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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글(펌)

[스크랩] 2002 신춘문예 당선작

2002 신춘문예 시당선작

경향신문/鳥致院 지나며,
세계일보/버스칸에 앉은 돌부처
경인신춘/좌판
문화일보/감성돔을 찾아서
동아일보/가문비냉장고
조선일보/옹이가 있던 자리
한국일보/산벚나무를 묻지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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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시
鳥致院 지나며,
〈송유자〉


밤열차는 지금 조치원을 지나가고 있는 중이다
조치원이 어딘가, 수첩 속의 지도를 펼쳐보니
지도 속의 도계와 시계, 함부로 그어 내린 경계선이
조치원을 새장 속의 새처럼 가둬놓고 있다
나는 문득 등짝을 후려치던 채찍자국을 지고
평생을 떠돌던 땅속으로 들어가서
한 점 흙이 되어 누운 대동여지도 고산자를 생각한다
새처럼 자유롭고 싶었던 사나이, 그가
살아서 꿈 꾼 지도 속의 세상과
죽어서 꿈 꾼 지도 밖의 세상은 어떻게 다를까
몇 달째 가뭄 끝에 지금은 밤비가 내리고
논바닥처럼 갈라진 모든 경계선을 핥으며
비에 젖은 풀잎들이 스적스적 일어서고
나는 불우했던 한 사내의 비애와
상처를 품고 앓아 누운 땅들을 생각한다
대숲이나 참억새의 군락처럼, 그어질 때마다 거듭
지워지면서 출렁이는 경계선을 생각한다
납탄처럼 조치원 た?박힌 열차는 지금
빗물에 말갛게 씻긴 새울음 소리 하나를 듣고 있는 중이다



균형 잃지 않은 완결된 시

이번 응모작들은 우열을 가리기 어려울 정도로 작품 수준이 높다. 예선에서 올라온 작품들 중 최승철의 ‘매화’, 안성호의 ‘계단에서’, 박하성의 ‘구두종합병원’, 윤진화의 ‘모녀의 저녁식사’, 송유자의 ‘鳥致院 지나며,’ 등은 어느 작품을 당선작으로 내세워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모두 역량이 느껴지는 작품들이다.

최승철의 ‘매화’는 꽃망울이 터지기까지의 과정을 치밀하게 묘사한 시이다. 말과 리듬을 다루는 솜씨도 노련하고 소재를 처리하는 능력도 뛰어나다. 세부 묘사에 치중하다 보니 꽃의 세계를 친 게 흠이다. 안성호의 ‘계단에서’는 사물의 구조를 이용하여 현실과 상상을 잘 맞물려 놓은 시이다. 박하성의 ‘구두종합병원’은 삶을 보는 시선이 건강하고 자연스런 호흡이 돋보이나 전체적으로 내용이 추상적이다. 윤진화의 ‘모녀의 저녁식사’는 상상력이 기발하고 구성도 독특하다. 그러나 시가 전개될수록 이미지가 융합되지 않고 겉돌아 초점이 흐려진다.

송유자의 ‘鳥致院 지나며,’는 윤동주의 ‘십자가’를 패러디한 시로 읽을 때 신진다운 패기와 실험의식이 더 느껴지지만 그냥 읽어도 산뜻하고 단아한 시이다. 정서가 단단하고 안정되어 있고 끝까지 균형감각을 잃지 않고 있다. 무엇보다도 응모시 가운데 가장 시가 완결되어 있다. 이 중에서 송유자의 ‘鳥致院 지나며,’를 당선작으로 뽑는다. 동봉한 시들이 수준이 고르고 시와 산문 사이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긴장을 유지하는 표현력도 수준급이다. 곧 바로 창작활동을 해도 무리가 없을 만큼 작품이 숙련되어 있다. 마지막까지 경합을 벌인 윤진화의 ‘모녀의 저녁식사’는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한다. /심사위원:신경림·신대철

심사위원=본심/유종호(문학평론가.연세대 석좌교수)이시영(시인),예심/안도현(시인)


세계일보 시
심은희 [버스칸에 앉은 돌부처]


생은 울렁거림이다;(누군가 말을 걸어오는지)
목젖을 타고 올라오는 건
환멸이란 이름의 멀미다

그만 살았으면 싶은 노인들의 푸념 또는 수작처럼
부끄러움도 없이 늘어진 가로수들이나
심하게 쳐진 할머니 입꼬리에 걸린 담배처럼 언제라도 툭
떨어질 듯이 과자 봉지를 들고 질주하는 어린 아이를 볼 때면
그것은 어김없이 찾아오는 것이다

기어이 아이의 과자는 축포처럼 공중분해되고
어디선가 날아든 비둘기들은 겁도 없는 상이군인처럼
버스전용차선으로 뛰어든다 순간 나는
위험 수위를 넘어서고 있는 어머니의 노동을
떠올렸다 그리고 잠시 비틀거렸는지도 모르겠다
아! 이제 알겠다 콘크리트 벽에 일렬로 달라붙어
초호화 캐스팅을 자랑하는 나이트 클럽 벽보를
무슨 복권처럼 긁고 있는 노인들을 볼 때면 왜
까닭모를 화가 치미는지를

버스는 이내 저 홀로 풍성한 계절을 맞이한 청소차를
아슬아슬 비껴나간다 청소차에서 분명
낯익은 해골 하나가 또르르 굴러 떨어졌다
차가 덜컥덜컥거리며 정류장에 멈출 때마다
짤랑거리며 들어서는 건 언젠가는 내 몸 가장
투명한 부분을 밀치고 들어설 낯선 불행들일 것이다;갑자기 숨이 가빠온다
(아까부터 누군가 말을 걸어오는데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심사평]
작품마다 결정적 새로움 부족…당선작 [젊음의 직핍] 돋보여

예심자의 진지한 노고에도 불구하고 본심에 넘어온 작품들은 그다지 높은 수준이 아니었다. 아직도 시의 말법을 익히지 못한 평균 이하의 시들이 섞여 있는가 하면 사적인 감정의 절제 없는 토로를 서정시로 착각한 작품들도 많았고, 지리한 자기 주장을 역시 반성 없는 지리한 산문 형식에 의탁한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그 중에서 다음과 같은 작품을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먼저 [공터는 만삭이었네](전혁)는 노래의 유연성이 살아 있는 아름다운 시였다. 1연의 [공터는 어머니들/쉬었다 간/ 자리였네/ 젖먹이들 응석부림에/ 목이 늘어나/ 보유스름한 가슴/ 언덕 드러낸 메리야스]라거나 2연의 [풋풋한 공터의 아이들이/ 휘휘 휘파람 불며/ 어머니들 품으로 되돌아가고/ 만삭의 달이/ 뽀도독/ 힘찬 턱걸이를 시작하는 시간] 같은 구절은 이제는 사라져버렸지만 지난 한 시절의 가난의 탁발한 시적 형상화다. 단, 낡은 내용을 너무 낡은 형식에 수습하고 있어서 오늘의 젊은 시로서는 한계라는 점. 작품마다 뚜렷한 현대성을 성취한 백석의 경우를 고구(考究)해보기 바란다.

[마음의 위기](김지연)와 [기념품](박선영)은 각기 단아한 서정시들이다. 그러나 전자의 경우 [아직 떨어지지 않은 단풍잎은/ 시든 꽃잎을 위해] 내리는 비의 운행이 [계절과 계절 사이] 혹은 [벌어진 계절의 틈]을 벗어나지 못한 채 자족적 공간에 갇히고 마며, 후자는 전자에 비해 시상(詩想)의 전개도 활달하고 시적 대상을 장악하는 솜씨도 볼만하며 이제까지의 꽃과의 대화를 전복하여 [나] 스스로 씨앗인 기념품이 되기도 하지만 상상력의 이동에 힘이 느껴지지 않는다. 즉 시에 기운이 생동하지 않는다.

[그 집 앞 능소화](이현승)와 [버스칸에 앉은 돌부처](심은희)는 앞의 작품들에 비해 당선권에 훨씬 더 육박해 있으나 두 작품 공히 어떤 결정적인 새로움을 담보하지 못하여 아쉬움이 크다. [그 집 앞 능소화]는 이른바 [마음]의 행방을 좇는 시여서 절제되어 있고 고즈넉하나 행간(行間)이 표현된 것 이상의 또 다른 의미를 내장하고 있지 않으며 언어와 언어 사이의 긴장 또한 없다. 긴장이 없으니 시적 울림이 없고 울림이 없으니 좋은 예술품이 거느리기 마련인 소란 뒤의 고요의 그늘이 없다. 모호한대로 생활의 실감에 가장 근접한 작품이 [버스칸에 앉은 돌부처]인 듯 싶다.

[생은 울렁거림이다;(누군가 말을 걸어오는지)/ 목젖을 타고 올라오는 건/ 환멸이란 이름의 멀미다]로 시작되는 1연은 젊음 특유의 직핍하는 절규이며, 2-3연의 세부묘사는 죽음을 잊고 사는 오늘의 도시현실에 대한 통렬한 고발로도 읽힌다. 그리고 [낯익은 해골 하나가 또르르 굴러 떨어졌다]는 파격을 선사하고 있는 4연은 이제까지의 모든 현실을 다시 공(空)으로 돌리는 불교적 각성에 이르게 함으로써 이 시가 세속의 삶을 명상의 눈으로 담고자 했음을 보여준다. 표현이 다소 모호하고(하기야 모호성도 현대시의 한 특장이다) 얼개가 좀 삐걱거리긴 해도 환멸과 도시적 삶의권태까지를 포함하여 생활인의 구체적 실감에 기초한 이 작품을 당선작으로 밀며, 이 작가의 앞날의 가능성에 선자들의 더 큰 기대를 걸기로 한다./ 유종호 <문학평론가>, 이시영 <시인>


2002 경인
좌판


낯선 간이역에는 거대한 몽상과 혼돈의 장이 섭니다.
그곳에서는 가끔 죽은 바다도 싱싱하게 거래됩니다.

수전증에 걸린 노파에게 좌판의 生으로 끌려 다니는 그녀는 등 푸른 생선입니다. 미끈거리는 그녀의 몸을 좌판 위에 올려놓고, 노파는 하루에도 몇 번씩 떨리는 손으로 진로를 더듬습니다. 제발 나를 풀어 줘. 몽롱한 그녀의 눈은 점점 빛을 잃어가지만 푸른 물살의 전율을 기억하는 몸은 여전히 싱그럽습니다. 가는귀 먹은 노파의 손은 좌판만 땅땅 두드립니다. 비릿한 바다 냄새에 이끌린 사내들이 그녀의 주변으로 모여듭니다. 신명이 난 노파는 덜덜거리는 손으로 바다를 들고 한껏 부풀립니다. 그녀의 푸른 등에는 매혹의 바다 무늬가 아로새겨져 있습니다. 매력적인 바다야. 뭇사내들의 탐욕이 번득입니다. 불빛도 슬쩍 끼어 들어 그녀의 등을 한 번 쓰윽 쓰다듬어 봅니다. 탄력 있는 몸이야. 몽상의 바다 속으로 한 사내가 출렁거리며 걸어 들어옵니다. 노파는 서둘러 그녀의 몸을 도마 위에 모로 눕힙니다. 그녀의 몸에서 우우 깃털처럼 바다의 지느러미가 일어섭니다. 한껏 달구어진 몽상의 도마 위에서 그들이 몸을 섞습니다. 지폐를 챙긴 노파의 손은 알고 있습니다. 비릿한 그녀의 몸 속 깊이 깊이 들어가 보면 바다는 이미 딴 세상으로 훌훌 떠나버린 지 오래란 것을.


2002년 신춘문예
윤성학
[감성돔을 찾아서]



홀로 바위에 몸을 묶었다

바다가 변한다
영등철이 지나 바다가 몸을 바꿔 체온을 올리고
파도의 깃을 세우면
그들은 산란의 춤을 추기 시작한다
빠른 물살이 곶부리를 휘어감는 곳
빠른 리듬을 타고 온다
영등 감생이의 시즌이다

바닷물의 출렁거림은 흐름과 갈래를 지녔다
가장 강한 놈은 가장 빠른 곳에서만 논다
릴을 던져라 저기 본류대를 향해
가쁜 숨 참으며
마음 속 깊이로 채비를 흘려라
거칠고 빠른 그곳
거기 비늘을 펄떡이는 완강함
릴을 던져라
바다는 몸을 뒤채며 이리저리 본류대를 끌고 움직이지만
큰 놈은 언제나 본류에 있다
본류는 멀고
먼 데서부터 입질은 온다
바다의 마개를 뽑아 올릴 힘으로 나를 잡아채야 한다
팽팽한 포물선을 그리며 발밑에까지 끌려온 마찰저항
마지막 순간이 올 때

언제나 거기 있다
막, 채비를 흘려보냈다

온다


*영등 감생이:영등철(영등 할머니가 내려온다는 음력 2월초)에 잡히는 감성돔

**채비:낚싯대 끝에서 낚시 바늘까지. 낚싯줄과 찌와 납덩어리 등을 통틀어 일컫는 말

팽팽한 긴장감... 쉼표에도 무게

본심에 올라온 작품 중에서 김선아의 ‘석모도 가는 길’, 박일구의 ‘외출’, 이상우의 ‘지리 수업’, 그리고 윤성학의 ‘감성돔을 찾아서’가 마지막까지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석모도 가는 길’은 아름답다. ‘세상의 마지막 노을에 물들어/ 태어나는 투명한 말’이나 ‘파도 위에 앉은 수천의 금빛 동자승들’과 같은 빼어난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이 시는 걸러지지 않은 감정의 토로가 흠이었다. ‘외출’은 길게 논의되었다. 이 산문시에 대해 의견을 교환하면서 응모작 전반에 걸쳐 있는 문제들-너무나 쉽게 생각하고 있는 행 갈이, 산문시 특유의 장점에 대한 뚜렷한 인식 없이 확산된 산문화 경향-에 대한 우려가 있었음을 밝힌다. ‘지리 수업’엔 재기가 번뜩인다. 그러나 시를 성급하게 하나의 의미로 단순하게 귀결짓는 잠언조의 진술들이 더러 눈에 거슬렸다.

문학적 역량도 중요하지만 신인이라면 새로운 면모가 있어야 한다. 세계를 새로운 눈으로 보고 새로운 언어로 말하며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만들어낼 줄 알아야 한다. 신인은 그렇다. 새로운 표현에의 열정으로 늘 젊어야 한다.

그 모든 면에서 충분히 새롭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당선작으로 결정한 ‘감성돔을 찾아서’는 참신하다. ‘홀로 바위에 몸을 묶었다’로 시작되는 이 시는 긴장을 늦추는 법없이 전개된다. 리듬의 자연스러움과 진술의 격조도 높이 평가할 만하다. 쉼표 하나를 찍는 데도 이 신인은 많은 시간이 걸렸던 것 같다. 참다운 시인이라면 쉼표 하나에도 자신의 이름과 인생을 걸어야 할 것이다. 당선작에 이견이 전혀 없었던 심사였다. 그만큼 눈에 띄는 시를 만난 것이 기쁘다./황동규 서울대 교수·시인 최승호



2002 동아일보
가문비냉장고
- 김중일


내 생의 뒷산 가문비나무 아래, 누가 버리고 간 냉장고 한 대가 있다 그날부터 가문비나무는 잔뜩 독오른 한 마리 산짐승처럼 갸르릉거린다 푸른 털은 안테나처럼 사위를 잡아당긴다 수신되는 이름은 보드랍게 빛나고, 생생불식 꿈틀거린다 가문비나무는 냉장고를 방치하고, 얽매이고, 도망가고, 붙들린다 기억의 먼 곳에서, 썩지 않는 바람이 반짝이며 달려와 냉장고 문고리를 잡고, 비껴간다 사랑했던 한 남자가, 한 여자를 데리고 찾아와서 벼린 칼을 놓고 돌아갔다 매일 오는 무지렁이 중년남자는 하루에 한 뼘씩 늙어갔다 상처는, 오랜 가뭄 같았다 영영 밝은 나무, 혈관으로 흐르는 고통은 몇 볼트인가 냉장고가 가문비나무 배꼽 아래로 꾸욱 플러그를 꽂아 넣고, 가문비나무는 빙점 아래서 부동액 같은 혈액을 끌어올린다

가까운 곳에, 묘지가 있다고 했다 가문비나무가 냉장고 문열고 타박타박 걸어 들어가 문 닫으면 한 생 부풀어오르는 무덤, 푸른 봉분 하나가 있다는,


<가문비냉장고 심사평>
김혜순(시인·서울예대 교수) , 이남호(문학평론가·고려대 국어교육과 교수)

본심에 오른 작품들은 예년보다 높은 수준을 보여주었다. 거의 모든 투고작에서 일정수준 이상의 언어 구사력과 시상 전개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강한 개성을 보여주는 작품은 많지 않았다. 새로운 시인에게 기대하는 것은, 새로운 언어와 새로운 상상력이다. 기성 시인의 스타일을 알게 모르게 흉내내고 있는 듯한 작품들이 종종 눈에 띄는 것은 유감이다. 또한 신춘문예를 의식한 듯한, 상투적 틀을 보여주는 작품들도 유감이다. 이러한 작품들은 그 시적 완성도가 높다하더라도 바람직한 것이 못된다.

<사냥철>, <글자연습>,<거품>,<나비의 가을>,<암말>,<불화그리는 어머니>,<거울을 품다>,<가문비냉장고>,<두근거리는 신전> 등의 작품들이 최종적으로 논의되었다. 어느 작품이던지 당선작으로서의 자격이 있다고 판단되었지만, 또한 이러저러한 아쉬움이 있었다. 이 가운데서 <가문비냉장고>와 <두근거리는 신전>가 돋보였다. 당선자는 쉽게 결정되었지만, 어느 작품을 당선작으로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약간의 망설임이 있었다. <두근거리는 신전>은 비유적 묘사가 화려했다. 비유적 언어를 구사하는 솜씨가 대단했지만, 오히려 한작품 속에 인상적인 비유들이 너무 많은 것이 흠이 되었다. 그리고 비유와 언어의 화려함에 파묻혀 버린 주제의 애매함도 문제가 되었다. 결국 개성적인 이미지와 주제가 조화를잘 이루고 있는 <가문비냉장고>를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당선작 <가문비냉장고>는 매우 흥미로운 상상력을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전혀 이질적인 가문비나무와 냉장고를 연결시켜 하나의 의미 공간을 만들어내는 시적 상상력은 주목을 끌기에 충분하였다. 이 작품은 가문비나무 아래 버려진 냉장고의 이미지를 穿?와서, 치유할 수 없는 상처 또는 고통의 아우라를 개성적으로 환기시킨다. 나무라는 유기체 이미지와 냉장고라는 무기체 이미지 사이의 단절을 역으로 이용하여 의미를 생성한다. 그리고 왜 하필 가문비나무이고 왜 하필 냉장고인가를 시적으로 설득시킨다. 시상의 전개도 적절하며, 안정감도 있다. 앞으로도 이런 개성적인 상상력을 적극 살려서 삶의 진실을 충격적인 이미지로 드러내줄 수 있기를 바란다. 당선자에게 큰 축하를 보내며, 앞으로의 대성을 기원한다. 아깝게 탈락한 다른 예비 시인들에게도 격려를 보낸다.



2002 조선일보
옹이가 있던 자리
이윤훈


울타리 한켠 낡은 잿빛 나무판자에서
옹이 하나 아무도 모르게 빠져나가고
아이가 물끄러미 밖을 내다본다
그 구멍에서 파꽃이 피었다 지고
분꽃이 열렸다 닫힌다
쪼그리고 앉아 늙은 땜쟁이가
때워도 새는 양은냄비 솥단지를 손질하고
겨울의 궤도에 든 뻥티기가
등이 시린 이들 사이로 행성처럼 돈다
꿈이 부풀기를 기다리며
코로 쭉 숨을 들이키는 이들
홀쭉한 자신의 위장을 닮은 자루를 들고 서 있다
이승의 끝모서리에 이를 때마다 나는
아이의 그 크고 슬픈 눈과 마주친다
나는 아픈 기억이 빠져나간 그 구멍으로
저켠 길이 굽어드는 곳까지 내다본다
누가 잠자리에 들 듯 목관에 들어가 눕는다
뚜껑이 닫히고 어둠이 쿵 쿵 못질하는 소리
문득 옹이 하나 내 가슴에서 빠져나가고
세상 한 곳이 환히 보인다



심사평/ 감추지 않는 패기 돋보여

높고 고른 수준의 시들을 읽는 일은 언제나 즐겁다. 그러나 규격적인 훈련을 받은 비슷비슷한 시들을 읽는 일은 동시에 다소간 괴롭다. 대체로 즐거우면서도 이따금씩 괴로운 작업 끝에 우리는 이윤훈씨의 ‘옹이가 있던 자리’를 올해의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이 작품은 시적 완성도가 우수하지만, 그가 당선자가 된 까닭은 역설적으로 ‘돈황으로 가는 길’, ‘아씨시 성 프란시스코와 마주하여’, ‘주인님전 상서’등 비교적 완성도가 떨어진 작품들 덕택이다. 거기서 그는 엉뚱한 상상력과 독특한 자신만의 세계, 스타일을 감추지 않는 패기를 내보였기 때문이다. 아직은 연약한 모습이 남아 있는 패기이지만, 더욱 힘을 길러 세상을 보는 시인만의 시각을 키워가기 바란다. 이민, 김미영, 최찬상, 문신 씨등도 상당한 경지에 근접해 있는데 문제는 자신만의 목소리이며 자기의 언어 발견이다. 가정속의 일상성, 시어의 상투성, 운률이 결핍된 산문시 애호 현상 등등은 이를 위해 싸워야할 대상들로서 시인을 동경하는 분들이 깊이 음미해도 좋을 것이다. ( 황동규/시인)·김주연/문학평론가 )


2002 한국일보
산벚나무를 묻지마라
임경림



늙은 산벚나무가 온 산을 먹여 살리고 있었다 가부좌 틀고 앉은 벙어리 부처를 먹이고, 벌떼 같은 하늘과 구름을 먹이고, 떼쟁이 햇살과 바람과 새를 먹이고, 수시로 엿듣는 여우비를 먹이고, 툇마루에 눌러앉은 한 톨의 과거와 할미보살을 먹이고, 두리번두리번 못 다 익은 열매들의 슬픔을 먹이고, 애벌레의 낮잠 끝에 서성이는 노랑나비를 먹이고, 먹이고…먹이고,

흘러 넘친 단물이 절 밖을 풀어먹이고 있었다 젖무덤 열어젖힌 산벚나무, 무덤 속에 든 어미가 무덤 밖에 서 있다 퉁퉁퉁 불어터진 시간이 아가 아가 아가를 숨가쁘게 불러댄다

산벚나무를 묻지 마라
코 닫고 눈 닫고 귀 걸어 잠그고
문둥이 속으로 들어간 절 한 채
어두워지고 있으리라



[2002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심사평
-독특한 감성·안정된 사유 돋보여

투고작들의 일반적인 수준은고른 편이었지만, 특별히 신인다운 패기있고 인상적인 작품은 드물었다. 시의 모습을 갖추고 있는 작품은 많았지만, 좀 서툴더라도 시적 에스프리가 넘치는 작품이 눈에 띄지 않아서 아쉬웠다. 특히 많은 작품들이 산문적인 경향을 보여주고 있었다. 소위 산문시들도 많았다. 그러나 산문시는 산문과 다르다. 시와 산문의 주요한 차이는 그 상상력에 있을 것이다. 산문의 상상력으로 씌어진 작품은 아무리 시적인 외형을 지니고 있더라도 시적 감흥을 주지 못한다. 새로운 언어, 새로운 감성이 부족한 점도 아쉬움이다. 요즘 같은 감각의 시대에 오히려 시가, 감성의 빈곤을 드러내는 작품이 많았다. 시적 상상력과 새로운 감성의 부족을 경직된시적 포즈로 대신할 수는 없을 것이다.

최종적으로 논의의 대상이 된 투고작은 김우섭, 이상관, 조동범, 임경림의 작품이었다. 김우섭, 이상관의 작품은 언어를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구사하는 힘과 사물을 응시하는 힘이 있었다. 그러나 시적 사유가 일정한 틀에 갇혀 있는 듯했고, 시적 탄력이 부족했다. 또 때때로 생경하거나 부적절한 표현이 작품의 긴장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성실성과 솜씨가 있는 작품이었지만, 스스로 틀을 벗어나려는 노력이 더 있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에 비해 조동범, 임경림의 작품은 그 감성이 발랄하고 풍부했다. 언어를 조합해서 긴장된 언어의 조형물을 만드는 솜씨가 있었다. 조동범의 ‘둘둘치킨’과 임경림의 '뾰족지붕과 뾰족창을 그는 가졌다’, ‘산벚나무를 묻지 마라’ 세 편을 두고 망설인 결과 ‘산벚나무를 묻지 마라’를 뽑게 되었다. 임경림은 상당한 시적 훈련이 되어 있는 듯하다. 그의 감성과 언어에는 독특한 색깔이 있다. 그러면서도 안정된 시적 사유를 보여준다. 축하하며, 정진을 바란다. 당선자와 아깝게 탈락한 투고자 모두에게 격려를 보낸다. /심사위원=이성부 김종철 이남호
출처 : 달밭산장
글쓴이 : 진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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