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10.09.04 문창극칼럼
공정한 사회’가 정치적 화두로 부상했다. 그러나 무엇이 공정한 것이냐로 들어가면 답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각자가 처한 위치와 생각, 배경이 다르기 때문이다. 공정한 사회는 정의로운 사회의 다른 말이기도 하다. 정의로운 사회는 어떤 사회인가. 혹자는 평등한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라고 하고, 누구는 능력대로 평가받는 사회라고 말하기도 한다. 또 어떤 이는 기회를 똑같이 주는 사회라고 말한다. 『정의의 아이디어』라는 책에 이런 비유가 있다. 아이들 앞에 부는 악기인 플루트 한 개가 있었다. 이것을 누가 가져야 하느냐를 놓고 다툼이 났다. 한 아이가 “나는 플루트를 불 줄 아니까 내가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다른 아이가 “나는 가난해서 장난감도 없으니 내 것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또 다른 아이는 “이 악기는 내가 만들었으니까 내 것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누가 플루트를 가져야 공정한 사회가 되는가? 저자인 아마르티아 센 교수(하버드대)는 이처럼 정의로운 사회는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다고 말했다. 정의의 기준은 다면적이고 상대적이기 때문이다.
공정한 사회란 각자가 받기에 합당한 몫을 차지하게 하는 사회이다. 그 합당한 몫을 빼앗겼을 때 사람들은 억울해한다. 앞의 예에서 보듯 각자는 그것이 자기 몫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 데서 문제가 발생한다. 그러나 만약 아이들이 이렇게 생각한다면 어떨까. 플루트를 불 줄 아는 아이는 “내가 너희들을 위해 노래를 연주할 테니 잠시 나에게 불게 해주면 안 되겠니”라고 말한다. 자기 능력을 친구들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목적이지 소유가 목적이 아닌 것이다. 능력이 있다고 다른 사람보다 몇백 배의 보수를 받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기보다는 자기 능력을 사회를 위해 사용한다는 그런 마음씨 말이다. 가난한 아이는 “나는 무어라도 장난감이 있으면 되니까 굳이 플루트만을 고집하지 않을게”라고 말할 수 있다. 장난감은 수천 가지가 될 수 있다. 꼭 플루트에 매달려야만 행복한 것은 아니다. 사회의 가치 역시 다양하다. 악기를 만든 아이는 “나는 플루트를 만들 줄 아니까 너희들을 위해 두 개 더 만들게.” 플루트 한 개를 놓고 싸우는 제로섬 사회가 아니라 부를 더 창출해 다같이 누리는 ‘논 제로섬’ 사회를 만들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누구도 억울하다고 느끼지 않을 것이다. 이런 마음은 정치로, 법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공정함만을 집착하다 보면 우리 마음은 더 좁아지고, 더 날카로워질 뿐이다.
그런 점에서 청와대가 말하는 ‘공정한 사회’는 매우 단선적이다. ‘개천에서 용이 나는 사회’ ‘패자 부활전이 있는 사회’라고 했다. 그러나 개천에서 꼭 용이 나와야 공정한가? 미꾸라지가 꼭 용이 되어야 정의로운 사회인가? 패자 부활전이라는 것 역시 성공을 전제한 것이다. 꼭 사회적으로 성공해야만 잘사는 것인가. 돈 지상주의, 성공 지상주의로는 공정한 사회를 만들 수 없다. 공정한 사회는 각자가 자기 자리에서 자기 일을 열심히 하면서 행복을 느끼는 사회이다. 모든 사람이 그런 ‘용’이 되고자 하는 마음 때문에 지금 이 나라는 이렇게 살벌해졌다. 모두 대학에 가고, 고시에 합격해 출세하고, 최고경영자(CEO)가 되어 돈 많이 버는 것만이 꿈이라면, 우리 사회는 영원히 불행한 사회가 될 것이다. 정의라는 것에 하나의 잣대가 없듯이 돈과 출세만이 잣대가 아니라 다양한 가치를 인정하게 될 때 공정한 사회는 자연스럽게 오게 되어 있다.
무엇이 공정한가를 합의해 내기 위해서는 성숙한 사회가 전제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도그마에 빠질 수 있다. 특히 ‘공정’이 정치구호가 되면 위험하다. 권력이 공정을 판단하게 되고 그의 입맛에 따라 공정과 불공정이 결정된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관계도 마찬가지다. 청와대가 불공정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 법이 정하게 해야 한다. ‘공정한 사회’가 정치운동화되면 걷잡을 수 없는 바람을 타게 된다. 누가 정의를, 공정성을 반대할 수 있을까? 고시 대신 특채비율을 늘리기로 했다가 취소했다. 바람 때문이다. 앞으로 이 바람이 어디로 불지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정의의 핵심가치인 개인의 자유와 행복도 정의라는 이름으로 훼손될 수 있는 것이다. 정치인이 ‘공정한 사회’를 말하려면 무엇보다 자신의 발밑을 돌아보아야 한다. 이 정부 들어서 과연 공정한 인사를 했는지, 또한 국회 청문회에서 고함을 지르는 의원들 스스로는 과연 떳떳한지…. 내 눈의 들보는 안 보이고 다른 사람 눈의 티만 찾는 것은 아닌지…. 구호를 외치는 자의 겉과 속이 다를 때 공정사회는 웃음거리가 되는 것이다.
나는 이 나라가 더 공정한 사회로 가기를 원한다. 억울한 사람이 줄어들기를 원한다. 『정의의 이론』을 쓴 존 롤스는 정의를 공동체와 연관시켰다. “가장 빠른 선수에게 족쇄를 채우지 말라. 단, 우승은 그만의 것이 아니라 재능이 부족한 사람들과 함께 나누어야 한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그런 성숙한 사회를 기대한다.
문창극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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