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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글(펌)

명상의 핵심은 '바라보기'이다.

명상은 모험이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큰 모험이 명상이다. 명상은 그저 존재하는 것이다.

거기엔 아무 행위도 없다. 사념도 없고 감정도 없다. 명상 속에서 그대는 그저 존재할 뿐이다.

그것은 순수한 기쁨이다. 아무런 행위도 없이 존재할 때 이 순수한 기쁨은 어디에서 오는가?

이 기쁨은 어디에서 오는 것도 아니며, 또는 모든 곳에서 온다.

이 기쁨은 다른 원인에 의해 유발되는 것이 아니다.

존재자체가 기쁨이라는 재료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모든 행위가 중단되고 단순히 존재하는 것, 그것이 명상이다.

명상은 행할 수도 없고 연습할 수도 없다. 그대가 할 일은 다만 그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시간날 때마다 모든 행위를 중단하고 단순히 존재하라. 생각 또한 행위이다. 집중이나 숙고(熟考)도 행위이다.

단 한순간만이라도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대 자신의 중심에 존재할 수 있다면,

완벽하게 릴랙스(relax)된 상태로 존재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명상이다.

그리고 일단 그 기술을 터득하면 원하는만큼 그 상태에 머물 수 있으며, 마침내 하루 내내 그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동요되지 않고 존재할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한 연후에는 서서히 행위를 시작할 수 있다.

물론, 그대의 존재가 동요되지 않도록 주의깊은 의식을 유지하면서 말이다. 이것이 명상의 두번째 단계이다.

첫번째 단계가 단순히 존재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면 두번째 단계는 약간의 행위를 배우는 것이다.

마루를 청소하거나 샤위를 하면서도 그대 존재의 중심을 흐트러뜨리지 않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더 복잡한 행위까지 가능하다.

 

예를 들어, 나는 지금 그대들을 상대로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명상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다.

나는 존재의 중심부에 잔물결 하나 일으키지 않고도 말을 계속할 수 있다.

내 존재의 중심에는 철저한 침묵이 있을 뿐이다.
따라서 명상은 행위를 거부하지 않는다. 명상은 삶으로부터 도피하는 것이 아니다.

명상은 다만 새로운 방식의 삶을 가르친다. 태풍의 중심에 존재하는 삶.

 

명상 중에도 그대의 삶은 계속된다. 오히려 더 강렬하고 기쁨에 충만한 삶, 더 분명한 시각과 창조적인 삶을 얻는다.

하지만 명상 속에서 그대는 방관자이다. 그대는 언덕 위에 서 있는 사람처럼 사방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고 있다.

그대는 행위자가 아니라 주시자(注視者)이다. 주시자가 되는 것, 이것이 명상의 핵심이다.

행위는 제 나름대로의 차원에서 계속 진행된다. 거기엔 아무 문제도 없다.

그대는 장작을 팰 수도 있고 우물에서 물을 길을 수도 있다. 사소한 일이든 큰 일이든 아무 것이나 가능하다.

그러나 한 가지 지켜야할 사항이 있다. 그것은 그대의 중심이 흔들려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각성과 주시는 그대로 유지되어야 한다. 절대로 흐려지거나 동요되어서는 안된다.

 

유대교에는 하시디즘(Hasidism)이라고 하는 신비주의 종파가 있다.

이 종파의 창시자인 바알 셈(Baal Shem)은 희귀한 인물이었다.

그는 강에 나갔다가 한밤중이 되어서야 돌아오곤 했다. 그것은 그의 하루 일과중 하나였다.

한밤중의 강가는 고요한 정적이 감돌고 있었으며 그는 그곳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앉아있곤 했다.

다만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았을 뿐이다. 관찰자를 관조하면서.

 

그날 밤도 그는 강에서 돌아오다가 대부호의 저택 앞을 지나게 되었다.

커다란 대문 옆에는 경비원이 서있었다. 경비원은 매우 궁금했다.

이 사내는 날마다 똑같은 시간에 이 길을 지나가고 있지 않은가? 경비원이 밖으로 나와 말했다.
"쓸데없이 참견해서 죄송합니다만 더 이상 참을 수가 없군요.

낮이나 밤이나 당신에 대한 궁금증이 머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당신은 무엇을 하는 분인지요?

날마다 강가에 나가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여러차례 당신 뒤를 밟아 미행을 했습니다만 그 곳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당신은 그저 몇 시간이고 가만히 앉아 있다가 한 밤중이 되면 돌아오곤 했지요."
바알 셈이 말했다.
"당신이 내 뒤를 밟은 것은 나도 알고 있소. 적막한 밤이라 당신의 발자국 소리를 들을 수 있었지요.

그리고 당신이 날마다 대문 뒤에 숨어서 나를 지켜본 것도 알고 있소. 하지만 궁금한 것은 당신만이 아니오.

나 역시 당신에 대해 궁금하오. 그래서 묻는데, 당신은 무엇하는 분이오?"
경비원이 말했다.
"저는 그저 경비원(watchman)일 뿐입니다."
바알 셈이 말했다.
"오, 저런! 당신은 핵심적인 단어를 말했소. 그것은 내 일이기도 하오."
경비원이 물었다.
"저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만일 당신이 경비원이라면 집이나 궁전을 지켜야 당연할 것입니다.

그런데 강가 모래뻘에 앉아서 무엇을 지키고 계신 것입니까?"
바알 셈이 말했다.
"우리 사이엔 약간 다른 점이 있소.

당신은 외부인물이 저택에 들어가는 것을 지키지만 나는 다만 이 '보는 자'를 관찰하고 있소.

이 보는 자는 누구인가? 이것을 아는 게 내 평생의 과업이오. 나는 나자신을 지켜보고 있소."
경비원이 말했다.
"그것은 참 이상한 일이군요. 그러면 보수는 누구에게 받습니까?"
바알 셈이 말했다.
"이 형언할 수 없는 지복(至福)과 기쁨, 이 엄청난 은총 자체가 그 댓가요.

단 한순간만 이것을 맛본다해도 세상의 어떤 보물도 이에 비교할 바가 못되지요."
경비원이 말했다.
"그것 참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저는 평생동안 지켜보는 일을 해왔습니다만 당신이 말하는 것처럼 아름다운 경험은 한 적이 없습니다.

내일 밤에는 당신과 동행하고 싶습니다. 제게 당신의 방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저 역시 지켜보는 법을 압니다. 다만 방향전환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당신이 지켜보는 방식은 저와 다른 것 같습니다."

다만 방향과 차원이 다를 뿐이다.

외부에 촛점을 맞출 수도 있고, 또는 외부에 대해서는 눈을 닫고 모든 의식을 내면으로 끌어들일 수도 있다.

내면에 촛점을 맞출 때 그대는 알게 될 것이다. 그대는 '아는 자'이며 각성(awareness) 그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한 순간도 거기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다만 그대의 각성된 의식이 수 천 갈래로 분산되어 있을 뿐이다.

그대의 의식을 외부로부터 거두어 들여라. 그리고 내면에 들어가 휴식을 취하라.

그러면 그대는 이미 존재의 집에 도달한 것이나 다름없다.

 

명상의 본질, 그 핵심은 어떻게 지켜보느냐 하는 것이다.

들어보라, 지금 밖에는 까마귀가 울고 있다..... 여기엔 주체와 대상이 있다.

그러나 까마귀와 '듣는 자' 둘다를 보고있는 주시자를 볼 수는 없을까?

대상과 주체 둘다를 보고 있는 누군가가 있다. 이것은 매우 간단한 현상이다.

 

그대는 나무를 본다. 거기엔 그대가 있고 나무가 있다.

그렇다면 한 가지를 더 찾아볼 수는 없을까?

그대는 나무를 지켜보고 있지만 그런 그대를 보고 있는 주시자가 있다.

 

주시가 명상이다. 무엇을 보느냐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나무를 볼 수도 있고, 강을 볼 수도 있고, 흘러가는 구름, 또는 아이들이 뛰노는 모습을 볼 수도 있다.

주시가 명상이다. 그 대상이 무엇이냐 하는 것은 요점이 아니다.

 

주의깊게 깨어있는 의식의 특성이 명상이다.

이것을 명심하라. 명상은 '깨어있음(awareness)'을 의미한다.

깨어있는 의식을 갖고 있다면 무엇을 하든 모두 명상이다.

문제는 어떤 행위를 하느냐가 아니라 그 행위에 어떤 의식의 특성이 깃들어 있느냐 하는 것이다.

주의깊게 깨어있기만 한다면 산책도 명상이 될 수 있다.

의식이 깨어있다면 앉아있는 것도 명상이 될 수 있다.

각성된 의식으로 듣는다면 새 소리를 듣는 것 또한 명상이 될 수 있다.

주의깊게 관조한다면 그대 마음 속의 잡다한 소음에 귀기울이는 것 또한 명상이 될 수 있다.

잠결처럼 흐릿한 의식으로 행동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그 핵심만 이해하면 무엇을 하든 모든 게 명상이다.

 

각성(awareness)의 첫 단계는 그대의 육체에 대해 예민하게 깨어있는 것이다.

서서히 그대는 몸짓 하나, 동작 하나마다 예민하게 의식하게 된다.

그러한 각성의 상태에 이르면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전에는 아무런 의식없이 행했던 많은 행위들이 간단하게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그대의 육체가 더 편안하고 조화롭게 된다.

육체 안에 깊은 평화가 자리잡기 시작하고 미묘한 음악이 육체 안에 울려퍼지기 시작한다.
그 다음에는 사념에 대해 자각하기 시작한다. 사념은 육체보다 더 미묘하며 또한 더 위험하다.

사념을 자각하게 되면 그대는 자신의 내면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해 깜짝 놀랄 것이다.

만일 생각 하나하나를 조목조목 기록해 본다면 그대는 경악을 금치 못할 것이다.

도대체 마음 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믿을 수 없을 것이다.

 

10여 분 후에 그 기록을 읽어보라. 미치광이처럼 날뛰는 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대는 깨어있지 못하다. 그래서 그대 마음 속에는 광기가 지하 수맥처럼 흐르고 있다.

그 광기는 그대가 무엇을 하든 영향을 미친다.

그대가 어떤 행위를 거부하고 행하지 않는다해도 거기엔 미친 마음의 영향을 주고 있다.

이 미치광이 마음이 모든 것을 좌지우지 한다. 그리고 그대의 삶이라는 것은 이 광기의 합계에 불과하다!

이 미치광이가 변해야 한다. 그대에게 필요한 것은 깨어나는 것이다. 그 밖엔 아무 것도 필요치 않다.

이것이 깨어있음의 기적이다.

 

내면을 주시하는 것 자체가 내면에 변화를 일으킨다.

서서히 미치광이가 사라지고 사념이 질서를 잡아잡기 시작한다.

혼란상태가 사라지고 더 조화롭게 된다. 그 다음에는 더 깊은 평화가 자리잡는다.

몸과 마음이 평화롭게 될 때, 그대는 몸과 마음이 서로 조화를 이루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어떤 다리가 형성된다. 이제 몸과 마음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달려가지 않는다.

서로 다른 말을 타고 질주하지 않는다. 난생 처음으로 조화가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 조화는 각성의 세번째 단계에 지대한 도움을 준다.

 

이 세번째 단계란 그대의 느낌, 감정, 기분을 주시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가장 미묘하고 어려운 일이지만 사념을 주시하는 단계에서 한걸음만 더 나아가면 된다.

조금 더 주의깊은 각성이 요구될 뿐이며, 그렇게 되면 그대의 감정, 느낌, 기분에 대해 깨어있게 된다.

이 세 단계 모두에 대해 깨어있게 되면 그것들은 하나의 현상으로 통합된다.

그리고 이 세 단계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어 하나로 작용하게 되면 그대는 아름다운 음악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그 단계들은 조화로운 오케스트라가 된 것이다. 이 때에 네번째 단계가 일어난다.

그러나 이것은 인위적으로 할 수 없다. 그것은 제 스스로 일어나는 것이다. 그것은 존재계의 선물이다.

앞의 세 단계를 통과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보답인 것이다.

 

네번째 단계는 깨달음을 가져다 주는 최고의 각성 상태이다.

자신의 각성에 대해 각성하고 있는 상태, 이것이 네번째 단계이다. 이 단계에서 붓다가 탄생한다.

이러한 각성의 상태에 도달해야만 지복(bliss)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몸은 쾌락을 알고, 마음은 행복을 알며, 가슴은 기쁨을 안다. 그러나 네번째 단계는 지복을 안다.

지복이야말로 산야스(sannyas)의 목적이다. 그리고 각성은 그 목적을 향해 가는 길이다.

 

중요한 것은 한순간도 놓치지 말고 주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시하고 또 주시하라.

그 주시가 더 안정되고 흔들림이 없을 때 변형이 일어난다.

그대가 주시하고 있던 대상이 사라지는 것이다. 주시자 자체가 주시되고, 관찰자 자체가 관찰된다.

그대는 집에 당도한 것이다.


[출처] 명상나라 http://zen.co.kr/zen/bbs.php?table=prSermon&query=view&uid=1&p=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