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동군의 향토유적)
1.강선대
종 목 영동군 향토유적 제1호
지 정 일 1996.04.15
소 재 지 충북 영동군 양산면 봉곡리 43
시 대 현대
금강 기슭의 기암절벽과 노송이 울창한 곳으로 대 밑을 감돌아 흐르는 맑은 강물과 멀리 퍼진 넓은 들의 경관은 사람의 마음을 상쾌하게 만들어 주는 곳이다. 전설에 의하면 신선이 내려와 놀던 곳이라 하여 강선대라 하였으며, 동악 이안눌과 백호 임제의 훌륭한 시가 있다. 1956년 5월 10일 여씨 문중에서 6각정을 건립 하였는데, 둥근 기둥에 시멘트 6각 기와집으로 6.6m이다.
2.고반대
종 목 영동군 향토유적 제2호
지 정 일 1996.04.15
소 재 지 충북 영동군 상촌면 유곡리 817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중종조 시대의 삼괴당 남지언 선생이 을사사화시 은거하며, 즐기던 곳으로 이곳에 그의 유허비가 있어 대각을 건립하여 고반대라 하고 깊이 생각한다는 뜻으로 영사각이라 했다. 앞에는 천연 우물이 있어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장마에도 넘치지 않아 봉황정이라 부르고 있다. 정면 2칸, 측면 2칸의 둥근기둥 목조기와 팔작집으로 16.5㎡이다
3.관어대
종 목 영동군 향토유적 제3호
지 정 일 1996.04.15
소 재 지 충북 영동군 심천면 금정리 산51
시 대 조선시대
심천면 약목리와 금정리 도로변에 기암이 우뚝 솟아 양강에 불쑥 튀어나오니, 강물은 대를 휘어 감고 맴돌며, 대는 깍아 세운듯 벼랑을 이루고 송림이 우거져 있어 고기가 노니는 것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절경이다. 옛날 민욱이 그 아우 민성과 더불어 이곳에서 놀며, 아래 위로 고기가 노는 모양을 장난하며 보았기에 이름을 관어대라 하였다.
민욱은 조선중기의 학자로 호는 석계이며 영동출신이다. "관어대"란 현판은 민병석의 친필로서 민병석은 호가 시남으로 조선말기의 문신이며, 시화에 능하고 행서에 뛰어 났다. 둥근기둥 목조기와 팔작집으로 정면 2칸, 9.9㎡이다.
4.금호루
종 목 영동군 향토유적 제4호
지 정 일 1996.04.15
소 재 지 충북 영동군 양산면 봉곡리 378
시 대 현대
영동·옥천 이남 하천의 근원이 양강을 이루어 한 호수를 뚫고 금강으로 흘렀으니, 이 호수를 금호라 불렀고 또 8경을 이루고 있다. 이 호수 위에는 옛날 환선루가 있었는데 큰물에 허물어져 버렸다. 그 후 이 고장의 선비 37명이 1938년 봄에 전북 무주에 있던 한풍루를 옮겨다가 옛터 옆에 세웠으나, 1971년 무주의 반환요구에 따라 한풍루를 반환하고, 현 위치에 다시 지어 금호루라 이름하였다. 32.4㎡ 규모로 정면 3칸의 둥근기둥 목조기와 팔작집이다.
5.대각사
종 목 영동군 향토유적 제7호
지 정 일 1996.04.15
소 재 지 충북 영동군 황간면 난곡리 524-4
시 대 조선시대
광무 2년(1898년)부터 땅굴 속에서 석불을 받들어 모시고 있었다고 전하며, 그 석불은 지금도 대웅전내 새로 만든 불상 옆에 봉안되어 있다. 경내에 신도들의 부도가 있고, 대웅전 1동과 요사채 1동이 있으며, 목조 기와집 건물이다. 1988년 5월 28일 전통사찰 34호로 등록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6.두평리 오층석탑
종 목 영동군 향토유적 제8호
지 정 일 1996.04.15
소 재 지 충북 영동군 양강면 두평리 545-4
시 대 신라말~고려초
1989년 10월 1일 지하에 매몰된 5층 석탑의 옥개석 발굴로 귀중한 탑파의 연구 자료로 그 빛을 더하게 될 지 자못 기대되는 탑이다. 모형으로 보아 신라 말에서 고려 초의 것으로 보이며, 옛날 이곳은 풍곡사라는 사찰이 있었다고 한다. 조선 초 배불숭유 정책에 따라 유교의 보급과 치도의 이념 확대를 위해서 많은 사찰을 폐하여 향교나 유학 진흥에 이용하도록 하였으며, 또한 이 곳에 자풍서당이 있는 것으로 보아 폐사된 것으로 추측된다.
7.반야사
종 목 영동군 향토유적 제9호
지 정 일 1996.04.15
소 재 지 충북 영동군 황간면 우매리 151
시 대 신라
반야사는 신라 성덕왕 27년(728년) 원효대사의 10대 제자중 수제자인 상원화상이 창건하고, 고려 충숙왕 12년(1325년) 학조대사가 중수 하였다고 전한다. 극락전은 언제 중건 되었는지 확실치 않으나, 근래 수리하고 단청을 해서 상태가 단정하고 아담하다. 목조 맞배 기와집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포 없는 간략한 양식의 건물이다. 1988년 5월 28일 전통사찰 제25호로 등록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8.반야사부도 1.2기
종 목 영동군 향토유적 제10,11호
지 정 일 1996.04.15
소 재 지 충북 영동군 황간면 우매리 152-3
시 대 조선시대
영동군 향토유적 제 10, 11 호 좌측 1기는 화강석으로 만들었으며, 원통에 가까운 석종형으로 된 탑신을 지대석과 팔각의 대석이 받치고 있고, 그 위에 옥개석을 얹었다. 우측 2기 또한 화강석으로 석종형이며, 네모난 받침돌 위에 팔각의 받침돌을 이중으로 얹어 그 위에 종형의 탑신석을 올렸다. 그리고 그 위에 원반형의 옥개석을 올려 놓았다. 2기 모두 전체적으로 균형과 조화를 잃고 있으며 조선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9.반야사 불상
종 목 영동군 향토유적 제12호
지 정 일 1996.04.15
소 재 지 충북 영동군 황간면 우매리 152-33
시 대 신라
반야사는 신라 성덕왕 27년(728년) 원효대사의 10대 제자중 수제자인 상원화상이 창건하고 고려 충숙왕 12년(1325년) 학조대사가 중수 하였다고 전한다. 대웅전 내에 있는 이 석조 불상은 제작 연대는 정확히 알수 없으나, 신라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전해 내려오며, 제작기법이 이 시대의 제작법과 비슷하다. 반야사 대웅전에 봉안된 불상은 3위로서, 중앙의 석가여래좌상은 높이가 100㎝ 이며, 우측의 보현보살은 높이 72㎝, 좌측의 문수보살은 높이 72㎝이다.
10.봉양정
종 목 영동군 향토유적 제13호
지 정 일 1996.04.15
소 재 지 충북 영동군 양산면 수두리 산 5-11
시 대 조선시대
금운 이명주가 젊어서부터 이곳을 좋아하여 동문수학하던 13명과 함께 힘을 모아 병신년에 정자를지으니 어진 새들이 아침볕(조양)에 와서 울게 되어 봉양정이라 이름했다. 이 땅과 이 정자는 일만 가지 기상이 있어 옛날부터 소상팔경에 못지 않는다고 전해온다.
11.빙옥정
종 목 영동군 향토유적 제14호
지 정 일 1996.04.15
소 재 지 충북 영동군 양강면 남전리 산637
시 대 조선시대
고려 말 전객령 영산김씨 김영이가 맏사위인 순천박씨 정랑 박원용, 둘째사위 구례장씨 한성판윤 장비, 셋째사위 밀양박씨 대제학 박시용을 데리고 이곳에 와서 갈건야복으로 학문을 강론하며, 후진양성에 노력하여 덕행과 미풍양속을 심어주어 많은 인재를 배출하게 되었다. 그 후 후손들이 정자를 짓고 추모하여 옥정이라 하였으며, 빙옥정의 이름은 얼음과 같이 맑고 구슬과 같이 윤이 난다는 뜻으로 이름짓게 되었다. 이 정자의 규모는 정면 2칸, 측면 2칸, 팔작 지붕의 목조기와집이다.
12.삼호정
종 목 영동군 향토유적 제15호
지 정 일 1996.04.15
소 재 지 충북 영동군 양강면 묵정리 598
시 대 조선시대
조선 철종 11년(1860) 치당 성대식이 세웠으며, 양강 위에 자리잡고 있다. 앞에는 장강이 뻗어 마치 유단을 펼쳐 놓은 듯하고, 뒤에는 높은 산들이 병풍을 두른 듯 하여 모든 번뇌를 씻고 산색을 우러러 심신을 바르고 고요하게 할 수 있어 선비들이 수양하기에 좋은 곳이다. 이 정자의 규모는 둥근 기둥, 정면 2칸, 측면 2칸, 팔작 지붕의 목조기와집이다.
13.송계서원 유허비각
종 목 영동군 향토유적 제16호
지 정 일 1996.04.15
소 재 지 충북 영동군 매곡면 수원리 산 12-1
시 대 현대
조선 현종 7년(1666년) 창건된 서원으로 매계 조위, 송당 박영, 남정 김시창, 오촌 박응훈 등 4선생을 봉안 하였으며, 봉안문은 우암 송시열 선생이 썼다. 숙종말 삼괴당 남지언, 일석 박유동 등 2선생을 추향하여 이를 송계 육선생이라 하였다.
1868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시 훼철되었으나, 광무 2년(1898)에 지방 유림들이 유계를 창설하여 매년 음력 3월 보름날 육선생의 위패를 묻은 단소에서 배향제를 받들어 오고 있으며, 1956년 4월 송계서원 유허비각을 건립하였다. 비각은 둥근기둥 목조기와 맞배집으로 6.6㎡이다.
14.세덕사
종 목 영동군 향토유적 제18호
지 정 일 1996.04.15
소 재 지 충북 영동군 심천면 고당리 559-1
시 대 조선시대
고종 8년(1871년)에 밀양박씨 복야공파의 조상 6위를 받들어 모시기 위하여 사당을 건립 하였으나, 6·25 동란으로 낡아 무너진 것을 1974년 다시 고쳐 세워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곳에 안치된 위는 고려조 우문관 대제학 문간공 박시용, 증이판 박천석, 한성판윤 박천귀, 증이판 국당공 박흥생, 예문관 대제학 박연, 전중어사 박흥거 등 13위를 모시었다. 대지면적 약 3,500㎡, 사당외 8동의 부속 건물이 있다.
15.세심정
종 목 영동군 향토유적 제19호
지 정 일 1996.04.15
소 재 지 충북 영동군 상촌면 임산리 43-1
시 대 조선시대
세심정은 조선 중종조에 삼괴당 남지언 선생이 기묘사화에 시국을 비관하고 일생을 은거하며, 성심껏 수도하고 덕행을 친히 숭상하여 어버이를 모시는 어질고 너그러운 행실과 편안한 마음으로 분수를 지켜 만족할 줄 아는 선비 생활을 하면서 세운 정자이다. 학문과 덕을 숭상하고 도리를 배우는데 일생을 바치며 벼슬을 버리고 숨어사는 선비들의 뛰어난 행실과 높은 절개를 본받아 이어가라는 의미에서 세심정이라 하였다. 기초 암벽에는 산고수장이라는 음각 글귀가 있어 선생의 덕행을 나타내고 있으며, 후면 바위에는 고성남씨 세거지 라는 음각의 글씨가 새겨져 있다. 구조는 둥근기둥 목조기와 단층 6각정이다.
16.신안리 석불입상
종 목 영동군 향토유적 제20호
지 정 일 1996.04.15
소 재 지 충북 영동군 추풍령면 신안리 84-3
시 대 고려시대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석불입상은 반고개 마을의 수호신으로 모셔지고 있다. 매년 음력 1월 14일에 마을 수호와 가정의 덕복을 기원하는 제사를 올리고 있다. 불상의 전체높이는 2.27m, 어깨폭은 80㎝ 이다
17.쌍효각
종 목 영동군 향토유적 제21호
지 정 일 1996.04.15
소 재 지 충북 영동군 심천면 고당리 550-1
시 대 조선시대
쌍효각은 국당 박흥생과 이요당 박흥거의 효자비로서 1684년 화암서원 건립당시 호서유림들이 조정에 건의하여 조정의 윤허로 건립된 것인데, 난계 박연 효자각을 1973년 밀양박씨 종중에서 현 위치로 이전하여 삼효각이 됐다. 둥근기둥 목조기와로서 정면 2칸, 맞배집이다.
18.어서각
종 목 영동군 향토유적 제22호
지 정 일 1996.04.15
소 재 지 충북 영동군 심천면 고당리 550-1
시 대 조선시대
밀양박씨 한성판윤 박천귀는 대제학 박시용의 둘째 아들이다. 10세에 아버님이 별세하자 형 박천석이 관직에 있었음으로 홀로 늙으신 어머님을 모시게 되었다. 태종이 임금이 되기 전에 친분이 있던 관계로 태종이 즉위한 뒤 옛정을 생각하여 한성판윤의 왕지를 써 주시고 관직에 오를 것을 권하였으나, 당시 선비의 고결한 기풍을 꺾지 않고 병을 핑계로 인천강산에서 낚시로 여생을 마쳤다. 그 후 후손들이 어서각을 짓고 왕지를 탁본하여 현재까지 봉안중이며 한칸 맞배집이다.
19.여의정
종 목 영동군 향토유적 제23호
지 정 일 1996.04.15
소 재 지 충북 영동군 양산면 송호리 산 37
시 대 일제강점기
이요당 박흥거의 후손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연안부사였던 만취당 박응종이 관직을 사직하고 이 곳으로 낙향하여 강 언덕 위에 전원을 마련, 여러 되의 해송 종자를 손수 뿌려서 송전이라 불렀고, 정자를 지어 만취당이라 하고 예의와 풍속 및 정치와 역사를 설교하며 시간을 보냈던 곳이다.
후손들이 조상의 덕행을 추모하고 유지를 기리기 위해 1935년 가을 문중이 모여 정자를 짓기로 하고 콘크리트 기와집 16.5㎡를 건립 하였으니, 정면 2칸, 측면 1칸이다. 송림에 덮히고 금강이 유유히 흘러 주변경관이 매우 뛰어난 곳이다.
20.영암사
종 목 영동군 향토유적 제24호
지 정 일 1996.04.15
소 재 지 충북 영동군 심천면 심천리 233
시 대 현대
영암사는 오보연화 보살의 이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1971년에 건립한 절로서 절 입구에 그 이적을 기리는 비석이 서 있으며, 또한 석불이 있다. 불당과 요사채등 2동의 건물이 있으며, 1988년 5월 28일 전통사찰 제42호로 등록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21.영천사
종 목 영동군 향토유적 제25호
지 정 일 1996.04.15
소 재 지 충북 영동군 황간면 신흥리 28
시 대 일제강점기
1912년 보살 이칠만의 조모 서봉순이 창건한 사찰로 1988년 5월 28일 전통사찰 제35호로 등록되었고, 1992년 범준스님이 요사채를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웅전 1동, 산신각 1동, 요사채 2동이 있다.
22. 이리사지 삼층석탑
종 목 영동군 향토유적 제26호
지 정 일 1996.04.15
소 재 지 충북 영동군 양산면 가곡리 293-1
시 대 고려시대
당초 비봉산 이리사지(숭추골)에 있던 것을 해방후 양산초등학교 교정으로 옮겨 놓아 보존하고 있다. 이것은 지대석과 상륜부분이 없고 다만 지대석 제2기단 1개의 돌만 있으며, 탑신이 거의 없고 옥개석도 거의 파손 되었다. 고려시대 탑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전체 높이 2.4m, 폭이 1m 이다
23.읍청루
종 목 영동군 향토유적 제27호
지 정 일 1996.04.15
소 재 지 충북 영동군 영동읍 매천리 산5
시 대 일제강점기
구 황간현의 아문루인 황악루가 퇴락하여 1925년에 영동군수 최지환이 당시의 지방유지와 협의하여 군 소재지인 영동읍 매천리로 이전, 신축하고 읍청루라 편액 하였다. 이는 매천의 맑은 기운을 따서 이름한 것이라 하며, 이때 비용은 이당 손재하 선생이 100원을 희사하여 이루어졌다. 그 후 1971년 임혁재 군수가 다시 매천리 용두산 중간봉으로 이전하였으며, 6·25때 없어진 현판은 1971년 효연 이철순씨가 다시 썼다. 이 누각의 규모는 청색기와, 정면 3칸, 측면 2칸, 팔작 지붕의 중층 건물로 36㎡이다.
24.중화사
종 목 영동군 향토유적 제28호
지 정 일 1996.04.15
소 재 지 충북 영동군 영동읍 화신리 32
시 대 신라
신라 문무왕 16년(676)에서 신라 효소왕 10년(701) 사이에 의상조사가 창건한 고찰로서 고려 원종 원년(1260) 보각국사 일연이 중창하였고, 조선 중종 25년(1530) 이후에 폐사 되었다가 1550년에 서산대사 휴정이 중창 하였으나, 임진왜란으로 소실되고 숙종 3년(1677)에 중건한 후 수차례 중창 하였으며, 일제시대(1934년)에 이르러 당시의 주지인 보진화상이 중수하였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 목조기와, 맞배지붕, 다포집으로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지장보살이 봉안되어 있고, 1988년 5월 28일 전통사찰 제 21호로 등록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25.지봉리 좌불상
종 목 영동군 향토유적 제29호
지 정 일 1996.04.15
소 재 지 충북영동군 부용리 379
시 대 미상
건립 연대는 미상이고, 임진왜란 때 불상의 두부가 절단되었다고 전하며 2기로서 뒤쪽에는 입불상이 있고, 앞쪽에는 좌불상이 있다. 좌대에는 연화문이 조각되어 있고, 우측 팔이 절단 되었으며, 두부의 상단면도 파손되었다. 원래 추풍령면 지봉리 10-1 번지에 있던 것을 향토전시관이 건립되면서 이 곳으로 옮겨 관리하고 있다.
26.청절사
종 목 영동군 향토유적 제30호
지 정 일 1996.04.15
소 재 지 충북 영동군 학산면 지내리 500
시 대 조선시대
조선초 문신 정수충의 영정을 모신 사당으로 조선 태종 원년(1401년)에 출생, 예종 원년(1469년)에 사망 했으며, 자는 경부, 본관은 하동, 호는 고송재, 시호는 문절공이다. 공은 재덕을 겸비한 인사로서 영응대군의 사부가 되었다. 이어 1463년에 대사성이 되고 좌찬성에 이르렀다. 항상 인을 숭상하고 청빈한 생활로서 빈곤한 자를 친척같이 대접하며, 그 교훈과 덕화가 주위 일대에 알려졌다. 공을 추모하기 위하여 청백서원에 배향 하였는데, 임진왜란때 소실되어 후손들이 1700년경에 현 위치에 영정을 봉안, 지방 유림들이 제사를 올리고 청절사라 이름 하였다. 목조 기와 집으로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집이다.
27.채하정
종 목 영동군 향토유적 제31호
지 정 일 1996.04.15
소 재 지 충북 영동군 양산면 봉곡리 산 37
시 대 일제강점기
원래는 강선대 옆에 있었으나, 오래되어 무너진 것을 25명의 선비들이 뜻을 같이하여 계를 조직 하였고, 계에서 모아진 자금으로 1934년(갑술년) 착공하여 1935년(을해년) 7월 7일 준공했다. 반세기가 지나 도복 위기에 달한 정자를 후손인 상속계원들이 성금을 모아 1990년 4월 7일 중수 하였고, 채하정 중수 공적비를 세웠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목조기와 집으로 내부는 우물마루이고 난간을 돌렸으며, 안에는 동강 김영한이 지은 채하정기를 비롯하여 전태언의 상량문이 있고, 여러개의 편액이 걸려있다.
28.침강정
종 목 영동군 향토유적 제32호
지 정 일 1996.04.15
소 재 지 충북 영동군 용산면 시금리 5-3
시 대 조선시대
조선시대 사계 김장생의 문인 김감이 강을 따라 정자를 세우고 침강정이라 하였다. 이곳에서 중봉 조헌과 읍청 박사종이 더불어 거닐며 봄꽃과 강, 국화를 벗삼아 의리와 학문을 강론 하면서 술잔을 들어 세상의 근심을 바람결에 서로 나누기도 하였다. 현재 건물은 원래 용산면 가곡리에 있었는데 1919년에 옮겨 세운 것이다. 이 정자는 20㎡의 둥근기둥 목조기와집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집이다
29.한천정
종 목 영동군 향토유적 제33호
지 정 일 1996.04.15
소 재 지 충북 영동군 양산면 수두리 산58
시 대 조선시대
양산면 수두리에서 강을 건너 대곡 입구 언덕 강안에 위치하여 있다. 경치가 매우 아름다우며, 양산들이 한눈에 보이고, 금강을 품에 안고 있는 모습이다. 정각은 목조 기와로 당대 거유였던 백우 이시연의 문인들이 그를 추모하여 세운 정각이다. 만취 이찬연의 기문 등이 있다.
30.노후사
종 목 영동군 향토유적 제34호
지 정 일 1996.04.15
소 재 지 충북 영동군 영동읍 부용리 372
시 대 조선시대
영동향교내 대성전 서쪽에 위치하며 태종 15년(1415)에 노흥이 수령으로 부임하여 백성을 잘 다스리고 학문을 일어나게 하였으나 향교가 피폐하고 관리할 사람이 없어 고민한 나머지 노수령이 사재를 희사하여 관리토록 하였다. 그의 성인을 존경하고 유교를 숭상하는 공로를 길이 추모하기 위하여 유림들이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내왔다. 목조기와로 정면 2칸의 맞배집이다. 매년 석전제를 봄, 가을에 지내후 그 달 둘째번의 정일에 제사를 지낸다.
31.함벽정
종 목 영동군 향토유적 제35호
지 정 일 1996.04.15
소 재 지 충북 영동군 양산면 봉곡리 산54
소 재 지 조선시대
이곳은 양산면 송호리에서 강을 따라 500m쯤 올라와 강 언덕 반석 위에 지어진 정각이다. 유유히 흐르는 강물에 멀고 가까운 곳의 산이 어우러져 빼어난 절경을 이루고 있는 곳으로 양산팔경중 제 5경이다. 정각은 2칸의 목조기와 팔작집이다.
32.화수정
종 목 영동군 향토유적 제36호
지 정 일 1996.04.15
소 재 지 충북 영동군 영동읍 부용리 142-3
시 대 조선시대
약 300여 년 전 영일 정씨 휘 익 공이 문흥정을 금성산 아래에 세웠으나, 여러 차례 병화를 겪어 1939년(기묘년)에 종중에서 중건하고 화수정이라 이름했다. 이 정각의 규모는 24㎡의 둥근기둥, 팔작지붕, 목조 기와집이다.
33.호서루
종 목 영동군 향토유적 제37호
지 정 일 1996.04.15
소 재 지 충북 영동군 심천면 금정리 산 1-1
시 대 현대
조선시대 읍청 박사종이 호호정을 약목리 장승산에 지어 일명 마산정이라고도 하였다. 이후 임진왜란때 불탄 것을 밀양박씨 종중에서 1959년 이곳에 다시 짓고, 호서루로 이름을 바꿨으며, 금탄 박시호가 기문을 지었다. 둥근기둥의 목조기와 2층 누각으로 99.2㎡(30평)이며,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집이다.
34.금성사
종 목 영동군 향토유적 제38호
지 정 일 1996.04.15
소 재 지 충북 영동군 영동읍 부용리 산 7-2
시 대 삼국시대
금성사는 신라 무열왕 때 품일 장군과 아들 화랑 관창이 백제를 정벌하기 위해 황산벌로 가던 중 이곳 중강곡에서 야숙하게 되었고, 관창이 16세의 어린 나이에 황산벌에서 전사하여 품일 장군이 돌아올 때 이 곳을 지나며, 관창의 명복을 비는 마음에서 사찰을 건립하여 품관사라 이름지었다.
그러나 이 절은 임진왜란(1592년)때 소실되었고, 그 후 영동에 부임한 현감이 법당을 마련하여 내려오던 중 1946년 9월 20일 박남파 스님과 신도들이 4칸 법당, 요사채를 창건하고 금성사라 하였으며, 1986년 박진구 화상이 부임하여 퇴락한 법당과 요사채를 철거하고 정면 5칸, 측면 3칸의 대웅전과 요사채, 종각, 삼성각 및 해우소를 창건하였으며, 1988년 5월 28일 전통사찰 제 41호로 등록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35.배진호 효자문
종 목 영동군 향토유적 제39호
지 정 일 1997.07.04
소 재 지 충북 영동군 용산면 신항리 산 8번지
시 대 조선시대
이 정문은 통덕랑 배진호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서 세운 것이다. 배진호는 본관이 성산, 호는 병와, 자는 자천이다. 그는 부친이 중풍으로 한쪽 다리를 못쓰고 고생할 때 갖가지 약을 구해다 달여 드렸으나 소용없었다. 그러던 중 잉어와 꿀이 좋다는 말을 듣고 구하려 하였으나 때가 장마철이라 구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강가에 앉아 통곡하고 있는데 갑자기 잉어가 튀어나와 잡아서 달여 드렸더니 병이 금방 나았다 한다. 이 소문을 들은 임금이 1854년(철종 5년)에 명을 내려 정려 하였다. 이 정문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 기와집이다.
36.선산임씨 효열문
종 목 영동군 향토유적 제40호
지 정 일 1997.07.04
소 재 지 충북 영동군 양산면 가곡리 169
시 대 조선시대
이 정문은 인천이씨 원동의 처인 선산 임씨의 곧은 절개를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임씨는 천성이 정숙하여 남편의 병환에 허벅지 살을 베어 먹임으로써 두 차례나 병을 고쳤다. 조정에서는 고종 29년(1892) 정렬로 정문을 명하였다. 효열문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 기와집이다.
37.구례장씨 선덕비각
종 목 영동군 향토유적 제41호
지 정 일 1997.07.04
소 재 지 충북 영동군 양산면 호탄리 산 54
시 대 조선시대
이 비각은 밀양박씨 박운흠의 처 구례장씨 선덕비각 이다. 비각에는 "밀양박공운흠부인 구례장씨"(密陽朴公雲欽夫人 求禮張氏)라 음각 되어 있고, 비 뒷면에는 시가 음각 되어 있다. 비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팔각 기와집이며 막돌 담장으로 되어 있다. 비의 높이는 160㎝, 넓이 360㎝, 두께 20㎝ 이다.
38.밀양박씨 열려문
종 목 영동군 향토유적 제42호
지 정 일 1997.07.04
소 재 지 충북 영동군 상촌면 하도대리 350
시 대 조선시대
이 열녀문은 남우한의 처 밀양박씨의 정절을 기리고자 순조 17년(1817)에 건립했다. 박씨는 남우한의 아내로서 출가한 지 1년 만에 남편이 죽자 따라 죽었다. 남편이 병환 중에 부인의 몰골이 초라함을 보고 혹 옷을 갈아입기를 권하면 "남편의 병환이 낫지 않았는데 어찌 몸 치장을 하리요" 하고 3개월씩이나 옷을 갈아입지 않았다. 원래 1600년경 삼괴당 남지언이 학문을 가르치던 곳으로 쓰다가 초가로 있던 것을 1930년경 남씨 종중 정려로 개축하였다.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 기와집이다
39.은진임씨 효열문
종 목 영동군 향토유적 제43호
지 정 일 1997.07.04
소 재 지 충북 영동군 양산면 가곡리 169
시 대 조선시대
이 효열문은 이집의 효행과 그의 부인 은진임씨의 곧은 절개를 기리기 위해 고종 22년(1885)에 세웠다. 이 집의 본관은 인천, 자는 대성, 호는 죽전이다. 학문에 조예가 깊었고, 효행이 뛰어나 숙종 때 생원에 올랐다. 임씨는 시예를 잘하였고, 용모가 뛰어났으며, 시부모를 효성으로 섬겼는데, 남편이 죽자 장례를 치르고 나서 혼인 때 입었던 옷으로 갈아 입고 자결하였다. 목조 기와집으로 한칸의 맞배집이다.
40.원주김씨 효열문
종 목 영동군 향토유적 제44호
지 정 일 1997.07.04
소 재 지 충북 영동군 학산면 봉소리 666
시 대 조선시대
이 효열문은 원주김씨의 효열을 기리기 위해 고종 28년(1891)에 세웠다. 원주김씨는 호조판서겸 의금부사 경주이씨 이영근의 아내로 남편이 병이 나자 손가락을 잘라 수혈까지 하였으나 25세에 남편을 여의고, 시어머니 병환이 위독하여 참외를 원하니, 겨울인데도 원두막 밑에서 참외를 구해드려 병환이 덜했다 한다. 이 효열이 알려져 고종 27년에 지방유지 10명이 관에 건의하여 상을 주었고, 이듬해에는 부역을 면제 받았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팔작 기와집이며, 비의 높이는 1.04m이다.
41.인천채씨 열녀문
종 목 영동군 향토유적 제45호
지 정 일 1997.07.04
소 재 지 충북 영동군 상촌면 임산리 483
시 대 조선시대
이 열녀문은 인천채씨의 남편 남상익이 천연두로 병사하자 그의 뒤를 따라 자결하려는 것을 종중에서 말려 남편의 3년상을 치르고, 다음 제날 자결하여 이를 후손에게 깊이 전하기 위해 문중에서 건립하였는데, 순조 30년(1830) 4월에 정려되었다. 정면 1칸 측면 1칸, 둥근기둥 홑처마, 맞배 기와집이다.
42.충주박씨 열녀문
종 목 영동군 향토유적 제46호
지 정 일 1997.07.04
소 재 지 충북 영동군 상촌면 하도대리 350
시 대 조선시대
이 열녀문은 충주박씨의 정절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박씨는 13세에 친어머니의 병환이 있어 지극 정성으로 모시었고, 출가해서는 시부모를 또한 정성으로 섬겼다. 그런데 남편과 자식이 한꺼번에 병을 얻어 위독하자 밤마다 목욕하고 남편 대신 죽기를 하늘에 빌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과 자식이 일시에 죽자 따라 죽으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단식으로 끝내 자진하였다. 그 뜻을 기리고자 정조 8년(1784)에 정려 되었고, 조정에서 17량을 보조받아 열녀문을 세웠다. 정면 1칸 측면 1칸, 둥근기둥, 맞배 기와집이다.
43.충현각
종 목 영동군 향토유적 제47호
지 정 일 1997.07.04
소 재 지 충북 영동군 심천면 약목리 462-2
시 대 조선시대
이 충현각은 충신 송시영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조선 인조 17년에 명정되어 숙종 30년에 중수되었다. 영조 때 초강서원 경내로 이전한 후 4차의 중수를 거친 후 융희 21년(을사)에 다시 중수하였던 것을 1983년 11월 현 위치로 이건하였다. 그는 인조 5년 정유재란 때 의병을 일으켜 호국정신을 고취시켰고, 병자호란 때에는 관민의 위축된 사기를 북돋워 결사구국의 용기를 불러 일으켰다. 목조기와 1칸의 둥근기둥 맞배집이다.
44.창효각
종 목 영동군 향토유적 제48호
지 정 일 1997.07.04
소 재 지 충북 영동군 용화면 자계리 419
시 대 일제강점기
이 창효각은 김정만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1934년 종중에서 건립하였다. 김정만은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조정에서 효자상을 받았으며, 조선 중기 사람으로 본은 김해이다. 건물은 정면 1칸 측면 1칸, 둥근기둥의 맞배 기와집이다
45.하동정씨 정문
종 목 영동군 향토유적 제49호
지 정 일 1997.07.04
소 재 지 충북 영동군 심천면 금정리 449-4
시 대 조선시대
열부인 정씨는 하동 사람이고 민보광의 아내이다. 정씨는 시부모를 효성으로 섬겼고, 온화함으로 남편을 섬기었다. 남편 사후 삼년 동안 죽을 마시고, 세수도 안하고, 머리도 안 빗고, 묘 옆에 움막을 짓고 바람이 불거나 비가 오거나 혼백을 붙들고 슬피 울었다 한다. 그의 열행이 뛰어나 성종 2년(1471)에 정려되었고, 이 정문은 영조 40년(1764)에 건립하였다. 정면 1칸 측면 1칸, 둥근기둥 맞배 목조 기와집이다.
46.여하현 효자문
종 목 영동군 향토유적 제50호
지 정 일 1997.07.04
소 재 지 충북 영동군 양산면 누교리 515-2
시 대 일제강점기
이 정문은 여하현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1913년 마을 사람들이 길을 닦고 정문을 세워 그 안에 비를 세웠다. 그는 본관이 함양, 자는 우필, 호는 금사이다. 그는 부친이 병을 얻자 온 정성을 다하여 간호했으며, 돌아가신 후에도 6년간 매일같이 성묘하면서 슬픔을 달래는 등 효심이 지극했다. 건물은 1칸, 목조기와 맞배집이다.
47.이의정 정문
종 목 영동군 향토유적 제51호
지 정 일 1997.07.04
소 재 지 충북 영동군 양산면 봉곡리 산 37
시 대 조선시대
이 정문은 이의정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이의정은 본관이 여주 하음으로 고려후기 이규보의 팔대손이고 , 이조판서 장의 손이며, 율곡 이이 문하에서 수업하였다. 그는 무과에 급제하여 보령현감에 재직할 당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천일, 최경희 장군과 더불어 진주성 싸움에서 투신 순절 하였으며, 경종 2년(1722)에 명정되었다. 건물은 1칸, 목조기와 팔작집이다.
48.민경호 정문
종 목 영동군 향토유적 제52호
지 정 일 1997.07.04
소 재 지 충북 영동군 심천면 금정리 445-1
시 대 조선시대
민경호는 여흥인으로 부친의 병환이 위독하자 손가락을 잘라 수혈하여 끊어져 가는 목숨을 소생케 하였고, 그 후 모친의 병환이 있을 때도 그렇게 하였다. 또한 돌아가신 후에도 6년간을 묘 옆에 움막을 짓고, 죽을 먹으면서 부모님에 대한 예를 지켰다. 숙종 42년(1716)에 정문을 명 받았고, 가선대부 한성부 좌윤에 증직되었다. 건물은 1칸, 목조기와 맞배 집이다.
49.매한손 효자문
종 목 영동군 향토유적 제53호
지 정 일 1997.07.04
소 재 지 충북 영동군 매곡면 노천리 70-2
매한손은 조선초의 사람이다. 우암 송시열 선생이 말하기를 그의 선조는 원래 중국사람으로 고려말 우리나라로 귀화하여 이곳 황간을 관향으로 삼아 그 이후부터 자손들이 이곳 매곡면 노천리에서 살았다고 하였다. 매한손은 원래부터 효성이 지극하고 공손하며, 품행이 바른 사람으로 부친이 중병에 걸려 생명이 위태롭게 되자 손가락을 잘라 수혈하여 병을 낫게 하였으며, 추운 겨울에 강의 얼음을 깨고 잉어를 잡아 병석의 부친을 받들어 모셨다. 중종 14년(1519년) 매한손의 효성을 전해들은 조정에서 그에게 충순위이라는 벼슬을 내리고 정문을 세워 후손들이 본받도록 하였다.
세월이 흘러 정문이 퇴락하고 무너지자 노천리 주민들이 그의 효행을 영원히 기리고자 1946년 3월 중건 하였다. 건물은 1칸, 목조기와 팔작집이다.
50.박응훈 효자문
종 목 영동군 향토유적 제54호
지 정 일 1997.07.04
소 재 지 충북 영동군 매곡면 노천리 348-1
시 대 조선시대
오촌 박응훈(1539∼1590)은 임진왜란시 의병장인 박이룡 장군의 동생으로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한 사람이다. 부모상을 당하여 장지를 구할 때 호랑이가 나타나 묘소를 정해 주었으므로 이를 호점산소라 하며, 묘소는 황간면 소계리 안산에 있다. 묘소 옆에 움막을 짓고 3년 동안 시묘를 살았는데 밤마다 호랑이가 나타나 공을 지켜 주었다고 한다. 이 일이 조정에 알려져 선조 34년(1601년) 정려가 내려졌고, 현종때 송계서원에 배향 되었다. 옆의 열려문은 통덕랑 박수현의 처 열부 선산 김씨를 표창하는 문으로 경종 3년(1723년)에 정려되어 쌍려문이 된 것이다.
이 건물은 정면 2칸, 측면 1칸, 둥근기둥의 맞배 기와집으로 1976년 도로확장 공사시 약간 위로 옮겨져 다시 세워진 것이다
51.민대혁 효자문
종 목 영동군 향토유적 제55호
지 정 일 1997.07.04
소 재 지 충북 영동군 용산면 부상리 산 37
시 대 조선시대
이 정문은 민대혁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고종 29년(1892)에 건립하였고 1924년에 개축하였다. 그는 본관이 여흥으로 효성이 지극하였다. 그는 그물을 만들어 어부에게 주어 5일에 생선 2마리를 바치게 하고, 푸줏간에 돈을주어 10일에 고기 5근을 바치게 하여 부친을 봉양하였다. 그러던 중 부친의 발에 종기가 나자 백약이 무효였으나 쇠비름이 좋다는 말을 듣고 겨울인데도 울타리 밑에서 쇠비름을 개어 생즙을 내서 발라 종기를 낫게 하였다. 조정에서 이 사실을 알고 고종 29년(1892) 10월에 동몽교관으로 임명되었고, 정문을 내렸다. 건물은 목조기와 1칸의 팔작집이다.
52.남원양씨 행적비각
종 목 영동군 향토유적 제56호
지 정 일 1997.07.04
소 재 지 충북 영동군 용화면 자계리 587
시 대 일제강점기
양씨는 경주정씨 양경공파 후손인 정세환과 혼인하여 일찍 남편과 사별하고 어린자식과 시부모를 모시던 중, 시아버지가 병환이 나자 손가락과 허벅지를 칼로 베어 피를 먹이는 등 효성이 지극하여 그 효열을 기리기 위하여 1930년 경주정씨 종중에서 건립하였다.
53.김한필 효자문
종 목 영동군 향토유적 제57호
지 정 일 1997.07.04
소 재 지 충북 영동군 심천면 각계리 585-1
시 대 조선시대
이 정문은 김한필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영조 17년(1741)에 건립하였다. 그는 부친을 일찍이 여의고 모친을 모시던 중, 모친이 병환으로 눕자 돌아가실 때까지 10여년간 대소변을 손수 받아냈다. 또한 약을 구하고자 험하고 깊은 산에 올라가 약초를 캐어 손수 달여 병 구환을 하였다. 이 건물은 목조기와 1칸의 맞배집이다.
54.명정각
종 목 영동군 향토유적 제58호
지 정 일 1997.07.04
소 재 지 충북 영동군 용산면 율리 670-1
시 대 조선시대
첨지중추부사 배흥당(1685-1745)과 그의 차남 배진호(1719-1769)의 효행을 기려 철종 5년(1854)에 명정되어 세워진 정려이나, 자세한 효행 행적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이 건물은 목조기와 1칸의 맞배집이다.
55.하동정씨 열려비각
종 목 영동군 향토유적 제59호
지 정 일 1997.07.04
소 재 지 충북 영동군 심천면 금정리 217-1
시 대 조선시대
하동정씨는 여흥민씨 민보광의 아내로 남편이 죽자 3년간 시묘하고 4계절 의복을 묘 앞에 태웠으며, 탈상하자 조석으로 상식을 평생 계속 하였다. 성종 2년에 명정 되었고, 정문은 영조 40년(1764)에 건립되었으며 1954년 이곳으로 비를 옮기고 정문을 중건하였다. 정면 1칸 측면 1칸, 둥근기둥의 맞배 기와집이다.
56.서병두 효자문
종 목 영동군 향토유적 제60호
지 정 일 1997.07.04
소 재 지 충북 영동군 황간면 금계리 386-2
시 대 조선시대
서병두의 호는 농은, 본관은 부여인이며 19세기 중엽의 인물이다. 그는 대원군의 자손으로 효행이 지극했다 하는데 자세한 효행 행적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가 죽은 후 고종 35년(1898)에 효행을 기려 정려문을 세웠고, 동몽교관에 증직되었다. 정려문은 정면 1칸, 측면 1칸, 맞배 기와집이다.
57.황의사
종 목 영동군 향토유적 제61호
지 정 일 1997.07.04
소 재 지 충북 영동군 매곡면 어촌리 산 284
시 대 현대
학촌 박이룡 장군(1533∼1595)은 충주인으로, 1533년에 출생하여 선조 10년(1577) 승문원정자로 처음 벼슬에 올라 여러 관직을 역임 하였으며, 해서(현재 황해도) 순찰사로 있을 때인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향으로 내려와 스스로 황의장이 되어 1500여명의 의병을 모아 이곳 괘방령을 근거지로 삼아 김천, 지례, 개령, 선산 등지에서 200여 회에 걸쳐 수많은 왜적을 무찔러 큰 공을 세웠다. 그 공적으로 능성현령(전라도 화순)을 제수 받았고 1595년 군자감정에 봉해졌으나, 왜란때의 부상이 재발하여 그해 4월 63세를 일기로 별세 하였는데 순조 12년(1812) 이조참의로 증직 되었다.
현재의 사당은 1998년 4월 완공한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 기와집이다.
58.고백당
종 목 영동군 향토유적 제62호
지 정 일 1999.05.07
소 재 지 충북 영동군 황간면 금계리 11-2
시 대 조선시대
16세기 초엽 기묘사화로 인해 중종때 벼슬을 버리고, 이곳 백화산 기슭에 은거하면서 후학을 지도하였으니, 이름은 이우인, 자는 사중, 호는 농헌으로 본관은 경주 이씨이다. 그는 이곳에서 후학을 지도하여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는데 그곳을 고백당이라 하고 현판은 미수 허목이 지었다. 건물은 3칸의 팔작 기와집이다.
59.계술재
종 목 영동군 향토유적 제63호
지 정 일 1999.05.07
소 재 지 충북 영동군 매곡면 옥전리 449
시 대 미상
계술재는 순흥안씨 옥담 안국민의 손자로 작산현감을 지내면서 선정을 베푼 뒤 향리인 매곡면 옥전리로 낙향하여 후학양성에 힘쓴 통덕랑 안치장【 자는 수백, 호는 계술, (1621∼1674)】의 덕행을 기리기 위하여 후손들이 세운 재실이다.
정확한 건립연대는 알수 없으나, 원래 공의 묘 앞에 있던 것을 1919년 7월 현재의 위치로 자리를 옮겨 세웠다고, 1934년 공의 8대손 안상철이 지은 계술재기에 기록되어 있다. 건물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목조기와 팔작집이다.
60.봉유재
종 목 영동군 향토유적 제64호
지 정 일 1997.05.07
소 재 지 충북 영동군 매곡면 노천(내동)
시 대 조선시대
이 건물은 조선 중종때 안주목사를 지낸 박성량을 기리기 위하여 그의 후손들이 인조 10년(1632년) 3월에 건립한 재실이다. 처음 이 건물이 세워졌을 때 현판도 달지 않고 그냥 소종재라고 일컬었는데 이는 곧 대종재인 흥학당 앞에 세워져서 이런 이름으로 불리었다고 한다. 그러나 후대에 이르러 세대가 멀어지고 자손이 번창하자 "선조를 받들고 후손에 복을 준다"라는 뜻의 현판을 달고 봉유재라 했다 한다. 이 건물은 정면 4칸, 측면 2칸, 팔작지붕의 건물로 정면 2칸이 큰 대청마루를 이루고 있다.
61.영모재
종 목 영동군 향토유적 제65호
지 정 일 1999.05.07
소 재 지 충북 영동군 양산면 수두리 138
시 대 현대
성균관 대사성 이거경과 자 최진, 손 수, 증손 원량, 현손 문범, 행범, 충범, 신범 등 8위를 모시는 재각으로 정면 4칸, 측면 2칸, 팔작집이며, 좌우로 방을 두고 중간 두칸은 대청으로 되어 있다.
62.원모재
종 목 영동군 향토유적 제66호
지 정 일 1999.05.07
소 재 지 충북 영동군 심천면 기호리
시 대 현대
밀양박씨 후손인 문간공 박시용을 비롯한 판윤과 함창의 삼세와 교관 및 연천의 오위를 봉사하는 재실로 어류산 기슭 기호리(태소 마을)에 있다. "원조를 받들고 드높이고자 그 덕을 사모함이 사람의 본능이리라. 자손된 자가 멀게는 선세의 문학, 충효를 본받고, 가까이로는 몸으로 체험하면 어찌 선조를 사모함이 되지 않으리오" 1985년 갑자년 봄에 후손 참봉 찬하가 위의 상량문을 짓고 썼다.
- 영동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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