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정대로라면 우리 ‘시조문학진흥회’ 창립 1주년 축하 모임 따라, 오늘은 마곡사나 공주의 명소를 찾아다니며 좋은 음식에 좋은 술과 안주를 먹으면서 문학기행을 다니고 있을 텐데-.
어제 밤 동학사 계룡산장에서 회의를 마치고 뒤풀이로 취토록 마신 후 아침에 일어나니 ‘일만 선생 괜찮소?’하고 묻는 이가 많다.
들어보니 어젯밤 인사불성이 될 정도로 마시다가 뒤로 넘어진 모양인데 그게 ‘영-’ 기억이 나지 않는다.
우리 아버지가 남보다 먼저 ‘철’ 들라고 ‘성철용’ 내 이름자 가운데다가 ‘철’자를 떠억- 넣어주신
것인데 마음 따라 행하여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다(從所心欲不踰矩)는 나이에도 목숨을 걸고 마시고 다니며 아내의 잔소리 거리가 되고 있으니 이를
어쩌랴.
겨우
겨우 아침을 챙겨 먹고 ‘동학사까지만이라도-’ 하고 배낭을 메고 나섰다가 '내친김에하고- '일행에서 빠져서 나 홀로 등반길에 나서기로 했다.
3년 전 등산회 따라 신원사 코스로 연천봉까지 갔다가 일정에 쫓기어 뒤돌아서면서 천왕봉의 위용을 보고 다시 오기를 두고두고 별러온
산인데다가, 요즈음은 1년 중 가장 꽃과 신록이 아름다운 계절이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런데 큰일 났다. 오늘 점심은 어찌한다? 상가 지대도
지나쳤으니.
그러나 한 끼 굶는 것이 어찌 근심이 되랴. 저 멀리 신록 사이로 천황봉과 쌀개봉이 손짓하고 있는데.
9시에 시작된
등반길에다가 낮이 긴 초여름이니 오늘은 시간이 아주 넉넉다. 게다가 유사시를 대비한 헤드 랜턴이 마음을 든든하게 한다. 오늘은 쉬고
싶은 때 쉬고,쉬고 싶은 곳에 마음 놓고 쉬면서 새로운 기록을 세워야겠다. 계룡산을 가장 오랜 시간 오르내린 기록 말이다.
*. 계룡산 전설
계룡산은 통일신라시대
이후에는 오악(五嶽) 중에 하나였다.
오악(五嶽)이란 옛날에 음양오행에 따라서 국태민안(國泰民安)을 위하여 나라가 제사를 지내던 다섯
명산을 말한다. 동(東)의 토함산, 서(西)의 계룡산, 남(南)의 지리산, 북(北)의 태백산, 중앙의 부악(父岳, 지금의 대구)이 오악이다.
무학대사가 이 태조와 함께 새 도읍지를 정하려 찾아다닐 때였다. 험준한 천황봉(1,845.1m)에서 연천봉(740m),
관음봉(816m), 삼불봉(775m)으로 이어지는 모습을 보고 ‘닭의 벼슬을 쓴 용의 모습을 닮았구나!’ 하였다는 데서 유래된 이름이 닭
'鷄'(계), 용 '龍'(용). '鷄龍山'(계룡산)이다. 계룡산은 풍수지리학 상 최고의 길상지(吉祥地)로도 유명하지만 십승지지(十勝之地)의
하나로 더욱 유명하다. 천재지변이나 전쟁이 일어나도 안심하고 살 수 있는 곳을 십승지지(十勝之地)라 한다.
*. 계룡산 일주문(一柱門)
사찰에서 처음 만나는 문이 일주문(一柱門)이다. 한 ‘一’(일), 기둥 ‘柱’(주) 로 두 기둥이 한 줄로 늘어서
일심(一心)을 뜻한다. 일주문부터는 속계(俗界)에서 진계(眞界)로 들어서는 문으로, 이곳에 들어선 자 일심(一心)에 귀의(歸依)한다는
뜻이다.
두발로 서 있는 일주문을 보니 학(鶴)같이 고고하다. 계룡산 일주문은 그냥 지나치지 말고 오른쪽을 꼭 볼 일이다. 거기
‘학바위’가 있으니 말이다.
이 ‘학바위’부터 관음봉 고개에 이르기까지 약 3.5km 구간을 '동학계곡'이라 한다.
이 계곡에서 귀를 열어놓은 이들에게는 맑은
물소리, 새소리, 바람소리와 계절이 오가는 소리를 들려 준다. 연둣빛 신록이 피어나는 초여름의 신록의 합창으로 이 계곡을 계룡산 8경
중의 제5경이라 한다. ‘춘동학(春東學), 추갑사(秋甲寺)’이라는 말은 그래서 생긴 말이다.
거기서 얼마 더 오르면 왼쪽에 '불교문화원'이 있다. 이 불교문화원은 운문사승가학원, 수덕사덕숭총림과 함께 불교에서는 알아주는 이름
있는 승가대학이다.
*. 계룡8경 선정기념 조형물들
오른쪽으로 자연학습원이 있는 곳을 유심히 보니 '계룡8경 선정기념
조형물'이 보인다.
자연과 인간을 화강석에 부조(浮彫)하여 끊임없이 반성하며, 아픔이 순환하는 삶의 현장을 묘사한 것이다.
그 앞에 있는 오석(烏石)이 소녀의 모습을 상징하고 있는 계룡의 얼굴이다. 이러한
조각들은 전체적으로 사랑과 평화, 생명에 대한 예찬, 사유의 분위기를 조성했다는 것이 조각가의 설명이다.
그 왼쪽 아래의 소녀석상이
백제의 미륵반가사유상에서 보는 백제의 얼을 이으려고 만들었다는 '생각하는 여인'의 화강석 입상이
있다.
그 두 마리 돌사자가 지키고 있는 곳에 세워진 비도 있다. ‘통일서원’으로
한국산악회 충남지부가 세운 기념비요 다짐 비다.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조국강산
겨레도
나라도 하나이기에
피와 사랑으로 한 덩이 되어
우리 손으로 통일을 이루오리다.
‘계룡산8경 선정비’를 지난다. 그냥 지나치면 단순한 길이지만 이렇게 애정을 가지고 보면 그 속에 이렇게
다가와 속삭이는 역사의 숨결이 있다.
그래서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는 것은 전과 다르니라.’ 하던 선인들의 경지에
가까이 갈 수 있는 것이다.
극락교를 지나니 동학사의 암자라는 연등으로 장식한 문수암, 길상암, 미타암. 관음암
등이 모여 있는데 거기에는 누구나 잠깐 망설이게 하는 이정표가 있다.
동학사를 보려고 계속 직진할 것인가. 아니면 동학사를
생략하고 우측으로 1시간 30분 걸린다는 남매탑으로 향할 것인가.
매표소에서 산 계룡산 지도를 보니 816m의 관음봉이 그 높이를
자랑하고 있고 775.1m 삼불봉까지 그 유명한 자연성릉이 이어진다니 발길이 자연 직진 쪽으로 기운다.
*. 숙모전과 동학사
동학사로 막 직진하니 좌측 계곡 물가에 세진정(洗塵亭)이 초여름의
싱그러운 신록 속에 시원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씻을 ‘洗’(세), 티끌 ‘塵’(진)이니 여기서부터라도 세속의 티끌을 말끔히 씻고 동학사를
보러 가라는 말 같다.
동학사는 사찰이면서도 여말삼은(三隱) 같은 유생을 모신 삼은각(三隱閣) 과 숙모전(肅慕殿)이 있어 특이하다.
삼은(三隱)은 물론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 목은 이색을 말한다.
숙모전은 전당 북벽에 단종과 그의 비 정순황후 위패를, 그
동벽에는 고려 말 충신인 삼은(三隱)과 단종의 시신을 거둔 충신 엄홍도 등 7위를, 서벽에는 사육신과 김시습 등 7위를 모신 곳이다.
수양대군의 찬탈로 세상의 뜻을 버리고 스님이 된 김시습이 이곳에 와서 삼은각(三隱閣)을 보고 크게 감동하였다. 그래서 세조 원년에
노량진에 사육신의 시신을 묻고 동학사에 단을 설치하고 사육신을 제사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 동학사
계룡사에는 동에 동학사, 서에 갑사, 서남쪽 연천봉 남쪽 산록에 신원사 같은 고찰이 있다.
그 중 동학사는
대전서 24km, 유성서 14km 근거리에 있는 계룡산 산봉계곡 사이에 위치한 마곡사의 말사로 사철 인파가 붐비는사찰로 비구니의 불교강원으로
유명한 절이다.
동학사는 신라 성덕왕 때 상원조사(上願祖師)가 터를 잡고 후에 회의화상(懷義和尙)이 창건하고 고려 초에 도선국사가 태조의
원당으로 중건한 절이지만 단청이 너무 요란하여 3층석탑과 돌담만 빼면 고풍스러운 맛이 전혀 없는 것이 흠이다.
경내에 앞에서 말한
숙모전과 삼은각이 있으며 동계사(東鷄祠)에는 신라 충신 박제상과 고려 개국공신 유차달의 패를
모셨다.
옛 학자들이 말하는 동학사를 들어 보자
-동학사는 계룡산 북쪽 기슭에 있는
고찰인데 양쪽 봉우리에 바위가 층층으로 "빼어나고 산이 깊어 골짜기가 많으며, 소나무와 단풍나무와 칠절목(七折木)이 많다. 지금은 절이 절반쯤
무너지고 중이 6, 7인뿐인데 그나마 몹시 용열해서 옛일을 이야기할 만한 자가 없다.
-남하정의 '계룡기행에서(영조 조)
*. 시인묵객들이 노닐던 계룡산
산세가 수려하면 이를 제일 먼저 찾는 이들이 시인묵객들이다. 시인은 가난하지만 인생이 한번 가고나면 그들이
남긴 주옥같은 글은 부귀보다 난 법(生前富貴 死後文章)이다. 이들이 남기신 계룡산을 찬탄한 글을 두고 내 또 무슨 부질없는 군말을 덧붙이랴.
-계룡산 높이 솟아 층층이 푸름 꽂고, 맑은 기운 굽이굽이 장백에서 뻗어왔네.
내
일찍이 이 산에 노닐고자 하였음은, 신령한 기운이 다른 산과 다름이라.
때마침 장맛비가 천하를 적시나니, 용은 구름 부리고 구름은 용을
좇는도다.
-서거정(성종 조)
-남쪽으로 계룡산을 바라보니 은하수 위로 솟아난 것 같다.
-남수문(세종 조)
-계룡산은 웅장하기가 오대산에 미치지 못하고, 수려하기도 삼각산에 미치지 못하나,
골짜기가 깊숙하게 들어앉은
것이며, 국(局)안 서북쪽에 용연(龍淵)이 있어 심히 깊고 넓게 흘러서
국 안에 큰 시내를 이룬 것은 개성이나 한양에는 없는 것이다.
-이중환 '택리지'
*.이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전고
*. 은선폭포 가는
길
본격적인 산행 길에서 1.5km 거리에 은선폭포가 있고 그 가는 길에서 주봉 천황봉보다 계속 보이는
것이 V자형의 쌀개봉이다.
디딜방아의 방아허리에 가로 맞추어서 방아를 걸게 마련된 나무 막대기를 쌀개라 하는데, 산의 형상이 디딜방아
쌀개를 닮았다 하여 붙인 이름이다.
계룡산에 있는 폭포로는갑사 지역의 용문폭포, 천황볻 지역의 암용추폭포, 숫용추폭포, 관음봉
지역의 은선폭포가 있다.
계속되는 팍팍한 돌길을 따라 신록을 헤치고 은선폭포를 향하여 오르다 보니 나무로 만든 멋진 전망대가 지루한 돌길
오름길에서 잠깐 마음과 몸을 쉬게 한다. 거기에 다음 같은 친절한 설명이 있다.
-은선폭포는
쌀개봉과 관음봉으로 감싸인 동학사계곡의 상류에 옥처럼 맑은 물을 받아 20m 의 암벽을 비류하는 은선폭포는 동학사 계곡의 유일한 폭포이다.
폭포 앞의 기암절벽은 아름다움의 극치이고 절벽 가에서 멀리 보이는 쌀개봉의 위용이 경이로우며, 이토록 '아름다운 경치 속에 아득한 옛날
신선(仙)이 숨어[隱] 살던 곳이라 하여 은선폭포(隱仙瀑布)'라 한다. 폭포의 물줄기가 낙차 되며 피어나는 운무는 계룡 7경으로 일컫는 계룡산의
자랑거리다. 높이 46m 폭 10m 경사 60m의 폭포다.
산의 정상부에 위치하기 때문에 오늘 같은 갈수기에는 낙수 현상을 거의 볼 수
없어 아쉽기 그지없다.
*. 너덜바위
길
나이를 잊고 마신 엊저녁이 술이 과하였는 데다가 계룡산 등산길은 처음부터 끝까지 내내 너덜겅 길이어서 너무나
힘들었다. 쉬고 또 쉬어며 오르고 있는데 올라가는 길에 있는 '암석이 풍화작용에 의해 암설(바위 부스러기)이 집적(集積)한 너덜바위 구간‘이란
관음봉 하단 너덜바위 지대의 주의사항을 보니 나만이 힘든 것이 아닌 것 같다.
*. 관음봉 고개
계룡산에서 가장
아름다운 고개가 관음봉 고개다. 오던 길에서 좌측으로는 연천봉 가는 연천봉 고개요, 우측으로는 계룡산 등산의 하이라이트라는 자연능성으로 해서
삼불봉 가는 길이다. 거기서 200m 거리에 있는 삼불봉 고개는 금잔디고개와 남매탑을 좌우에 두고 있다. 그런데 주봉 천황봉으로 가는 길은
아쉽게도 휴식년제로 굳게 잠겨있다.
관음봉 오르는 길에 앞서 가는 젊은 이 한 쌍이 속삭이고 있었다. 남정네가 말한다.
"힘들지? 그렇지만 말야. 점점 산이 낮아지지 않니?"
이 젊은 연인들의 이야기가 나로 하여금 시 한 수를 짓게 하였다.
山이 점점 낮아지더니
下山 길엔
山이 점점 높아집니다.
마음 속
山 가득안고
행복한 하루 닫습니다.
*. 관음봉 한운(閑雲)/ 계룡산 4경
천황봉 쌀개봉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는 계룡산을 대표하는 공주10경의 하나인 816m관음봉으로 이어져 내려와서 동학사 계곡과
신원사 계곡을 앞뒤로 두고, 문필봉과 연천봉 지척에서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관음봉 정상석 아래에는 전망대 정자가 있어 자연성릉으로 해서
삼불봉으로 가는 길에서 관음봉을 구별하게 해주는데, 여름철이 되면 하운기봉(夏運奇峰)으로 그 멋을 더해 주는 계룡산 4경 '관음봉의
한운(閑雲)'이다.
여기는 이름처럼 전망대여서 왼쪽으로 삼도봉, 우산봉, 장군봉, 갑하산, 대전 유성, 황적봉, 백운봉 간암산이 보이고
그 사진을 찍어 그 위치를 알려주고 있다. 게다가 그 봉우리의 유래마저 설명해 주고 있다.
-금잔디고개: 1960년대 큰 산불로 나무가
죽은 자리에 억새가 돋아 가을이 되면 말라 있는 것이 마치 금잔디 같다 하여 금잔디고개라 부른다.
-삼불봉: 세 부처가 앉아 있는 것 같다 하여 삼불봉이라 부른다.
-도덕봉: 푸르름을 자랑하는 산이라 하여 도덕봉이라 부른다.
-황적봉: 봉우리 형상이 쌓아 둔 곡식의 더미인 노적가리 같다 하여 황적봉이라 부른다.
-백운봉: 항상 산 봉우리에 흰구름이 끼어 있다 하여 백운봉이라 부른다.(출입금지)
-쌀개봉: 디딜방아의 받침대를 쌀개라 하는데, 산의 형상이 디딜방아 쌀개를 닮았다 하여 쌀개봉이라
부른다.
*. 아아, 아름다운 자연성릉이여
나는 30대에 아내와 함께 동학사로 해서 남매탑을 넘어 갑사를 다녀왔고, 60대 후반에 신원사로 해서
연천봉까지 원점회귀 산행을 했을 뿐이어서 계룡산에 자연성릉이 있는 줄도 몰랐었다.
자연성릉이란 암릉이 자연스런 성곽의 능선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 성릉을 막 안내도 따라 내려서려는 초입 급경사의 쇠층계로부터
전개되는 1.8km의 삼불봉을 향한 능선을 바라보며 나도 모르게 탄성을 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칼날 같이 주욱 이어간 암릉마다 붉은 층계가
오르내리고 있었고, 거기 삼원색의 등산객들이 보이는데, 길가 양쪽에는 선혈 같은 진달래꽃이 맞추어 만발하여 있다. 아기자기하고, 아슬아슬하기도
하고, 변화무쌍한 길은 너무나 험준하여 웬만한 봉들은 출입금지판으로 막아 서서 우회를 하라 권하고 있어 암릉의
능선으로의 산행을 그리게 한다.
그런데 지금은 점심시간이라 산꾼들은 점점이 모여 도시락을 펴놓고 식도락을 즐기고 있다.
그 모습이 준비 없이 나선 몸이라 부럽기 그지없지만 다음부터는 배낭에 비상식을 준비하리라고 벼르는 것으로 시장을 달랠 뿐이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란 말을 실감하며 안복이 식복을 겸해야 함을 비로소 깨닫겠다.
.
*. 삼불봉(三佛峰)의설화(雪花)/ 계룡2경
세부처가 앉아 있는 형상이라는 삼불봉(三佛峰)이라 정상에서 보는 경치는 천황봉을 중심으로 벌이고 있는
봉들의 행렬이 장관이다.
이 삼불봉이 계룡8경 중 제2경인 '삼불봉의 설화'로 계룡산에서는 최고의 절경으로 손꼽힌다. 이 삼불봉은
계룡산의 중앙이라 할 수 있을 위치여서 주봉 천황봉을 위시해서 갑사 동학사까지 모든 곳과 통하는 길목이 되기도 한다.
풍수가에
따르면 계룡산은 용이 제 몸을 휘감고 제 꼬리를 돌아다보는 회룡고조형국(回龍顧祖形局)을 이루었다 한다. 천황봉이 형제봉, 중두봉,
종봉들이 황제 '帝'(제)자 모양의 제자봉(帝字峰)을 이루었다 하여 이곳이 도읍지로 손꼽히는 이유가 된다. 주능선이 남북으로 크게 뻗은
가운데 서에서 동으로 두개의 능선이 나란히 뻗어 영어의 'F'자 형태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인가 정감록에서도 '산천에 묻힌
정기가 계룡산에 들어가니 정씨 8백년의 땅이다.'라 하더니 요즈음은 J씨 아닌 N씨 세상인데도 느닷없이 수도분할 이전이 진행되고 있으니
신기하기만 한 일이다.
나는 삼불봉까지 메고 온 3kg이나 되는 무거운 카메라 삼발이를 펴 가지고 오랫동안 파노라마에 핀트를
맞추고 있었다. 세찬 바람에 중국에서 몰려온 황사 때문에 뿌연 하늘뿐이었지만.
*. 남매탑 명월/계룡
8경
삼불봉에서는 갑사로 가려면 금잔디 고개로 내려가면 된다. 그러나 남매탑을 보고 갑사로 가려면
삼불고개까지 내려가서 다시 또 30분 정도 남매탑으로 내려갔다가 남매탑을 보고 다시 왔던 길로 올라오는 코스여서, 남매탑을 보고 동학사로 원점
회귀하는 코스를 택하였다.
삼불봉고개로 내려오는 길에서는 남매탑이 가깝게 보이기 시작하였다.
온종일 팍팍한 돌 층계길만
오르내리어서인가. 오늘은 유난히 무릎이 아파서 내려올 때는 몹시 힘들었다. 등산 서적에는 5시간 코스라는 것을 8시간에 걸쳐 올라왔는데도
그렇더니 남매탑이 보이기 시작하면서부터 피로가 말끔히 가신다.
탑은 옛날과 같이 여전하였고, 빙 둘러선 연등이 며칠 앞으로 다가온
초파일을 축하하고 있었다.
옛날에 스레트 지붕이었던 계명정사는 상원사란 큰 당우로 바뀌었고, 탑 앞에는 돌로 깎은 거북의자가 운치를 더해
주고 있는데 내 대신 그림으로 글로 이 상원사 남매탑의 전설을 소개하고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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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은 인터넷에서 자신을 나타내는 유일한 모습입니다. 상대에게 상처를 주기보다 같이 즐거워 할 수 있는 코멘트 부탁드려요. |
2006-05-04 09:22:37 |
|
음악 '프라하의 봄' | 2006-05-03 16:32: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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