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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글(펌)

[스크랩] 2001 신춘문예 당선작

2001신춘문예<시> 당선작


한국 : 그 노인이 지은 집
강원 : 수선집
경남 : 봄, 야유회를 가다
경인 : 해바리기
경향 : 개신고물상
광주 : 이삿날
국제 : 아버지의 파업/춘궁기
농민 : 기차역에서 서성이다
대전 : 젓갈 골목은 나를...
대한 : 스프링 위를 달리는 말
동아 : 이층에서 본 거리
매일 : 금관
문화 : 밀란 쿤데라를 생각함
부산 : 찻잔 앞에서
세계 : 수유리에서
전남 : 발자국은 길을...
전북 : 철로변
전주 : 역경
조선 : 뿌리
중앙 : 복숭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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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노인이 지은 집
한국일보 -길상호


그는 황량했던 마음을 다져 그 속에 집을 짓기 시작했다
먼저 집 크기에 맞춰 단단한 바탕의 주춧돌 심고
세월에 알맞은 나이테의 소나무 기둥을 세웠다
기둥과 기둥 사이엔 휘파람으로 울던 가지들 엮어 채우고
붉게 잘 익은 황토와 잘게 썬 볏짚을 섞어 벽을 발랐다
벽이 마르면서 갈라진 틈새마다 스스스, 풀벌레 소리
곱게 대패질한 참나무로 마루를 깔고도 그 소리 그치지 않아
잠시 앉아서 쉴 때 바람은 나무의 결을 따라 불어가고
이마에 땀을 닦으며 그는 이제 지붕으로 올라갔다
비 올 때마다 빗소리 듣고자 양철 지붕을 떠올렸다가
늙으면 찾아갈 길 꿈길뿐인데 밤마다 그 길 젖을 것 같아
새가 뜨지 않도록 촘촘히 기왓장을 올렸다
그렇게 지붕이 완성되자 그 집, 집다운 모습이 드러나고
그는 이제 사람과 바람의 출입구마다 준비해둔 문을 달았다
가로 세로의 문살이 슬픔과 기쁨의 지점에서 만나 틀을 이루고
하얀 창호지가 팽팽하게 서로를 당기고 있는,
불 켜질 때마다 다시 피어나라고 봉숭아 마른 꽃잎도 넣어둔,
문까지 달고 그는 집 한 바퀴를 둘러보았다
못 없이 흙과 나무, 세월이 맞물려진 집이었기에
망치를 들고 구석구석 아귀를 맞춰나갔다
토닥토닥 망치 소리가 맥박처럼 온 집에 박혀들었다
소리가 닿는 곳마다 숨소리로 그 집 다시 살아나
하얗게 바랜 노인 그 안으로 편안히 들어서는 것이 보였다


시 당선작 / 서정·서사성 조화…마치 한권의 책 읽는 듯"
시부문 심사평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편이나 이번 시 부문 심사만은 그렇지 않았다. 기대가 큰 만큼 그 기대에 부응하는 작품이 여러 편 있었다. 최종심까지 올라온 작품은 김상호의 '그 노인이 지은 집', 김남극의 '마른 물푸레나무 한 묶음', 정선용의 '달팽이', 박판식의 '장지', 최요기의 '2월의 강' 등 모두 다섯 편이었다.

'마른 물푸레나무 한 묶음'은 역동성과 천진성이 돋보였으나 '가련한 생들 아니랴'와 같은 미숙한 표현이 지적되었다. '생'이라는 말을 직접 쓰지 않고 생을 노래하는 것이 시라는 점을 간과하고 있었다.

'달팽이'는 달팽이에 대한 생태학적 관찰을 통해 인간의 생태학적 여정을 충실히 그린 작품이었으며 , '장지'는 할머니를 땅에 묻고 돌아와 통닭을 먹는 나와 가족들의 회한과 상처를 깊게 그리고 있었으며, '2월의 강'은 침묵에 대한 가치를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었다.
그러나 모두 '그 노인이 지은 집'에는 못미치는 작품이었다.

'그 노인이 지은 집'은 군계일학이었다. 한 편의 시가 마치 한 권의 책과 같은 질량감과 완성도를 지니고 있었다. 한 노인이 집에 들어가는 과정, 즉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아무런 무리 없이 균등한 밀도를 바탕으로 통일감을 형성한 점이 크게 돋보였다.

특히 서사적 요소에 서정적 요소를 차근차근 잘 어우러지게 한 데서 오는 감동이 커 당선작으로 결정하는 데에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다.

이번 심사를 통해 심사위원들은 한국의 서정시가 본 궤도에 오른 느낌을 받았다. 한때 과도한 부담으로 느껴졌던 현실참여라는 짐을 이제 비로소 내려놓은 것 같았다는 점을 부기한다. 당선자는 부디 노력을 통해서 대성하기를 바란다. /심사위원= 김남조 김광규 정호승



수선집
강원일보 박대성


정겨운 이웃들이 궁금한 소식들을
보퉁이에 담아 보냅니다.

앞서가는 계절의 깃을 달아 보내기도 하고
지난 계절을 잠 깨워 가기도 합니다.

섶섶에 묻어 온 향긋한 피로와
땀으로 얼룩진 소망의 연흔들
보드랍게 풀려나간 욕망의 실밥들을
맡겨두고 갑니다.

털어내고, 지우고
펴고, 접고
줄이고, 늘이고
이어 붙여야 하는 나른한 소식들이
따갑게 쪼아대는 재봉틀에 붙들려
한 땀 한 땀 다시 일어섭니다.

생살이 미도록 해어진 그리움 하나
누가 이 그리움의 솔기를 미어 놓았을까

튼튼하고 곱다란 사랑 조각 찾아내어
기워줍니다.


봄, 야유회를 가다
경남신문 정선호


바다가 보이는 오래된 초등학교에 갔네
아이들은 보이지 않고 바람만이 저녁밥을 지어
논둑의 뱀풀이며 씀바귀들에게 퍼 주었네
염소들 그것들을 뜯어먹으며 아이들을 불렀지만
아이들은 해변에서 바다를 뜯어먹고
되새김질하여 수평선 너머로 공을 차내고 있었네

바람은 날개를 접어 몇몇은 빈 교실에서 헤진 추억들을 풀어놓고
몇몇은 야유회 온 사람들의 배낭을 비집고 들어가
아이들과의 이별을 준비했네
저녁식사엔 염소 한 마리 잡아 만든 수육이며
국물이 나왔는데 바다냄새와 풀냄새가 물씬 났네
풍성한 저녁식사는 시작되었지만 일행은
부음을 전해들은 사람들처럼 말없이
질디기질긴 식사를 하는 것이었네

파도소리는 보채는 아이들을 잠재웠고
소쩍새같은 숨소리를 내며 커가는 아이들,
이슬을 불러 염소의 쓸쓸함을 덮었네
파도소리가 더 크게 들리자 일행은 저마다
염소의 울음소리를 내던 어린시절을 떠올리며
하얗게 늙어갔네
그들의 턱에는 수염이 빠르게 자라고 있었으며
새벽녘에서야 막혔던 귀가 뚫리고 있었네



해바라기
경인일보 박명옥


하루 종일 햇볕이 놀다간 자리
발자국처럼 시든 꽃잎
사다리 타고 내려온다
문을 열면 마당 한 가득 벌어진 해바라기
긴 그림자 안 방까지 들어와
잠을 자기도 하던
낮 동안 키웠던 몸이 뜨거웠다
제 열망에 사로잡혀
눈을 떼지 못했던 그 높이
푸른 하늘 짓무르게 고개 들었던
목덜미에서 푸르고 넓은 대지가 떠내려갔다
온 힘을 다해 긴 터널을 통과했던 물방울들이
둥지를 틀고 소란스럽게 몸 흔드는 날은
제가 감당하기 힘든 큰 꽃을 피우기 위해
노랗고 긴 손가락을 펴고 있었다
한 줌의 햇살 같기도 하던 노란 꽃술 부려놓고
앞마당을 달빛같이 채우던
그림자를 딛고 나는 자랐다
그 작은 씨앗 속에서 거인처럼 솟아오르던
희망의 줄기를 붙잡고
너무 느리게 자라는 내 키를 기대면
기차소리처럼 다가오던 먼 미래
잘 익은 태양을 가득 싣고
불꺼진 간이역마다
해바라기 같은 등을 매달고
천천히 달려오던 녹색의 터널에 웅크리고 앉아
천천히 기다리는 법을 배웠다
해 그림자 길게 모래알을 흘려놓고 가던
여름철마다 사다리 타고 올라가
해바라기 속에 씨앗처럼 많은 집을 지어놓고
햇살을 파먹던 그 높이
녹색의 터널은 길고 지루한 여행이었다


개신고물상
경향신문 박옥순


1

충대우 6로 29번지
언제부턴가 이곳에
버려진 꿈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냉매가 지나던 혈관이 터져 버린 후
감옥 같던 마음의 빗장을 열어둔
문짝 떨어진 냉장고
가난한 사람의 소박한 꿈으로
바퀴 탱탱하게 부풀었을
젊음이 짐스럽지 않던
페달 부러진 늙은 자전거
굴착기의 굉음에 허리 끊어지기 전까지
어느 건물, 어느 다리의 튼튼한
뼈대였을 등 굽은 철근조각
지상에서의 마지막 눈물인 듯
눈 질끈 감고 삼키던 독한 시름
제 허리 꺾어가며 위로해주던 소주병
그리고, 불개미 같은 세월의 녹을 달고
달동네의 겨울을 기억하는 연탄집게까지


2

맞은 편엔 몇 달이 멀다고
간판이 바뀌는 상점
고물상 옆 커피숍이 어울리지 않았는지
어제는 뼈다귀 해장국 간판을 달았다
이 골목의 상점들이 어느새
폐허처럼 버티고 선
고물상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한 것일까
한 자리에서 십여 년 넘게 버텨온 뚝심
이제 더 이상 떨어질 바닥은 없다고
세상의 낮은 곳 쉬지 않고 살피는 눈
저녁에는 낡은 호미자루 같은 등으로
수레 가득 폐지를 싣고 오는 노인들


시 심사평
낮은곳 살피는 따스한 ‘생명의 눈’

정감이나 관념을 구체적인 표현 없이 실감나게 드러내긴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너무 구체적인 표현에 얽매이면 묘사할 수 없는 부분까지 묘사하게 되어 시의 초점이 흐려지게 된다. 체험이 부족한 시일수록 더욱 그러하다. 비명까지 묘사하려 들지 말고 그런 상황을 겪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묘사가 반으로 줄어들 것이다.

김지혜의 ‘그런 것이 아니다’ 외 4편은 비교적 마무리가 잘 된 작품들이다. 표현도 치밀하고 긴장도 있다. 그런데 그 긴장이 주로 구성이나 인위적인 호흡조절에서 일어나고 있어 오히려 시를 더 공허하게 만든다. 내용이 채워지면 “울고 싶음의 막막함” 같은 어색한 표현도 쉽게 해결될 것이다. 안성호의 ‘의자’ 외 4편은 모두 상상력이 뛰어나고 재치있다. 생명이 고려되지 않은 표현은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정민규의 ‘거미에 관한 보고서’ 외 7편은 정서가 안정되어 있다. 삶의 내용이 구체화된다면 호소력 있는 작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김혜선의 ‘산부인과 대기실에서’ 외 4편은 신선미가 확 풍긴다. 특히 ‘산부인과 대기실에서’는 생명감이 넘치는 작품이다. 그런데 이미지가 발전되지 못하고 반복되고 있다. 아기와 풀씨 중 하나만 선택하거나 새 틀을 짜야 할 것이다. 박옥순의 ‘개신고물상’ 외 10편은 단순하긴 하지만 삶이 묻어나 있고 표현에 무리가 없다. 호흡도 자연스럽다.

이중에서 선자들은 ‘개신고물상’을 당선작으로 뽑기로 합의했다. 당선작 한편만 두고 본다면 특별히 내세울 게 없다. 그럼에도 이 작품을 당선작으로 내세우는 것은 다른 응모자의 작품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삶이 느껴지고 낮은 곳을 살피는 따스한 생명의 눈이 있기 때문이다. 아무런 눈도 없는 시보다 미숙하지만 눈을 떠가는, 생명 있는 시를 밀어본다. 당선작과 함께 투고된 시들이 모두 일정한 수준에 올라와 있어 기대가 된다. 정진을 바란다.〈심사위원/신경림·신대철〉



이삿날
광주일보 김행란


집 한 채가 1톤 트럭에 너끈히 실린 오후
하나 둘 도시의 집들이 나와 거리를 간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집에는 집이 없다

낯선 자의 비좁은 집에 편승하여
세 식구 잠시 인생을 포개어 앉는다
밀어낼 수 없는 따스한 불편
살아온 사십여 년을 싸놓은 짐보다
무거운 아내의 한숨이
보자기를 풀어놓은 듯 물결친다

못질을 한다
세 식구 밝은 웃음을 걸어두고
가슴 속 깊은 곳에서 꺼낸 희망도
단단하게 더욱 단단하게 걸어 놓는다
오래된 살림살이 낡은 남루를 벗듯
아내는 오래오래 닦는다

부엌문에 딸아이가 제 그림을 붙인다
아내와 내가 어설프게 도화지에 서 있는
아내와 내가 가난하게 서 있는
방 한 칸과 두어 평 부엌을 이어 놓는다

딸아이의 여섯 살 웃음이 진달래꽃으로 곱다


아버지의 파업/춘궁기
국제신문 오영숙


아버지의 파업

집이 난파되자 나는 가슴에 얼음 하나 깨고 있었다
햇볕에 풀어져버린 기와집은 아버지를 밀어내고
활자가 부서진 우편함에는 주인 잃은 일련번호들이 빗물에 잠겨 얼룩을 물어 뜯고 있었다.
등이 굽은 문짝 사이로 세간들이 퇴행성 관절염에 걸려 전신을 삐꺽거리며 엎어진다
여기 저기서 숨어있던 먼지들이 뛰쳐나와
아버지의 독한 체위에서 잠수한다
허기진 방안을 매운 온기가 가족사진에 곰팡이를 피워내고
내 어린 시절을 떠내려 보냈다
청마루 밑에 흩어진 헌 신발들이 맥박이 뛰고
빈 뜨락에는 녹이 슨 농기구들이 동강 나서 비명을 지른다
한 구석에는 잠을 털고 일어선 우물가에는 절구통이 무게를 잰다
나는 아버지의 흔적을 하나하나 버리고 있었다


춘궁기

초가집 서까래는 전신을 삐걱대며 소리를 낸다
촘촘히 박힌 돌담, 한 모퉁이가 허물어졌다
허물어진 흙더미 속에서 일어난 붉은 장미 한그루가
햇살을 당기며 울타리를 만들었다 울타리는 안간힘으로
서서 얼굴을 가리고 봄 날을 만났다 풀섶을 헤친
틈 사이에서 못다핀 꽃 한송이가 빗장을 푼다
넓은 마당에는 낡은 의자가 부러져 움츠리고 앉자
슬픈 상처를 달래고 있었다 욕망의 살갖을 태운
얄팍한 브라우스가 창가에 서성이며 잃어벼렸던 암내를
찾고 있었다 암덩어리 끄집어 낸 돌담은 무게 무거워서
길 하나 열어놓고 불그레 취해있는 장미와 물레방아를 돌린다
속살드러낸 이데올로기 길 밖으로 질주한다


기차역에서 서성이다
농민신문 이궁로


기차가 오기에는 아직 이른 시각이다
대합실내 군데군데 칠이 벗겨진 나무의자
일몰의 그림자 길어지면 차갑게 흔들리는
철로 주변의 측백나무 사이로 쓸쓸히 흘러가는 저녁
종착역을 알 수 없는 낯선 사람들 지루한 표정
딱딱한 마분지 차표를 건네는 매표원의 가느다란 손가락
아무도 일러주지 않는 출발과 도착의 낡은 시각표
의미 없는 부호처럼 굴러 다니는 비닐 봉지
너무 일찍 나온 것이다
플랫폼으로 들어오는 기차가 보였지만
기차는 서지 않고 역을 지나쳐 간다
역을 지나쳐 가는 저 열차처럼
삶도 그냥 지나쳐 가야 할 때가 있는 것일까
대합실 밖에서 흔드는 이별의 손짓도
더 이상 슬프지 않다
이별을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하는 것과
재회를 꿈꾸며 사는 것도
열차가 다시 제 철로를 밟고 돌아오는 것처럼
생의 어느 지점에서 떠났던 사람이
자신이 알지 못하는 때에
한 번은 돌아올 것을 믿는 때문이고
자신이 타야 할 기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침묵이
세상의 침묵으로 이해되는 순간이 오는 것이다
나는 천천히 돌아서 본다
수은등이 켜지기 시작하?역 광장에
이별의 그림자처럼 서성이는 작은 별이 뜨고
작별의 인사를 나누는 내가 보인다, 그러나
아직 이른 시각이다, 기차가 오기에는



젖갈 골목은 나를 발효시킨다
대전일보 이가희


강경상회 이씨는
짠 손바닥에다 새우를 키운다
멸치떼도 몰고 다닌다
헝클어진 비린내를 싣고 와
육거리 젓갈시장 골목 가득 풀어놓는다
날마다 그는 해협을 끌어다
소금에 절여 간간하게 숙성시킨다
그가 퍼 주는 액젓은
오래 발효시킨 수평선이다
그는 저울에다
젓갈의 무게를 재는 법이 없어
누구나 만나면
후덕하게 바다를 퍼 준다

저무는 수평선처럼 강경상회가 셔터를 내리면
골목에다 몸 풀었던 바다 갯내음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싱거웠던 내 몸,
어느새 짭짤하게 절인
젓갈이 된다


스프링 위를 달리는 말
대한매일 신혜정


분홍 빛 말이 나를 유혹했어요
말을 타려고 하는데 해진 바지 사이로 무릎이 보이네요
말장사 아저씨가 입은 회색 점퍼 소매에도 누런 솜털이 삐죽거려요
아까부터 아저씨는 저기 공장굴뚝처럼 기침을 토하고 있어요
나는 달리고 있었거든요
달리는 말 위에서 달리고 있었거든요
그래도 나는 말 위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어요
위로 솟으면 초록과 빨강 줄무늬 천막이 보이고
내려오면 내 바지처럼 군데군데 구멍난,
쓰레기더미 같은 판자집이 보였어요
연탄재들은 오늘 아침 차에 실려 떠났어요
말장사 아저씨는 네발달린 의자에 안장처럼 앉아있네요
아저씨가 움직일 때마다 의자가 삐그덕 소리를 냈어요
나는 달리고 있었거든요
달리는 말 위에서 달리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말발굽 소리 대신 녹슨 스프링만 자꾸 삐그덕 거렸어요
창호지 바른 우리집 창문에 불이 켜지네요
이제 말들이 리어커 바퀴에 실려 떠날거예요
나는 달리고 싶었거든요
다리가 없는 분홍 빛 말 위에서 나는 달리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엄마, 연탄재는 왜 또 내 놓으세요?


[대한매일 신춘문예 당선작] 시 심사평

시인됨의 자질은 무엇보다도 말에 대한 집중력과 그것을 장악하는 역
량의 여부일 것이다.시어를 제대로 다루지 못하면서 좋은 시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는 일이다.마지막까지 당선을 다투었던
작품은 신혜정씨의 ‘스프링 위를 달리는 말’ 등과 조동범씨의 ‘심
야 배스킨 라빈스 살인사건’ 등이었다.이들 두 응모자가 보여주는
것은 경쾌한 시어의 운용 속에 포개놓은 범상치 않는 삶의 흔적이었
다.이들의 시적 재능은 응모 시의 전편에 걸쳐서 고루 확인되었다.

신혜정씨의 시편에는 어떤 가능성 앞에 열려 있는 발랄한 시적 감수
성이었다.이 응모자가 선택하는 시어는 그 정밀성에 값하는 당돌함과
당당함이 느껴졌다.그럼에도 말의 운용에 다소의 무리가 끼어 들고
그것을 쇄신할 역량이 일천하다는 약점도 함께 읽혀진다.어쩔 수 없
는 선택의 결과라 하더라도 결점이 있는 시를 당선작이라고 밀어 올
리는 선자들의 심사가 마냥 편편한 것만은 아니다.선자들은 이 응모
자의 잠재적 기대치를 평가한 것이다.더욱 정진하여 거기에 부응하길
바란다.

조동범씨의 시편에도 그 착상의 무거움에 비교적 선명하게 반응하는
시어의 운용이 돋보인다.표제 시는 심야의 적요가 삶의 무심한 표징
과 어울리면서 섬뜩한 풍경을 빚어낸다.그리하여 문명한 세계의 이면
에 감추어진 그로테스크한 삶의 편린들이 시의 전면에도 부상된다.그
럼에도 선뜻 당선작으로 밀지 못한 것은 그 풍광이 만들고 있는 지극
히 어두운 시선과 분위기 때문이었다. /송수권 김명인


이층에서 본 거리
동아일보 김지혜


1.
모시 반바지를 걸쳐 입은 금은방 김씨가 도로 위로 호스질을 하고 있다 아지랑이가 김씨의 장딴지를 거웃처럼 감아 오르며 일렁인다 호스의 괄약근을 밀어내며 투둑 투둑 흩뿌려지는 幻의 알약들 아 아 숨이 막혀, 미칠 것만 같아 뻐끔뻐끔 아스팔트가 더운 입김을 토하며 몸을 뒤튼다 장딴지를 감아 올린 거웃이 빳빳하게 일어서며 일제히 용두질을 시작한다 한바탕 대로와 아지랑이의 질펀한 정사가 치러진다 금 은방 김씨가 잠시 호스질을 멈추고 이마에 손을 가져가 짚는다 아 아 정말 살인적이군, 살인적이야 금은방 안, 정오를 가리키는 뻐꾸기 시계의 추가 축 늘어져 있다

2.
난간, 볕에 앉아 졸고 있던 고양이가 가늘게 눈을 뜬다 수염을 당겨본다 입을 쩍 벌리며 하품을 한다 등을 활선처럼 구부린다 앞발을 쭈욱 뻗으며 온몽의 털을 세워본다 그늘은 어디쯤인가 幻想은 어디쯤인가 졸음에 겨운 눈을 두리번기린다 난간 아래에 굴비 두름을 줄줄이 꿴 트럭 한 대가 쉬파리를 부르며 멈춰져 있다 백미러에 반사된 햇빛이 이글거리며 눈을 쏘아댄다 하품을 멈춘 고양이, 맹수의 발톱을 안으로 구부려 넣는다 팽팽하게 당겨졌던 활선을 거두고 어슬렁, 난간 위의 시간으로 발을 뻗어본다 빛의 알갱이들이 권태의 발 끝에 채여 후다닥 흩어진다 권태가 이동할 때마다 幻想도 한걸음씩 비켜 선다 이윽고 권태가 지나 간 난간 위로 다시 우글거리며 모여드는 햇빛,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쩌억쩍 하품을 뿜기 시작한다

3.
건너편의 창, 적색 커튼이 휘날리고 있다. 시간이 들고난 것처럼 휑하다. 안은 보이지 않는다. 일몰 쪽으로 입을 벌리고 있다. 동굴 같다. 그러나 그 동굴에도 전등 켜지던 밤이 있었다. 불 밝힌 창 아래에서 토악질하던 사내. 목구멍에 검지를 집어넣고 속을 뒤집고 있었다. 돌아가 잠들기 위해 영혼을 뒤집던 사내는 전신주처럼 깡말랐었다. 깡마른 영혼들이 분주하 게 오가던 골목은 그러나 이제 텅 비워져 있다. 깨진 유리창. 찢겨 울부짖는 적색 나일론 커튼. 절벽처럼 캄캄해지고 절벽처럼 늙어가는 창. 영영 주인이 돌아오지 앟는, 아직 닫히지 못한 창을 나는 바라보고 있다. 창도 그런 그런 내가 끔찍할 것이다. 영원히 다물리지 않을 것만 같은 입구들이 키를 쥐고 있음을. 그 안엔 환상도 캄캄하리라는 것을. 몸소 보여주는 창의 건너편에서 나는 매일 꼼짝않고 있으므로.



금관
매일신문 조유인


실수로 들고 있던 유리잔을 떨어뜨린 적이 있습니다. 그때 유리잔은 바닥에 부딪치며 단 한
번의 파열음으로 산산조각이 나버렸지요. 소리가 빠져나간 유리잔, 그것은 꼭 혼이 빠져나간
몸뚱어리 같았습니다. 어쩌면 깨어지는 순간에 들린 바로 그 소리가 부서진 유리조각들을 그
때까지 하나의 잔으로 꽉 붙잡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그렇다면 금관 역시 소리의 다른 모습일지 모릅니다. 금덩이를 천번도 넘게 두드려 펴던 소
리, 연푸른 경옥을 쪼개어 갈고 갈던 소리.. 그 많은 소리들을 고스란히 쌓아 빛으로 일으킨
나무, 그 위에 따로 가린 고갱이들을 곡옥과 영락으로 빚어 찰랑찰랑 늘어뜨린, 세상에서 가
장 눈부신 소리의 변용 말이지요.

빛의 몸을 입은 소리, 그것을 머리 위에 두신 임금님에겐 그 빛이 온 몸을 휘돌아 마침내 세상을
다스리는 자애로운 음성으로 화했을 법합니다. 정말 그래요. 그쯤은 돼야 소리가 소 리를 부른다
는 이치 그대로, 여항과 저잣거리의 태평가에서부터 깊은 산 험한 골짜기 이름 없는 백성들의 작
은 탄식소리까지 비로소 그 사슴뿔 같은 입식 속으로 낱낱이 빨려들지 않 았겠습니까.

가볍고 얕은 소리들만 웃자라 오래고 실한 믿음들을 하나둘식 허물어 가는 나날들, 나는 곧 잘
박물관을 찾아 금관 앞에 섭니다. 그러면 그때마다 은하의 가장 빛나는 한 부분을 옮겨 온 것만
같은 빛무리에 휩싸여, 까마득 흘러간 저편의 소리에 닫혔던 마음이 활짝 열리곤 하는 것입니다.
마치도 행방이 묘연한 만파식적을 다시 찾아 듣는듯.



밀란 쿤데라를 생각함
문화일보 고현정


세계 풍물전이 벌어지고 있는 서점 안에
모형 낙타가 탁자 위에 우뚝 서 있다
아무도 들쳐 봐 주지 않는 책들을 풀죽은
그들의 이마를 모형낙타는 측은한 눈빛으로
멈추어 서서는 목에서 가슴까지 곧게 뻗은 털을
휘휘 저으며 둘러보고 있다
권태로운 오후 두 시의 사막을 걷고있던 나는
네 모습에 빨려들 듯 단숨에 다가간다
카멜색의 길고 부드러운 잔등의 털
네 개의 발과 발톱들, 두 눈은 흙빛 플라스틱이다

먼 길을 걸어 오느라 많이 닳아 있다
튀어나온 코와 그 아래엔 구멍은 뚫려있지 않고
정교하게 붓으로 모양만 그려져 있다
그러나 네 개의 다리는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의
사람만이 찾는 책의 사막을 단단히 딛고 서 있다
사막이 만들어 냈다는 등에 솟은 두 개의 혹이 눈물겹도록
의연해 보여 나는 두 손으로 천천히 쓰다듬어 본다
오후 두 시의 도시 사막을 혼자 타박타박 걷고 있는
모형낙타의 메마른 슬픔이 내 손바닥의 무수한 잔금들을 통해
전달되어 심장을 쿵쿵 올려대기 시작한다.


水踰里에서
세계일보 장만호


함부로 살았다, 탕진할 그 무엇도 없었다
그대에게 말할까 말까, 사랑하는
어머니 나를 불쌍히 여기사 석달 열흘
한 줌의 마늘과 쑥을 드시고도,
강림하지 않는 아버지를 우리가 기다릴 때
그대를 만나고 미아리나 수유리 저녁을 만날 때
간혹 희망은, 뽑지 않은 사랑니처럼
아팠다, 생애의 묽은 죽을 반추하거나
희망과 혁명을 바꿔 부르기도 했지만,
집 근처 국립묘지의 무덤과 무덤들
푸르고 단단한 입술들이 일러주던 또 다른 피안은
시대의 낙엽들 되돌아 갈 길을 묻고 있었다
그렇게도 읽을 수 없는 날들이 지나갔다
세상은 징검다리였다
삶은 금간 항아리 같았다
성급한 이해가 한 생애를 그르쳤으므로
점자를 읽듯 세상을 더듬거렸으나
잇몸인 물과
행간에서 깊어지는 한숨 같은 우물들
읽을 수도 재울 수도 없는 세상을
탕진할 것 하나 없는 시절을
한 켤레 벙어리 장갑처럼, 함부로
나는 살았다


[신춘문예]시- 심사평

시들이 형식이나 내용에 있어 너무들 비슷비슷하다. 유행처럼 생긴 대학의 문예창작과나 각종 문학강좌 탓이 아닌가 싶다. 시란 어차피 남과 다른 시각 없이는 쓸 수 없는 것, 이런 시각은 손기술의 훈련만으로 되는 것은 아닐 터이다. 감각적으로 세련된 시들이 적지 않으면서도 큰 울림을 주는 시는 그리 많지 않았다는 것도 이번 심사를 하면서 느낀 점이다.

하지만 최승철('눈 덮힌 돌''목도장이 있는 골목' 등), 이현승('근황''모과'등), 장만호('수유리에서''겨울잠' 등)의 시는 크게 돋보인다. 최승철의 시에는 생활의 음영이 짙게 배어 있다. 특히 '목도장이 있는 골목'의 분위도 시를 재미있게 읽히는 데 한몫을 한다. 표현을 공연히 모호하게 하여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모르게 만드는 버릇은 고쳐야 할 것 같다. 이현승의 시는 남과 비슷하지 않은 시로서 매우 개성적이다. '근황'이 가장 좋았는데 이만큼 유니크한 자기 세계를 구축하기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한데 수준에 미달하는 시가 여러편이다.

장만호의 시는 우선 읽기에 편하다. 자연스럽고, 그 나름의 리듬도 갖고 있다. 젊음만이 가질 수 있는 회한이며 안타까움, 그리움이며 깨달음 같은 시적 내용이 새로울 것은 없지만 남의 것이 아니고 진짜 자기 것이란 생각이 든다. 억지로 만든 시들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이 점은 매우 값진 것이다. '수유리에서'가 가장 빛나는데, "점자를 읽듯 세상을 더듬거렸으나" 같은 비유도 시에 생기를 더한다. 밝고 환한 분위기의 '원정'(園丁)은 생명감으로 충일해 있고 완결성에 있어서도 돋보인다. '청어'(靑魚)도 그가 시를 재미있게 쓸 수 있는 자질을 가졌음을 말해주는 균질감 있는 시다. 우리는 그가 시인으로 출발할 준비를 충분히 끝냈음을 의심하지 않으면서 주저하지 않고 '수유리에서'를 당선작으로 뽑는다. /유종호-신경림


발자국은 길을 묻지 않는다
전남일보 정경이


우항리에서

그곳에 가면 싱싱한 그리움의 지느러미를 달고 있는 발자국을 신어 볼 수 있다 따뜻한 햇살이 발등을 콕콕 쪼는 해변을 따라 달려가다 보면 손톱만한 꽃들이 까르르르 하얀 웃음 흩뿌리고 갈대들이 뒷걸음질치며 다정하게 손 흔드는 호숫가, 생기 넘치는 풍경들은 여러 장의 궁금증을 복사한다 궁금증을 살짝 들추면 잔물결이 발을 간지럽히는데도 웃음을 참고 발자국 걸어나온다 그런데 누가 저렇게 헐렁한 신발을 신고 다녔을까 바위에 박힌 발자국은 서로 부서지지 않기 위해 촘촘히 껴안고 있다 1억년이 넘도록 흐트러 지지 않은 발자국의 깊이만큼 두꺼운 사랑, 껴안고 돌이 된 채로 백열등 만한 심장을 찾아 환하게 불 밝히고 있을 심장을 찾아 헤맸는지도 모른다 때론 누울 곳 없는 정신 툭하면 집 을 나갔을 것이 고. 발자국은 그렇게 호수가 되고 바다가 되고 바위가 되고 다시 길이 되어 1억년 밖으로 나섰는데 생각해보면 나는 참 어수선한 길을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 다 화석처럼 박힌 관습의 발자국들을 정신없이 좇아 다녔을 뿐 슬그머니 신발을 벗고 발자국 신어 본다 지금껏 내 발등을 밟고 있던 발자국 하나 얼른 벗 어 놓 고 도망치듯 빠져 나오는데 깨금발로 따라오는 커다란 발자국 나도 깨금발로 걷고 있다 우항리를 벗어 날 때쯤 나의 걸음은 경쾌하고 길도 신발을 신고 내 팔짱을 낀다

*우항리:전남 해남군 황산면 우항리 공룡발자국화석지


철로변
전북일보 이길상


역사엔 톱밥난로가 홀로 어둠을 끌어당기고 있다
저탄장 탄가루의 마른 기침소리가 들리고
아침을 여는 길은 객지를 떠돈다
막장에 들어가는 반딧불들, 날개를 떨구면
검은 산엔 절망의 삽날이 꽂힐 뿐이다
등록금 낼 때쯤이면 아이들은 학교가 불 꺼진 빈집 같다
학교에 가지 않은 몇 아이들은 울먹이는 강이 된다
잠 못 이루며 출렁이는 삶이 거품으로 올라올 때
그 빈 공간 메우자고 떠난 아이,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 아이 소식 궁금할 때마다 강물은 말이 없고
고요와 적막에 남은 논밭마저 드러눕는다
갈대처럼 함께 모여 살던 이웃들은 흔들리고 있는가
갈기 선 바람이 불자 희망의 불이 꺼진
길 아래 집들은 웅크리고
떡잎 같던 시간이 뿌리를 거둔다
시린 눈발에 하늘도 허기진 달을 내건다
달처럼 텅텅 울리는 마음은 철로로 놓여 먼 길 떠났을까
거죽만 남은 풍경은 주저앉아 빈 밭을 키우고
세간은 더 야위어 간다
장에 가신 아버지의 좌판에 햇살 가득 찰 날이 올까
아버지가 오실 길에 차단기가 내려가 있다
겨울 그놈의 겨울이 또 눈과 바람을 데리고
무쇠처럼 달려오고 있다


역경
전주일보 이영환


"어느날 눈을뜨고
두손으로 들어올린 잘생긴 호박돌 한개
그 많은 모래와 자갈의 속세에서
찬란한 색깔이 희석된채 윤회의 단아함을 내색하며
온몸으로 떠받치고 있는 황금 모래알의 묵상
힘겨운 오후
야생화들의 몸부림치는 소리가
주황빛 노을의 뜨거운 입김에 가려
하나의 고행으로 만져니는호박돌의 감촉.
고통과 아픔의 껍질을 벗기고
공중으로 날아오르는 불꽃을 외면한채
저 깊은 살속,
번뇌를 에인다.
단단히 여물어가는 빛나느 돌맹이의 고통
빛좋은 호박돌 속에 녹아있는 힘겨운 체온
흩어진 가슴을 미동으로 만지며
희석된 정좌의 심경을
발거벗은 몸짓으로 이야기 한다.


뿌리
조선일보 정임옥


나무 뿌리에 앉아 잠이 들었다
뿌리가 말을 걸어왔다
바람이 이따금씩 그 말을 끊어 놓았다
빈깡통이 재활용 쓰레기통에서
꽃으로 피어나는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깼다
다시 뿌리가 말을 걸어 왔다
이번에도 바람이 귀를 막아버리자
뿌리가 가지 끝으로 손을 내뻗었다
만져지지 않았다
네가 만져지지 않던 지난날의 내가
저 뿌리와 같았음을 알겠다
네 마음 끝까지 오르지 못한 내가
나무의 빈 물관에 불과했음도 이제는 알겠다
네가 잠 속까지 따라 들어왔다
잠에게 말을 걸자
꽃들이 일시에 입을 다물어버렸다
바람도 숨을 죽였다
깊은 잠에서 깨어난 아침
가지 끝에 매달린 뿌리를 본다


<심사평>
정직한 자기성찰 돋보여

조필수 이채운 정임옥 세 분의 작품을 놓고 당선작을 결정하기까지 꽤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이들 가운데 어느 것을 당선작으로 하더라도 별 무리가 없을 정도로 수준이 높았기 때문이다.

결국 정임옥의 ‘뿌리’가 당선작이 되었는데, 이 작품은 시적 완성도에서 뛰어날 뿐 아니라 주의깊은 관찰력, 섬세한 즉물성과 더불어 전체적으로 다정한 분위기를 이루어내고 있는 수작이다. 정직하고 겸손한 자기성찰이 그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정 씨의 모든 응모작은 당선작에 못지 않았으며, 특히 ‘명암방죽’은 보기에 따라서 더 매력있는 작품으로 뽑힐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채운의 ‘리듬체조’와 ‘사과알 속의 수행자’도 당선작에 비해 손색없는, 재미있는 작품이었다. 한편 조필수의 ‘내부 순환로’는 패기와 독창성이 돋보인 작품이다. 당선권에 든 분들은 아니지만 최승철의 몇몇 작품들도 힘이 있어 보였으며, 하정임의 ‘햇빛별빛 잔치’도 동화적 목가성이 아름다운 작품이다. (황동규·김주연)


복숭아
중앙일보 서광일


비닐 봉지가 터졌다
우르르 교문을 빠져나오는 여고생들처럼
여기저기 흩어진 복숭아
사내는 자전거를 세우고
떨어진 것들을 줍는다

길이가 다른 두 다리로
아까부터 사내는
비스듬히 페달을 밟고 있던 중이었다
허리를 굽혀 복숭아를 주울 때마다
울상이던 바지주름이 잠깐 펴지기도 했다
퇴근길에 가게에 들러
털이 보송보송한 것들만 고르느라
봉지가 새는지도 몰랐던 모양이다

알알이 쏟아져 멍든 복숭아
뱉은 씨처럼 직장에서 팽개쳐질 때
그리하여 몇 달을 거리에서 보낼 때 만난
어딘가에 부딛혀 짓무른 얼굴들
사내는 아스팔트 위에사
그것들을 가지런히 모아두고
한참을 두리번거렸다
얼마만에 사들고 가는 과일인데

흠집이 있으면 좀 어떤가
식구들은 둥그렇게 모여
뚝뚝흐르는 단물까지 빨아먹을 것이다
사내는 겨우 복숭아들을 싣고
페달을 힘꼇 밟는다

자전거 바퀴가 탱탱하다
출처 : 달밭산장
글쓴이 : 진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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