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 여행은 번거롭게 준비하거나 경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냥 훌쩍 떠나면 된다.
‘삶의 의미'를 찾아내는 건 여행자의 특권이다.
천년의 시간을 여행자와 함께 지나온 사찰들이 특별한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그렇다면 이번주 금토일에서는 국내 여행을 즐기는 이들, 특히 사찰에 관심이 있는 이라면 한 번쯤 들러봤을 충북 옥천 용암사로 떠나본다.
최근 CNN이 선정한 ‘한국에서 꼭 가봐야할 50곳’ 중 38위에 오르기도한 이 사찰은 상당수 답사기나 여행기의 목차 한쪽에 빠지지 않고 들어 있다. 용암사의 매력을 묻는다면 선뜻 대답할 수는 없다. 모든 절집은 나름대로의 매력이 있고, 그 매력은 보는 이의 주관에 따라 크게 달라지기 때문이다.그러나 어느새 또 다시 용암사로 향하는 여행객들의 발길을 보면 이 절집의 매력이 상당하다는 것을 짐작케한다. |
◆ 용암사는
용암사는 신라 진흥왕 13년(552년)에 지어진 사찰이다.
근처에 있던 용모양의 바위에서 이름을 따왔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파괴됐고 결국에는 사라졌다고 한다. 창건 이후의 중수·중건에 대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고려시대 양식의 석탑과 마애불상이 남아 있어 고려시대에도 법통이 이어져왔을 것으로 짐작할 따름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불우(佛宇)조나 ‘여지도서’의 사찰조에 용암사가 없기 때문에 조선 중기 용암사의 역사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임진왜란 때 병화로 폐허화됐다는 ‘설’로 미뤄볼때 한동안 복구되지 못한 채 지낸 것으로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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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시대 석탑의 특징인 3단의 탑신부로 구성된 동·서쌍석탑. |
1986년에 주지 무상(無相)이 대웅전과 산신각을 중창했고 뒤이어 주지 현관(玄觀)이 요사채를 중건하고 범종각을 신축했다. 천불전은 2002년 완공됐다. 이곳은 신라의 마지막 왕자가 신라가 무너지기 전 자신의 고향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던 곳이라고 한다. 새벽녘에 둘러보면 구름과 안개로 둘러싸여 형용할 수 없는 분위기를 자아낸다.
용암사 입구에는 여느 사찰과 달리 일주문과 사천왕문이 없다. 다만 화엄경에 나오는 글귀가 방문객을 인도한다. 절 마당으로 들어서자 마자 세 줄의 계단이 나온다. 특히 석등이 눈에 띈다. 유심히 살펴보면 사각받침위에 8각 형태와 원형형태가 각각 9개씩으로 이뤄져 있다. 앞쪽에 마련된 드므(넓적하게 생긴 독)는 불기운을 눌러 ‘화재를 예방하라’는 상징이란다. 바로 옆 대웅전 안에는 닫집형태의 전각에 아미타여래를 주존으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의 삼존상이 봉안돼 있다. 그 좌·우와 양 벽면으로 여러 점의 탱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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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년 완성된 천불각. 마의태자가 눈물을 흘렸던 곳이라고 전해진다 |
◆ 범종각
대웅전 왼편 마당에 위치하고 있다. 범종각은 사물을 걸어 놓고 온 세상의 변변치 않은 것까지 성불할 수 있도록 건립된 건물이란다. 기단은 화강암을 이용해 만들었는데 기단면에 사용된 화강암의 마감으로 혹두기을 선택했다. 석공이 처음 자연상태의 거친돌을 쇠망치로 대강 다듬는 식이다. 초석은 근래 조성한 많은 사찰에서 사용하듯, 원형초석에 연꽃이 새겨진 높은 운두를 가진 초석이다. 초석 상부에는 굵은 배흘림기둥을 사용했는데 그 흘림률이 그리 크지 않게 만들어졌지만 기둥의 높이에 비해 두께가 굵다. 내부에는 범종이 걸려있는데 범종에 부가된 기록에 의하면 이 범종은 1998년에 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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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웅전 뒤편에서 바라본 옥천군 전경. |
◆용암사 마애불(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7호), 동·서쌍석탑(보물 제1338호)의 기운
마애불로 가기위해 대웅전 왼쪽으로 난 계단을 따라 올라간다. 전각을 하나하나 오르며 앞을 바라볼 때마다 탁트인 전망이 나타난다. 좌우엔 작은 대숲이 있어 제법 운치가 있다. 마애불은 바위의 중간, 마치 공중에 뜬 것같은 형태로 연화대좌 위에 서 있다. 높이 297cm 머리는 아무런 장식이 없는 소발이며 양눈, 코, 입 등 얼굴의 형상은 매우 단정하다.
고려 중기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마애불은 신라 멸망의 비애를 품고 유랑하던 마의태자가 이곳에 머물다 떠나자 그의 모습을 새겼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영험이 있어 기도하면 이뤄지지 않는 일이 없다고 소문이 자자하다. 더욱이 용암사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어 이곳에서 바라보는 경치 또한 일품이다. 석공은 아마도 이 모든 것을 고려했을 것 같다. 비록 돌을 다루는 석공일망정 그 지혜가 반야의 경지에 들어섰다 할만하다.
계단을 되짚어 내려와 대웅전 앞을 지나 북쪽 기슭에 있는 동·서쌍석탑으로 발길을 옮긴다. 이 쌍석탑은 일반적인 ‘가람배치(사찰 중심부를 형성하는 건물의 배치)’를 따르지 않았다. 고려시대에 유행했던 산천비보사상에 따라 대웅전 앞이 아닌 북쪽 낮은 봉우리에 탑을 세운 것이다.
산천비보란 탑이나 건물을 세워 산천의 쇠퇴한 기운을 보충해준다는 사상이다. 이 두 석탑은 거의 같은 형태다. 이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부를 형성하고 상륜부를 장식한 일반형 석탑이다. 옥개받침(지붕처럼 덮는 돌)이 고려시대 석탑의 특징인 3단이다. 기단부에서도 고려 석탑의 특징이 나타나는 것으로 봐, 고려중기의 석탑으로 추정된다.
글·사진=이승동 기자 dong79@cc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