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은 병원을 가는 길은 늘 우울하다.
잘 드시는 삼계탕과 죽을 쑤어서 아버님을 뵈러 다녀왔다.
아버님은 이젠 내게도 존대말을 하신다.
어머니는 몰라볼 때도 마지막 까지 난 알아봐 주시더니
지난 번 면회 때부터 존대말을 하시기 시작하셨다.
그래도 중간에 이러저런 말을 걸면 조금 기억이 살아 나시는 듯
반말로 돌아오시더니
이번에 처음부터 끝까지 존대말을 쓰신다.
복지과장이 날 보며 이사람 누구냐고 물으니 망설이듯 ‘우리아들’
이라고 하시는데 주야장창 존대말을 쓰던 은비엄마한테도
‘딸’이라 하신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기억력 마저 바람에 날린다.
드시는 건 여전히 잘드신다.
간간히 정신이 돌아오면 입버릇처럼 하시던 “이래 살아 뭐하나?
니들 고생 안 시키려면 내가 빨리 죽어야지” 하시는 말씀도 이제 안 하신다.
인간의 존엄성이 허물어 지는
당신의 삶을 바라보면
가슴 한 켠에 쾡한 바람이 인다.
어머님이 늘 찾으시는 부처님께서 그냥 이제 그만 데려가셨으면 싶다.
아버지를 보면 삶이 두려워진다.
열심히 살았던 시절은 온데간데 없다.
당신에게서는 모든 것이 사라졌다.
아내와 아들과
함께 웃고 떠들던 친구들 모두가…
존재의 근원도 모른 채
살아가는 이유도 모른 채 ….
박탈된 자유조차 아무런 의미가 없다.
바람에 흩어져간 그 기억들처럼
아버지의 하루하루는 모래시계처럼
메마르게 흘러내린다.
내가 기억하는 모든 것이 사라진다면?
내가 걸었던 고원의 아름다운 풍경과 깨달음
내가 기쁨을 위해 찾았던 모든 것들
그리고 훗날을 위해 쌓아 놓은 그 수많은 추억들
내가 기억하려 노력했던 많은 것들이
물거품처럼 사라진다면
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살아 가야 한다면
삶이란 얼마나 황당하고 허망한 것인가?
4월 26일 (일요일)
날씨는 좋고 컨디션 개털
어제 머리 깎으면서 고장난 바리캉 소음에 노출된 것이 치명적
이런 날은 훌쩍 떠나서 기분을 푸는 것이 상책이다.
마눌은 태현이 시험 때문에 동행 유보
과일 두개 땅콩한 봉 , 물 한 병 , 그리고 책 한 권
봄빛 속으로 떠난다.
오늘은 대청호반 비밀의 정원으로 간다.
비가 봄 오긴 했어도 대청호는 목마르다.
오래 잠겨 있었던 산허리 속살이 허옇게 드러나고
그 옛날 베어져 물 속에 잠겼던 뿌리들은 그 상처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그 곳에서는 늘 마음이 정돈되고 가라 앉았다.
도로변에서 가까운 곳에도 아름다운 곳이 있다.
몇 번인가 떠나지 못한 어느 날
혼자 호반을 이곳 저곳을 배회하면서 만난 풍경들이다.
풍경을 따라 왔음인지 큰 카메라를 든 아저씨 물가로 내려와 열심히 셔터를 누른다.
나의 평화는 이방인과 중장기 소음으로 깨어졌다.
묘지를 조성하는지 불도저 굉음과 아이들의 모습에 슬며시 차를 타고
나의 비밀의 정원으로 떠난다
중간 기착지로 내려섰다.
아마도 묘지조성 때문이겠지만 길 없던 산등성이에 나무를 죄 베어 길을 만들었다.
나의 비밀의 영지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가뭄으로 인해 물이 많이 빠져서 호안을 따라 비밀의 정원으로 갈 수 있다.
이상기온과 물부족이 계속되어 물이 길을 감추어주지 않으면
어쩌면 이 새로운 길은 계속 유지되기 어려울 지도 모른다.
원치 않은 새로운 길로 인하여 내 비밀의 정원은 사라질지 모른다.
사월의 태양은 나른하다.
태양은 구름 안팎을 드나들어 호수의 명암을 조절하고
바람은 서늘히 불어 온다.
버드나무 나무 아래 앉아 두 시간 쯤 읽던 책을 끝냈다.
늘 그러하듯이 책이 졸음을 불러내기도 하여 30분 쯤 졸았다.
찰랑거리는 물소리 이외의 모든 문명의 소리가 사라진 곳이다.
침묵과 고요는 사색과 명상을 불러내고
그 느릿느릿한 시간의 마음의 평화와 기쁨을 가져다 준다.
길게 드러난 모래톱을 따라 가다 보니
짐승 발자국 옆에 사람의 발자국이 나 있다.
늘 새나 짐승발자욱 밖에 없는 곳인데
내 비밀의 정원에는 누군가 침입자가 있었다
그 표식을 모두 떼어냈다.
비밀이 정원으로 인도하는 듯한 징표는 모두 지워 버렸다.
리본도
나뭇가지에 매 놓은 표식들도.
훗날 모험가와 약탈자들이 다시 들이닥치겠지만
내가 할 방도는 다한 셈이다.
이젠 비가 비밀의 정원으로 난 길을 막아주는 일만 남았다.
백인에게 유린되는 땅들을 고통스럽게 바라보던 인디언의 마음이 그랬을까?
나를 위해 피어나는 꽃을 바라보며
적막 속에서 세상의 시름을 잊을 수 있는 나만의 영토가 사라짐을 슬픈 일이다.
바람소리와 찰랑이는 물소리만 있는 곳
혼자만의 황홀한 고독을 느낄 수 있는 곳이 사라짐은
조용히 나를 돌아 보고
내 마음에 쌓인 삶의 찌거기 같은 걸 비어낼 곳이
하나 사라진다는 거
나만의 사색과 명상의 공간이 사라진다는 거
나의 영지를 돌아 나와 어머님 댁에 들렸다.
모처럼 내려온 여동생과 조카와 함께 저녁식사를 했다.
여동생은 천태산에 다녀 왔다고 했다.
8시 10분 열차를 예매한 동생을 역 까지 바래다 주고 돌아 왔다.
'대청호 500리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대청호 500리길 제2구간 (이현동-냉천종점) (0) | 2013.12.31 |
---|---|
대청호500리길 제1구간 (대청호 물문화관 -이현동) (0) | 2013.12.31 |
비밀의 정원 2006년 11월 (0) | 2010.03.30 |
비밀의 정원 2006년 1월 (0) | 2009.03.30 |
비밀의 정원 2006년 4월 (0) | 2006.04.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