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에 발목 잡힌 한국 경제
결국 1%대 저성장 진입 국면
79년간 69번 정부 바뀐 伊도
G5에서 10위권 밖 추락
정치개혁으로 제도개선 이루고
생산성 높여 성장동력 회복해야
윤성민 논설위원
‘웃픈’ 얘기지만 올해 한국 경제성장률을 놓고 한판 내기라도 벌어진 모양새다. 한은이 지난해 8월 2.1%에서 11월 1.9%로 수정한 뒤 정부는 올 들어 1.8%로 낮췄다. 글로벌 투자은행들의 평균 전망치는 지난해 11월 말 1.8%에서 12월 말 1.7%로 내려갔다. JP모간은 1.7%에서 1.3%로 0.4%포인트나 떨궜다.
탄핵 쇼크를 감안한 하향 조정이지만, 문제는 그 이전부터 이미 1%대 전망이 대세였다는 점이다. 1%의 공포는 역사에서 금방 확인된다. 1954년 집계 이후 성장률이 2% 미만이었을 때는 전쟁 여파에서 헤어나지 못하던 1956년과 1980년 대혼란기, 외환위기, 글로벌 금융위기, 코로나19 팬데믹 사태, 그리고 2023년 등 총 여섯 번뿐이다. 특별한 외부 충격이 없었는데도 1%대 성장에 그친 것은 2023년이 유일하다. 수출 부진이 주요인이었다. 김세직 서울대 교수가 1995년 이후 한국의 장기성장률이 5년마다 1%포인트씩 내려가는 ‘5년 1% 하락의 법칙’을 얘기했는데, 1% 저성장 시대의 지옥문이 열린 것 같아 께름칙하다.
김 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과거 6% 이상의 고도성장을 맛본 뒤 50년 이상 지속해서 내리막길을 걷다가 성장률이 0%대로 떨어진 곳이 일본과 스페인, 마이너스로 추락한 곳이 이탈리아 포르투갈 그리스다. 이 다섯 나라 중 플라자 합의와 미·일 반도체 협정이라는 유례없는 극도의 외압에 기세가 꺾인 일본을 제외하면 나머지 네 곳은 스스로 무너졌다. 결국 유럽 재정위기까지 촉발한 ‘PIGS’ 4개국이다.
성장 동력을 상실한 상황에도 퍼주기 복지 정책으로 나라 곳간을 구멍 내고 유로존 전체에 위기를 불러왔었다. 이 중 맏형 격이 이탈리아다. 1980~1990년대만 해도 영국을 앞서 세계 5위였던 이탈리아는 이제 1인당 국내총생산(GDP)에서 우리와 엎치락뒤치락하는 수준이다. 인구도 5800만 명으로 비슷하다. 무엇보다 닮은꼴은 사회 전체를 마비시키는 정치 갈등이다.
이탈리아는 1946년 공화국 수립 이후 79년간 정부(내각)가 69번이나 바뀌었다. 거의 1년에 한 번꼴이다. 총리도 31명째다. 의회는 권한이 똑같은데도 상·하원으로 나뉘어 있다. 그러다 보니 의원 수가 945명이나 됐다. 일곱 차례 시도 끝에 2022년 의원 수를 줄인 게 600석이다. 독일 등 유럽의 다른 의원내각제 국가에서는 정부 위기 시 의회 과반의 동의가 있어야 정부 교체가 가능하도록 안전장치를 두고 있는데, 이탈리아는 소수 정당에 의해 내각이 붕괴하는 ‘왝더독’ 현상이 왕왕 일어난다. 무솔리니와 같은 독재자가 출현하지 않도록 오로지 분산에 초점을 맞춘 정치 시스템으로 독재는 피했을지 모르지만, 극심한 비효율과 무정부에 가까운 정치 혼란을 초래했다. 흡사 견제와 균형만 의식한 한국의 87체제가 탄핵 남발과 입법 폭주로 국정을 교착에 빠트리는 ‘괴물 의회’를 태동시킨 것처럼 말이다.
작가 조귀동이 쓴 <이탈리아로 가는 길>에는 예리한 대목이 나온다. 한국 다음으로 출산율이 낮은 OECD 국가는 이탈리아 그리스 일본 스페인 순인데, 이 역시 일본을 빼면 모두 PIGS 국가다. 이와 관련해서도 한국과 이탈리아는 큰 공통점이 있다. 노동시장 이중구조가 고착화돼 있다는 것이다. 2부 리그의 삶에서 1부 리그로 진출이 극히 제한적이거나 불가능한데 양육할 겨를이 있겠으며, 누군들 자식에게 그 짐을 물려주고 싶겠는가.
스페인 포르투갈 그리스는 지난해 성장률을 다소나마 회복했는데, 코로나 보복 관광의 수혜일 뿐 성장 동력을 복원했다고 보긴 어렵다. 이탈리아 경제가 추락한 일차적 원인은 제조업의 몰락이다. 포천 500대 기업에 이탈리아는 5개로 대만(7개)보다도 적다. 사업가들이 노조 설립 의무가 없는 15인 이하 기업에만 안주하려고 해 규모의 경제가 실종된 탓이 크다. 자본과 노동 투입에 한계가 있는 상태에서 경제를 키울 수 있는 힘은 생산성이다. 제도, 기술, 기업가정신, 근로의욕 등의 총합이다. 생산성을 추동하는 것이 개혁이요, 이는 곧 정치의 산물이다. 이탈리아나 한국이나 정치 병목에 걸려 “아무것도 바꿀 수 없는 사회”가 됐다. TV를 살 때는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하지만, 정치 상품을 잘못 고르면 나라가 결딴날 수 있다.
윤성민 논설위원
지난해 한국 증시 성적은 처참했다. 미국과 일본의 주요 지수가 사상 최고가 행진을 하는 동안 코스피지수와 코스닥지수는 못난이 형제처럼 사이좋게 뒷걸음쳤다. 주요국 중 가장 부진했다. 기간을 늘려 보면 더 한숨이 나온다. 나스닥은 20년 전보다 9배 넘게 올랐다. S&P500은 5배, 닛케이225는 3.5배 뛰었다. 하지만 코스피는 2.7배, 코스닥은 1.8배 오르는 데 그쳤다.
201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한국 증시의 성적표는 꽤 준수했다. 글로벌 주요 증시에 뒤처지지 않았다. 한국 증시가 무너지기 시작한 것은 2015년을 지나면서다. 그즈음 나스닥과 차이가 벌어졌고 2019년에는 S&P와도 멀어졌다. 2022년께부터는 닛케이에도 밀렸다. 결국 지난해 글로벌 꼴찌가 됐다. 도대체 지난 10년간 우리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지난 10년간의 패착
한국 증시가 저평가된 요인이 어디 한두 가지겠냐마는, 그래도 지난 10년간 한국 증시가 유난히 뒤처진 가장 큰 이유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아 보인다. 우리나라 경상수지 흑자 폭이 역사적으로 가장 컸던 시기가 2015년이다. 달리 말하면 그 이후 경상수지는 계속 내리막을 탔다는 얘기다. 한국 수출산업이 그즈음 일제히 꺾였다. 휴대폰과 액정표시장치(LCD), PC 등 우리 주력 전자제품을 비롯해 조선, 철강, 석유화학 등이 정점을 찍고 감소세로 돌아섰다. 수출산업이 중국에 추월당하기 시작한 것이다. 미국에 성장률이 뒤지는 저성장 쇼크가 현실이 됐다. 사회 곳곳에서 구조개혁을 서둘려야 한다는 경고가 터져 나왔지만 공허하게 메아리쳤다. 19대 국회 후반기 여야는 역대급 정쟁에 여념이 없었고 경제 살리기 법안과 노동개혁 법안은 뒷전이 됐다.
그해 일본과 미국의 설비 투자를 대폭 늘렸다. 빅테크는 질주하기 시작했다. 미국 실리콘밸리 거물들이 모여 오픈AI를 설립한 것도 그때다. 하지만 한국 기업들은 정부 압박에 사상 최대 배당금을 주주들에게 풀었고 결국 투자를 줄여야 했다.
2015년 우리 기업의 총투자율은 1998년을 제외하면 산업화 이후 가장 낮았다. 지난해 한국 증시 성적은 그 연이은 패착이 10년간 켜켜이 쌓인 결과다. 반도체가 흔들리고 한동안 구원투수 역할을 하던 2차전지마저 꺼지자 한국 증시의 민망한 체력이 드러난 것이다.
K증시 대표주 더 나오려면
한국 증시의 ‘왕따’ 현상은 유동성 투입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우리나라 전체 수출에서 반도체와 자동차가 차지하는 비중은 10년 전 20%에 못 미쳤다. 하지만 계속 불어나 지금은 30%를 웃돈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 현대자동차가 삐끗하면 증시가, 아니 나라가 망할 판이다. 향후 10년, 20년이 더 걸리더라도 이 왜곡된 산업 구조를 바꿀 수 있도록 혁신 기업을 찾아서 길러내고 우리 증시를 떠받치게 해야 한다. 미국과 중국에선 이미 장외에서도 삼성전자 몸값을 추월하는 기업이 등장하고 있다. 지난해 스페이스X와 바이트댄스의 몸값이 삼성전자 시가총액을 넘어섰고, 10년 차인 오픈AI도 삼성전자를 따라잡을 기세다. 우리가 지금부터 바뀌지 않으면 다음 10년의 한국 증시도 답이 없다
고경봉 증권부장
로봇 등과 결합한 AI 전면에 부상
해외 종속 피할 '전략' 마련 시급
주영섭 서울대 공학전문대학원 특임교수·前 중소기업청장
세계 최대 IT·가전 전시회인 CES 2025가 7일(현지시간) 개막했다. 역대 최대 규모인 166개국, 4800여 개 기업이 참가했다. 한국도 역대 최다인 1031개 기업이 행사장에 얼굴을 내밀었다. 참가 기업 수로는 미국, 중국 다음으로 많다. 특히 세계 1300여 개 스타트업이 모인 까닭에 ‘기술 올림픽’을 방불케 하는 유레카관에선 한국 스타트업이 절반 가까운(625개) 비중을 차지하며 K스타트업의 열기를 뽐냈다.
이달 중순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이후 미·중 기술 패권 전쟁이 더욱 치열해질 것으로 전망돼 CES 2025의 전략적 의미가 배가되고 있다. 올해 CES의 기술 트렌드는 양자 컴퓨팅 등 미래 기술이 관심을 끄는 면도 있으나 종합적으로 보면 단연 인공지능(AI)이 최고 화두다. 올해는 AI를 적용하지 않은 제품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명실공히 전 분야에서 핵심 트렌드로 자리 잡았다. 수년간 표방해온 ‘모든 곳에 스며든 AI’(AI Everywhere)가 현실화한 모습이다.
AX라고 불리는 AI 대전환이 세계적으로 대세가 되면서 AI 기술 트렌드는 물론 AI 패권을 둘러싼 미·중 경쟁 추이 등의 분석을 기반으로 한 한국의 국가적 AI 대전환 전략이 매우 중요해졌다. 특히 현재는 물론 미래에도 한국 경제의 핵심인 반도체, 정보기술통신(ICT), 자동차, 로봇, 배터리, 바이오, 우주·항공 등 첨단 제조업의 AI 대전환에 국가적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
개막 전야인 지난 6일 저녁 세계의 이목이 쏠린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의 기조연설은 우리의 AI 대전환 전략에 많은 시사점을 던졌다. 현장 관객 1만여 명, 온라인 관객 수십 만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젠슨 황은 1시간 반에 걸쳐 사실상 세계 AI 반도체 시장을 평정한 엔비디아의 자신감 넘친 AI 대전환 전략을 설파했다.
그중에서 AI 발전 단계를 ‘인식 AI’ ‘생성 AI’ ‘에이전트 AI’ ‘물리적(Physical) AI’ 등 네 단계로 나누고 엔비디아가 현재의 생성 AI와 에이전트 AI를 넘어 물리적 AI 단계에 진출하겠다고 선언한 것은 우리에게 의미가 크다. 물리적 AI란 센서 및 액추에이터를 통해 실제 물리적 세계를 인식하고 이해하며 상호작용하는 지능형 시스템을 말한다. AI 기반 자동차, 로봇, 드론, 기계장비 등이 대표적 예다.
AI 대전환의 양대 축인 클라우드 기반 AI와 온디바이스라고 불리는 디바이스 기반 AI, 이 둘을 결합한 하이브리드 AI 모두가 이 네 단계로 발전할 것으로 전망된다.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LG전자 등 첨단 제조기업을 중심으로 한 우리의 강점을 고려하면 오픈AI, 마이크로소프트, 구글 등 미국 빅테크가 주도하는 클라우드 기반 AI보다 제품 중심의 온디바이스 AI에서 승산이 크다. 이에 따라 우리가 잘하는 AI 스마트폰과 같은 온디바이스 AI를 넘어 자동차, 로봇, 기계장비 등에 AI를 적용하는 물리적 AI 분야에서 세계를 주도하는 역량을 확보하는 데 주력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물리적 AI에 진출하겠다는 엔비디아 전략을 면밀히 분석해 클라우드 기반 AI 대전환에서는 ‘빠른 추격자’ 전략으로 협력하고 온디바이스 및 물리적 AI 대전환에서는 우리의 강점을 살려 ‘선도자’(first mover) 전략으로 시장을 선도해야 한다. 모든 분야를 지배하겠다는 엔비디아의 포부에 주눅 들어 종속되기보다 물리적 AI 분야에서는 대한민국 생태계가 더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실행 전략이 무엇보다 시급한 시점이다. 세계 최강의 산업 AI 대전환이 ‘AI 3대 강국’으로 가는 길이다
주영섭 서울대 공학전문대학원 특임교수·前 중소기업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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