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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시 산내면 문화재

 

 

 

남원시 산내면의 문화재)

 

1.남원 실상사 백장암 삼층석탑


종 목  국보  제10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전북 남원시  산내면 대정리 974 실상사 백장암 
시 대 통일신라


실상사는 지리산 천황봉 서편에 위치한 절로, 통일신라 흥덕왕 3년(828)에 홍척이 창건하였다. 이 곳에서 북쪽으로 얼마쯤 가다보면 백장암이 나타나는데, 실상사에 딸린 소박한 암자로, 그 아래 경작지에 이 탑이 세워져 있다.

 

낮은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으로, 각 부의 구조와 조각에서 특이한 양식과 수법을 보이고 있다. 즉, 일반적인 탑은 위로 올라갈수록 너비와 높이가 줄어드는데 비해 이 탑은 너비가 거의 일정하며, 2층과 3층은 높이도 비슷하다. 층을 이루지 않고 두툼한 한 단으로 표현된 지붕돌의 받침도 당시의 수법에서 벗어나 있다. 또한 탑 전체에 조각이 가득하여 기단은 물론 탑신에서 지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조각이 나타난다. 기단과 탑신괴임에는 난간모양을 새겨 멋을 내었고, 탑신의 1층에는 보살상과 신장상을, 2층에는 음악을 연주하는 천인상을, 3층에는 천인좌상을 새겼다. 지붕돌 밑면에는 연꽃무늬를 새겼는데 3층만은 삼존상이 새겨져 있다.

 

통일신라시대 후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측되는 이 탑은 갖가지 모습들의 조각으로 화려하게 장식하는 등 형식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구조가 돋보이고 있어, 당시를 대표하는 아름다운 석탑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2.남원 실상사 수철화상 탑


종 목  보물  제33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전북 남원시  산내면 입석리 57 실상사 
시 대 통일신라


실상사 안에 있는 극락전을 향하여 그 오른쪽에 서 있는 탑으로, 수철화상의 사리를 모셔 놓은 사리탑이다. 수철화상은 신라 후기의 승려로, 본래 심원사에 머물다가 후에 실상사에 들어와 이 절의 두번째 창건주가 되었다. 진성여왕 7년(893)에 77세로 입적하니, 왕은 그의 시호를 ‘수철화상’이라 하고, 탑 이름을 ‘능가보월’이라 내리었다.

탑은 신라 석조부도의 전형적인 양식인 8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삼아 맨 아래 바닥돌에서 지붕까지 모두 8각을 이루고 있다.

 

기단은 아래받침돌에 구름과 용무늬와 사자가 새겨져 있으나 마멸이 심하다. 윗받침돌에는 솟은 연꽃무늬가 삼중으로 조각되어 둘러져 있다. 8각의 탑몸은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이 새겨져 있고, 각 면에는 문 모양과 사천왕상이 새겨져 있다. 지붕돌은 얇고 경사가 완만하며, 처마부분에는 엷은 곡선을 이루고 서까래를 새겼다. 지붕 경사면에는 기와골을 표시하였고, 그 끝에는 막새기와까지 표현함으로써 목조건축의 지붕 양식을 충실히 모방하였다. 꼭대기에는 몇 층의 단이 있고, 그 위에 원형이 작은 돌에 있을 뿐 모두 없어졌다.

 

탑 옆에는 탑비가 건립되어 있어서 이 부도의 주인공을 비롯한 여러 관련된 내용을 알 수 있다. 비문에 의하면, 수철화상이 진성여왕 7년(893)에 입적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어, 탑을 세운 시기를 이 즈음으로 추측하고 있다. 

 


3.남원 실상사 수철화상 탑비


종 목  보물  제34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전북 남원시  산내면 입석리 50 실상사 
시 대 통일신라


실상사에 위치한 수철화상의 탑비이다.

 

수철화상은 통일신라 후기의 승려로, 본래 심원사에 머물다가 뒤에 실상사에 들어가 수도하였다. 진성여왕 7년(893) 5월 77세로 이 절에서 입적하자 왕이 시호와 탑명을 내렸다고 한다. 비문에는 수철화상의 출생에서 입적까지의 행적과 사리탑을 세우게 된 경위 등을 기록하고 있다. 그는 실상사에서 입적하였으나 심원사의 승려이었기 때문에 비문에는 ‘심원사수철화상’으로 적고 있다. 비문을 짓고 쓴 사람은 알려져 있지 않으며, 마멸과 손상이 심한 편이다.

 

탑비의 형식은 당시의 일반적인 탑비 형식과는 달리 거북모양의 받침돌 대신 안상 6구를 얕게 새긴 직사각형의 받침돌을 두어 그 위로 비를 세웠다. 비를 꽂아두는 비좌에는 큼직한 연꽃을 둘렀다. 머릿돌에는 구름 속에 용 두마리가 대칭하여 여의주를 다투는 듯한 모습이 조각되어 있고 그 앞면 중앙에는 ‘능가보월탑비’라는 글이 새겨져 있는데, 조각수법이 형식적이고 꾸밈이 약화된 경향이 뚜렷하다.

 

비의 건립 연대는 효공왕(재위 897∼912)대로 추정되고, 글씨는 당대를 전후하여 성행한 구양순체를 따랐다.

  

 

4.남원 실상사 석등


종 목  보물  제35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전북 남원시  산내면 입석리 50-1 실상사 
시 대 통일신라


실상사는 지리산 천왕봉의 서쪽 분지에 있는 절로, 통일신라 흥덕왕 3년(828)에 홍척이 선종 9산의 하나로 실상산문을 열면서 창건하였다. 이 석등은 실상사 보광명전 앞뜰에 세워져 있다.

 

석등은 불을 밝히는 화사석을 중심으로 밑에 3단의 받침을 쌓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었는데, 평면은 전체적으로 8각형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받침부분의 아래받침돌과 윗받침돌에는 8장의 꽃잎을 대칭적으로 새겼다. 화사석은 8면에 모두 창을 뚫었는데, 창 주위로 구멍들이 나 있어 창문을 달기 위해 뚫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붕돌은 여덟 곳의 귀퉁이가 모두 위로 치켜올려진 상태로, 돌출된 꽃모양 조각을 얹었다. 머리장식에는 화려한 무늬를 새겨 통일신라 후기의 뛰어난 장식성을 잘 보여준다.

 

이 석등은 규모가 커서 석등 앞에 불을 밝힐 때 쓰도록 돌사다리를 만들어 놓았으며, 지붕돌의 귀퉁이마다 새긴 꽃모양이나 받침돌의 연꽃무늬가 형식적인 점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보인다. 

 

 

5.남원 실상사 승탑


종 목  보물  제36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전북 남원시  산내면 입석리 50 실상사 
시 대 고려시대


실상사 안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잔디밭에 건립되었다. 실상사에는 동서 3층 석탑과 석등을 비롯하여 부도·석비 등 많은 석조 유물이 전하고 철조여래좌상이 있으며, 1967년에는 경내에서 통일신라 후기로 추정되는 동종이 발견된 일이 있었다.

 

탑은 일반적인 양식을 기본으로 하여 맨 아래 바닥돌에서 지붕까지 모두 8각을 이루고 있다. 아래받침돌에는 용틀임과 구름무늬가 아름답게 새겨져 있고, 가운데받침돌은 아무런 무늬를 새기지 않았다. 윗받침돌에는 연꽃 8잎이 위를 향해 피어 탑몸돌을 받치고, 각 모서리를 따라 꽃장식이 표현되어 있다.

 

탑몸돌은 한 면에만 문을 얕게 조각하고, 다른 면에는 아무 장식이 없다. 지붕돌은 윗면의 경사가 급하고, 여덟 곳의 귀퉁이에는 작은 꽃이 장식되었다.

 

꼭대기에는 꾸밈이 없는 둥근 돌이 놓이고, 그 위에 연꽃무늬가 새겨진 보주(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가 놓여 있다.

 

너비에 비해 길쭉해 보여 안정감이 없어 보이지만 정제된 편이다. 약한 석질 탓인지 조각은 간소하고 소박한 편이며, 특히 윗받침돌의 꽃장식 표현은 심하게 닳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종류에 속하는 부도로서는 걸작에 속한다고 하겠다. 만들어진 연대는 통일신라시대의 양식을 충실하게 계승한 고려 전기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6.남원 실상사 동ㆍ서 삼층석탑


종 목  보물  제37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전북 남원시  산내면 입석리 50 실상사 
시 대 통일신라


실상사의 중심법당인 보광전 앞뜰에 동·서로 세워져 있는 두 탑이다. 실상사는 통일신라 흥덕왕 3년(828)에 홍척이 창건하였으며 풍수지리설에 의거하여, 이 곳에 절을 세우지 않으면 우리나라의 정기가 일본으로 건너간다 하여 지은 것이라 한다. 이 곳에는 3층 석탑 이외에도 석등, 묘탑, 탑비, 부도, 철조여래좌상 등이 있어 유명하다.

 

탑은 2층으로 된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으로, 동서 두 탑 모두 탑의 머리장식이 거의 완전하게 보존되어 있는 희귀한 예이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만들어져 통일신라시대의 정형을 보이며, 각 층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이 새겨져 있다. 지붕돌은 처마밑이 수평이며, 밑면의 받침은 4단이고, 네 귀퉁이에서 살짝 들려 있는데, 그 정도가 부드러우면서도 경쾌하다. 특히 탑의 머리장식은 원래대로 잘 보존되어 각 장식부재들이 차례대로 올려져 있다.

 

이와 같이 두 탑은 규모나 양식이 같아서 동시에 조성된 것임을 알 수 있으며, 대작은 아니지만 돌의 구성이 정돈되어 있는 통일신라 후기의 뛰어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7.남원 실상사 증각대사 탑


종 목  보물  제38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전북 남원시  산내면 입석리 50 실상사 
시 대 통일신라


홍척국사의 사리를 모신 탑으로, 팔각의 평면을 기본으로 삼고 있는 전형적인 팔각원당형 부도이다. 홍척은 통일신라 후기의 승려로 시호는 ‘증각’이다.

 

탑은 기단은 팔각형의 석재를 여러층 쌓은 뒤 연꽃이 피어있는 모양의 돌을 올렸다. 각 면의 조각들은 닳아 없어져 거의 형체를 알아보기가 힘들고 윗받침돌의 연꽃잎만이 뚜렷하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로 구성되었는데 낮은 편이다. 몸돌은 기둥 모양을 새겨 모서리를 정하고 각 면에 아치형의 문을 새겼다. 그곳에 문을 지키고 있는 사천왕상을 돋을새김하였다. 지붕돌에는 목조건축의 처마선이 잘 묘사되어 있다. 전체적인 조형과 조각수법으로 보아 9세기 후반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8.남원 실상사 증각대사 탑비


종 목  보물  제39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전북 남원시  산내면 입석리 50 실상사 
시 대 통일신라


실상사에 있는 증각대사의 탑비이다.

 

증각대사는 일명 홍척국사 ·남한조사로 불리며, 통일신라 헌강왕 때에 당나라에 들어갔다가 흥덕왕 1년(826)에 귀국한 뒤 구산선문의 하나인 실상사파를 일으켜 세운 고승이다.

 

비는 비몸돌이 없어진 채 현재 거북받침돌과 머릿돌만이 남아있다. 받침돌은 용의 머리를 형상화 하지않고 거북의 머리를 그대로 충실히 따랐다. 머릿돌은 경주의 ‘태종무열왕릉비’계열에 속하는 우수한 조각을 보여주는데, 앞면 중앙에 ‘응료탑비’라는 비명칭을 새겨 두었다.

 

9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경주의 신라 무열왕릉비와 같이 한국 석비의 고전적 형태를 잘 나타내고 있다. 대사의 묘탑인 실상사증각대사응료탑(보물 제38호)은 탑비의 뒤편 언덕에 세워져 있다. 

 

 

9.남원 실상사 백장암 석등


종 목  보물  제40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전북 남원시  산내면 대정리 975 실상사 백장암 
시 대 통일신라


실상사는 지리산 천왕봉의 서쪽 분지에 있는 절로, 통일신라 흥덕왕 3년(828)에 증각대사(일명 홍척국사, 남한조사)가 선종9산 중 실상산문을 열면서 창건하였다. 절 안의 백장암 남쪽 밑으로 울타리를 마련하여 몇 점의 유물을 보호하고 있는데, 석등은 남원 실상사 백장암 삼층석탑(국보 제10호)과 함께 있다.


석등은 일반적으로 불을 밝히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밑에 3단의 받침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는데, 이 석등은 받침의 밑부분이 땅속에 묻혀있는 상태이다. 받침은 가운데에 8각의 기둥을 두고, 아래와 윗받침돌에는 한 겹으로 된 8장의 연꽃잎을 대칭적으로 새겼다. 화사석 역시 8각형으로 네 면에 창을 뚫어 불빛이 퍼져 나오도록 하였다. 지붕돌은 간결하게 처리하였고, 그 위의 머리장식으로는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가 큼지막하게 올려져 있다.


전체적으로 8각의 평면인 점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 석등의 기본 형태를 잘 간직하고 있다. 각 부분에 새긴 세부적 조각수법으로 미루어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에 건립된 것으로 짐작된다.

 

 

10.남원 실상사 철조여래좌상


종 목  보물  제41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전북 남원시  산내면 입석리 50 실상사 
시 대 통일신라


통일신라 후기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실상사 창건 당시부터 지금까지 보존되어 오고 있는 유명한 철불이다. 통일신라 후기에는 지방의 선종사원을 중심으로 철로 만든 불상이 활발하게 만들어졌는데, 이 불상 역시 한 예로서 당시의 불상 양식을 잘 표현하고 있다.


머리에는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기교있게 붙여 놓았고, 정수리 위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아담한 크기로 자리잡고 있다. 귀는 그런대로 긴 편이고, 목에 있는 3줄의 주름인 삼도는 겨우 표현되고 있다. 좁아진 이마, 초생달 모양의 바로 뜬 눈, 다문 입 등의 근엄한 묘사는 이전의 활기차고 부드러운 모습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어깨선이 부드럽고 가슴도 볼륨있게 처리되었지만 전반적으로 다소 둔중한 느낌을 주며, 양 어깨에 모두 걸쳐 입은 옷 역시 아래로 내려올수록 무거운 느낌을 준다. 옷주름은 U자형으로 짧게 표현되고 있는데 이것은 당시에 유행하던 옷주름 표현기법으로 비교적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이상과 같은 특징을 지닌 실상사 철제여래좌상은 긴장감과 활력이 넘치던 8세기의 불상이 다소 느슨해지고 탄력이 줄어드는 9세기 불상으로 변화하는 과도기적인 작품이라는 점에 그 의의를 둘 수 있다.

 

 

11.남원 개령암지 마애불상군


종 목  보물  제1123호  
지 정 일 1992.01.15
소 재 지 전북 남원시  산내면 덕동리 산215 
시 대 고려시대


지리산 정령치에 연이은 고리봉 아래 개령암터 뒤 절벽에 새긴 이 마애불은 크고 작은 12구의 불상으로 이루어진 규모가 큰 불상군이다.


울퉁불퉁한 자연암벽이어서 조각 자체의 양각도 고르지 못하고 훼손도 심한 편이나 3구는 비교적 잘 남아 있다. 이 가운데 가장 거대한 불상은 4m나 되는데 조각솜씨도 제일 뛰어나 본존불로 여겨진다. 얼굴은 돋을새김이지만 신체의 옷주름은 선으로 처리를 하고 있어 일반적인 고려 마애불의 수법을 따르고 있다. 또한 큼직한 얼굴과 형식화된 이목구비, 장대해진 체구와 간략해진 옷주름 등에서도 고려시대에 유행하던 거불적인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1∼2m의 작은 불상들 역시 조각수법이 모두 같으며, 각 부분의 양식이 비슷한 것으로 보아서 같은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규모가 큰 불상군은 희귀한 예로서 그 가치가 인정되며, ‘세전’, ‘명월지불’등의 글이 새겨 있어 그 중요성을 더해주고 있다. 

 

 

12.남원 실상사


종 목  사적  제309호 
지 정 일 1984.10.19
소 재 지 전북 남원시  산내면 입석리 33-3외 
시 대 신라


실상사와 백장암 약수암을 포함한 일대로서 지리산 북쪽 기슭에 있다.


실상사는 신라 흥덕왕 3년(828)에 증각대사 홍척이 창건하였으며, 제자 수철대사와 편운대사도 이 절에서 배출되었다. 조선시대 정유재란 때 화재를 입어 200여 년 동안 폐허로 남아 있었고, 승려들은 백장암에서 머물며 그 명맥을 이어왔다. 숙종 때 다시 지었고 고종 때 화재를 입어 작게 지은 것이 현재의 모습이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보광전·약사전·명부전 등이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백장암 3층석탑(국보 제10호)·실상사 수철화상능가보월탑(보물 제33호)과 탑비(보물 제34호)·실상사 석등(보물 제35호)·부도(보물 제36호)·실상사 3층석탑(보물 제37호)·증각대사응료탑(보물 제38호)과 그 탑비(보물 제39호)·백장암 석등(보물 제40호)·실상사 철제여래좌상(보물 제41호)·백장암 청동은입사향로(보물 제420호)·약수암 목조탱화(보물 제421호) 등이 있다.


중요문화재를 많이 간직하고 있으며, 절 입구에는 상원주장군(중요민속자료 제15호)을 비롯한 석장승들이 있다. 

 

 

13.지리산 천년송


종 목  천연기념물  제424호 
면 적 907㎡(보호구역)
지 정 일 2000.10.13
소 재 지 전북 남원시  산내면 부운리 산111 


지리산 천년송은 나이가 약 500여살로 추정되는 소나무로 높이는 20m, 가슴높이의 둘레는 4.3m이며, 사방으로 뻗은 가지의 폭은 18m에 달한다. 지리산의 구름도 누워간다고 이름 붙여진 와운마을의 주민 15인이 이 나무를 보호 관리하고 있어 상태가 좋고 수형 또한 매우 아름답다.


이 나무는 와운마을 뒷산에서 임진왜란 전부터 자생해 왔다고 알려져 있으며 20m의 간격을 두고 한아시(할아버지)송과 할매(할머니)송이 이웃하고 있는데, 이중 더 크고 오래된 할매송을 마을주민들은「천년송」이라 불러오며 당산제를 지내왔다 한다. 매년 초사흗날에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며 지내는 당산제의 제관으로 선발된 사람은 섣달 그믐날부터 외부 출입을 삼가고 뒷산 너머의 계곡(일명 산지쏘)에서 목욕재계 하고 옷 3벌을 마련, 각별히 근신을 한다고 한다.


우산을 펼쳐 놓은 듯한 반송으로 수형이 아름다우며 애틋한 전설을 가진 유서깊은 노거목으로 희귀성과 민속적 가치가 커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14.실상사 석장승


종 목  중요민속문화재  제15호 
지 정 일 1969.12.15
소 재 지 전북 남원시  산내면 입석리 50 
시 대 조선시대


실상사 입구에 있는 3기의 돌장승이다.


장승은 민간신앙의 한 형태로 마을이나 사찰 입구에 세워져 경계를 표시함과 동시에 잡귀의 출입을 막는 수호신의 구실을 한다. 이 장승 역시 경계표시와 함께 경내의 부정을 금하는 뜻에서 세운 것으로 보여진다.


사찰 입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개울을 사이에 두고 2기의 석장승이 마주하고 있다. 하나는 논두렁에 있고 다른 하나는 큰 고목 아래에 자리잡고 있는데 10m 간격으로 사이가 넓다.


세 장승은 거의 같은 모습으로 머리에 벙거지를 쓰고 있으며 크고 둥근 눈에 뭉툭한 주먹코이다. 윗 송곳니 두 개가 삐져나와 험상궂은 듯 하지만 입가의 미소가 순한 심성을 드러내고 있다. 길게 수염이 표시되고 몸체에는 좌우 각각 상원주장군과 대장군, 옹호금사축귀장군이라는 이름이 새겨있다. 다만 수염이 반대로 향하고 있어 상원주장군과 대장군은 대칭적인 한 쌍을 염두에 둔 조각인 듯싶다.


좌측 장승을 받치는 기단석에 있는 기록으로 보아 조선 영조 원년(1725)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15.실상사 극락전


종 목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45호 
지 정 일 1974.09.27
소 재 지 전북 남원시  산내면 입석리 50 
시 대  조선시대


지리산에 위치한 실상사는 통일신라 흥덕왕 3년(828)에 홍척이 처음 지은 절이다. 당나라에서 공부를 하고 돌아온 홍척은 풍수지리학적으로 이곳에 절을 세우지 않으면 우리나라의 정기가 일본으로 건너간다고 하여 이 절을 지었다고 한다.


극락전은 조선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 때 불에 탔다가 다시 지어졌다. 절의 역사를 기록해 놓은 자료에 의하면 순조 31년(1831)에 지어졌다고 한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의 건물로,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집이다. 가운데 칸에는 세짝의 문을 달았고 양쪽은 한짝 씩의 문을 달았다. 건물 안은 바닥에 마루를 깔고, 뒤쪽 높은 기둥 사이에 후불벽을 설치하고 불단 위에는 아미타불이 모셔져 있다. 

 

 

16.실상사 위토개량성책


종 목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88호 
지 정 일 1979.12.27
소 재 지 전북 남원시  산내면 입석리 50 
시 대 조선시대


이 성책은 사찰의 토지대장으로, 실상사 소유토지대장 중 일부분이지만 여기에서 250년전의 조계종사찰 재정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실상사의 토지재산을 알 수 있다. 크기는 세로 66㎝, 가로 46㎝이며, 전후 표지를 합해 19매이다.


내용을 보면 실상사의 본사와 여러 소속암자의 토지 및 불양답(사찰에 기증한 토지)을 구분하고, 전답의 소재지·명칭·위치·형태·등급·경작인·조세 등을 표시하고 있다. 그리고 각 전답에는 이 절의 소유토지의 기장번호가 있다.


이것은 250년전에 시행된 토지대장의 정리·측량법· 세제·소유자와 경작권·경작권의 실제 등을 파악할 수 있으며, 실상사의 옛 모습을 고찰할 수 있는 자료로 평가된다. 

 

 

17.실상사 동종


종 목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37호 
지 정 일 1992.06.20
소 재 지 전북 남원시  산내면 입석리 50 
시 대  조선시대


실상사 경내에 있는 높이 123㎝, 입 지름 83㎝의 종이다.


종을 매다는 고리는 용이 종머리를 딛고 있는 형상이며, 소리의 울림을 도와주는 용통은 간략화 된 용이 꼬리를 휘감은 모양을 하고있다. 몸통 위쪽은 원안에 범자를 양각한 문양을 12곳에 배치하였다. 그 아래 사각형을 이룬 유곽이 4면에 있으며, 사이사이에 두 손으로 꽃가지를 잡고 보관을 쓴 보살상이 1구씩 배치되었다. 유곽의 테두리는 덩굴무늬로 장식되었고, 안쪽으로는 꽃 모양의 유두 9개가 있다.


종에 새긴 글을 통해 조선 숙종 20년(1694)에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18.백장암 보살좌상


종 목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66호  
지 정 일 1999.04.23
소 재 지 전북 남원시  산내면 대정리 975 
시 대 고려시대


전라북도 남원시 산내면의 백장암은 실상사와 같은 시대인 9세기 초에 창건된 사찰이다. 임진왜란으로 실상사가 폐허화되었을 때는 약 200년 동안 실상사의 승려들이 이 절에서 머물렀다고 한다.


이 보살좌상은 원래 실상사 백장암 안에 보관되어 있었으나 1997년 5월에 도난 되었다가 같은 해 9월에 회수되어 현재는 실상사에 보관되어 있다.


머리는 높게 틀어 올려 상투모양으로 묶은 후 보관(寶冠)을 썼다. 이마 부분에는 머리카락이 굴곡지게 표현되어 양쪽 귀를 돌아 어깨 아래까지 길게 늘어져 있는데, 이는 고려말 조선초의 보살상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다. 얼굴은 사각형에 가까운 편이며, 신체는 어깨가 둥글고 무릎 너비가 좁아 단아한 느낌을 준다. 옷은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데, 탁 트여진 가슴에는 화려한 목걸이가 표현되었다.


백장암 보살좌상은 고려말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 보존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19.백장암 소장 동종


종 목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211호 
지 정 일 2007.01.19
소 재 지 전북 남원시 산내면 대정리 산28 
시 대 조선시대


백장암 동종은 1743년에 제작되었으며 전고 64cm, 종구 42cm의 규모로 그리 크지 않은 규모의 자그마한 종이다. 백장암 소장 동종은 전체적으로 신라계의 전통을 따르고 있으면서 조선시대의 양식이 혼합된 양식의 종으로 천판이 높게 솟아있는 봉긋한 형태와 음통 및 유곽과 보살상 등 전통적인 조선종의 형식을 따른 작품이다.


특히 용뉴가 소략하고 보살상이 형식화되었으며 연판이 간략화되는 등 일부 형식적인 면이 엿보이기는 하지만, 보존상태가 매우 양호하며 유려한 연화당초문의 조각수법, 전형적인 포탄형의 종신의 형태를 갖추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20.퇴수정


종 목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65호 
지 정 일 2000.11.17
소 재 지 전북 남원시  산내면 대정리 827 
시 대 조선시대


조선 후기에 벼슬을 지낸 박치기가 1870년에 세운 정자이다.


박치기는 벼슬에서 물러나 심신을 단련하기 위해 이 정자를 지었다고 한다. 그래서 정자 이름을 ‘퇴수정’이라고 하였다.


정자 앞으로는 시냇물이 흐르고 뒤에는 암석이 높게 솟아 있다. 받침부에 사각형 주춧돌을 놓고 그 위에 원형 기둥을 세워 이층 건물을 지었다. 건물 안에는 방 한 칸을 들였다. 정자 왼쪽에 있는 관선재라는 사당은 후손들이 세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