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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백석

시인 백석

어떤 가슴아픈 사랑 이야기가 눈에 들어왔다.

작년에 우연히 만난 삽화의 쓸쓸한 분위기와 하도 절절한 싯구절로

각인되었던 시인 백석

그의 사랑도 그렇게 애절했던 모양이다. 

 

 

 

 

 

2012.9.14일자 한국경제신문

 

일반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은 김소월 윤동주 서정주다. 반면 시인들 중엔 백석(1912~1996)을 꼽는 이들이 많다. 고향인 평북 정주의 투박한 사투리로 토착 정서를 노래하면서도 모던한 감각을 살려낸 시가 영감을 주기 때문이라고 한다. 1936년 1월 백석이 낸 시집《사슴》에 대해 김기림은 “신년 시단에 한 개의 포탄을 내던졌다”고 했다. 신경림은 6·25 직후 헌책방에서 이 시집을 찾아내고서 “실린 시는 40편이 못 됐지만 감동은 열 권의 장편소설을 읽은 것보다 더한 것이었다. 읽고 또 읽었다”고 털어놨다.

당대의 미남으로 통했던 백석은 연애도 잘했다. 나중에 요정 ‘대원각’의 주인이 된 자야(본명 김영한)와의 사랑은 드라마처럼 애틋하다. ‘가난한 내가/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燒酒)를 마신다…’(‘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자야가 곧 나타샤인지는 알 길이 없으나 그녀는 1995년 ‘내사랑 백석’이란 책을 내고, 백석 문학상도 제정했다. 1997년 1000억원에 이르는 대원각 땅을 법정스님에게 시주했을 때 주위에서 “아깝지 않으냐”고 묻자 이렇게 답했다. “그 사람의 시 한 줄만도 못하다.”

자야와 헤어진 후 만주를 방랑하던 무렵엔 지독한 외로움에 시달렸던 모양이다. ‘흰 바람벽에/희미한 십오촉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때글은 다 낡은 무명샤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흰 바람벽이 있어’) 낯선 땅 적막한 방에 홀로 앉아 늙은 어머니와 사랑했던 여인을 떠올리며 사무치는 그리움에 젖는다. 해방 후 고향으로 돌아가 영어·러시아어 통역으로 활동하다 분단과 함께 북에 남으면서 우리 문학사에서 지워져 버렸다. 한때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지냈지만 당성(黨性)이 약하다는 이유로 양강도 협동농장으로 쫓겨나 양치기를 하다가 1996년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백석은 1988년 월북문인 해금조치 이후에야 다시 읽히기 시작한다. 그를 주제로 한 석·박사 논문만 수백 편에 이를 정도로 시적 성취를 인정받고 있다. 올해 탄생 100주년을 맞아 백석의 시가 그림으로 다시 태어났다. 서울 인사동 통인옥션갤러리와 통인화랑에서 18일까지 열리는 문학그림전을 통해서다. 중견화가 10여명이 그의 시 세계와 삶을 그림으로 담아냈다.

출중한 재능과 미끈한 용모로 뭇 여성들을 사로잡던 백석이 노년에 오지 협동농장의 양치기로 생을 접은 건 비극이다. 우리가 헤쳐 나와야 했던 역사의 굴곡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이제 그는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영원한 자유인이 돼 나타샤와 함께 웃고 있을까.

이정환 논설위원 jhlee@hankyung.com

 

 

아름다운 나타샤는 가난한 그를 잊지 못하고

- 김영한 -

 

 

 

서울 성북동 한적한 주택가 한가운데 자리한 아름다운 사찰 길상사. 내가 그곳을 처음 찾은 것은 4,5년쯤 전의 일이다. 절에서 얽힌 애달픈 사연도 사연이지만 경관이 수려하고 단아하기가 예상을 뛰어넘는 정도인지라 나는 내내 감탄하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경내 한쪽 공덕비 앞에 20대로 보이는 남녀가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괜한 호기심이 발동하여 그들에게 다가갔다.

아니나 다를까. 청년은 시를 읊고 있었고 처녀는 시를 듣고 있었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그것은 우리나라 시인들이 널리 애송하는 시로 늘 첫손에 꼽히는 작품, 백석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였다. 내가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오늘밤 눈이 내린다는 그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되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시. 그럼에도 읽다보면 왠지 마음이 애틋해지면서 정말 누군가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눈이 내릴 수도 있지 않을까 믿고 싶게 만드는 시. 게다가 백석이 그 시를 쓸 때 나타샤의 실제 모델을 염두에 두고 쓴 것이 아닐까 상상할라치면 그 정체모를 애틋함이 곱절로 커지는, 바로 그 시를 연인 사이로 보이는 두 남녀가 읽거니 듣거니 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름 아닌 나타샤의 공덕비 앞에서 말이다.

 

나타샤. 누구나 예상할 수 있듯 시 속의 그녀는 시인의 연인이었다. 백석은 1938년 그 시를 자신의 연인에게 바쳤다. 진향(眞香), 자야(子夜), 길상화(吉祥花)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렸던 여인 김영한. 그녀가 바로 위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속의 나타샤이다. 사실 백석은 그녀뿐 아니라 문예지 삼천리의 여기자에게도 같은 시를 준 것으로 알려져 있고, 항간에는 나타샤의 실제 주인공이 그가 짝사랑했던 통영 처녀라는 주장도 있다. 진실이야 그 누가 알랴. 다만 사실을 말하자면 이 시가 쓰였을 무렵 백석과 동거하고 있던 여인은 김영한이었다.

 

김영한은 1916년 서울 관철동의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집안이 파산한 후 나이 만 열여섯에 조선 권번에 들어가 기생이 되어야 했다. 그녀는 명창 하규일 문하에서 궁중아악과 가무를 배우고 진향이라는 기명을 받았다. 진향은 춤과 노래에만 재주가 빼어난 것이 아니었다. 기생 신분으로 삼천리에 수필을 발표할 정도로 문학적 재능도 뛰어났다. 1935년 조선어학회의 회원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신윤국이 그녀의 영민함과 글재주를 귀히 여겨 그녀가 일본에 유학을 가도록 도왔을 정도였다. 그러나 김영한은 일본에서 학업에 정진하던 중 신윤국이 일제의 탄압으로 함흥의 형무소에 수감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녀는 곧바로 귀국하여 스승에게 달려갔지만 면회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하여 김영한은 함흥 권번으로 들어가 다시 기생이 되었다. 기생으로 이름을 떨치면 법조계 인사들과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고 그들의 도움으로 함흥 형무소에 있는 스승을 구할 수 있으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스승은 구하지 못했으나 그녀는 백석과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되었다.

 

김영한이 김자야라는 이름으로 1995년 출간한 회고록 내 사랑 백석에 따르면 두 사람은 1936년 함흥의 요릿집에서 처음 만났다. 함흥 영생고보의 영어교사로 재직중이던 백석은 마침 그곳에서 열린 동료 교사들과의 회식 자리에 참석해 있었다. 두 사람은 만나자마자 서로 첫눈에 반했다. 백석은 그녀의 손을 잡고 말했다.

오늘부터 당신은 나의 영원한 마누라야. 죽기 전엔 우리 사이에 이별은 없어요.”

 

그 한마디에 김영한은 까닭 모를 슬픔을 느꼈다. 그것이 사랑의 시작이었다. 백석은 퇴근하면 으레 그녀의 하숙집에서 밤을 보냈다. 실질적인 동거를 시작한 것이다. 이때 그는 그녀에게 자야라는 호를 지어주었는데, 오랑캐를 무찌르러 간 낭군을 기다리는 여인 자야의 애절한 마을을 노래한 이백의 시 자야오가子夜吳歌에서 따온 것이다. 이는 1988년 문예지 창작과 비평봄호에 발표한 회고록 백석, 내 가슴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에 나와 있다.

 

 

나는 그날 이후로 백석의 자야가 되었고 이 호는 아마 지금도 세상에서 우리 둘만이 알고 있는 이름일 것이다. () 나의 이 깊은 외로움도 그때 백석이 이자야란 호를 나에게 붙여주었을 때부터 이미 결정되고 마련된 운명이었던 것일까. 아니면 그는 아직도 그의 원정이 끝나지 않아서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김영한과 백석은 3년 남짓 동거하며 부부처럼 살았다. 이 시기에 백석은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바롯하여 사랑을 주제로 한 아름다운 서정시를 여러 편 썼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은 인텔리전트 아들이 한낱 기생과 동거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백석 부모의 반대에 부딪혔다. 19391월에 백석은 부모의 강요로 원치 않은 결혼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신부를 내버려두고 김영한에게 도망쳐 오기를 세 차례, 마침내 그는 김영한에게 만주로 도피할 것을 제안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의 미래를 망치고 있다는 죄책감 때문에 이를 거절했다. 결국 193910월에 백석은 뒷날을 기약하며 혼자 만주로 떠났다. 그도 김영한도 짐작하지 못했으나 이후 해방이 되고 남북 간에 삼팔선이 생기면서 두 사람은 서로 영영 만나지 못하게 되었다.

 

서울에서 김영한은 성북동에 고급 요정인 대원각을 차렸다. 서울의 3대 요정 중 하나로 꼽힐 만큼 큰 인기를 누렸던 대원각 덕분에 엄청난 부를 쌓았다. 하지만 그녀는 백석을 잊지 못해 노상 줄담배를 피웠다. 매년 71일 그의 생일에는 물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다.

 

그렇게 백석을 못잊어하며 나이 일흔을 넘긴 어느 날, 평소 불교에 관심이 많았던 김영한은 우연히 법정스님의 책 무소유를 접하게 되었다. 그리고 깨달은 바가 있어 시가 천억 원에 달하던 대원각을 스님이 거하고 있던 송광사에 조건 없이 시주하기로 마음먹었다. 대원각 부지에 절을 세우고 싶다는 것이 그녀의 바람이었다.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는 법정스님과 끈질기게 실랑이한 끝에 결국 그녀가 자신의 뜻을 이룬 것은 스님에게 처음 시주의 뜻을 밝힌 지 꼭 10년 만이었다.

 

저기 보이는 저 팔각정은 여인들이 옷을 갈아입는 곳이었습니다. 저의 소원은 저곳에서 맑고 장엄한 범종 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입니다.

 

길상사가 창건되던 날 그녀는 그곳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말했다. 그리고 법정스님으로부터 염주 한 개와 길상화라는 법명을 받았다. 서울 최고의 호화롭고 퇴폐적인 요정이 경건하고 신성한 사찰로 탈바꿈하던, 밤과 낮이 교차하고 속과 성이 몸을 바꾸던, 그것은 한 편의 시처럼 그 자체로 완결되는 아주 특별한 순간이었다.

길상사 창건 관련 기사를 쓰기 위해 김영한을 찾아온 기자가 물었다고 한다.

천억 원이나 되는 거금을 선뜻 기부한 것이 아깝지 않으세요?”

천억 돈이 그 사람의 시 한 줄만도 못해요.”

 

그때 이미 폐암으로 투병 중이던 김영한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백석의 시를 읽는 것이야말로 생의 가장 큰 기쁨이었다고. 백석을 기리기 위해 2억 원을 투자하여 백석문학상을 제정하고 나아가 가난한 고교생들을 위한 장학금 제도도 마련해 두었던 그녀였다. 그러니 20대 초반에 백석을 처음 만나 80대 중반 세상을 떠나기까지 60평생을 오로지 그만을 사랑하고 그리워했던 것이다.

사랑했기 때문에 존재했던 여인, 자야 김영한. 천억 돈이 백석의 시 한 줄만도 못하다지만 어쩌면 그의 시도 김영한의 한결같은 사랑에는 못 미치지 않을까. 그러니 그녀는 이미 나타샤로서의 자격이 충분하다 못해 넘치지 않을까. 실제 나타샤가 누구인지에 대한 세간의 의견이 아무리 분분하다 해도 말이다.

 

문득 몇 해 전 길상사 그녀의 공덕비 앞에서 백석의 시를 읊던 두 남녀의 초상이 떠오른다. 세상의 숱한 가난한 내가 숱한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눈이 푹푹 쏟아질 것 같은 겨울날, 뜬금없이 그들 남녀의 안부가 궁금해진다.

 

 

김미월 / ‘내가 사랑한 여자중에서

 

 

* 김영한 / 작가, 기녀

 

서울에서 태어나 몰락한 집안을 위해 열여섯 살에 스스로 한성 기생이 되었다. 1936년 조선어학회 회원이었던 해관 신윤국 선생의 도움으로 도쿄에 유학 갔다가 일제의 탄압으로 투옥된 해관 선생을 면회하기 위해 귀국했다. 그때 시인 백석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이후 만남과 이별을 거듭하다가 1939년 백석이 만주로 떠나면서 영영 이별했다.

 

서울 성북동에서 요정 대원각을 운영해온 김영한은 1995년 대원각을 법정스님에게 시주하였다. 이로써 그 자리에 길상사가 세워졌다. 또한 백석의 시적 업적과 문학정신을 기리기 위해 창작과 비평사에 기금 2억 원을 기증, 백석문학상이 제정되었다.

 

1953년 중앙대학교 영어영문과를 만학으로 졸업한 후 1990년 하규일 선생 일대기를 담은 <선가 하규일 선생 약전>을 출간했고, 1995년에는 백석과의 추억을 담은 수필집 <내사랑 백석>김자야라는 이름으로 펴냈다. 길상사가 문을 연 지 2년 만인 1999, 84세의 일기로 별세했다.

 

 

 

 

 

 

< 참고 자료>

 


 

 

 


 

 

 

 

이 시는 바야흐로 사랑의 도피행각을 벌이고 싶은 시인의 고백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진짜 연애편지다. 어느 밤 눈은 내리고 연인이 있는 곳에도 연인과 함께 가고 싶은 곳에도 눈이 푹푹 내릴 때 한 대책 없는 시인이 사랑을 노래한다. 그윽한 영상을 펼쳐 보이며 잔잔하게 전개되는 이 시는 두 번의 절정을 가지고 있다. 첫 번째는 시의 도입부에 단도직입으로 펼쳐진다. 내가 나타샤를 사랑해서 눈이 내린단다! 중증의 나르시시즘이다, 요샛말로 '자뻑'이 한참 심하다. '낙엽이 져요, 당신이 그리워요' 이게 순서 아닌가. 그런데 이 시는 대뜸 내가 당신을 그리워하여 낙엽이 지고, 내가 당신을 사랑해서 꽃이 핀다는 것이다. 사랑의 힘을 이토록 과장되게, 그러나 천진하고도 사랑스럽게 전할 수 있는 것은 시뿐이리라.


두 번째 절정은 3연. 산골로 도망가자고 연인을 꾀는 시인의 속내에 그대로 드러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라고! 이 시가 발표된 때는 1938년이니 일본제국주의 압박이 점차 수위를 높여갈 때다. 세상은 갈수록 추해져 가고, 우리는 더러운 세상에 섞여 살기 힘든 순결한 존재들. 그러니 더러운 세상에 상처받지 말고 우리가 먼저 세상을 버려버리자고 이 시는 선동하는 것이다. 기막힌 사랑의 선동이 어이없으면서도 흐뭇하다. 상대를 단박에 무장해제시키는 철없고 순수한 자긍심이라 할 만하다. 그렇지, 이 정도는 돼야 사랑의 도피행각을 벌일 만하지! 게다가 이 말은 시인의 입을 통해 나오지 않는다. 출출이(뱁새) 우는 산골로 가 마가리(오두막집)에 살자고 하는 시인에게 나타샤가 응답하며 고조곤히(조용히) 속삭이는 말로 설정해 놓았는데, 묘하게 아련하고, 아프고, 캄캄하다. 사랑하는 그대가 이렇게 말해주는데 도리 있나. 푹푹 내리는 흰 눈 속에 응앙응앙 울며 어서어서 흰 당나귀가 와야지!


이제 당나귀를 타고 떠나는 일만 남았다. 그런데 이를 어째! 언젠가 눈은 그치고 말 텐데! 더러워 버린 세상에서 여전히 시인은 살아내야 하는 걸! 몽환적인 한 편의 흑백영화 같은 이 시는 그래서 더욱 애잔하다. 영어와 러시아어에 능했고 시 잘 쓰고 핸섬한 모던 보이 백석(1912~1995)에겐 여자가 많았다. 그 중에도 통영 처녀 '란(박경련)'과 기생 '자야'의 인연은 특별해 보인다. 누런 미농지 봉투 속에 든 이 시를 백석에게서 직접 받았다고 전하는 자야 여사는 자신이 죽으면 화장해서 첫눈 오는 날 길상사 마당에 뿌려달라고 유언했고, 그리 되었다. 생사를 알 길 없이 남과 북에 헤어져 살면서도 백석의 생일날이 돌아오면 금식하며 그를 기렸다는 한 여자가 첫눈 속에 돌아간 흔적이 아득하다.


김선우 / 시인

(2008.11.7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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