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경봉 마켓인사이트부장
“현금으로 수백억원 받을래? 아니면 수십억원 덜 받는 대신 포장재(또는 세탁 서비스) 기업 주식과 사장 자리 받을래?”
기업 창업자의 자녀들에게 이 같은 질문을 던지면 어떤 답이 돌아올까. 당연히 ‘사장’ 타이틀을 원할 듯하지만 요즘 인수합병(M&A) 시장을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최근 한 달 남짓 사이에 쉰 살 넘게 먹은 대표 장수기업 두 곳이 사모펀드(PEF)에 팔렸다. 하나는 51년 된 국내 가구 1위 한샘이다. 이 회사는 총수 일가가 경영을 계속 이어가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창업자인 조창걸 명예회장은 80세를 넘겼지만 슬하의 3녀는 물론 사위들도 경영에 뜻이 없었다.
50년 넘은 기업 잇따라 매각
이보다 한 달쯤 앞서 57년 된 남양유업도 PEF에 매각됐다. 이 회사는 지난 몇 년간 ‘갑질’과 소비자 기만 등으로 ‘오명’을 켜켜이 쌓아왔다. 표면상으로는 회사가 벼랑 끝 위기에 몰리자 도저히 감당하지 못한 총수 일가가 두 손을 든 모양새다. 하지만 속내는 조금 다르다. 이 회사는 2~3년 전부터 매각 의사를 타진하고 있었다. 홍원식 전 회장이 20년 가까이 50% 넘는 지분을 보유하고 있었음에도 상무와 본부장을 맡은 아들들의 지분율은 줄곧 0%였다. 회사를 둘러싼 논란과 상관없이 일찌감치 기업 승계를 포기한 것이다.
이들 기업 말고도 올해 장수기업들의 매각 사례가 유난히 많다. 29년 된 국내 세탁업계 1위 크린토피아도 총수 일가가 지분 100%를 내놨다. 속옷 제조업체 BYC의 총수 일가가 보유한 승명실업 역시 팔렸다. 이 회사는 BYC에 들어가는 포장재를 제조한다. 마찬가지로 매각 원인은 기업 승계에 차질을 빚어서다. 요즘 이런 장수기업 M&A 시장은 말 그대로 불이 붙었다.
언뜻 보면 이해하기 어렵다. 이렇게 현금 ‘따박따박’ 나오는 회사들을 물려주기 어렵다니. 하지만 조금 들여다보면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주식 대신 현금을 물려주면 증여세만 수십억~수백억원을 아낄 수 있다. 이들 기업은 대부분 수십 년간 한 우물을 판 회사다. 그렇다 보니 지분율이 대부분 50%를 훌쩍 넘는다. 증여하면 최고 50%의 세율이 붙고 최대주주는 20%가 할증된다. 남양유업의 경우 주식으로 물려줬다면 단순 계산해도 200억원 넘는 세금을 더 내야 했다.
가구 1위·세탁 1위도 승계 못해
물론 일련의 매각 사례를 단순히 세금 부담 때문이라고 단정짓기는 곤란하다. 문제는 자식들에게 이 회사의 사장 자리가 더 이상 자신의 인생을 걸어볼 만큼 매력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요즘 잘나가는 정보기술(IT) 분야 스타트업이나 플랫폼 기업 최고경영자(CEO)는 뭔가 폼이 난다. 심지어 투자금도 몰린다. 이들은 한 번 터지면 조(兆) 단위 거부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수십 년 된 한 우물 기업은 그런 기대도 없이 소위 기름때 묻혀가며 박 터지는 경쟁을 해야 한다. 인건비 부담과 각종 규제도 가중된다. 이럴 때 손을 내민 곳들이 PEF였다. 깔끔하게 현금 결제하고 웃돈(경영권 프리미엄)까지 쳐준다. 창업 2·3세들에겐 거부할 이유가 없다. PEF들이 이런 기업을 찾아다니면서 사재기를 하고 있다.
국내 가구 1위, 세탁 서비스 1위가 이럴진대 지방 중소기업들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나마 기업 규모가 크고 우량해서 PEF가 손을 내밀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은 회사는 여유가 될 때 자산과 부동산을 팔고 사업 부문을 잘라 넘겨야 한다. “회사는 됐고 스크린골프 매장이나 차려달라는 아들 때문에 미치겠다”는 한 공구업체 사장의 고민이 더 이상 낯설지 않다.
김채연 마켓인사이트부 기자
한샘 인테리어 매장
“대한민국에 한샘을 모르는 국민이 있을까요. 이 같은 사실과 인테리어 시장 성장성만으로 그 가격이 충분히 된다고 본 겁니다.” (투자은행업계 관계자)
조(兆) 단위 기업 매물이 제대로 된 실사도 없이 3주 만에 팔렸다. 실사 결과에 따라 가격이 수백억~수천억원 조정될 여지가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인수합병(M&A) 시장에선 극히 이례적인 사례다. 그만큼 팔고 싶었던 측에서 급했고, 사고 싶은 측에서도 남들한테 뺏기기 싫었다는 얘기다. 지난주 주인이 바뀐 국내 1위 가구업체 한샘 얘기다.
한샘의 창업주이자 최대주주인 조창걸 명예회장이 경영권 매각을 고려한 것은 벌써 수년 전이다. 조 명예회장은 1970년 한샘을 세운 뒤 경영 최전선에서 진두지휘하다가 1994년 물러났다. 이후 한샘은 전문경영인 체제로 운영됐다. 조 명예회장은 슬하에 1남 3녀를 뒀지만 외아들이 2012년 사망하면서 가업을 물려줄 후계자가 없어 고심해 왔다. 세 자매는 물론 사위도 경영 의사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대기업들 매입 주저…깜짝 후보 등장
한샘은 2017년 사상 처음으로 매출 2조원을 돌파하며 승승장구하는 듯했으나 사내 성추문, 불법 채용 등 각종 구설에 오르며 위기를 맞았다. 실적도 크게 고꾸라졌다. 2017년 1400억원에 달하던 영업이익은 1년 만에 560억원으로 곤두박질쳤다. 조 명예회장은 결국 2019년 매각에 나섰다. 당시 글로벌 사모펀드(PEF) 칼라일과 타결 직전까지 갔으나 막바지에 무산됐다.
매각 작업이 다시 본격화한 것은 불과 몇 달 전이다. 조 명예회장은 때가 됐다고 판단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집콕 라이프’가 일상화하면서 가구 인테리어에 대한 관심이 늘어 한샘 실적이 예년 수준으로 회복하면서다. 한샘은 지난해 매출 2조원을 돌파하고 영업이익 931억원을 달성했다. 조 명예회장은 먼저 신세계 등 국내 유통 대기업 등과 두루 접촉했다. 그러나 가격 등 입장차가 좁혀지지 않았다. 주당 20만원 이상 수준을 제시했으나 후보자들은 손사래를 쳤다. 한샘은 그러자 사모펀드(PEF)로 방향을 틀었다.
몇몇 PEF가 관심을 갖고 들여다보는 사이 뒤늦게 뛰어든 깜짝 후보가 가격을 전격 수용했다. IMM 프라이빗에쿼티(PE)였다. 양측이 합의한 주당 거래 금액은 22만원 수준으로 파악된다. 거래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투자은행(IB)업계 관계자는 “IMM PE는 한샘이 50여 년에 걸쳐 쌓아온 브랜드 경쟁력과 인테리어 시장의 성장성만 봐도 가치가 충분하다고 판단했다”며 “가격을 깎겠다는 생각보다는 다른 곳이 가로챌까 봐 더 걱정이었다”고 설명했다.
"인테리어 시장 성장세…가치 충분"
첫 만남으로부터 3주 뒤인 지난 15일 IMM PE는 조 명예회장 지분 15.45%를 포함한 특수관계인 지분 약 30.21%를 인수하기로 하는 양해각서(MOU)를 맺었다.
IB업계에선 거래 금액이 적정한 수준이라는 게 대체적인 분석이다. 한샘은 자사주 26.7%를 보유하고 있다. 자사주와 경영권 프리미엄 등을 고려하면 인수가는 주당 18만원 안팎 수준으로 떨어진다는 분석이다. IMM PE는 앞으로 상세실사, 주식매매계약(SPA) 체결을 거쳐 10월께 최종 거래를 마무리할 예정이다.
코로나 팬데믹 여파로 가구 인테리어를 비롯한 건자재 업체 등 관련 업계에서는 이미 총성 없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재택근무 보편화 등으로 주거 환경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인테리어업계는 기업과 소비자 간 거래(B2C) 영역의 시장 점유율을 높이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홈코노미(home+economy)라는 신조어도 생겨났다. 현대 리바트는 ‘디자인 퍼스트’를 내세워 프리미엄 전략으로 차별화에 나서겠다는 목표다. LG하우시스는 ‘LX하우시스’로 이름을 바꿔 달고 인테리어 ‘지인’ 브랜드를 통해 전방위 공세에 나섰다. 여기에 오늘의집, 하우저 등 온라인 기반 인테리어 플랫폼도 공격적으로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IMM PE도 한샘을 온·오프라인 통합 플랫폼으로 만들겠다는 계획이다. 1년 뒤 판도가 어떻게 재편될지 주목된다.
현금으로 물려달라는 외동딸…아빠는 600억에 회사 팔았다
입력 2021.08.03 17:39 수정 2021.08.04 09:00 지면 A3
기업 M&A시장 달구는 '창업자 은퇴'
중소·중견기업 인수합병 역대 최대
60대 이상 창업주 "자식들이 경영 꺼리니 팔 수밖에…"
실탄 풍부한 PEF·승계 마친 기업들, 알짜 매물 사들여
'경영권 승계' 관심 없는 2·3세들
업종 1위 기업까지 매물로
이달 초 중소 제조사 A사의 사장은 회사 지분 70%를 사모펀드(PEF)에 600억원에 매각했다. 해외 유학파인 외동딸에게 경영권보다는 현금을 쥐여주는 게 낫겠다는 판단에서다. 자동자 부품업체인 B사도 올해 초 팔렸다. 서울에 거주하는 아들이 경영권을 물려받기 위해 지방 공장으로 출퇴근하다가 더 이상 못 하겠다며 두 손을 들었기 때문이다.
중소·중견기업의 인수합병(M&A)이 올 들어 역대 최대 규모에 달하고 있다. 베이비부머(1955~1963년생)가 경영일선에서 물러나면서 마땅한 후계자를 찾지 못하는 사례가 급증하고 있는 데다 제조업 경영 환경이 악화된 데 따른 결과로 해석된다. M&A 시장 호황으로 제값을 쳐줄 때 파는 게 낫다는 판단도 작용했다.
한국경제신문 마켓인사이트 리그테이블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대기업 계열사와 구조조정 매물 등을 제외한 개인 대주주 기업의 매각 사례는 36건으로 집계됐다. 조사를 시작한 2012년 이후 반기 기준 최고치다. 올 하반기 들어서도 가구 1위 한샘, 세탁서비스 1위 크린토피아 등 굵직한 회사가 잇따라 매물로 등장했다. 시중에 나온 개인 대주주 기업 매물이 20여 건에 달하는 점을 감안하면 연간 최고치였던 2019년의 51건을 훌쩍 뛰어넘을 것으로 보인다.
중견기업의 ‘큰 장’이 서자 대형 회계법인과 PEF 등은 1980~1990년대 창업한 중소·중견기업을 공략하는 별도 팀을 꾸려 대응하고 있다. 한 PEF 대표는 “최근 M&A 매물의 절반 이상은 이런 기업들”이라며 “풍부한 실탄을 갖춘 PEF, 승계를 마치고 도약을 노리는 또 다른 중견기업 등이 사들이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한 회계법인 M&A 자문 본부장은 “주 52시간 근로제, 중대재해처벌법 등 경영 관련 규제 강도가 세지고 코로나19로 경영환경이 악화되자 중소기업의 경영 기피 현상이 더 심화됐다”며 “영세 중소기업은 후계구도가 흔들리자 아예 자산을 팔고 휴·폐업 절차를 밟는 사례도 급증하고 있다”고 말했다. 중소벤처기업진흥공단의 자산거래 중고장터에 나온 중고 기계·설비 매물은 올해 상반기 735건으로 반기 기준 역대 최대치였던 지난해 기록(601건)을 훌쩍 넘어섰다.
중견기업 대주주 지분 매각 올 상반기 36건 '최대'
유학파 외동딸·공학박사 아들…기업경영 적성 안맞아 '손사래'
공학박사 출신인 아들은 경영권 승계를 거부하고 정보기술(IT) 분야에 뛰어들었다. 현직 의사인 딸도 회사 지분 대신 현금 증여를 원하고 있다. 최근 국내 대형 회계법인에 기업 매각을 의뢰한 한 중견기업의 사례다. 최근 2~3년 사이 이처럼 승계 실패에 따른 기업 매물이 가파르게 증가했다. 올해 들어서는 반기 기준 역대 최대치를 경신했다.
국내 가구 1위인 한샘, 1세대 연예기획사 SM엔터테인먼트 등이 올해 승계 대신 지분 매각을 택한 대표적 사례다. 업력이 40년에 달하는 대구·경북 기반 MS저축은행도 상속세 부담 등이 겹치자 2세에게 물려주는 대신 SK증권에 팔았다. 크린토피아, 태화기업, 승명실업, 태림포장, 제이제이툴스, 이지웰, 성원산업 등 최근 5년 동안 개인 대주주가 경영권을 매각하거나 추진한 사례는 총 181건에 달했다.
‘지방 공장’ 경영 꺼리는 2세 늘어
최근 인수합병(M&A) 시장에 주류로 등장하는 매물은 대부분 1970~1990년대 창업한 제조·서비스업체다. 한 대형 회계법인의 M&A 담당 변호사는 “60대 이상 창업주들이 회사를 매각한 이유는 여러 가지지만 근본적으로는 승계할 사람이 마땅치 않다는 점 때문”이라며 “물려줄 만한 자식이 없든가, 있어도 회사에 관심이 없거나 아니면 능력이 모자란 경우”라고 말했다.
또 다른 회계법인 관계자는 “과거 조선, 해운, 자동차 부품 등에 치중된 국내 주력 업종이 최근 IT, 플랫폼, 서비스 등으로 바뀌었다”며 “자녀들에게 근면 성실하게 제조공장을 운영하라고 강요할 수 없는 분위기도 영향을 미쳤다”고 했다. 한 사모펀드(PEF) 대표는 “창업주의 자녀가 해외에서 유학한 뒤 외국계 기업과 스타트업 등에서 근무하는 사례가 많다 보니 제조업 경영에 대한 관심이 적다”고 말했다. 최근 매각된 한 금형업체는 공장이 있는 지방에서 자녀를 교육시킬 수 없다는 며느리의 반대로 아들의 승계가 무산되기도 했다. 매각 대금으로 편의점을 차려달라는 아들의 요청 때문에 회사를 판 사례도 있다.
과거와 달리 창업주들 사이에 ‘능력 없는 자녀’에겐 물려주지 않는다는 인식도 확산됐다. 중견 제조업체 A사의 사장은 아들의 경영능력이 기대에 못 미치자 어쩔 수 없이 회사를 팔았다. 70대 창업주가 일군 B사는 50대 자녀들의 승계 다툼이 심해지자 돌연 매각으로 방향을 돌리기도 했다.
상속세 부담도 중견기업 매각을 부채질하는 요소로 꼽힌다. 국내 상속세 최고세율은 50%지만 최대주주 지분으로 주면 60%에 육박한다. 한 중소기업 유관단체 관계자는 “가업승계 공제나 과세특례 제도가 있지만 고용 유지 등의 조건이 달려 있다 보니 2세들도 ‘현금 증여’를 선호하는 추세”라고 설명했다.
승계보단 현금 보유 ‘선호’
이 같은 매물의 상당수는 PEF가 채가고 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국내 PEF는 총 855개, 투자자가 PEF에 출자를 약정한 금액은 97조1000억원으로 모두 역대 최고치를 찍었다. 경영권을 매각해 회사가 성장한 전례가 늘어나면서 대주주와 임직원들의 PEF에 대한 거부감이 예전처럼 크지 않은 상황이다. 신규 PEF가 계속 늘어나면서 “좋은 값에 회사를 사겠다”는 제안도 많아졌다. PEF들도 가격이 치솟을 수 있는 공개 경쟁입찰보단 대주주와의 수의계약을 선호할 수밖에 없다. 물 밑에서 꾸준히 딜이 성사되는 이유다.
M&A업계에선 ‘대목’이 당분간 이어질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특히 중개 수수료를 주요 수익원으로 하는 투자은행(IB)과 회계법인, 법률법인 등은 더 분주해졌다. 대형병원의 인맥을 총동원해 알짜기업 오너 일가의 건강 상태를 수시로 확인하거나 주요 임직원에게 접촉해 오너 일가의 불화를 찾아내는 등 기회 포착을 위한 물밑 경쟁도 치열하다. 대형 회계법인 중에는 지방의 작은 회계법인과 사전에 친분을 쌓은 뒤 그 지역의 알짜 중소·중견 기업 경영인들의 속사정을 수집하는 사례도 있다.
IB업계 관계자는 “제조업체의 경영 체질을 개선하고 미래 먹거리를 찾는다는 측면에선 PEF가 인수하는 것이 유리할 수 있다”며 “경영 일선에 남아 조언을 한다는 조건으로 회사를 매각하는 사례가 최근 들어 점점 늘고 있다”고 말했다.
민지혜/차준호 기자 spop@hankyung.com
21년 8월 4일자 한국경제 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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