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좋은글(펌)

[스크랩] 2003 신춘문예 당선작

2003년 신춘문예 <시>당선작

경향 신문/귀로 듣는 눈
삐비꽃이 아주 피기 전에
문화일보/징검돌이 별자리처럼 빛날때
세계일보/'신발論'
부산일보/돌 속의 길이 환하다
매일신문/낙타의 젖은 눈썹을 본 일이 있는가 그림 속 낙타의 눈을 들여다보지 말라
조선일보/옥편에서 ‘미꾸라지 추(鰍)’자 찾기
경인일보/타관에서
농민 신문/희생
조선일보/봄의 계단
경향신문/꿈꾸는 門
동아일보/촉지도(觸地圖)를 읽다.
매일신문/남문산역에서
경남신문 시조/또 하루
광주매일/노고단에서
무등일보/빌딩숲 속에서 길을 잃다
경남신문/시조/또 하루

-----------------------------------------------------------
경향 신문
귀로 듣는 눈
문성해


눈이 온다
시장 좌판 위 오래된 천막처럼 축 내려 앉은 하늘
허드레 눈이 시장 사람들처럼 왁자하게 온다
쳐내도 쳐내도 달려드는 무리들에 섞여
질긴 몸뚱이 하나 혀처럼 옷에 달라붙는다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하고 실밥을 따라 떨어진다
그것은 눈송이 하나가 내게 하고 싶은 말
길바닥에 하고 싶은 말들이 흥건하다
행인 하나 쿵, 하고 미끄러진다
일어선 그가 다시 귀 기울이는 靡섭?걸어간다
소나무 위에 얹혀 있던 커다란 말씀 하나가
철퍼덕, 길바닥에 떨어진다
뒤돌아보는 개의 눈빛이
무언가 읽었다는 듯 한참 깊어 있다
개털 위에도 나무에도 지붕에도 하얀 이야기들이 쌓여있다
까만 머리통의 사람들만 그것을 털어내느라 분주하다
길바닥에 흥건하게 버려진 말들이
시커멓게 뭉개져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다
그것이 다시 오기까지 우리는 얼마를 더 그리워해야 하나


* 시 심사평 *
쉬운 언어로 깊고 넓은 뜻 표현

최종심에서 심사위원들은 네 응모자의 작품에 주목했다. 안여진씨의 응모작은 언어가 맑고 신선하다. 사물을 접하는 감각도 날카롭다. 그러나 주제가 새롭지 않고 깊이도 부족하다. 게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상투적 표현에 의지하는 습관이 있다. 유승하씨는 현실을 분석하는 눈이 예리하고 필력도 훌륭하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가 넓어 주제도 깊고 다양하다. 이따금 사실의 묘사와 은유적 표현 사이에 아귀가 잘 맞지 않는다는 것이 흠이다.

김금숙씨의 응모작은 심사위원들의 눈길을 가장 오래 끌었던 작품이다. 삶의 깊은 체험이 주제와 언어 속에 드러나고 작품을 쓰는 태도가 진지하며 표현도 힘차다. 그러나 여성의 몸이나 임신과 생리에 관한 주제가 현금 시단의 유행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 심사위원들의 안타까움이 있었다.

당선자인 문성해씨는 경쾌한 일상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그 쉬운 언어로 드러내는 뜻은 깊고 넓다. 사물의 한 귀퉁이를 가볍게 건드려 의미 하나를 폭발하게 하는 이 능력은 결코 흔한 것이 아니다. 당선작인 ‘귀로 듣는 눈’에서 읽게 되는 것은 시각과 청각 간의 공감각적 환치에 그치지 않는다. 거기에는 실현되지 못한 채 무효가 되어버린 모든 선의와 희망에 대한 수준 높은 성찰이 있다. 다른 작품 ‘수건 한 장’에서도 인간의 삶과 사물이 어떻게 진정한 관계를 맺게 되는가를 감동 깊게 서술한다. 그가 훌륭한 시인으로 성장할 것을 확신한다. 당선자의 문운을 빌며 모든 응모자 들의 분발을 기대한다. <김종해·황현산>


삐비꽃이 아주 피기 전에
김일영


햇빛들이 깨어져 모래알이 되고
조개들은 그 빛의 알갱이로 집을 지어
파도에 마음을 실어 보냈다가
다시 불러들이던 섬

밥 묵어라
어둠이 석양 옷자락 뒤에 숨어
죄송하게 찾아오는 시간,
슬쩍 따라온 별이
가장 넓은 밤하늘을 배불리 빛내던

달빛 계곡 꿈을 꾸면
쪽배가 저보다 큰 텔레비전을 싣고
울 아버지 하얗게 빛나는 이빨을 앞장세워 돌아오듯

이제 다친 길을 어루만지며 그만 돌아와
삐비꽃이 아주 피기 전에

여린 삐비꽃을 씹으며
애들 소리 사라진 언덕에 앉아 있으면 석양은
머리가 하얀 사람들이
애벌레처럼 담긴 마당에 관절염의 다리를 쉬다 가고
빌려서 산 황소가 다리를 꺾으며
녹슨 경운기 쉬고 있는 묵전을 쳐다보는 섬으로
늙은 바람이 낡은 집들을 어루만져주는 고향
그대가 파도소리에 안겨 젖을 빨던
그 작은 섬으로

*묵전: 묵혀두어 잡초가 무성한 밭


*시 심사평
특별한 안목·가능성 높이 평가

예심 과정 없이 우리는 응모작 수천 편을 직접 다 읽어야 했다. 이렇게 많은 응모작 앞에서 우리는 아직까지 우리 사회에 ‘신춘문예’라는 아름다운 계절병이 도지고 있다는 것, 누군가에게 읽혀지기를 원하는 시의 의지가 폭넓게 퍼져 있다는 것에 경이감과 함께 의아스러움을 느낀다. 그만큼 우리 사회의 시적 리터러시가 높다 하겠다. 이는 시가 과거의 유물이거나 소수 마니아를 위한 장르로 치부되고 있는 세계 여러 나라의 경우와 달리, 우리가 이례적으로 누리고 있는 시의 축복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 분에 넘치는 시의 복지가 한낱 거품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응모작들을 읽어가는 동안 떨쳐버릴 수 없었다는 것도 우리는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응모작의 태반이 이것도 시라고 생각하고 쓴 것일까 하는 당혹감을 주었기 때문이다.

워드 프로세서의 보급으로 곧바로 눈앞에 뜨는 활자체가 시 아닌 것도 시처럼 보이게 하는 착각을 주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전반적으로 시를 너무 쉽게, 혹은 함부로 쓴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아니면 지금의 우리 삶이 그렇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최소한 어떤 것이 시이기 위해서 가져야 할 제한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그리고 시를 이렇게 쓸 수밖에 없는 어떤 내적 필연성을 갖고 있는가? 이 두 물음을 견딘,

김일영씨의 ‘삐비꽃이 아주 피기 전에’와 고경희씨의 ‘겨울단상’, 그리고 차주일씨의 ‘삼베옷에 밴 땀내’를 최종심에 놓고 우리는 고심하였다. 차주일씨의 ‘삼베옷…’은 삶에서 우러나오는 체험의 심도가 있어보인다는 점이 눈길을 끌었다. 꾸며서 쓴 것 같지 않다는 것도 장점으로 지적되었다. 그러나 시가 어떤 시상을 향해 응축되기보다는 풀어져 있으며 그것의 구성에 있어서 다분히 평면적이라는 느낌을 준다. 고경희씨의 ‘겨울단상’은 그의 다른 시편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전체적으로 시를 유지시키는 고른 수준을 획득하고 있다는 점에서 평가받을 만하다. 자신의 어떤 정신적 외상과 관련된 듯한, 어딘지 병적인 상흔들이 드러나기도 하지만 그것을 시의 무늬로 그려나갈 줄 안다는 점도 돋보였다. 그러나 그의 시가 단아하고 안정감을 준다는 것이 우리를 불안하게 하였다. 그것은 금방 소품주의(이것은 시가 짧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의 한게에 안주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완성도는 다소 떨어져 보이지만 지금 씌어진 것 그 이상의 시, 호흡이 긴 시를 쓸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믿음 때문에 우리는 김일영씨를 당선자로 결정하는 데 동의하였다. ‘슬쩍 따라온 별이/ 가장 넓은 밤하늘을 배불리 빛내던’과 같은 구절에서 보듯 그는 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이 되게 하는 특별한 안목을 터득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그 시의 후반부나 그의 다른 시편에서 드러나듯 언어의 과부하가 걸려 시적 인식이 비전도체처럼 막혀버리는 과욕을 앞으로 그가 조절해야 할 것이다. 정진을 바란다. / 심사위원=김광규 정희성 황지우


문화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징검돌이 별자리처럼 빛날때 / 김병호


금줄 친 대문이 어둠을 낳습니다
대문에서 토방으로
토방에서 사랑방으로 이어진
징검돌이 별자리처럼 빛납니다
환하고 평평한 징검돌 안에 담긴
어린 내가 별을 닮아가는 밤
할아버지는, 저녁보다 먼 길을 나섭니다

눈 깊어 황소 같던 할아버지
할머니를 맞던 해 봄날
강가의 둥글고 고운 돌만 골라
새색시 작은 걸음에도 마치맞게
자리 앉혔다는 징검돌
그 돌들이 오늘밤
별똥별 지는 소리로 울고 있습니다

별똥별 하나, 하늘을 가르자
어미 소의 울음소리가 금줄을 흔듭니다
미처 눈 못 뜬 송아지가 뒤척이자
어미 소가 송아지를 핥아줍니다
내 볼이 덩달아 따뜻해집니다

하늘은 오래 된 청동거울처럼 깊습니다
바람은 저녁을 다듬어
첫 별 뜨는 곳으로 기울고
내가 앉은 징검돌들이
지워진 별자리를 찾아 오릅니다

삼칠일도 안된 송아지의 순한 잠을
이제 할아버지가 대신 주무십니다


심사평
시적 역량·동화적 상상력 독특

당연한 말이지만, 신인의 시는 참신해야 하고 내적인 절실함에서 비롯된 진정성이 있어야 한다. 튼튼한 시적 역량을 겸비해야 하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심사자들이 의견을 교환한 것은 바로 이런 심사의 척도였다. 김병호의 ‘징검돌이 별자리처럼 빛날 때’를 올해의 당선작으로 뽑는다. 시의 질료로서의 언어에 대한 감각이 이만큼 섬세한 신인도 드물 것이다. 마음의 천진성에서 비롯된 동화적 상상력도 독특했다.
‘강가의 둥글고 고운 돌만 골라/새색시 작은 걸음에도 마치맞게/자리 앉혔다는 징검돌’이나 ‘내가 앉은 징검돌들이/지워진 별자리를 찾아 오릅니다’ 같은 표현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함께 응모한 ‘봄날의 사진 한장’에 나오는 ‘어머니에게 연애 한번 걸고 싶은거지요/봄 햇살 속의 어머니를, 나는/그만 처녀로 놓아주고 싶은 것이지요’ 같은 구절도 그렇다. 한편의 시를 서정적으로 끌고 가는 리듬 구사 능력과 분위기의 통일성에서 시적 역량이 느껴졌고, 대상과 공명(共鳴)하는 부드럽고 여린 감수성이 귀한 것으로 여겨졌다. 두 심사자 사이에는 당선작에 대한 이견이 없었다. 당선을 축하하고, 향상의 길위에 시가 늘 있기를 기대한다. 끝으로 남승민의 ‘양초’, 김선아의 ‘인사동, 황사 며칠’, 안여진의 ‘새장에서’가 최종까지 논의되었음을 밝힌다.
(시인 감태준·최승호)


2003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신발論' / 마경덕


2002년 8월 10일

묵은 신발을 한 보따리 내다 버렸다.
일기를 쓰다 문득, 내가 신발을 버린 것이 아니라 신발이 나를 버렸다는 생각을 한다.
학교와 병원으로 은행과 시장으로 화장실로, 신발은 맘먹은 대로 나를 끌고 다녔다.
어디 한번이라도 막막한 세상을 맨발로 건넌 적이 있는가. 어쩌면 나를 싣고 파도를
넘어 온 한 척의 배. 과적(過積)으로 선체가 기울어버린. 선주(船主)인 나는 짐이었으므로,
일기장에 다시 쓴다.

짐을 부려놓고 먼 바다로 배들이 떠나갔다.



2003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돌 속의 길이 환하다 / 신정민


밤새 내린 눈을 모포처럼 둘러 쓴 길이
꽁꽁 얼어붙은 강을 건너고 있다
눈길 위로 걸어간 발자국
먼저 간 발자국 위를 다시 걸어
뒤엉킨 길이 또 하나 걸어가고 있다
강둑에서 멈춘 발걸음들
문득 발자국의 임자가 궁금하다
강 건너에 도착한 풍경들
마주보고 서 있다가
발이 시릴 때쯤 안다
멀리 있는 하늘이 제일 먼저
이 길을 건넜으리라
그 아래 몰골 드러낸 산이 건넜을 테고
그 다음엔 산등성이의 그림자가
이 길을 건넜을 것이다
털갈이하는 짐승처럼 서있는 나무들도
눈길 위에 발자국을 남겼으리라
건너온 길을 바라보며
제 발자국 헤아리지 않으며
얼어있는 강 밑으로 흐르는 물소리
묵묵히 듣고 있는 것이다
건너지 않고 서있는 나를
아무 말 없이 기다리는 풍경
강 건너 저쪽으로 걸어 들어간다
누군가의 발자국을 지우며 간다


심사평
시의 기본 정신 가장 충실해

최종심에 오른 투고자는 6명이었다. '오리병아리'의 이태규, '형벌'의 유행두, '겨울 과메기'의 김기찬, '겨울 측면'의 탁명주, '가스통이 사는 동네'의 안여진, '돌 속의 길이 환하다'의 신정민이 바로 그들이다.

이 시들은 전체적으로 수준이 퍽 고른 편이었다. 특히 추상과 관념에서 벗어나 현실적 삶의 구체에 깊고 진솔하게 뿌리를 내린 시들이 많아 퍽 고무적이었으며 선정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오리병아리'는 결말이 식상하다는 점에서, '겨울 과메기'는 평이한 묘사와 설명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에서, '겨울 측면'은 절박하거나 간절하지 않다는 점에서,'가스통이 사는 동네'는 체험의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먼저 제외되었다. 결국 유행두와 신정민의 작품이 남게 되었는데,이 두 사람의 작품은 어느 작품이 당선되어도 당선 작으로서 손색이 없다 싶었다. 그러나 유행두의 '형벌'은 '지구 끝에서/아내가 붕어빵을 굽고 있다'에서 느낄 수 있는 것처럼 감각적인 참신성이 돋보였으나 내용보다 형식에 치중한 나머지 읽고 나서 허전하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신정민은 고른 기법과 다양한 시야를 통해 축적된 시적 역량을 한꺼번에 보여주었다. '한 노인이 사물함 속으로 들어간다' 등의 구절에서는 상상력을 현실적으로 구체화시키는 개성적 힘이 있었다. 특히 당선작으로 결정한 '돌 속의 길이 환하다'는 시는 결국 은유로 이루어진다는 시의 기본을 가장 충실히 지키고 이해하고 있는 시로 여겨졌다.
(시인 허만하·정호승/예심:시인 박태일·최영철)


2003년 대구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낙타의 젖은 눈썹을 본 일이 있는가 그림 속 낙타의 눈을 들여다보지 말라 / 김옥숙


낙타의 길고 아름다운 눈썹에 손을 대지 말라
천년만년 그림 속에 박제가 되어있어야 할
낙타가 고개를 돌려 당신 앞으로 걸어나올 것이다
낙타가 당신에게 올라타라고 말을 건넨다
언젠가 낙타의 등에 올라타고
한없이 사막을 건너갔던 것처럼 낙타의 익숙한 등
불룩한 혹을 쓰다듬을 것이다 당신은
지쳐보이는 식구처럼 낙타가 안쓰러울 것이다
선인장들은 하늘에다 무수한 가시를 박아 넣고
메마른 하늘을 마구 찔러대고 있다
선인장의 눈과 귀는 뿌리에 있지 낙타가 말한다
캄캄한 지하에 눈과 귀를 박아 넣고
수만 미터 아래에서 물이 흐르는 소리를 찾아내는 거야
내 몸 속의 물을 꺼내 마셔, 괜찮아
낙타의 목을 끌어안고 우는 당신
낙타의 몸에서 물을 꺼내 마신다
모래바람이 불어와 낙타의 몸을 이불처럼 덮는다
당신은 눈물을 훔치며 그림 속을 걸어나온다
당신의 몸 속에 들어온 낙타 한 마리
문을 열면 모래 바람이 거세게 불고
당신의 늑골 속으로 기억 속으로 모래가 쌓이는 소리
당신은 몸 속의 낙타 한 마리 거느리고
사막을 건넌다 그림 속의 낙타는 눈썹이 길다


* 심사평 *

본심에 오른 작품 중에 논의의 대상이 되었던 작품은 철탑, 머물어가는 사람들, 옻나무 숲으로 들어가는, 고서점에서,결합 ,매직 아이, 곶감, 월전리, 어린 골파, 낙타, 말이 그려진 방석, 지구촌 오지를 가다, 사월, 살꽃이 피다, 아리랑 성냥, 홍인, 외딴 묘지, 재봉틀 등이었다.

모두들 그만그만한 수준을 지닌 작품들이었기 때문에 확실하게 이것이다라고 집어내기엔 어려움이 따랐다. 그러면서도 최후까지 남은 작품은 살꽃이 피다, 사월, 말이 그려진 방석, 낙타, 어린 골파, 월전리 였다. 어린 골파 는 작품 구성이나 서정적 처리가 가장 짜임새 있는 작품이었으나, 함께 투고한 다른 작품들이 편차가 심해 다음으로 미루기로 하였다. 말이 그려진 방석과 살꽃이 피다 는 두 작품 모두 나름대로의 어법을 지닌 독특한 감수성의 소유자라 생각되었다. 그런데 이것 이외의 작품에서 보이는 이미지와 이미지의 부자연스런 연결이 마음에 걸려 고심 끝에 제외시켰다. 월전리는 싱싱한 감각과 활달한 감수성이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낙타와 함께 당선작으로 하고 싶을 정도였으나 한 작품을 선택해야하는 신춘문예의 응모방침에 따라 부득불 빠지게 된 아쉬움이 남는다. 시적 상상력과 서사적 밀도가 더 뛰어났다는 점이 낙타가 당선작으로 선정된 이유였다. 더욱 정진한다면 모두에게 좋은 결실이 있을 것으로 믿는다. 권기호(시인/경북대 교수) 정호승(시인/현대문학북스 대표)


200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옥편에서 ‘미꾸라지 추(鰍)’자 찾기 / 천수호


도랑을 한 번 쭉 훑어보면 알 수 있다
어떤 놈이 살고 있는지
흙탕물로 곤두박질치는 鰍
그 꼬리를 기억하며 網을 갖다댄다
다리를 휘이휘이 감아오는
물풀 같은 글자들
송사리 추, 잉어 추, 쏘가리 추
발끝으로 조근조근 밟아 내리면
잘못 걸려드는
올챙이 거머리 작은 돌맹이들
어차피 속뜻 모르는 놈 찾는 일이다
온 도랑 술렁인 뒤 건져올린
비린내 묻은 秋는 가랑잎처럼 떨구고
비슷한 꼬리의 (송사리)추, (잉어)추, (쏘가리)추만
자꾸 잡아 올린다.

(편집자주:송사리추, 잉어추, 쏘가리추는 원래 한문 글자로 표기해야
하나 컴퓨터 한자의 제한으로 한글로 대치했습니다.)


심사평
긴장된 시적 질서·패기 탁월

신춘문예가 ‘프로신인’을 배출하는 제도라면, 가장 중시되어야 할 요소는 그 신인의 프로로서의 가능성일 것이다. 이 가능성은 때로 작품의 완결성이 미흡할 경우에도 거칠게 그 모습을 드러내는 수가 있다. 작품의 질서가 주는 조화에 매료되어 그 뒤의 힘찬 에너지를 놓친다면, 심사자는 두고 두고 아쉬움에 머무를 수 밖에 없다. ‘옥편 속에서 <미꾸라지 추(鰍)>자 찾기’ ‘오래된 부채’ 외 3편의 천수호씨와 ‘못은 나무의 역사를 만든다’ 외 4편의 김형미씨는 이같은 아쉬움을 처음부터 걷어내 준 분들로 높은 평가에 값할 만 하다. 당선자가 된 천씨는 긴장된 시적 질서와 패기 양면에서 탁월한 재능과 힘을 지닌 것으로 보이며, 김씨 역시 패기가 대단하고 대담한 상상력이 돋보인다. ‘지하철 역에서’ 외 3편의 윤석정씨, ‘석모도 민박집’ 외 4편의 안현나씨도 새로운 시각으로 세계를 해석하고, 그들만의 언어로 그것을 표현해내는 능력이 기성시인을 차라리 앞서는 면이 있다. 당선자, 그리고 당선을 양보한 김씨의 창의력을 다시한 번 가슴에 새기며, 앞으로의 활동을 주목하고 싶다.
(황동규·시인, 김주연·문학평론가)


2003년 경인일보 당선작
타관에서
박세인


몇 번이고 물어서 갔다
저물 무렵 차는 늦게 도착했다
강원도 옥수수 술을 마셨다
잎새 우수수 떨구는 바람, 삭풍인갑다
무너진 탄촌 바라보며 저문 강물 소리 들었다
여행지에서 아무 생각 없이 무작정 걸었다
그 생각의 끝에 늘 두고온 사람들 있었다
추억은 잊어버리려해서 잊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무진장 쏟아지는 저 청천 하늘
별 속에도 그 사람 있었다
토방에서 중늙은이 몇 화투를 치고
나는 낮게 엎드려
두고 온 도시와 지난 생을 생각하였다
세상이 받아주지 않으면
가끔 사랑하는 것이 죄가 된다
검은 밤이 길고 길었다
강물 거센 물살 소리, 잠이 오지 않았다
허름한 여관 벽에는 이렇게 쓰여있었다
'그래도 삶이란 살아볼 만한 것이다'
그곳을 나올 때 한 번 더 보았다


2003년 농민 신문
희생

하병연


몸 낮추고 벼를 보아라
벼는 혼자 살려고 하지 않는다
스무사나흘 정도 살 맞대어 살다가
큰 논으로 분가하면
그때부터 다시 한달 보름 동안
자기 몸을 쪼개고 쪼개다 여름을 들인다
몸 낮추고 벼를 자세히 바라보면
이 여름 푸른 이유를 알 수 있다
눅눅한 장마철,
축축한 욕심 씻어낸 자리에
벼는 하늘과
시퍼런 사랑을 뜨겁게 해댄다

벼꽃이 피고 이삭이 영글고

몸 낮추고 벼를 보아라
벼 이삭이 혼자 익는 게 아니다
어미 없는 자식이 어디 있으랴
비우고 비워
탱탱한 사랑을 세상 밖으로 내놓는 가을
미련없이 털어버리는 벼는
또다시 제 몸 썩혀 반년의 생을 접는다


200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봄의 계단 / 이송희


반쯤 열린 문틈에서 들어오는 햇살을
두꺼운 침묵으로도 밀어내지 못하고
푸석한 낯빛 하나로 거리를 나선다

반만 남은 노을이 감싸 안은 거리는
가슴까지 차 오른 꿈, 푸르게 출렁이고
그 속에 섞이지 못한 삼각 파도의 내가 있다

무심코 올려다 본 유년의 하늘은
골 패인 기억들만 촘촘이 찍어낸다
시간의 고삐를 풀어 얼마를 더 가야할까?

날카로운 바람이 붉은 알들을 쏟아내면
부스스 일어나는 어린 잎새 한 줄기
하늘가 꽃물을 토해낸 아침이 오고 있다



200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꿈꾸는 門 / 선안영


어둡기 전에 불을 켜야 조금 덜 쓸쓸하다는
아버지의 말씀 따라 촛불을 밝힌다.
마음을 따라가지 못한
편지 속에 추운 문자들

흔들리는 불꽃 따라 바람벽이 출렁이고
마른 잎새의 귀를 달고… 웃고 있던… 눈사람
幼年이 긴 꼬리를 감고
소리 없이 굴러온다

우리 잠시 지나왔던 길들 다시 포개져
아버지, 지치도록 걸어온 불의 몸을
저녁 내 그림자가 껴안고
까무룩 졸고 있다.

뜨거운 세상 향해 심지를 밀어 올리는
그 열림과 닫힘의 門을 지나, 침묵도 지나
헐렁한 바늘귀를 건너
눈꽃들이 피어난다.



200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촉지도(觸地圖)를 읽다. / 유종인                     


휠체어 리프트가 선반처럼 올라간 뒤
역 계단 손잡이를 가만히 잡아본다
사마귀 그점자들이 철판 위에 돋아있다

사라진 시신경을 손 끝에 모은 사람들,
입동(立冬) 근처 허공 중엔 첫눈마저 들끓어서
사라진 하늘의 깊이를 맨얼굴로 읽고 있다

귀청이 찢어지듯 하행선 열차소리,
가슴 저 밑바닥에 깔려있는 기억의 레일
누군가 밟고 오려고 귓볼이 자꾸 붉어진다

나무는 죽을 때까지 땅 속을 더듬어가고
쉼없이 꺾이는 길을 허방처럼 담은 세상,
죄 앞에 눈 못 뜬 날을 철필(鐵筆)로나 적어 볼까

내안에 읽지 못한 요철(凹凸)덩어리 하나 있어
눈귀가 밝던 나도 소스라치게 놀라는 몸,
어머니 무덤마저도 통점(痛點)의 지도(地圖)였다.



2003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작
남문산역에서 / 손영희


기차는 아직도 이곳에 닿지 않았다 해묵은 선로만 시린 발을 끌고 와
창문을 기웃거리고
나는 짐처럼 놓여 있다
갈 곳 잃은 전화번호와 헐벗은 상념들
한 줌의 값싼 희망 주머니에 구겨 넣은 채
바람의 갈피 속에서
들썩이는 잠이여
나를 깨우는 건 언제나 냉혹한 시간
완강한 어둠을 덧문 밖에 밀쳐 놓아도
저만치 유배된 내일이
복병처럼
달려든다


[2003년 광주매일]

노고단에서
-박지선-


들국화 흐드러진 골짜기를 오르다가
무너져 벽만 남은 수용소를 보았다
이끼마저 비켜선 벽 군데군데
손톱으로 긁어 쓴 글자들
그대와 내가 어느 쪽 사람이었든 한 데 섞여
하나가 되어가고 있었을까
18세 소년이 남기고자 했던 것은 이름 석 자 였을까?
이루지 못한 꿈꾸던 나라였을까
한 때는 푸르름으로 싱그럽던 산은
잎 하나 지키지 못해 알몸으로 울음 운다
쫓고 쫓기는 발자국으로 무수히
넘나들던 노고단에서
억새풀로 흩어지는 옛 토굴의 전사여
멈추어 서기엔 얼어터진 발가락이 떨어지고
오르기엔 발목까지 차오르는 피고름
별빛마저 숨어버린 적막인데
발길 붙잡던 눈보라 헤치고 마침내
노고단 정상에 서니 하늘 가득 덮어오는
눈바람 소리

명치끝이 아리도록 그리운 이여
삭정이가 되어버린 언 손으로 돌탑을 쌓는다
목숨보다 소중했던 깃발을 묻고 재배를 올린다
저 멀리 산 아래 엎드려 있는 11월의 산은
형형색색 곱기만 한데
화엄사 범종소리 산허리를 휘어 감고
천황봉을 울린다
둥 둥 둥



빌딩숲 속에서 길을 잃다
-김경옥- [2003년 무등일보]


빌딩 숲 어디에 새가 살고 있나
호르르르
호르르르
어느 구석에서 노랫소리 올라온다

(짝을 부르는)
긴 부리 아래
목울대 출렁이는 소리다
푸른 물 위, 깃을 스치며
한 마디 두 마디 가슴선 그려
저수지를 건너오던
빛깔 고운 청호반새
무너진 산허리 붉은 황토
절벽에 지은 구멍집 드나들던
그 새 소리다

탁, 무슨 새? 몰라 그런 거
그냥 벨소리보다 이게 좀 낫잖아

나 떠난 뒤
도시로 팔려와
핸드폰 속 전자음으로 갇혔구나

등허리에 디미는 칼
아프게 밀려오는 그리움
작은 눈 아득하게 감긴다, 돌아보니
사방에서 들린다
휘파람새, 동박새, 오목눈이 울음소리.


2003년 경남신문 시조 당선작

또 하루
-서성자-


박제된 그리움 같은 앨범을 뒤적인다
우유빛 날개 입은 순백의 기러기 한 쌍
무지개 융단 위를 날아
꽃 계단을 오르고.

담장 밑에 심었던 박하 풀 마른 자리엔
가난한 내 유년의 여린 목을 휘감았던
퇴색한 희망 몇 포기
잡초로 웃자라 있다.

이렇게 반쯤 걸어온 하루가 또 가고 있다
선 밖에서 떠돌던 상념의 찌꺼기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사각 틀을 맴돌고.
출처 : 달밭산장
글쓴이 : 진란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