나는 마라톤과 책, 컴퓨터만 있으면 행복한데 큰돈이 무슨 필요냐”며 웃었다. 이어 그는 “현대중공업에 대한 충성과 의리가 있으니 3년은 다른 기업과 일하지 않을 생각”이라며 “이후에는 국내의 기업이라면 어디든 도와줄 것”이라고 덧붙였다.

 

종심(從心)을 넘은 민계식 전 회장은 가장 존경받는 CEO이자 공학자 중 하나다. 관련 부문에서 수상도 많이 했지만 그보다는 실제 그와 만난 적 있는 직원들과 후배들의 경험담을 통해 더 잘 드러난다. 현대중공업 대표이사를 맡았던 시절 그가 현장에 나타나면 노조위원장이 다가와 그의 허리를 껴안으며 반겼고, 어딜 가든 같이 사진 찍자는 직원들도 많았다. 퇴직 후에도 사내 마라톤 동호회원들은 같이 뛰고 싶다며 자주 그를 초청한다. 인터넷에서 그의 이름을 검색하면 그를 만난 후 느낀 소감들을 자유롭게 올려놓은 글이 많은데 언론에 알려진 화려한 성과보다는 뛰어난 인품과 철저한 자기관리, 모두에게 겸손하고 온화한 태도 등에 대한 존경심이 대부분이다.

 

많은 후배들이 뒤따르고자 하는 그의 가치관과 철학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 그를 만나 그의 삶을 반추해보았다.

 

# 늦둥이 막내…"까불지 말라며 때려주는 꿀밤이 날 키웠다"

 

민계식 전 회장은 뼈대 있는 집안에서 나고 자랐다. 고모할머니뻘인 명성황후를 비롯해 왕비를 여럿 배출한 유서 깊은 가문 출신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훌륭한 가치관을 가진 부모형제가 있어 좋은 집안이었다.

 

부친은 자식들에게 모든 일에 열심히 하는 집안 전통을 가르쳤다. 그는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1회생으로서 120명 중 단 6명에 불과했던 조선인 중 하나였지만 평생 스스로가 머리가 좋다는 이야기는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자식들에게도 “사회를 이루는 모든 사람들이 다 너희들만큼은 할 수 있으니 열심히 하는 것 밖에 없다”며 “오늘 10분 더 공부하는 것이 10년을 가고 평생을 가면 하늘과 땅 차이를 만들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그가 자식들이 말 배울 때부터 외우게 한 3가지 인생철학이 만인평등주의, 범인사상, 자조의 정신이다. 이를 가르치기 위해 UN헌장의 영어 구절을 적어 목에 걸고 외우게 했다. 자식들은 모든 사람이 날 때부터 평등하며, 자신을 보통사람으로 여기고, 개인과 국가는 스스로 일어서야 한다고 체득했다.

 

모친은 민계식 전 회장을 마흔다섯에 낳았다. 임신기간 내내 창피해했던 모친은 후에 “늦둥이 재롱이 큰 낙이었다”며 “안 낳았으면 후회할 뻔 했다”고 말했다. 사범대학을 나와 중학교 교사였던 모친은 확고한 교육관과 뜨거운 교육열을 갖고 있었다. 그는 남편이 경성제국대학 시험을 준비하는 동안 뒷바라지를 했는데, 학교 수업과 집안일을 하면서도 공부하는 남편보다 먼저 잠드는 일이 없었다. 옆에서 바느질을 하며 남편이 졸 때마다 등을 치고 “이래서 어떻게 합격을 합니까?” 물었다고 한다. 100점을 못 맞으면 회초리를 들었던 모친은 아들들은 모두 경기고-서울대, 딸들은 모두 경기여고-이화여대를 보냈다. 막내아들에게는 고교입학지원서에 2지망을 빈 칸으로 두게 할 정도로 엄격했는데 나중에서야 “너희 형들 하는 거 봤더니 넌 충분히 될 것 같더라”며 속내를 밝혔다.

 

모친의 철칙은 하루에 한 끼, 저녁은 꼭 온가족이 다 같이 먹는 것이었다. 덕분에 저녁자리는 막내의 꿀밤세례 시간이 되기도 했다. 바로 위의 형하고도 7살 차이가 났던 민 전 회장이 저녁자리에서 백점을 맞은 것이나 달리기 시합에 이긴 이야기를 자랑하면 여기저기서 “까불지 말라”며 꿀밤이 쏟아졌다.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갖고 있는 형제자매들이 이야기를 시작하면 화제가 끊이지 않았다. 그에게 한글을 가르쳐준 것도, 독서의 즐거움을 알려준 것도, 에디슨 전기를 권해주며 발명가의 꿈을 키워준 것도 모두 형이었다.

 

에디슨 전기를 읽고 감명 받은 그는 종종 산에서 총알을 주워다가 실험을 했다. 전쟁 직후 산에는 총알이 많았고 망치로 두드리면 쉽게 분리됐다. 그걸로 로켓을 만들었는데 제작 중에 터져서 죽을 뻔 한 적도 있고, 하늘 높이 날아간 로켓을 찾으러 이웃집을 기웃거리기 일쑤였다. 물론 그때마다 그는 저녁자리에서 “바보천치” 소리를 들으며 꿀밤을 맞아야 했다.

 

# 패기 넘치는 조선공학도…"직접 만든 배를 타고 일본에 가려했다"

 

발명가를 꿈꾸던 그는 고등학교 1학년때 조선항공학을 전공으로 정했다. 이순신 장군의 전기를 읽고 존경하게 된 것도 계기가 됐지만, 규장각에서 본 옛 지도의 영향이 컸다. 북쪽에 앉은 임금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국토를 담은 지도, 그 안에서 우리나라는 3면이 아니라 전부가 바다였다. 국방이든 산업이든 진취적으로 바다로 나가지 않으면 국가의 미래는 없다는 판단이 들어 전공을 택했다.

 

입학 후 그의 목표는 배를 직접 만들어서 일본을 방문하는 것이었다. 제자의 계획을 기특하게 여긴 교수가 조언을 해주었고, 그를 포함 죽이 잘 맞던 4명의 신입생들이 설계부터 자재 조달, 대패질까지 직접 진행해 숙식 해결이 가능한 10미터 가량의 큰 배를 만들었다. 입학 직후부터 시작된 제작은 2학년 첫 학기 때 끝났고, 방학 때부터는 인천 영종도와 충청도를 오가며 항해 훈련을 했다. 파도와 암초에도 끄떡없겠다며 자신만만했고 추석이 지난 후 출발계획을 잡았다.

 

하지만 막상 떠나려고 하니 교수가 나서 강력하게 반대했다. 당시엔 몰랐지만, 후에 들어보니 그를 제외한 나머지 세 친구는 외아들이었다. 추석에 아들에게 계획을 들은 어머니들이 기겁을 하고 나서 교수를 설득했던 것이다. 옛 서울대 공대가 있던 공릉동 캠퍼스에는 그와 친구들이 만든 배가 전시돼 있었는데 현재의 관악캠퍼스로 옮기며 행방이 묘연해졌다. 패기 넘치게 나섰던 그는 2학년 2학기부터 바닥으로 떨어진 성적을 회복하느라 꽤 고생했다.

 

그가 졸업하던 1960년대 초, 대학을 나와도 들어갈 회사가 없었다. 특히 조선공학과는 더욱 그랬다. 국영기업이었던 대한조선공사(현 한진중공업)가 있었지만 월급 지급이 제대로 되지 않았고, 간혹 돈 대신 쌀로 지급되기도 했다. 그는 시험을 1등으로 통과해 설계사로 입사했지만 배를 짓지 않으니 회사 전체가 할 일이 없었고, 그나마도 설계는 일본에서 받아서 진행했다. 그가 거기서 4개월 간 제대로 일 한 기간은 겨우 보름, 일본에서 해온 설계도를 다시 일일이 다 계산해 복원력의 오류를 잡아낸 것뿐이었다. 그는 원래 계획대로 유학을 떠나 공부를 계속하기로 결심했다.

 

# 미국 생활 11년…"식당 접시 치우기부터 보잉사 연구원까지 경험"

 

그는 학부성적과 토플성적을 토대로 UC버클리(University of California, Berkeley)와 MIT 두 곳에서 입학허가를 받았는데 외무부에 근무하던 사촌형에게 조언을 받아 1967년 UC버클리에 입학했다. 후에 미국에서 산업계 경험을 쌓은 후에야 UC버클리보다는 MIT가 공학도에게는 더 장점이 많다는 걸 알게 됐지만 선택이 그렇게 된 연유는 따로 있었는지 유학시절 우연찮게 어릴 적 동네 여동생을 만나며 결혼을 하게 됐다.

 

결혼과 함께 유학생활도 어느 정도 적응이 됐던 1969년, 첫 아이가 태어났고 고난이 시작됐다. 2.2파운드(약 0.99kg) 미숙아로 태어난 아이는 3개월간 병원에 입원해 있었고 2만3000달러의 병원비가 청구됐다. 당시 중형차 한 대가 1500달러였다.

 

시간당 70센트를 받는 식당 접시 치우기일부터 시작했지만 그렇게 모아 병원비를 내기엔 터무니없었다. 시간당 90센트의 주유소 점원, 3달러의 공장 품질관리원, 5달러의 부둣가 짐꾼 등을 거쳤다. 부둣가 짐꾼이 되기 위해 미국노동조합 평생회원에도 가입했다. 새벽 4시부터 오전 9시까지 한 달을 부두에서 일하니 파김치가 돼서 수업시간엔 졸기만 했다. 녹음기를 틀어놓고 엉망으로 필기를 하는 그의 딱한 사정을 알고 교수들이 노트의 틀린 부분을 고쳐주기도 했다.

 

그가 병원비를 제대로 갚지 못하자 병원은 그의 채무를 일종의 불법추심전문회사인 콜렉팅컴패니(Collecting Company)에 넘겼고, 매주 덩치 큰 흑인이 와서 협박을 일삼았다. 그 즈음해서 그는 마지막 막노동으로 대형트레일러 운전을 했다. 이틀 간 2000km를 운전해 냉동고기를 운반하는 고된 일이었지만 그 역시 빚을 갚기엔 충분한 보수가 못 되었다.

 

그는 결국 1년간 휴학하고 일해서 빚을 갚고 와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지도교수를 찾아갔다. 하지만 교수는 “그렇게 이야기하고 떠난 사람 중에 학교로 돌아온 사람은 아무도 없다”며 끝까지 만류했다. 그도 엄청난 액수의 빚을 이야기하며 물러서지 않자 교수는 대신 군함설계회사를 추천했다. ‘바늘부터 배까지(from needle to ship)’라는 모토로 유명한 리튼(Litton Industries)사 안의 리튼쉽시스템스(Litton Ship systems)라는 자회사였다.

 

입사 후 그는 미 해군에서 발주한 구축함 설계 프로젝트를 수주해 진행했다. 총29척을 짓는 대형프로젝트로 16개 회사가 경합을 벌였는데 그는 마지막까지 남은 다른 3개 회사 담당자들과 함께 해군참모총장 앞에서 계획을 발표해 최종 선정됐다. LA 설계회사에서 1년, 미시시피 군함 건조현장에서 1년, 코네티컷 원자력함 건조현장에서 2년 등 총 4년을 일하는 동안 29억 달러에 따온 프로젝트는 92억 달러까지 늘어날 정도로 커졌다.

 

그 과정에서 MIT 출신들의 우수성과 영향력을 확인한 그는 1974년 MIT로 옮겨 박사학위를 밟았다. 빚은 이미 청산된 후였고 드디어 학업에 전념할 수 있었다. 조선항공학과 우주항공학 학위를 동시에 받으려면 1년 정도 더 소요됐지만 그는 둘 다 진행했다. 특히 MIT에선 프로펠러나 비행기 날개 설계 수업을 많이 들었고, 이를 계기로 보잉(The Boeing Company)사에 입사했다. 당시 보잉에서는 747기의 양력이 갑자기 떨어지는 현상이 발견돼 문제가 되고 있었다. 이를 해결한 것이 갓 입사한 민계식 전 회장. 그는 비행기 날개를 수없이 많은 선으로 나눠 아주 작은 부분 부분을 분석해서 문제점을 찾아 고쳤다. 그가 만든 비행기날개 및 프로펠러 설계프로그램은 여전히 탁월한 평가를 받고 있다.

 

보잉에 입사한지 3개월, 미국생활이 11년차를 맞이하던 어느 날, 처음으로 한국에 있는 모친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편지는 매일 주고받다시피 했지만 2~3시간을 대기해야 겨우 통화할 수 있는 전화는 불편함과 비용 때문에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나쁜 예감은 맞아떨어졌다. 모친은 흐느끼는 목소리로 간암 판정을 받은 부친이 위독하다는 내용을 전해왔다. 그는 당장 모든 것을 정리해 귀국했고 4개월을 부친 곁에서 보내며 마지막을 지켰다. 애초에 미국에서 계속 살 생각은 없었고, 다만 3년쯤 더 미국의 산업계를 경험할 계획이었기에 아쉬움은 전혀 없었다.

 

# 대우맨 10년, 현대의 10년 설득…"새벽 6시 집으로 찾아온 왕회장에 놀라 ‘네’ 대답"

 

1979년 12월, 귀국 후 1년 3개월쯤 지났을 때 대우조선공업(현 대우조선해양)이 설립됐다. 한국선박해양연구소(현 한국해양과학기술원) 연구원으로 일하던 그에게 고교선배가 영입을 제의했고 연구하고 설계한 결과물이 제품화 되는 걸 보고 싶어 숙고 끝에 자리를 옮겼다.

 

입사 당시 설계 담당 직원은 그를 포함해 단 3명이었다. 할 일을 찾기 위해 유조선 국제입찰을 찾아보던 중 노르웨이 해운선사에서 거칠고 험한 해협을 운항할 수 있는 특수유조선 입찰을 낸 것을 발견했다. 설계요원을 채용하는 동시에 사양서를 바탕으로 설계계획서를 작성해 제출했다. 한 달쯤 지나 대우조선과 일본, 스웨덴, 독일의 회사 등 네 곳이 마지막까지 남아 발표를 하게 됐고 대우조선과 일본회사가 최종 협상대상자로 선정됐다. 최종 결과가 나오는 이듬해 2월, 발표일이 3일이 지나 만나자는 연락이 왔고, 최종 선정 통보를 받았다. 대우조선이 낸 입찰가는 5500만 달러. 일본회사와 50만 달러의 근소한 차이였다. 12명의 설계요원이 투입된 야레나 호는 성공적으로 건조됐고, 여기에 만족한 노르웨이 해운선사는 세계 초일류기술을 도입한 셔틀탱크의 건조도 대우조선에 맡겼다. 그는 거제도 옥포조선소에서 살다시피 하며 설계와 연구에 매진했고, 대우조선을 방문한 해운선사들을 붙들고 설득해 즉석에서 배를 수주하기도 했다. 새벽 6시에 출근해 늦도록 일하던 그를 비롯해 당시 그의 팀 설계요원들은 아직도 회자들만큼 전설적으로 열심히 일했다. 대우조선의 부흥기였다.

 

그즈음 현대중공업에서도 그를 주목하고 있었다. 야레나 호는 현대에서도 입찰 참여를 고려했으나 설계가 복잡하고 난이도가 높아 포기했던 프로젝트였다. 그걸 신생회사가 수주하니 호기심에 대우조선을 방문한 현대맨들 중 일부는 그와 일해 보겠다며 그 자리에서 입사원서를 썼다.

 

행동에 나선 것은 1982년 현대중공업 사장에 취임한 정몽준 의원. 그와 서울대, ROTC, MIT 동문인 정 의원은 선후배 관계를 핑계로 종종 그에게 차를 마시자고 청했다. 일상적인 이야기부터 경영철학까지 다양한 주제로 많은 대화를 나눴고 부담스러운 자리는 아니었다. 다만 자리에서 일어설 때면 정 의원은 늘 넌지시 “이제 그만 오시죠”란 말을 건넸다. 그도 조용히 “장수가 말을 갈아탈 순 없죠” 대답하는 식이었다. 그렇게 10년을 함께 차를 마셨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와 다름없이 새벽에 집을 나설 준비를 하는데 큰 키의 두 사람이 집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누군가 바라보니 고(故) 정주영 명예회장과 정몽준 의원이었다. 그는 거실에 앉은 왕회장에 혼이 빠져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도 모르고 “네네”를 연발했다. 자리에서 일어서며 이번엔 왕회장이 “이제 오시는 겁니까?” 물었는데 거기에도 그는 당황해서 “네네” 대답했다.

 

그 길로 김우중 회장을 찾아가 물었다. “저는 기술자로 죽을 건데 정말 기술개발 안 하실 겁니까?” 김 회장의 대답은 “안 한다”였다. 평소 그에게 기술개발하지 말고 영업총괄을 맡으라고 권하던 김 회장이었다. 기술보다는 영업을 우선시했고, 핵심역량 보단 대마불사(大馬不死)를, 고유 브랜드 대신 OEM(주문자상표부착생산)을 고집해 그와는 철학이 달랐다. 그는 그 날 대우조선을 떠났다.

 

# 세계 1위 한국 조선의 선장…"연구개발은 노력, 경영은 상식이 필요하다"

 

민계식 전 회장이 부사장으로 현대에 올 때 정몽준 의원의 당부는 설계와 연구소를 다 맡아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민 전 회장은 “3년은 며느리로 있겠다”며 기술개발본부만 맡았다. 현대의 문화를 파악하고 자연스럽게 스며들고 싶었기 때문이다.

 

연구개발을 하며 살펴보니 현대의 설계실은 전 세계에 설계를 사러 다니고 있었다. 안타까웠지만 선뜻 나서기가 어려웠다. 연구소에서 새로운 걸 만들어 설계실에 가져가면 충돌이 생기는 분위기였다.

 

정주영 회장이 물꼬를 터줬다. 왕회장은 누구든 “할 수 있다”고만 말하면 무조건 “그럼 네가 해봐”였다. 왕회장이 허가하면 전사적 지원이 이루어졌다. 울산에서 러시아를 오가는 초고속선을 3개월 만에 설계했다. 기존보다 2배 빠른 배였다.

 

이후로 그를 중심으로 연구소에서 논문과 특허, 실용신안이 쏟아져 나왔다. 그의 이름으로 낸 것만 논문 280여편에 특허가 300건이 넘었다. 발명특허 중 제품화에 성공해 정부의 ‘세계일류상품 인증’을 받은 것이 5%에 달한다. 전 세계 평균은 0.8%다.

 

그 중 1999년에 완성한 중형디젤엔진은 그가 오롯이 혼자서 개발한 것이다. 1992년, 외국기술을 사용해 만드는 것이 안타까워 특허 검색을 통해 기존 특허를 침해하지 않으면서도 성능이 뛰어난 엔진을 착안해 회사에 개발을 제안했지만 거절당했기 때문이다. 회사의 지원이 있었다면 3년이면 마쳤을 개발에 7년이나 소요됐다. 취미처럼 연구해 결국 4기통 시제품을 만들어 1년 동안 운전시험을 해서 완성했으나 이번엔 조선사업본부에서 판매를 반대했다. 그는 포기하지 않고 독일 최대 해운선사의 선주를 찾아갔다. 기술에 조예가 깊기로 유명한 선주였다. 그를 설득해 6개월 시한부 사용을 허락 받았다. 일단 무상으로 제공하고 6개월 후에 마음에 들면 원가만 받는 조건이었다. 독일 선주는 3개월 만에 원가에 6% 이윤을 붙여 엔진 대금을 지불했다. 2000년 독일 선주에 넘긴 5개를 시작으로 50개가 판매됐고, 이후 매년 2400여개가 판매됐다.

 

항공역학을 이용해 개발한 선박용 추력날개, 사업다각화를 위해 개발한 해양플랜트용 방폭형 변압기 등도 사내보다는 해외에서 먼저 인정을 얻었다.

 

 

10년간 CTO 역할에 충실했던 민계식 전 회장은 2001년부터는 현대중공업의 대표이사로 경영까지 맡게 됐다. 그의 경영은 지식이 아닌 상식에 기반 했다. 그리고 그의 상식에서 회사의 최우선 목표는 ‘고용안정과 고용창출’ 단 두 가지였다.

 

고용안정을 위한 방법은 간단했다. 그는 대표이사로 있는 11년 동안 단 한 명도 해고하지 않았다.

 

“미국에서 무엇을 봤냐면, 일이 많을 때 사람을 마구 뽑았다가 한꺼번에 모조리 잘라요. 보잉에서는 1만5000명을 한번에 해고하는 것도 목격했죠. 초음속기를 개발하겠다며 사람을 잔뜩 뽑았는데 미국 의회에서 해당 안이 부결돼 계획이 무산됐습니다. 다음 날 출근했더니 사람들 책상에 하얀 봉투가 쫙 올려져있는 겁니다. 안에는 해고통보서와 2주치 월급이 들어있었죠. 모든 사람들이 ‘이 X같은 회사’ 욕하며 나가는 장면을 보며, ‘난 절대 이런 식의 경영은 하지 말아야 겠다’ 생각했습니다. 전 미국식 MBA 경영이 잘못됐다 생각합니다. 필요할 때 뽑았다가 필요 없으면 자르는 것? 그런 경영을 누가 못 합니까? 너무 쉽죠. 그러나 회사는 킬러(killer)가 아닙니다. 뽑은 사람을 책임지는 것이 회사고 경영이죠. 그 사람의 재주를 찾아 살려주고, 하다못해 복사를 시키건 청소를 시키건 퇴직에 대한 걱정 없이 즐겁게 일할 수 있게 만들어줘야 됩니다. 실제 희망퇴직 진행해봤자 20~30명뿐인데 그것 때문에 전 직원을 불안하게 하는 것이 효과적일까요? 세계에서 10등을 하는 부서라도 이익이 나면 놔두고 더 잘하게 해야지요.”

 

고용창출을 위한 방법도 특별한 묘수는 없었다. 지속적인 성장과 수출 중심의 매출구조를 만드는 것이었다. 조선사업본부에 집중돼 있던 현대중공업을 엔진기계사업본부, 해양사업본부, 플랜트사업본부, 전기전자시스템사업본부, 그린에너지사업본부, 건설장비사업본부 등 총 7개의 생산본부로 재편해 사업을 다각화했다. 물론 이것은 순수하게 그의 뜻만은 아니었다. 그의 경영능력을 높이 산 현대그룹에서 중장비‧로봇‧엔진 등 적자가 나는 사업을 현대중공업으로 넘기기도 했다. 그는 기술은 있으나 가치가 낮게 평가된 관련업체를 인수‧합병하거나 자체 기술력 향상 등을 통해 경쟁력을 높였고, 조선 외 분야에서도 지멘스(SIEMENS)‧에이비비(ABB) 등 세계 일류기업들과 거래의 물꼬를 텄다. 뚫기 힘들다는 일본까지 진출, 일본‧캐나다 변압기의 35%가 ‘메이드 인 현대’가 됐다.

 

그가 맡았던 10년 사이 회사는 5배 성장했고, 7:3이었던 내수:수출 비율이 거의 대등한 수준에 도달했다. 특히 2010년에는 제조업에서는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16.7%의 이익률을 기록하는 기염을 토했다.

 

2011년 은퇴한 그는 명실상부 세계 1위 조선사 현대중공업과 조선분야 세계 1위 대한민국을 이끈 선장이었다.

 

# 존경 받는 공학자 민계식…"나도 방황하는 99.8% 중 하나다"

인터뷰 내내 망설임 없이 진솔하게 이야기를 이어가던 민계식 전 회장이 마지막 무렵 살짝 미소 지으며 고백했다. 실은 방황을 좀 많이 했다고. 평생을 조선에 몸담았으며 뛰어난 성과를 거둔 그의 고백이 의아했다.

 

첫 번째 방황은 강한 애국심 때문이었다. 그는 고교를 졸업하고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해 6개월을 다녔다. 군대에 뼈를 묻을 각오였다. 그의 부친은 돈을 잘 버는 개업의로 활동하다 해방 후 군의관이 되었고, 한국전쟁에선 아직 어린 그를 제외한 4형제까지 집안의 남자 다섯이 모두 장교로 참전했다. 맏형은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이를 경험한 그는 국방에 대해 남들보다 넘치는 의무감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사관학교에선 군대에 대한 실망을 느꼈다.

 

“세상이 썩어도 군대만은 올바를 줄 알았는데, 사관학교에 가보니 학벌‧권벌‧향벌이 더 심한 곳이었습니다. 영남‧호남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니 양쪽에서 박해를 받았죠. 밤에 자려고 침상에 누워있으며 이유 없이 구타를 당했지요. 한계가 보여 그만두고 고교 때 하던 발명으로 돌아왔습니다. 사실 육사를 6개월 이상 다니면 이등병 제대로 군 면제가 되는데, 우겨서 ROTC 공수특전단에서 2년 4개월 복무했습니다. 그걸로 군에 대한 미련이나 의무감을 덜었죠.”

 

두 번째 방황은 그의 평생 취미인 마라톤 때문이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뜀박질을 좋아했다. 경성제국대학 재학시절 마라톤 선수로 독일까지 다녀온 부친의 영향이었다. 중고등학교 때는 없는 육상부도 만들어 뛰었다. 따로 훈련은 없었지만 수업이 끝난 오후 4시면 매일같이 운동장에서 철봉을 하거나 인왕산을 올랐다. 사건은 대학교 1학년 때 참가한 서울수복기념마라톤대회에서 터졌다. 전설의 마라토너 아베베가 1위를 차지했던 이 대회에서 그는 아베베에 6분 가량 뒤진 2시간 23분 48초로 세계 7위를 차지했다. 바로 국가대표로 발탁돼 태릉선수촌에 들어갔다.

 

“마라토너가 되고 싶었다기보다는, 올림픽 딱 한 번만 출전하고 싶었습니다. 사실 태릉선수촌에서 훈련하면서 매우 심란했어요. 당시엔 운동선수들 중에 가정이 불우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일주일 만에 소식을 듣고 찾아와 ‘미쳤냐’며 저를 데리고 나와 더 고민할 것 없었죠. 올림픽 출전은 못했지만 평생 달리며 완주를 300회 넘게 했습니다.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조선공학에 들어서며 시작된 세 번째 방황은 아주 오랫동안 지속됐다. 과학기술, 특히 기술은 대학을 졸업할 때 이미 낙후된 구식기술이 되버린다. 공학자들의 숙명은 끊임없이 공부하는 것이다. 어렵고 끝없는 방황이 따르는 길이다.

 

“공학하면서 제가 제일 상심하는 부분이, 기술에는 클래식(classic)이 없어요. 내가 아무리 기찬 기술을 개발해도 내일 이보다 손톱만큼 좋은 기술이 나오면 말짱 헛것이 됩니다. 과학은 좀 다르죠. 게다가 조선공학은 너무 클래식해서 학문적 발전이 더딥니다. 소수점 9자리까지 맞춰야 하는 학문도 많이 있는데 왜 조선공학을 택했을까 후회를 많이 했습니다. 마흔 살쯤 괴테의 파우스트를 보다가 답을 얻었어요. 말미에 이런 문장이 나옵니다. ‘인간은 노력하는 한 언제나 방황한다’. 몸에 전율이 오며 위안을 얻었습니다. 그때 결심했죠. 좋다. 나는 내가 전공한 분야에선 세계 1위, 굴지의 인물이 되겠다. 심리학자에 따르면, 내 마음에 딱 드는 길을 만나는 사람은 0.2%에 불과하답니다. 천 명에 한두 명이죠. 대부분의 사람들은 방황합니다. 그때는 계속 길을 헤매기 보다는 자신만의 목표를 찾는 것이 필요합니다.”

 

민 전 회장이 마지막으로 우리 사회를 향한 조언을 덧붙였다.

 

“이공계기피현상은 장학금 등으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사회제도가 바뀌어야죠. 의사‧변호사‧교사처럼 학교에서 배운 걸로 평생 일하는 직업이 대우를 받아야 하는지, 평생 공부해야 하는 직업에 보상이 필요한지 고민이 필요합니다. 경제적인 것만 중시해 직장생활이 필요악이 되는 것도 막아야죠.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재미있고 행복하게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우리 책임입니다. 절 보며 조선공학에 ‘미친놈’이라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저는 우리나라에 미친놈이 더 많아졌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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