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全作주의자의 꿈’ 찾아 떠나는 가을기행
2001년 중쇄(重刷)된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 속표지는 “다시, 사람만이 희망이다…(2001년 11월 30일)”라고 말한다. 8년 전 겨울이 시작될 즈음, 사람에게 상처받았던 여인이 다시 사람에 대한 희망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볼펜으로 꾹꾹 눌러쓴 단정한 글씨체에 그 사람의 성품이 담겨 있다. 1992년 초판이 나온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의 ‘양을 둘러싼 모험’에는 한자로 ‘청춘(靑春)’ 두 글자만 적혀 있다. 젊은 시절 하루키가 쓴 ‘질주하는 청춘’ 이야기에 누군가 공감했던 모양이다. 그는 1990년대 초반, 소설의 주인공과 비슷한 나이의 ‘청춘’이었을 것이다.
이곳에서는 흐르는 시간도 박제(剝製)된다. 시중 서점에 진열되는 온갖 종류의 신간 서적 대신 1990년대에 간행된 책들이 눈에 많이 띈다. 1990년대는 한국 출판계의 황금시대였으며 그동안 금서(禁書)로 묶여 있던 책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온 시기다. 그리고 그 많은 책들 중 상당수는 1990년대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선보인 후 절판됐다. 그 시절 김수행 전 서울대 교수가 번역한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안에는 ‘KT’ 대신 ‘한국통신’ 글자가 선명한 붉은색 공중전화 카드가 꽂혀 있었다. 책뿐 아니라 그 시대 자체가 고스란히 박제된 셈이다.
이곳은 ‘헌책방’이다. 이곳에는 지나간 과거의 지혜가 문자 그대로 빽빽하게 쌓여 있다. 낡은 책들은 낡음이 곧 늙음은 아니라고 말하지만, 세상은 이제 낡음과 늙음이 동의어라고 말한다. 판단은 독자의 몫이다. 가을, 서울시내 헌책방을 찾아다니며 종이가 나이를 먹는 냄새를 맡는 당신은 진정한 ‘문화인’이 아닐까.
○ 온·오프라인 고객 비율 7 대 3 정도
23일 찾아간 서울 성동구 금호동의 헌책방 ‘고구마’는 발 디딜 틈조차 없을 정도로 책이 가득 차 있었다. 양 옆 벽면을 타고 올라선 책 때문에 통로는 한 명이 움직이기도 힘들 정도로 비좁았다. 어린 시절 ‘책으로 가득 찬 공간’을 꿈꾼 적이 있는 사람들에게 이곳은 바로 ‘천국’이다. 고구마는 한국 최대의 헌책방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이곳의 관리를 총괄하고 있는 엄승세 씨는 “소설과 인문서, 어린이도서와 잡지 등 모두 합쳐 40만 권 정도의 헌책을 보관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확한 수치는 그도 모른다. 컴퓨터 데이터베이스에 누락된 채 주택가 창고에 보관하고 있는 책도 부지기수이기 때문이다. 고구마에서는 평일 오전 이른 시간에도 10여 명의 직원들이 책의 밀림을 헤치며 고객이 주문한 책을 찾고 있었다.
엄 씨는 “‘아마도’ 이곳이 한국에서 가장 많은 책을 보유한 헌책방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런 이야기를 할 때는 가정형 문체만 쓸 수 있다. 어느 누구도 정확한 헌책방 통계를 모르기 때문이다. 취재 과정에서 서울시와 문화단체 등에 서울 시내 헌책방 수와 헌책 거래량 등을 알아보려 했지만 어디에서도 집계하고 있지 않았다. 헌책방협회도 없다.
고구마는 1984년 헌책방을 시작했다. ‘헌책=청계천’의 공식이 유효할 때다. 1998년부터는 국내에서 거의 처음으로 온라인 헌책 판매를 시작했다. 온라인 취급 이후 헌책계의 유명 서점이 됐다. 지금은 리브로 등 온라인 대형 서점들이 헌책 판매를 겸하면서 속속 실제 매장에도 헌책을 들여놓고 있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독보적이었다. 엄 씨는 “현재 온라인과 오프라인 고객의 비율이 7 대 3 정도”라며 “최근에는 직접 찾아오는 오프라인 손님들이 늘어 영업 시간을 오후 10시까지 연장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40만 권의 책 중에서 가장 소중한 ‘헌책’을 물어봤다. 소중한 책은 알 수 없지만 가장 ‘비싼’ 책 은 알 수 있단다. 이 헌책방에서 보관하고 있는 가장 값비싼 책은 1936년에 100부 한정본으로 출간된 백석의 시집 ‘사슴’. 이 책의 가격은 자그마치 5억 원이다. 엄 씨는 “백석이 직접 한정 출판한 시집인 데다 정지용 시인에게 선물하며 친필 서명을 달아 놓은 책”이라며 “5억 원이라는 가격은 어려운 국내 헌책방 시장을 도와줄 분들을 찾는다는 의미도 있다”고 말했다.
○ 100권만 찍은 백석 시집 ‘사슴’은 5억 호가
시간의 흐름에 무심할 것 같은 헌책방에도 베스트셀러가 있을까. 취재했던 헌책방 관계자들은 하나같이 ‘있다’고 대답했다. 신간 서적이 연도와 계절에 따라 베스트셀러가 바뀌듯, 헌책에도 ‘잘 팔리는’ 작가가 따로 있다는 설명이다. 헌책은 작가에 따라 판매량이 크게 바뀐다.
이들이 첫손에 꼽은 베스트셀러 작가는 조정래다. 고구마의 엄 씨는 “조정래 작가의 책은 매장에 쌓여 있는 모습을 보기가 힘들다”고 말했다. 보통 연권으로 구성된 대하소설은 덩치 때문에라도 쉽게 팔려나가지 않는다. 삼국지나 수호지 전집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조정래의 ‘태백산맥’이나 ‘한강’, ‘아리랑’ 등은 시리즈로 짝을 맞춰 놓기가 무섭게 팔려나간다. 신촌의 유명 인문사회서적 전문 헌책방인 ‘숨어있는 책’을 찾았을 때도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모자이크 맞추기’ 형식으로 한 권씩 수집하는 손님이 있었다. 이 밖에 이윤기, 안정효 등이 헌책방계에서 더욱 빛나는 작가다.
헌책방은 일반 서점보다 ‘작가 파워’가 강하다. 헌책방을 탐험하는 헌책 마니아들이 주로 작가 위주로 책을 모으다 보니, 인기 있는 작가는 직접 집필한 책뿐 아니라 번역한 책까지 동이 나는 경우가 흔하다. ‘숨어있는 책’을 운영하는 이미경 씨는 “신경숙이나 은희경 등 베스트셀러 작가는 시중에 나온 물량도 많아 인기가 덜하다”며 “절판된 책이 많고 인문학적 소양을 지닌 작가의 책이 헌책방의 베스트셀러”라고 말했다.
인문학과 사회과학 도서는 얼마 남지 않은 국내 헌책방의 꾸준한 효자다. 자연과학서적은 워낙 이론 흐름이 빨리 바뀌다 보니 오래된 책을 찾는 이가 드물다. ‘괜찮은 번역의 해외 인문학 원전(原典)’이 헌책방에서 가장 안정적으로 팔리는 책이라는 게 이 씨의 설명이다.
학기 초만 되면 헌책방에서 많이 팔리는 대학 교재나 중고교 학습서는 어떨까. 의외로 이런 책들은 팔기 힘든 책이다. 헌책방 입장에서도 ‘리스크’를 안고 사들이는 책들이란다. 1974년부터 운영된 서울 신촌 ‘공씨책방’의 최성장 씨는 “흔히 대학 앞에 있으면 교재 판매 장사가 잘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헌책 중에서 가장 취급하기 힘든 게 대학 교재”라며 “워낙 종류가 많고 개정판도 자주 나와 자칫 잘못하면 폐지로 넘기는 상황이 발생한다”고 귀띔했다.
○ 헌책 고르기, 왕도(王道)는 없다
헌책방 입문자들이 가장 많이 하는 질문이 ‘헌책 잘 고르는 방법’이다. 헌책방은 일반 서점과 달리 별다른 계통 없이 서가에 꽂혀 있는 책이 많을뿐더러, 주인조차 책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헌책방 한번 가 볼까” 하고 생각하다가도 쉽게 포기하는 이유는 누구도 어떤 책이 어디에 있는지 알려주지 않기 때문이다. 무수한 ‘책더미’ 속에서 원하는 책을 고르는 좋은 방법이 있을까.
정답은 유감스럽게도 ‘없다’이다. 오직 발품 파는 만큼 책 고르는 안목도 커지고 원하는 책을 발견할 확률도 높아진다. 공씨책방 최 씨는 “자주 오는 사람들은 내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바닥에 깔린 책까지 귀신처럼 찾아낸다”며 “그렇게 한 책방 한 책방을 ‘탐험’하는 것이 인터넷으로는 맛볼 수 없는 헌책방의 묘미”라고 말했다.
그래도 초심자들에게 충고할 수 있는 부분은 있다. 우선 특정 작품만 염두에 두고 헌책방 한 곳을 찾지 말라는 것이다. 없을 확률이 크다. 헌책방을 순례하는 사람들이 작가 위주로 책을 모으는 것도 그 때문이다. 또 충동구매는 금물이다. 기본적으로 표지 가격의 30∼40%에 불과한 싼 가격 때문에 초보자들은 필요 없는 책을 잔뜩 사들일 가능성이 많다. 고구마의 엄 씨는 “평상심을 가지고 천천히 헌책방을 돌아보는 사람이 진정 헌책방을 즐길 수 있다”고 조언했다.
글=박재명 기자 jmpark@donga.com
디자인=공성태 기자 coonu@donga.com
▼“한 작가의 모든 책을 찾아 읽는 것 자체가 행복”▼
‘헌책방 키드’ 조희봉 씨
조희봉 씨(사진)는 헌책 마니아들 사이에서 유명 인사다. 그는 2003년 ‘전작주의자의 꿈’이란 헌책방 관련 책을 내고 일약 ‘헌책방 스타’로 떠올랐다. 그는 이 책에서 헌책을 모을 때 한 작가의 모든 책을 사 모으는 ‘전작주의’를 말했다. 작가 위주로 사들이는 것이 ‘정석’인 헌책 수집을 가장 잘 표현한 말이었기에, 전작주의라는 말은 헌책방 ‘순례자’들 사이에 빠르게 퍼져나갔다. 그가 제시한 작가는 이윤기에서 시작해 안정효, 김우창, 고종석 등 지금도 헌책방계에서 ‘잘 팔리는’ 작가들이다.
26일 전화로 인터뷰한 조 씨는 ‘헌책방의 죽음’을 말했다. 지금까지 5000여 권의 헌책을 모은 ‘헌책방 키드’가 헌책방의 종말을 예고하다니, 왜일까? 그는 “인터넷이 헌책방을 완벽하게 죽였다”고 말했다. 조 씨는 2006년 서울의 직장을 버리고 고향인 강원 화천군의 별정우체국인 상서우체국장으로 부임했다. 서울을 벗어나 고향으로 돌아오니 헌책방의 죽음이 더욱 또렷하게 보인단다.
“저부터도 온라인 대형 서점의 헌책 코너를 이용하고 있습니다. 헌책 품질도 사실 그쪽이 더 좋을뿐더러 편리하기까지 하니, 헌책방들이 자꾸 죽어가는 거겠죠.”
그래도 헌책방 키드의 마음은 여전하다. 헌책방을 잘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을 물으니 열변을 토한다. 그는 “헌책방을 다니기 위해서는 신간 정보를 꼼꼼하게 살펴야 한다”며 “원하는 책은 언젠가는 나타나며 그 순간을 챙기기 위해 신간을 체크하는 게 노하우”라고 말했다.
최근에도 한 작가의 ‘전작’을 모으는 전작주의를 고수하고 있을까. 그는 “헌책뿐 아니라 책을 읽는 가장 좋은 방법이 작가를 파고드는 것”이라며 “지금도 열심히 모으는 작가가 있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소설가 김원일과 평론가 김병익이다.
“전작을 모으기 위해서는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할 수 있는 사람을 선정해야 합니다. 사실 20∼30년 동안이나 책을 쓸 수 있다면 그것 자체로 ‘훌륭한’ 작가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런 글을 읽는 것 자체가 행복 아닐까요.”
박재명 기자 jmp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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