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아침에 - 윤동주
어둑한 퍼스렷한 하늘 아래서 회색(灰色)의 지붕들은 번쩍거리며, 성깃한 섭나무의 드문 수풀을 바람은 오다가다 울며 만날 때, 보일락말락하는 멧골에서는 안개가 어스러히 흘러 쌓여라.
아아 이는 찬비 온 새벽이러라. 냇물도 잎새 아래 얼어붙누나. 눈물에 쌓여 오는 모든 기억(記憶)은 피흘린 상처(傷處)조차 아직 새로운 가주난 아기같이 울며 서두는 내 영(靈)을 에워싸고 속살거려라.
그대의 가슴속이 가볍던 날 그리운 그 한때는 언제였었노! 아아 어루만지는 고운 그 소리 쓰라린 가슴에서 속살거리는, 미움도 부끄럼도 잊은 소리에, 끝없이 하염없이 나는 울어라.

추일미음(秋日微吟) - 서정주
울타릿가 감들은 떫은 물이 들었고 맨드라미 촉계는 붉은 물이 들었지만 나는 이 가을날 무슨 물이 들었는고.
안해박은 뜰 안에 큰 주먹처럼 놓이고 타래박은 뜰 밖에 작은 주먹처럼 놓였다만 내 주먹은 어디다가 놓았으면 좋을꼬.
가을의 시 - 김현승
넓이와 높이보다 내게 깊이를 주소서, 나의 눈물에 해당하는……
산비탈과 먼 집들에 불을 피우시고 가까운 곳에서 나를 배회하게 하소서.
나의 공허를 위하여 오늘은 저 황금빛 열매를 마저 그 자리를 떠나게 하소서. 당신께서 내게 약속하신 시간이 이르렀습니다.
지금은 기적들을 해가 지는 먼 곳으로 따라 보내소서. 지금은 비둘기 대신 저 공중으로 산까마귀들을 바람에 날리소서. 많은 진리들 가운데 위대한 공허를 선택하여 나로 하여금 그 뜻을 알게 하소서
이제 많은 사람들이 새 술을 빚어 깊은 지하실에 묻을 시간이 오면, 나는 저녁 종소리와 같이 호올로 물러가 나는 내가 사랑하는 마른 풀의 향기를 마실 것입니다.
숲을 지나오다 - 김수영
참나무와 졸참나무의 숲입니다 나뭇진이 흐르던 자리 (상처 없는 영혼도 있을까요) 가을이 오면 그 나무의 단풍이 많겠지요
오솔진 숲으로 흐르는 여름해의 눈부신 역광 발효한 빛의 향기가 헤매이게 합니다
보이지 않는 꿀에 취해 더러운 흙에서 나서 죽을 때까지 쓸쓸하여 허기지는 것들
가을까지라면 더욱 무겁겠지요 푸른 채 떨어진 나뭇잎과 굳어가는 나무 줄기 잘 구워진 깊은 우물 같은 마음의 맨 밑바닥에서 벗겨낸 한 두름의 그늘은 그 그늘이 된 자리에서 더 낮은 곳으로 쟁쟁이 울립니다
상처 없는 영혼이 있을까요 살면서 오래 아파함도 기쁨이었지요
늦가을 - 김지하
늦가을 잎새 떠난 뒤 아무 것도 남김 없고 내 마음 빈 하늘에 천둥소리만 은은하다.

가을밤 - 김용택
달빛이 하얗게 쏟아지는 가을 밤에 달빛을 밟으며 마을 밖으로 걸어나가보았느냐 세상은 잠이 들고 지푸라기들만 찬 서리에 반짝이는 적막한 들판에 아득히 서 보았느냐 달빛 아래 산들은 빚진 아버지처럼 까맣게 앉아 있고 저 멀리 강물이 반짝인다 까만 산속 집들은 보이지 않고 담뱃불처럼 불빛만 깜박인다 하나 둘 꺼져가면 이 세상엔 달빛뿐인 가을 밤에 모든 걸 다 잃어버린 들판이 들판 가득 흐느껴 달빛으로 제 가슴을 적시는 우리나라 서러운 가을 들판을 너는 보았느냐
가을 사랑 - 도종환
당신을 사랑할 때의 내 마음은 가을 햇살을 사랑할 때와 같습니다.
당신을 사랑하였기 때문에 나의 마음은 바람부는 저녁숲이었으나 이제 나는 은은한 억새 하나로 있을 수 있습니다.
당신을 사랑할 때의 내 마음은 눈부시지 않은 갈꽃 한 송이를 편안히 바라볼 때와 같습니다.
당신을 사랑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내가 끝없이 무너지는 어둠 속에 있었지만 이제는 조용히 다시 만나게 될 아침을 생각하며 저물 수 있습니다.
지금 당신을 사랑하는 내 마음은 가을 햇살을 사랑하는 잔잔한 넉넉함입니다.
너 에 게 - 정호승
가을비 오는 날 나는 너의 우산이 되고 싶었다 너의 빈손을 잡고 가을비 내리는 들길을 걸으며 나는 한 송이 너의 들국화를 피우고 싶었다
오직 살아야 한다고 바람 부는 곳으로 쓰러져야 쓰러지지 않는다고 차가운 담벼락에 기대서서 홀로 울던 너의 흰 그림자
낙엽은 썩어서 너에게로 가고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는데 너는 지금 어느 곳 어느 사막 위를 걷고 있는가
나는 오늘도 바람 부는 들녘에 서서 사라지지 않는 너의 지평선이 되고 싶었다 사막 위에 피어난 들꽃이 되어 나는 너의 천국이 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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