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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글(펌)

명성왕후 생가터 - 조선블로그 초아의 삶과 그리움

명성황후(明成皇后)생가터

경기도유형문화재 제46호
위치 : 여주군 여주읍 능현리 2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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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주 명성황후 조각공원 碑]

주차장에서 조각공원쪽으로 가는 길에 있는 여주 명성황후 조각공원 碑

경기도 조선일보에서 세웠네요.^^
조선블로그를 하고 있어서 그런지...왠지 더 정이 가는 돌비석...

이연이란 이런가봅니다.

차가운 대리석 조각 하나에도 인연을 느끼는 걸 보면...

대한제국 고종황제의 황후로 본관은 여흥(驪興), 성은 민씨(閔氏)
1851년(철종 2) 경기도 여주(驪州)에서 태어났으며,
증(贈) 영의정 치록(致祿)의 딸이다.
9세 때 고아가 되어 본가에서 가난하게 자라났다.

고종은 12세의 나이로 즉위하였으나 국정을 치르기엔 나이가 어려서
고종의 생부인 흥선대원군이 섭정을 하였으며, 정치 실권을 잡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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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성황후(明成皇后) 기념관]

명성황후는 16세때 고종의 비로 책봉된 후
고종 32년(1895년) 을미사변으로 일인(日人)에 의해 시해될 때까지
개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쳤다.

건립 당시에는 행랑채, 사랑채가 있었으나 없어졌고,
현재 남아 있는 안채는 1975년과 1976년에 중수한 것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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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성황후(明成皇后) 동상]

아!

명성황후(明成皇后)
그 이름만으로도 가슴이 물결쳐 오는

그는 조선국의 국모였으며, 큰 뜻을 다 펴지 못하고 요절하신...
우리의 국권이 약함을 먼저 탓해본다.

자신이 낳은 첫번째 왕자를 5일만에 잃는 등 어려운 상황이  계속되는 가운데  
궁녀 이씨가 낳은 완화군을 세자로 책봉하려 하자 시아버지인 대원군과  대립하여  
정치적으로  간섭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진실은 그게 아니라 한다.

지금까지 명성황후에 대해 사치가 심하고 시아버지인 대원군과의 전쟁만을 일삼는 등
부정적인 시각으로 전해진 이유는 [조선근대사]를 쓴 사람이 일본인이었으며,
철저하게 역사를 왜곡한데서 비롯되었다 한다.

일본은 명성황후의 반대파 세력이나 친일파들로 하여금 중상모략하도록 하였으며,
일제강점기 36년 동안 비하시켜 왜곡했다.

오늘 우리는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이다
일본의 만행으로 시해당하신 명성황후의 숭고한 뜻을 되돌아 보면서 잘못된 역사를 올바로
잡아야 하는것 또한 후손들이 해야 할 일인 것 같다..< 기념관에서 받은 안내서참조>

명성황후(明星皇后)에 대해 우리들의 인식은 어떠했던가?
시아버지와 갈등을 빚어 나라를 혼란에 빠뜨린, 간사한 여우의 이미지를 벗어나지 못했었다.
그녀가 지닌 이미지뿐 아니라, 그 명칭에 있어서도 논란의 여지가 많다.
이는 황후 시해 이후에 일본이 우리 역사를 왜곡해,
그녀의 이미지를 간교하고 간사하게 묘사했기 때문인 것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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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성황후(明成皇后) 생가터]

 

(1851∼1895)에 태어나서 황후가 되기 전 16살 때까지 살던 집이다.
명성황후 생가는 숙종 13년(1687)에 처음 지어진 집으로,
그 당시 건물로는 안채만이 지금까지 남아 보존되고 있다.

1996년에 안채는 수리되었고 행랑채와 사랑채, 별당채 등이
함께 지어져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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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좀더 가까이서 찍은 명성황후 생가터]

 

조선 시대의 마지막 국왕이라 할 수 있는 순종의 어머니이자 이하응 대원군의 며느리인
명성왕후의 생가인 이곳은 목조된 된 기와집이다.

여주읍 능현리 출신으로 9세때 부모를 여의고 여주의 본가에서 실제로는
4촌이나 양자로 온 오라버니 민승호와 단둘이 남게 되었고
이때 살던 곳이 명성황후의 생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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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에서 본 정경]

1895년 일본공사 미우라가 부임했으나 계속 이들을 견제하며 친러정책을 강화하자
일본인 낭인들이 8월 20일 궁궐을 침범하였고, 그 가운데 아다찌가 거느린 선봉부대의
흉인들에게 건청궁에서 난자당해 죽은 후 운반되어 소각되었다.

능은 청량리에 있었다가 1919년 고종황제가 세상을 떠나자 홍릉으로 함께 합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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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른쪽에서 바라본 정경]

명성황후를 민비로 부르는 것은 일본인들이 격을 깎아내리기 위해 민비로 불렀다 한다.
민비가 아닌 대한제국의 황후 명성황후로 재 인식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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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채의 모습]

안채 대청마루에 걸려있는 명성황후의 초상화가 마음을 서럽게 한다.

한 나라의 국모요. 황후였으나 국권이 약하여 목숨을 잃어야 했던 그 원통함이...

얼마나 컸을까 생각하면 가슴이 저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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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채에서 본 옆으로 난 작은 문]

차라리 황후로 간택되지 않았다면...

국권을 길러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약소국가의 비애요 슬픔이다. 

병자호란때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태종에게 삼배구고두의 예를 갖추어 항복한 일보다는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가장 치욕스러운 일이아니였을까..

우리는 과거를 너무 쉽게 망각하는 경향이 있어 국모가 시해당하는 아픔도
기억 저편에 묻어버리고 황후의 생가터 방문을 무슨 유원지 방문처럼 가볍게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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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덕에서 내려다본 생가의 모습]

황후가 돌아가신지 2년 뒤에 치룬 장례식.  
왕비는 일본 낭인들에 의해 궁궐 안에서 비운을 맞았으나, 그때 바로 장례를 치루지 못했다.
여러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하였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일본의 눈이 무서웠기 때문이리라. 

황후는 시해당한지 2년 만인 1897년 대한제국으로 나라 이름이 바뀌면서 국장으로
장례식을 치루고 명성황후로 추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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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옆으로 난 작은 쪽문]

대한제국으로 이름을 바꾸어 대내외에 자주 국가임을 천명하면서 고종이 황제가 되었으니,
그의 왕비인 민비도 자연스럽게 황후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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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성황후탄강구리비(明成皇后誕降誕降碑)]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 41호

조선 제26대 임금인 고종황제의 비 명성황후의 탄생을 기념하기 위하여 고향집에 세운 비석이다.
탄강(誕降)은 왕이나 성인이 세상에 태어났음을 말하고, 구리(舊里)는 고향이라는 뜻으로

"명성황후께서 태어나신 옛 마을"
이란 뜻이다.

원래 이 자리에 명성황후가 어린 시절에 공부하던 별당채가 있었으나
동학농민혁명때 소실되었다고 하며, 1904년도에 이 비석을 세웠다.

뒷면에는 광무8년 갑진 5월 일 배수음체경서라고 새겨져 있어

"손을 들어 맞잡고 절하며 눈물을 머금고 섰다"라는 뜻으로 아들 순종의 친필이라 한다.

<인터넷에서 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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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유중선생 묘 및 신도비]

저정번호 향토유적 제5호
소재지 : 경기도 여주군 여주읍 능현리

민유중(閔維重 1630~1687)선생은 인현황후의 아버지이며 숙종의 장인으로 자는 지숙,
호는 둔촌, 본관은 여흥이다.
민광훈 강원도 관찰사의 아들이고 좌의정 민정중의 아우이며 명성황후의 6대조 할아버지이다.

숙종 7년(1681) 딸이 숙종의 계비(인현왕후)가 되자 영돈녕부사가 되어 여양부원군에 봉해졌다.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문정이다.

신도비는 민유중선생의 업적을 소개하고 찬양하는 글이 새겨져 있다.
비의 기단석의 몸통은 거북이 형태이며, 머리는 용의 모양으로 묘소쪽을 향해 우측으로
틀어져 있으며, 이곳에서 150m 지점에 묘가 있다.

명성황후탄강구리비(明成皇后誕降誕降碑) 바로 옆에 있기에 함께 올려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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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유중 선생 묘]

민유중 선생과 이씨 및 송씨 부인을 합장하였으며, 봉분 주위에 호석을 둘렀고
봉분의 높이는 2.1m 둘레27.5m 묘역은 약 660m2가 된다.
묘 앞 좌측에는 옥개를 얹은 묘비, 중앙에는 상석, 향로석, 그 좌우에는
망주석, 문인상이 갖추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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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성황후 추모비와 문예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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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예관]

이곳에서는 명성황후 입체 에니메이션을 상영한다고 한다.

하루에 몇차례나 시간이 정해저 있기에 늦게 도착한 우린 이미 상영시간을 지났기에
구경하는 대신에 문예관
앞에서 기념 촬영으로 만족해야 했다.


 

 

[사진 / 초아]

[음악 /  인생은 구름이며 바람인것을 / 우당님]

 

2006년 9월 2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