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밖에 나서니...산은 늘 거기에 있다 산으로 '든다(入山)'는 말이 있다. 등산(登山)의 의미로도 읽히지 않고, 그렇다고 출가(出家)의 뜻으로도 다가오지 않는, 하지만 묘한 여운을 지닌 말이다. 남들과 같은 보통의 일상이 아닌 탓에 모처럼 찾아온 긴 휴식기간. 나는 오랜만에 다시 산을 찾는다.
지난주부터 때 이른 무더위가 찾아오더니 수삼일 흐린 날이 반복된다. 집을 나서면서 고르지 못한 일기예보를 다시 확인하곤, 방수자켓과 윈드스토퍼를 챙겨 넣는다. 밤 10시 노은지구를 출발한 버스는 대전 시내 한 바퀴를 돌며 산님들을 태운다. 이 밤에 그들은 왜 산에 가려하는가? 산은 늘 거기에 있다 내가 가기 전에는 이리로 오는 법이 없지 그래서 악착같이 오르고 싶은 것이다
사람도 늘 거기에 있다 내가 가기 전에는 고개를 돌려주지 않지 그래서 기를 쓰고 알리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어려움이 있다
오란다고 다 오는 상대는 매력 없다 절대로 먼저 이리로 오지 않는 거기의 산처럼……. 그렇게 산 같은 사람이고 싶다.
-작자미상/ 인터넷에 떠도는 글 중에서
유성에서 승차한 대기만성님,시민회관뒤에서 승차한 메나리님, 그리고 太山님등 낯익은 몇 분 산우님들이 속속 버스에 오른다. 1년 수개월 만에 정말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사진 촬영에 관한 전문가 과정을 만학하시는 대기만성님과는 행복한 그대님, 대평마루님등 몇몇 산님들의 근황과 안부를 소재로 가벼운 대화를 나눈다. 청솔에서 낯이 익은 불새님,피아노님등의 모습도 보인다.
산에서 만난 사람들은 모두가 정겹다. 비록 서로의 이름도 모르고 직업도 모르는 분이 대다수이지만, ‘산’이라는 단 한 가지 주제를 가지고도 최대공약수를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
밤 11시 20분이 넘어서야 대전IC를 통과한 산악회 버스는 어둠이 깊게 깔린 고속도로에 들어선다. 중부와 영동고속도로를 번갈아 거슬러 오르며 12시 30분, 자정을 넘어 여주휴게소 다다른다. 밤새 고속도로를 달려온 버스는 남설악휴게소에서 한 번 더 정차한 다음 한계령에 3시 20분에 도착. 한계령코스를 타는 산님들을 내려주곤 오색에는 3시 45분이 넘어 도착한다.
남설악휴게소를 지나면서 오색에 이르기까지 차창 밖으로 보이는 44번 국도는 밤길에 얼핏 봐도 곳곳이 엉망진창으로 헤어져 있다. 중장비가 보이고 길도 매우 고르지 않다. 한눈에 봐도 지난해 연이은 태풍으로 인한 수해의 피해가 만만치 않음을 알 수 있다. 끊기고, 무너지고, 내려앉고. 골짜기와 맞닿는 도로는 어디든 엄청난 계곡물과 바윗덩이에 의해 훼손되어 있었다. 예상했던 시간보다 좀 늦은 것도 고르지 못한 도로사정 때문이리라. 아무래도 일출은 보기 어려울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안개가 깔린 한계령(자료사진) 백두대간상의 한계령(寒溪嶺<五色嶺·920m)에서 진부령(陳府嶺<珍富嶺·520m)에 이르는 구간의 주산 설악산은 산수미에 있어서는 천하절승의 아름다움을 갖추고 있는 남한 제일의 명산이다. 비록 예로부터 천하명산으로 소문난 삼신산(三神山·금강산·지리산·한라산)에 끼지는 못하였으나, 일찍이 신라 때부터 소사(小祀)를 지내온 전국 명산대천 중의 하나다.
설악산은 현재 백두대간 상의 공룡능선을 중심으로 그 동쪽 지역을 외설악, 그 서쪽 지역을 내설악이라 한다. 그리고 서북능선을 경계로 한 그 남쪽 지역의 장수대지구·한계령지구· 오색지구 일원과 44번국도 남쪽의 가리봉,등선대,점봉산 일대를 남설악이라 일컫고 있다. 설악산의 깊은 속살을 맛보기 위해선 주릉인 공룡능선과 용아장성능,서북능선, 화채릉을 반드시 타보아야 한다. 그중의 백미는 용아장성능이다. 조선중엽에 오색석사의 승려가 발견한 오색약수는 밥을 지으면 푸르스름한 빛깔이 도는 것으로 유명하다.
내가 처음 오색약수의 물맛을 본 것은 20년 전인 1986년이었다. 지금은 용출량이 적어 물통을 들고 떠가는 것을 막고 있다. 특유의 향과 톡 쏘는 맛도 예전과는 다르다고 한다. 이 모든 게 집단시설내 호텔개발 때문이라 하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 오색매표소에서 원추리님의 배웅을 뒤로하고 산에 오른다.
#2 나는 아무래도……. 다시 산으로 가야겠다.
새벽 어둠이 채 걷히지 않을 무렵, 3시 50분 오색에서 등산을 시작한다. 원추리님의 배웅을 뒤로하고 설악에 빠져든다.
지난해 2월 몇몇 산우들과 겨울 공룡능선의 줄기를 밟아본 이래 근 1년 반만의 설악산행인 것이다.
아, 언제쯤이면 이 같은 주마간산의 간산(看山)이 아닌 관산(觀山)의 심안(心眼)으로 산과 풍경을 마주할 수 있을 것인가……. 그 외로운 봉우리와 하늘로 가야겠다. 묵직한 등산화 한 켤레와 피켈과 바람의 노래와 흔들리는 질긴 자일만 있으면 그만이다. 산허리에 깔리는 장밋빛 노을, 또는 동트는 잿빛 아침만 있으면 된다. 나는 아무래도 다시 산으로 가야겠다. 혹은 거칠게 혹은 맑게, 내가 싫다고는 말 못할 그런 목소리로 저 바람소리가 나를 부른다. 흰 구름 떠오르는 바람 부는 날이면 된다. 그리고 눈보라 속에 오히려 따스한 천막 한 동과 발에 맞는 아이젠 담배 한가치만 있으면 그만이다. 나는 아무래도 다시 산으로 가야겠다. 떠돌이의 신세로. 칼날 같은 바람이 부는 곳 들새가 가는 길 표범이 가는 길로 나도 가야겠다. 껄껄대는 산 사나이들의 신나는 이야기와 그리고 기나긴 눈 벼랑길이 다하고 난 뒤의 깊은 잠과 달콤한 꿈만 내게 있으면 그만이다.
바람이 인다. 새해 아침 먼동이 트면서 저기 장밋빛 노을이 손짓한다. 배낭을 챙기자. 나는 아무래도 산으로 가야겠다.
故김장호 산악인/ 詩人의 '나는 아무래도 산으로 가야겠다' 전문 -
▲대청봉을 향해 줄지어 오르는 헤드랜턴의 불빛 마치 부처님오신 날의 제등행렬 같다.
칠흑 같은 어둠속. 그 어둠속을 밝히기 위해 각자 머리엔 전부 광부들처럼 헤드렌턴 하나씩을 부착하고 야간산행을 시작한다. 마치 탄광의 막장으로 꾸역꾸역 빨려 들어가는 것과 같은 모습이다. 작은 불빛에 의지해 한발 한발 설악의 품으로 내딛는것은 분명 가슴 벅찬 즐거움이지만 결코 쉬운 것만은 아니다.
무엇이 이 칠흑 같은 어둠속에서 사람들을 걷게 하는 것일까.
누군가 산행의 3대묘미가 우중산행, 야간산행, 설중산행이라 했다. 이 모두가 쉬운 것 하나 없다. 특히 평소 산행을 즐기지 않는 사람들에겐 이해하기 힘든 부분일 테지만 쉽지 않기에 더더욱 끌리는 게 아닐까싶다. 언제나 이렇게 힘든 시간을 지나고 나면 추억과 낭만이라는 다른 이름으로 기억 속에 보상을 해준다. ▲용목(龍木).구상나무가 고사한 것이다.10년에 한 번씩 몸을 꼰다는 속설이 있다.
오색 입구부터 산을 독특하게 수놓고 있는 층층나무와 산딸나무 꽃이 반가이 맞이해준다. 산은 이제 막 성장하기 직전의 소녀처럼 연한 녹색으로 온 산을 물들이고 있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까지 층층이 다른 옷을 입은 설악산은 아직 운무가 겉이기도 전인 아침부터 숨결을 느낀다. 녹색은 색이라고 말할 수 없다. 생명의 바탕일 뿐이다. 설악산은 이제 산 전체를 녹색으로 물들이기 시작했다. 한참 산을 오르다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니 별빛들이 너무 아름답다. 도시에서 보는 별빛과는 자체가 틀리다. 이런 풍경을 언제 마지막으로 보았을까 싶다. 어느 크리스마스트리에 반짝이는 전구 불빛들이 저 별빛만큼 아름다울 수 있을까?
산을 오를수록 저지대의 철쭉보다는 비와 이슬에 젖은 진달래의 모습이 청초하다. 1시간여를 올랐다. 왼쪽 귀로는 이름 모를 산새소리가 속삭인다. 오른쪽 귀로는 지난밤으로 수량이 많아진 계곡의 물소리가 오케스트라의 공연처럼 계속 귀를 즐겁게 맴돈다.
현명한 사람은 인간의 말만이 아닌 사물의 말도 들을 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 하늘이 들려주는 말을, 땅이 들려주는 말을, 꽃과 새와 별이 들려주는 말을…. 그렇다. 인간을 구원하는 것은 결코 문명이 아니라 자연에 있다.
너덜지대로 들어섰다. 나는 이 너덜지대가 걷기 가장 힘들다. 높낮이가 다른 바위들은 체력 소모를 많게 하고 다리를 아프게 한다.
▲비와 새벽이슬에 젖은 진달래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었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도종환 ‘흔들리며 피는 꽃’
#3. 풍류무언(風流無言)... 천지를 바람처럼 흐르니 어찌 말로 형용하리오 너덜지대를 지나 설악폭포 위에 도착했다. 물 한 모금으로 호흡을 달랜다. 새벽 아침 여명이 동쪽에서 어슴푸레하다. 일출산행이 아니었지만, 누구나 빨리 정상에 올라가 설악의 일출을 보고 싶어 함이리라. 대청봉에서는 1년에 30일 정도만 일출을 볼 수 있다고 한다. 내 또한 여러 차례 대청봉에 섰지만 아직 일출은 한 번도 못 봤다. 야속하게도 늦은 출발시간을 어이 탓하리. 아직도 대청봉은 많이 남았다. 언뜻 하늘이 열린다. 한순간 맞은편 점봉산의 풍경이 눈에 확들어온다. 아! 운무의 바다였다. 가슴이 확 트인다. 이것만으로도 몇 시간에 걸쳐 밤에 잠 못 자며 불편한 차량으로 이동하면서 생긴 피로가 확 날아 가버리는것 같다. ▲ 새벽 여명이 밝으며 남설악 점봉산이 운무 한가운데 조망된다. 두 시간이 지났다. 나무 등걸에 앉아 간식을 꺼낸다. 동고비새와 다람쥐가 주변에 기웃거린다. 삶을 쉽게 살려고 이렇게 겁도 없이 양식을 얻으려 한다. 먹다 남은 영양갱과 오렌지를 놓고 일어나는데 다람쥐가 영양갱을, 동고비는 오렌지를 쪼아댄다. 아니다. 잘못한 일이다. 자연은 그대로인데 사람들이 자연에게 나쁜 버릇만 심어 준 것 같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걷는다. 무엇을 얻고 싶어 걷기도 하지만, 어떻게 하면 이 산과 하나 되어 자연스럽게 내 마음을 버릴 수 있을까 생각하며 걷는다. 모두 산에 올라와 건강을 챙기고, 소원을 빌고 자연을 감상하지만 나는 그냥 산을 일부가 되어 걷기를 바랄뿐이다.
아무 생각 없이 오직 걷고 싶다. 그러면 내 몸 안에 있는 온갖 사악한 기운이 밖으로 빠져나가면서 머리가 맑아져 옴을 느낀다.
('雪松'님의 사진을 보니 이를 두고 'S'라인이라 명명했다.) 5월 설악에는 야생화가 지천이다.
그중 밤 랜턴 불빛에 가장 눈에 띄는 게 얼레지(가재 무릇)다.
얼레지의 꽃말은 바람난 여인이다. 아마도 향기가 없으니 향기 있는 꽃들을 질투하는지도 모르겠지만 얼레지의 화사한 모습을 본 다른 꽃들이 얼레지를 유혹하는 것이겠지.
씨앗이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기까지는 7년이라는 긴 시간이 필요하다고 한다. 오늘 만난 보랏빛 꽃들을 피운 것들은 최소한 7살은 되었을 것이다. 꽃 한 송이에 담겨진 세월의 깊이가 실감난다.
▲ 새벽이슬에 젖은 얼레지 꽃의 유혹적인 자태 얼레지와 함께 산 정상부를 수놓고 있는 것은 별꽃이다. 말 그대로 작은 꽃들이 별처럼 온 사방에 깔려 있다. 하나하나를 놓고 보면 작고 볼품없지만 온 산천의 밑바탕이 되어 산의 메마름을 채워준다. 그래도 꿈은 높아 별꽃이다. 꽃잎은 언뜻 보면 10장처럼 보이지만 실은 5장이다. 깊게 갈라져서 10장처럼 보이는 거다.
이번 산행에서는 많은 꽃들을 보게 되어 기쁘다. 이른 봄에 피는 현호색부터 시작하여 괴불주머니, 별꽃, 얼레지, 양지꽃, 가락지나물, 그리고 노랑제비꽃까지 야생화로 덮인 설악산에서 나도 모르게 감탄이 쏟아졌다.
▲ 청초한 별꽃
올해 초 뉴스에서 4월부터 대청봉에 흉물스럽게 남아있던 군부대 벙커 철거작업을 착수한다는 뉴스를 들었었다. 대청봉 군 벙커는 1975년 10월 10일 군이 군사 작전(전시통신중계소)을 위해 철근 콘크리트 슬래브 형태로, 약 15평 규모로 설치했었다. 용도폐기 이후 1991년부터 한때 인명 대피시설로 이용되기도 했다. 그러나 1996년 대청봉 부근에 중청대피소가 신축된 이후 용도를 찾지 못한 채 폐건물로 방치돼 환경을 저해한다는 지적을 받아오던 차, 지난해 10월 설악산사무소는 군부대 측과 철거에 합의한 것이다. 산악회 대선배님인 '용천굴'님이 군 생활 시절 힘들게 시멘트를 지고 올랐다는 바로 그곳이다. 대청봉을 오르면서 유심히 보았다. 모든 철거작업이 끝난 상태다. 내년부터는 저기에도 이름 모를 야생화로 뒤덮이겠지……. ▲헬기로 실어올린 굴삭기로 군 벙커를 뜯어내고 있다. 오른쪽 위가 대청봉 (자료사진)
#4. 나는 산을 보고……. 산은 나를 보네……. 대청봉에 올라섰다. 안개의 나라다. 아직 대청봉 주변은 을씨년스러운 겨울 정경과 더 유사하다. 지난해 1월 공룡을 타기위해 얼어붙은 정상석을 만져본 후 꼬박 1년 4개월만이다. 단체로 온 대학생들이 파이팅과 야호를 외치며 단체증명 사진을 찍는다. 눈살이 찌푸려진다.
선진국에서는 등산도 스포츠의 하나로서 기본 지식과 산행일체를 학교에서 가르친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레저스포츠가 아니라 등산이 놀고, 먹고, 마시는 것부터 출발했다. 일반적으로 산악회라면 아직도 부정적인 시선이 많은 게 사실이다. 학교에서부터 산행문화 정립이 시급하다.
혹시나 하고 안개가 걷히길 기대하면서 한참을 서성거린다. 땀이 식자 기다렸다는 듯 한기가 엄습해 온다. 재빨리 배낭을 뒤적거려 윈드브레이커를 챙겨 입는다. 10여분이 지났건만 안개는 더욱 진해진다. 산은 역시 욕심을 허락지 않는다. 다음을 기약하면서 중청을 향한다. 설악산 최고봉인 대청봉은 조선시대에는 본래 청봉(靑峯)이라 일컫던 봉우리다. 동국명산기에 의하면, ‘그 봉우리가 높아서 높고 푸른 하늘을 만질 듯하고, 멀리서 보면 단지 아득하고 푸르기만 하므로 그 최고 정상을 가리켜 靑峯이라 불렀다’고 한다. 현대로 오면서 중청봉·소청봉·끝청봉과 그 귀때기 부위에 해당되는 귀때기청봉도 모두 대청봉과 유사한 면이 있다고 하여 함께 청봉이란 이름을 붙여 그 이름을 세분화하여 부르고 있다. 노산 이은상은 이 봉우리의 모습을 ‘둥글둥글하면서 가파르지 않고, 높으면서도 깎아지른 듯 험준하지 않고, 우뚝 솟아 서 있는 것이 마치 큰 거인 같다’고 하였다. 여름에 중청봉 쪽에서 대청봉을 바라보면 그러한 모습을 실감할 수 있다.
▲ 대청에서 중청으로 오는 길목. 키낮은 철쭉과 나무군락이 펼쳐져 있다
대청봉 정상에서 백두대간의 마루금을 뒤로하고 중청으로 내려가는 길. 반대편으로는 마치 우주기지 같은 모습을 한 하얀 레이더 기지 돔이 보인다.
중청봉이다. 아침을 먹으며 다시 안개가 걷히길 기다린다. 10여분쯤 지났을까. 갑자기 새벽의 운무가 흩날린다. 비로소 설악의 진경이 눈앞에 펼쳐지기 시작했다. 산 아래는 넋을 놓고 바라보면 심연(深淵)으로 빨려드는 블랙홀이다. 산 밑은 여름의 신록이 찾아왔건만 대청봉 주변은 아직 봄을 떨쳐내지 못했다.
설악은 점차 원래의 모습을 되찾는다. 귀청 끄트머리부터 햇살이 스며들더니 암봉들이 서서히 고개를 치켜들다. 산봉은 진달래 빛으로 붉은 빛이 난다. 저 멀리 울산바위와 설악동 일대, 화채릉을 물론 공룡 능과 용아장성까지 조망된다. 아침 여명에 화려하게 빛났다. ▲중청산장 앞에서 화채능 울산바위와 동해를 보는 조망 구름안개는 바람소리에 맞춰 춤을 춰댄다. 구름이 바위를 가리다가 바람소리에 초록색 융단이 펼쳐진다. 다시 불어댄 바람에 침봉들이 모습을 드러내기를 반복한다. 저기 멀리 양양 동해바다가 아니던가. 수 시간의 다리품을 팔아 얻은 일망무제(一望無際)이다.
▲오색 약수 계곡너머 남쪽 점봉산이 운무에 쌓여있다.
▲ 저 멀리 동해바다가 보이고, 화채능 각양각색의 기암괴석들이 날카롭게 날을 세우고 있다.
내가 설악산에 처음 와본것은 대학생 시절인 1986년 가을이었다.
오색에서 하룻밤을 자고 대청봉에 올라 이 중청산장에서 둘째 날을 맞았다. 지금처럼 현대식이 아닌 허름한 산장이었다. 한쪽 다리가 없었던 산장지기인 털보아저씨의 이야기를 밤새 들으며 몇몇이 소주 여러 병을 비웠다. 그로부터 10여년후 단풍 행락 철에 설악동 입구에서 장사를 하는 털보아저씨를 우연히 차창 밖으로 본게 마지막 이었다.
중청봉 대피소를 지나 소청봉으로 가는 내리막길에 들어서자 용아장성이 햇살을 받고 있다.
중청산장을 거쳐 소청봉, 소청산장까지 가는 것은 얼마 걸리지 않는다. 몇 걸음 띠자마자 전혀 새로운 세계가 펼쳐졌다. 왼쪽으로는 귀때기청이 반듯한 삼각형모양을 하고 있고 오른쪽 멀리는 중청봉의 군사시설이 가물가물 보였다. 발아래로 펼쳐져 있는 내설악의 모습이 장엄하다. ▲ 소청 가는 길.진달래가 망울을 터뜨리고 있다.
중청을 지나 소청에 이르는 길은 진달래 밭이다. 또 소청 아래부터 소청 산장까지는 진달래의 물결이다.
높은 산의 진달래는 키를 키우지 못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역량으로 온갖 풍상을 이기고 초여름이 되어서야 작은 꽃들을 피웠다.
오색에서 설악폭포까지는 철쭉으로 뒤덮였었는데 소청 길은 땅에 엎드린 진달래가 그들의 고된 삶을 힘겹게 드러내고 있었다. 비록 꽃은 작고 몸집은 작았지만 그 빛깔은 오히려 더 붉고 진하여 신고의 아픔을 딛고 일어선 기품을 드러냈다. 어릴 때 먹던 참꽃을 생각하며 몇 잎을 따서 입에 넣으니 쓰면서도 달콤한 진달래의 맛은 그때 그대로다.
설악의 진달래는 그 붉기가 대단하다. 소월의 고향 영변의 진달래처럼 짙고 어두웠다. 올라가고 내려오는 사람들을 말없이 맞으며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견디고 또 견디고 있었다. ▲ 건너편 남설악의 장관이 펼쳐진다
중청을 지나면 귀떼기청봉을 마주하는 조망 터가 있다. ‘대기만성’님이 전문가용 DSLR(Digital Single Lens Reflex) 카메라로 멋진 풍광을 담고 있다. 하이엔드급도 아닌 똑딱이 내 디카로는 눈과 마음에 담을 수밖에 없는 풍경이 펼쳐진다.
▲조망터에서 바라본 귀때기 청봉의 모습
▲소청산장 가는길
소청산장에서는 한계령에서 서북능선을 탄‘불새’'여우가 말했다’'표범’님 일행과 조우한다. 소청산장에서 평상에 앉아 바라보는 풍경도 가히 좋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일몰이 또 유명하다고 한다. 한참을 휴식후 소청산장에서 다시 배낭을 메고 길을 나선다.
▲ 소청산장 ▲ 소청에서 바라본 공룡능선 소청에서 몇 십 분을 운행하자 바로 밑으로 기암괴석에 둘러싸인 봉정암이 내려다보인다. 봉정암에 다다르기 100여m 전에서 부터 목탁소리가 청아하게 들린다. 위로 보이는 사리탑 주변에서 탑돌이를 하는 불자들의 모습이 정겹다. 봉정암을 배경으로 불새님, 여우님 표범님 등과 기념촬영을 한다.
▲ 왼쪽 끝이 사리탑이고 봉정암 뒤에서 위요하고 있는 암봉
#5. 정령 기도 발은 바위발인가? 봉정암(1,244m)은 열반한 부처님의 진신 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이다. 적멸보궁이 있는 절은 따로 불상을 두지 않고 불단만 두는 것이 특징이다. 적멸보궁이라 불상은 없고, 절 위 오층석탑에 부처님의 유골인 사리가 봉안돼 있다. 우리나라에는 양산 통도사, 오대산 상원사 적명보궁, 설악산 봉정암, 영월 사자산 법흥사, 태백산 정암사 등을 일컬어 5대 적멸보궁이라고 부른다. 적멸이란 열반(涅槃·Nirvana)을 뜻하는 말. 신라의 자장율사는 7세기에 중국에서 사리와 가사를 가져와 이 땅에 5곳의 적멸보궁을 지었다.
용아장성릉이 시작되는 봉정암 사리탑 뒤 큰 봉우리를 이룬 석가봉(釋迦峯), 암자를 중심으로 오른편 동쪽에 기린봉(麒麟峯)·할미봉, 북쪽에 독성나한봉(獨聖羅漢峯)· 지장봉(地藏峯)·가섭봉(迦葉峯)·아난봉(阿難峯)등이 자리하고 있다. 진신 사리를 봉안한 불교성지답게 불교적 이름을 지닌 봉우리들이 마치 신장(神將)이 암자를 호위하듯이 두르고 서있다
▲봉정암에서 바라다본 기암괴석
▲봉정암의 유래를 말해주는 바위...봉황이 갑자기 사라졌다는 전설상의 그 바위다.
봉정암에 도착했다. 초파일 앞두고 찾아온 신도들과 한창 공사로 인부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암자 자체만으로 주는 특이함은 볼수 없다. 하지만 봉정암은 봉황이 알을 품은 듯한 형국의 산세이다.
풍수지리에 대해 문외한인 사람일지라도 봉정암을 감싸고 있는 거대한 바위를 중심으로 한 산세는 분명 예사롭지 않게 보인다. 큰 바람 한번 불어 닥치면 금방이라도 떨어질듯 위태위태하게 자리 잡은 큰 바위가 수천 년을 저렇게 버티고 있다는 자체도 신비롭게 느껴졌다.
봉정암에 가보면 법당현판에도 가장 높은 절이라는 뜻의 天下第一道場(천하제일도량) 이라고 붙여져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 잡은 절이라고 하던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봉정암은 지리산 천왕봉에서 중산리 길목에 있는 법계사(1400m)에 이어 두 번째로 높은 곳에 세워진 사찰이다. 고도 1244m다. 통일이 되면 금강산 제일봉인 비로봉에 있는 비로암이 가장 높은 절이 된다고 한다.
봉정암에는 등산객도 많고 전국에서 찾아온 불자들도 많다. 봉정암은 기도발이 잘 받는다고 소문난 곳이다. 많을 땐 하루에 수백 명이 이곳에서 잠을 자고 나간다고 한다. 지금도 봉정암에는 계속 불사가 진행 중이다.
설악산 깊숙한 곳에 위치하고 있는 두개의 암자. 봉정암과 오세암은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봉정암은 암자가 아니라 대찰이고, 암자다운 암자는 오세암이다. 봉정암에서는 고즈넉한 산사다운 맛을 느끼기 어렵다. ▲봉정암 풍경...왜 남자 출입금지일까? 여신도의 숙소란다....
▲봉정암 산신각의 목어 명리학자인 조용헌님은 '기도 발은 바위발'이라고 한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남해 보리암이 그렇고 팔공산 갓바위가 그렇지 않은가? 경남 남해 보리암에서 놓칠 수 없는 것이 신기한 나침반. 보리암 해수관음상 왼쪽 작은 3층석탑 안에 들어있는 나침반의 바늘이 다른 곳에서는 정상적으로 작동하다가 3층석탑 아래만 가면 작동이 안되는 광경을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다.
보리암은 예로부터 강원도 낙산사 홍연암과 경기 강화도 보문사와 더불어 우리나라 3대 기도처로 이름이 높아 신도들이 연일 줄지어 찾는 곳이다.
완도앞에 있는 어떤 무인도는 섬을 이루고 있는 암반의 자장이 너무 강해 나침반의 기능이 무용지물일 정도다. TV프로그램 스폰지에도 방영된 바 있다. 보통 자석이 그냥 섬의 바위에 달라불을 정도이니 그 자장과 철 함유량을 짐작할 수 있다. 조용헌님은 등산이 주는 여러 가지 마력을 '마운틴 오르가슴'이라고 명명하였다. “사바세계의 러브호텔에만 오르가슴이 있는게 아니라, 등산에도 있다는 것이다. 마운틴 오르가슴은 바위에서 나오는 자력기운이 인체 내로 들어와 일으키는 화학반응이다. 숲 속에서 나오는 맑은 공기와 물도 물론 작용하겠지만, 보다 근원적인 원인은 바위에서 찾아야 한다.
바위는 자력(磁力)을 함유하고 있다. 지구라는 별 자체를 하나의 거대한 자석으로 볼 수 있다. 달도 마찬가지이지만 지구 또한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 그 힘을 일단 자력이라고 하자. 여기에서 뿜어 나오는 자력 기운은 광물질이라는 성분을 통해서 지상으로 전달된다. 그런데 바위 속에는 광물질이 섞여 있다. 제련소에서 암석을 녹이면 광물질만 남듯이 모든 암석에는 얼마간의 광물질이 섞여 있기 마련이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모든 바위에는 이 광물질을 통해서 흘러간 자력기운이 넘쳐흐르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사람이 이러한 바위에서 장시간 앉아 있거나 누워 있으면 이 자력이 또한 인체 내로 전달된다.
이러한 메커니즘을 이해한다면 바위에 흐르는 자력이 혈액 속에 흐르는 철분을 매개체로 해서 사람 몸으로 흡입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다.
혈액은 인체 곳곳을 순환한다. 바위에서 나오는 자력 기운도 혈액을 따라 뇌세포에까지 전달된다. 자력기운이 뇌에 전달되면 종교체험을 한다. 소위 말하는 '기도발'이 바로 이것이다. 알고 보면 기도발은 바위발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세계의 모든 영지(靈地)는 바위산들이다”
▲봉정암 사리탑 올라가는 길 그런 까닭일까? 봉정암에서 철야기도를 드리기 위해 마치 성지순례 하는 사람처럼 산을 오르는 중년의 불자들은 까칠한 얼굴빛에도 고단함이 없어 보인다. ▲봉정암 사리탑 전경
다른 산님이 알려주어 줌으로 촬영했다.
봉정암 오층석탑은 다른 여느 사찰의 탑과 달리 탑 기저부가 용아릉의 바위이다. 즉 용아릉 나아가 설악산 전체가 이 탑을 떠받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봉정암 경내에서 안내판을 따라 왼쪽 돌계단을 오르면 사리탑에 닿는다. 이 사리탑 전면에 일명 봉황령 고개라는 가야동계곡과 오세암으로 가는 절 길이 있다. 사리탑 바로 옆에서부터 용아장성능이 시작된다.
사리탑에 올라 설악의 심장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에는 울산바위가 바다 앞을 가로 막으며 설악의 외곽을 지키고 서있을 것이다. 바로 맞은편에는 공룡능선이 공룡의 등뼈처럼 천연 성곽을 이루며 안으로 들어오는 온갖 잡것들을 막고 있었다. 오세암으로 내려가는 가야동계곡을 어림으로 더듬는다. 여러 상념중에 갑자기 굉음이 들리면서 헬기가 앉고 공사자재를 내린다. ▲봉정암에서 바라본 공룡능선 봉정암에서는 용아장성 가는 길이 있다. 마음 같아선 그쪽으로 나서고 싶다. 시간 여유가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반자가 없다. 불새님은 그냥 하산하자고 한다. 다음 달 다시 올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때는 반드시가리라...
여기저기 한참을 구경하다가 불새님을 따라 구곡담으로 그냥 내려선다. 오색에서 출발해서 대청봉까지 그리고 소청봉을 지날 때까지 물을 얻을 만한 곳은 없다. 물이 부족하다면 여기 봉정암에서 채워야 한다.
봉정암을 내려오다 사자바위 앞에 섰다. 사자바위는 볼품없어도 사자바위에서 바라본 내설악의 정경은 압권이다. 한쪽은 장승처럼 암벽들이 버티고 서있고 맞은편은 온갖 나무들이 이제 막 자신의 본 모습을 드러내느라 정신이 없다.
▲봉정암 700미터 아래의 사자바위 (자료사진)
▲내설악 신록이 눈부시다
#6.골 깊어질수록 물소리는 맑고 높다. 봉정암 사리탑 뒤쪽으로는 용아장성능이 펼쳐져 있다. 이 능선을 경계로 북쪽으론 오세암으로 가는 절 길과 가야동계곡이, 서쪽으론 구곡담 계곡이다. 봉정암에서 제법 경사가 있는 하산 길을 재촉하다 보면 구곡담계곡이 등산로와 나란히 나타난다. 구곡담계곡(九曲潭溪谷)은 수렴동계곡에서 갈라진 계곡으로서 내설악에서 대청봉에 오르는 등산객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이 계곡은 중청봉에서 발원한 물줄기로 중간에 귀때기청봉에서 발원한 백운동계곡이 합쳐져 수렴동계곡으로 흘러내린다. 그사이 구곡담계곡에는 길이 50 미터의 쌍폭을 비롯하여, 작고 큰 폭포들이 7~8 개가 있다. 그중에서도 긴 절벽을 따라 흘러내리는 쌍폭의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다.
담(潭)과 소(沼)와 탕(盪),혹은 연(淵)에 대해 잠깐 언급해보자. 모두 물웅덩이를 일컫는 말이다. 다만 다른 것은 그 깊이감과 수면의 결이다. 담(潭)은 그 수면의 물살이 비교적 빠른 물웅덩이를 가리킨다. 소(沼)는 물살이 빠른 여울이나 폭포의 물이 한곳에 흘러 고인 물웅덩이다. 지리산 뱀사골의 간장소등이 그 것이다.
탕(盪)은 오랜 시간에 걸쳐 암반에 둥글게 파인 돌확에 고인 물을 가리킨다. 연(淵)은 하천의 절벽아래등지에서 분수 있는 수심이 깊은 물웅덩이다. 제주 천지연폭포 등이 그 예이다. 설악산은 담(潭)과 소(沼)와 탕(盪),연(淵)을 모두 볼수 있는 곳이다.
구곡담계곡은 험난하고 복잡한 천불동계곡에 비해 길이 완만하고 호젓한 분위기가 일품이다. 백담분소에서 백담사까지 셔틀버스가 다닌다. 백담계곡은 백담사에서 수렴동계곡으로, 수렴동대피소부터 청봉골까지 구곡담계곡으로 이름이 바뀐다. 사미소.정유소.구담.만수담.용손폭.용아폭.쌍폭등 담과 소, 폭포가 눈길을 끄는 이 코스는 쉬엄쉬엄 가면서 주변 경치를 즐겨야 제 맛이 난다.
그러나.…….모든 게 어수선했다. 중청~소청 안부에서 시작되는 구곡담 상류는 지난해 여름 태풍과 폭우로 깎여나가면서 속살이 흉하게 드러난 사태골짜기로 변해 버렸다.
계곡을 향해 들어서는 기분은 참담했다. 혼란스러울 따름이다. 그 사이로 난 물길은 배 위에 난 칼자국처럼 깊은 상처를 드러내며 말없이 자연의 힘을 과시하고 있다. 이 상처가 아물려면 또 수십 년이 지나야 할 것이다.
▲구곡담계곡 상류..수많은 돌덩이들이 계곡을 가득메우고 있다. 계곡을 끼고 걷는다. 바위가 밀려 내려온 골도 수도 없이 넘는다. 숲에서 닫혀있던 시계(視界)가 열렸다 닫혔다를 반복한다. 밝음과 어두움의 극단적인 체험. 계곡을 가로지르는 철교 또한 지리산 뱀사골의 그것과는 다르다.
아름다운 계곡이란 반드시 기이한 바위와 깊은 소(沼)가 있어야만 되는 것은 아니다. 계류의 폭과 깊이가 좁아지고 넓어지고 물소리는 질감을 달리한다. 계곡과 폭포의 소리가 듣고 거기에 호흡할 수 있어야 한다. 사람들은 십이 선녀탕과 이 수렴동을 설악의 속살이라 한다. 여러 계곡의 물을 받아들여 수렴이라고 하였는가? 구곡담이 아기자기하고 쉼 없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면 수렴동은 넓고 시원한 마음을 담고 있다. 지류에서 흘러나오는 계곡 또한 아름다웠다. 계곡은 너무도 황폐했다. 갑자기 불어난 계곡물에 끊어져 수도 없이 많은 임시 다리를 건넌다. ▲ 나무를 엮어 만든 임시다리.
계곡과 계곡을 사이에 두고 수많은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한다.
커다란 바윗덩이로 예전 모습을 찾을 길이 없다. 열목어가 타고 넘어서지 못한다는 황장폭포는 아래쪽 소에 모래자갈이 두텁게 쌓여 송사리조차 가볍게 넘어설 수 있게 됐다.
옥빛 물이 마음을 끌어당기던 사미소 역시 상류에서 쓸려 내려온 토사로 예전에 비해 절반으로 작아져 그만큼 신비감도 사라졌다. 끊임없이 물소리를 내던 골짜기는 수렴동 대피소를 얼마 남겨놓은 지점에서 숨을 죽인다. 영시암에서 20분 거리인 수렴동대피소도 매점과 관리인 숙소가 범람한 계류에 휩쓸려나가 비닐천막이 대신 대피소를 지키고 있는 형편이다. 하산 길…….등산객보다 더 많은 산 다람쥐만 연신 볼 수 있었다. 저 다람쥐들도 도토리를 가지고 싸이질을 남발할까?^^^
▲ 하산길에 바라본 용아능
▲ 수렴동산장 #7. 夜바위에서 "같이 죽자던 여인의 알몸"을 느낄 수 있는가 수렴동 휴게소를 앞두고 시장기를 느낀‘여우’님이 이른 점심을 먹자고 한다. 버스에서 나눠준 찰밥에다가 라면2개를 끓여 밥을 말아먹는다. 표범’님의 도시락은 여러 반찬이 풍성하다. 김이 맛있다. 좀 있으니 ‘불새’님이 내려오고 방울토마토와 바나나를 나눠먹는다.
모처럼 널널한 산행……. 여유 있는 점심에다가 커피를 마시며‘여우’님과 북한산 숨은 벽 사진을 화제 삼아 리지 산행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여우’님은 등산과 달리기에 일가견이 있는 분이다. 나름대로 즐거움이 있지만 리지산행의 또 다른 매력에 대해 힘주어 강조한다. 나 또한 속으로 상당한 공감을 한다.
등산을 다니다 보면 곳곳에 산에서 유명을 달리한 산악인을 모신 추모비를 볼 수가 있다. 봉정암 아래 사자바위 맞은편 거대한 바위 중간에서도 보았다.
▲사자바위 맞은편 암릉 중간 소나무옆에 추모비가 보인다. 나는 조선일보에 칼럼을 연재하는 명리학자 조용헌님을 아는가하는 질문을 한다. 아까 봉정암에서‘표범’님도 기도발이 잘 받는 곳 중의 하나가 여기라고 했다.
암벽을 타는 사람들을 보통사람들로서는 이해하기 힘들다. 목숨을 걸고 밧줄 한줄에 의지하여 바위를 더듬는 사람들이 바위를 느끼는 기분을 알까……. 산악인겸 작가인 박인식님은 암벽등반에서 흔히 쓰이는 “바위를 탄다”는 표현을 파고들어 유머러스한 해석을 내린바 있다. 바위를 해? 뭘 한다는 거지? 박인식은 “바위를 한다”라고 할 때의 그 “한다”라는 동사가 실은 “섹스를 한다”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얼핏 듣기엔 황당한 소리 같지만 실제로“바위를 하는”인간들은 내심 고개를 끄덕거리며 설핏 얼굴을 붉힌다. 비밀로 간직하고 싶었던 가장 내밀한 욕망을 들켜 버린 듯 한 심정이 되는 것이다. 실제로 산사람들은 가끔씩 그런 농담을 주고받는다. “한번 바위 맛이 들어봐, 섹스보다 좋아” 또 다른 산악인겸 시나리오 작가인 심산님은 이렇게 해설을 한다. 바위를 한다는 것은 흔히 생각하듯 ‘정복’과는 거리가 멀다. 홀드에 의지하여 몸을 일으켜 세울 때, 그것마저 찾을 수 없어 오직 암벽화의 마찰력 하나만을 믿고 체중을 실어버릴 때, 그것은 바위와 ‘合一’하는 일이다.
이렇듯 바위에서 살맛(肉味)을 느끼고, 바위를 하며 살 맛(삶의 기쁨)을 느끼는 것이 바로 산사람이다. 산악 은어에 야바위라는 게 있다. 滿月의 밤의 밤에 즐기는 암벽등반을 일컬어‘야(夜)바위’한다고 한다. 달빛아래서 바위의 속살을 만지며 바위와 나눌 수 있는 가장 황홀하고 은밀한 사랑의 몸짓이다. 철이 들고 나이를 조금씩 먹으면서 멋진 히말라야 안나푸르나나 알프스 사진을 볼 때, 누드보다 훨씬 더 에로틱하다고 느낄 때가 많다.
나 역시 수년전 가랑비 내리는 가운데 혼자 계룡산 칼릉으로 멋모르고 하산 하다가 죽을 뻔 한 적이 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사람이 이렇게 죽는구나 싶었다.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그 느낌이 나쁘지만은 않다. 심산님이나 떨어져본 경험이 많은 대부분 산악인이 추락이라는 게 묘한 오르가슴을 준다고 한다. ‘크라이머스 하이’라고 어느 순간 뻑 가는 게 온다는 것이다.
유명한 산악인겸 시인인 김장호님은 리지 등반을 "같이 죽자던 여인의 알몸" 으로 표현했었다. “바위는 믿음직하다 바위는 위험하다 손바닥을 얹으면 같이 죽자던 여인의 알몸이다“
처음 이 詩귀를 읽었을 때 전율했다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니다. 사실이 詩귀에는 혼이 서려있다. 단순한 말장난이 아니라 어떤 핵심적 진실이 그대로 농축되어 있는 것이다. 미사여구가 아니라 체험의 진술이다. 같이 죽자던 여인의 알몸이라…막무가내로 바위로만 치닫는 원초적 그리움 혹은 외곬수의 정한을 이보다 더 절절하게 표현해낼 수가 있을까? 분명 바위와 시 양쪽 모두에서 달인의 경지에 접어든 대가의 솜씨다. 따스하고 싸늘한 시월 상달 강물로 뛰어들듯 밧줄 한 가닥에 허리를 함께 묶고 하늘바다 한가운데 몸을 띄워라 손톱마디 성할 짬 없던 志鬼의 원한으로 기어 붙어라 절묘하다. 그리고 아름답다. 서재에 앉아 먼산바라기만 하는 책상물림들은 꿈도 못 꿔볼 표현들이다 심산님은 세상의 모든 바위가 다 “같이 죽자던 여인의 알몸”처럼 그립고 반가운 것이 아니라고 했다. 섬나라 특유의 바닷바람 때문인지 일본의 바위는 잘 부서지고 푸석거린단다.
이런 바위에 매달려 合一의 희열을 느끼기란 곤란한 일이다.
미국 요세미티의 바위는 지나치게 미끈거리는 품새가 꼭 겉만 번지르한 백인여자를 만지는 것 같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바위가 더없이 찰지고 한 치의 헛돎이 없이 합일되어 몸을 부비고 있는 동안에도 그리움이 샘솟는다고 했다. 같이 죽자던 여인의 알몸. 그 희열과 환희와 절정을 잊지 못해 암장꾼들은 오늘도 바위를 탄다. 도대체 어느 경지에 이르러야 같이 죽자던 여인의 알몸처럼 바위를 느낄 수 있는가? 같이 죽자던 여인이 없었던 나로서는 그런 여인의 알몸은 상상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 여자인‘여우’님이 느끼는 암릉의 또 다른 매력은 무엇인가?
자일을 타고 오른다 흔들리는 생애의 중량(重量 ) 확고한 가장 철저한 마음도 한 때는 흔들린다
암벽을 더듬는다 빛을 찾아서 조금씩 움직인다 결코 쉬지않는 무명 (無明)의 벌레처럼 무명(無明)을 더듬는다
함부로 올려다 보지 않는다 함부로 내려다 보지도 않는다 벼랑에 뜨는 별이나, 피는 꽃이나, 이슬이나 세상의 모든 것은 내 것이 아니다. 다만 가까이 할 수 있을 뿐이다.
조심스럽게 암벽을 더듬으며 가까이 접근한다. 행복이라든가 불행같은 것은 생각지 않는다. 발붙일 곳을 찾고 풀포기에 매달리면서 다만, 가까이, 가까이 갈 뿐이다.
- 오세영의 ‘등산’전문
#8. 우리는 절에서 무엇을 찾으려는 것일까? 산을 찾는 마지막 발걸음은 으레 절로 향하게 된다. 한국 사람에게 절은 어떤 공간일까? 우리는 절에서 무엇을 찾으려는 것일까? 소나무숲 분위기가 고즈넉하던 영시암터 앞마당에는 무배추밭이 들어섰다. 커다란 당우들과 또 새로운 당우를 짓기 위해 쌓아올린 축대가 눈에 띈다. ▲ 영시암
영시암 부근 수렴동은 비록 엄청난 태풍과 수해의 상처가 그대로 있지만, 계곡이 주는 기품과 수려함이 가득하다. 지난해 여름 그 엄청난 폭우도 고도를 낮아지며 차츰 가라앉은 것이다. 언필칭 明鏡止水. 계곡은 그 엄청난 돌무더기 속에서도 눈이 시리도록 푸르고 맑은 계류를 흘리고 있었다. 그래서 수렴동의 끝자락에 백담사를 지은 이유 중 하나가 될까? 단청이 희미해진 옛 절이 하루 중에서 가장 아름다울 때는 석양빛이 처마 밑을 파고들 무렵이라고 한다. 산사의 기호는 침묵의 덩어리 같은 적막이다. 그 적막은 자기 자신을 내면으로 향하게 하고, 자연과 가까이 하게 하는 접속 부사다.
사람이 입을 닫으면 자연이 입을 연다는 금언을 잊지 말 일이다
산길이 끝나는 곳에 암자가 있게 마련이다. 찬물 한 모금 마시고 다시 힘을 내는 자리가 있다.
어디 가파른 산길의 끝만 그러하리. 모든 인생의 길이 그러하지 않을까.
삶의 길이 막혀 눈앞이 깜깜해지거나,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 생의 기쁨이 사라졌을 때에도 절망스런 바로 그 자리에 희망이 숨어 있는 법이다.
막다른 길에서도 다시 눈을 크게 뜨고 보면 거기에 또 다른 길이 시작되고 있음이다.
- 정찬주의 「길 끝나는 곳에 암자가 있다」 중에서...
▲ 절 입구에서 휠체어를 미는 수녀님의 모습이 아름답다.
백담사는 피안(彼岸)의 절이다. 불교세상에서 이승의 번뇌를 해탈하여 열반의 세계로 도달하는 경지가 피안이 아니던가. 바라밀다(波羅蜜多)도 같은 의미다.
백담사로 오르는 백담계곡은 피안의 세상을 여는 아늑한 통로였다. 백담사는 또한 만해(卍海)의 절이다.
만해 한용운과 백담사는 깊은 인연을 지니고 있다. 20세 때 처음 백담사를 찾은 만해는 25세 때 다시 백담사에 들어와 이듬해 이곳에서 출가했다. 3ㆍ1운동 후 옥고를 치른 만해는 다시 백담사 품에 들어와 시집 <님의 침묵> 등을 탈고했다. 만해가 있었던 백담사의 분위기는 눈 내리는 겨울이라야 제격이다. 고즈넉함과 여유로움이 당시 만해를 매료시켰을 것이다. ▲ 백담사를 건너는 바로 앞 계곡에는 예전 같으면 수많은 돌탑이 장관이었다. 이 또한 흔적이 전혀 없다. 백담사의 백담은 흰 물웅덩이가 아니라 일백 백의 물웅덩이를 말한다. 대청봉에서 절이 있는 곳까지의 물이 잠시 머무는 담(潭)의 수를 세어보니 100개가 된다고 해 붙여졌다고 한다.
신라 진덕여왕 1년(647년)에 자장율사가 창건했다는 천년 고찰 백담사. 처음에는 한계사라 하였던 것을 십여 차례 소실되고 다시 지어지며 운흥사, 심원사, 선구사, 영축사 등의 여러 이름을 거쳤고, 조선 정조때 백담사란 이름을 얻었다고 전해진다.
백담사 경내 한쪽에 마련된 만해기념관에서는 만해의 발자취를 찾아볼 수 있다. 만해의 ‘조선불교유신론>과 <불교대전> 등의 저서와 <님의 침묵> 초간본 등 100여종의 판본이 전시돼 있다.
극락보전 바로 앞에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 머물던 작은 방이 있다. 천하를 호령하다 산골 작은 절로 쫓겨 온 그는 과연 이 작은 방에서 진정한‘참회’를 배웠을까? ▲ 전두환 전 대통령이 기거하던 방 백담사는 선원으로도 유명하다. 백담사 위로 출입통제 표지를 지나 150m 가량 오솔길을 올라가면 무금선원(無今禪院)의 무문관(無門關)이다. 화장실이 딸려있는 2평 크기의 방 12칸의 문은 모두 바깥에서 잠겨있다. 독방에 들어가 3개월이면 3개월, 3년이면 3년 시간을 정해놓고 밖으로 나오지 않은 채 방안에서만‘폐문정진’하는 곳이다.
하루에 단 한번 오전 11시 작은 공양구를 통해 식사만 전해질 뿐 외부와의 소통이 단절된다. 고독과의 싸움을 이겨내야 하는 폐문정진은 눕지 않고 참선하는 ‘장좌불와’와 잠자지 않고 수행하는 ‘용맹정진’과 함께 가장 어려운 수행법의 하나로 손꼽힌다. 지금은 12분의 스님이 폐문정진중이다. 무문관의 반대쪽 백담사 만해당 뒤편에는 조계종의 기본선원이 있다. 젊은 스님들이 본격적인 선 수행에 들어가기 전에 공부를 하는, 일종의 ‘불교 사관학교’다. 현재 40여 명의 스님들이 엄격한 규율 아래 교육을 받고 있다. ▲ 백담사의 돌담 풍경
백담사의 이곳저곳을 구경한 후 주차장에 가는 셔틀버스를 탄다.
요금 1500원. 7km의 백담계곡을 걷지 않고 차를 타는 값이리라. 언젠가는 이 백담계곡을 차를 타지 않고 걸을 날이 오겠지. 냇물은 무심히 흐른다. 냇물이 만약 사람처럼 복잡하고 미묘한 분별을 가지고 흐른다면 끝까지 흘러가지 못하고 도중에 갇히고 말 것이다. 물은 한 곳에 갇히면 썩는다.
그저 무심히 흐르기 때문에 산과 개울을 지나고 논밭을 지나 마침내 바다에 이른다.
- 법정스님의 「물소리 바람소리」 중에서……. ▲ 백담사 주차장으로 가는 버스 2시 40분. 주차장에서는 원추리님이 맛있는 김치찌개를 끓여놓고 내려오는 산님들을 반긴다. 아직 下山 가이드라인인 4시까지는 여유가 있다. 그런데도 버스1대는 벌써 떠났다. 뭐가 그리 급한가. 이 아름다운 풍경을 보기 위해 하룻밤을 달려왔는데 한두 시간 먼저 떠나는 게 그저 아까울 뿐이다. 막걸리 몇 잔에다가 원추리님이 손수 퍼 담아 주는 김치찌개가 꿀맛이다. 진진, 메나리, 원타이정, 지리연가님과도 술잔을 나눈다 ▲주차장 인근 민박집 마당에서 핀 금낭화 꽃이 이쁘다.. 설악산 지역에 많고, 꽃말은 '당신을 따르겠습니다'... 소나기가 오락가락하는 가운데 4시25분 버스는 대전으로 떠난다. 백담사 입구에는 예전에 볼 수 없었던 민박형 펜션이 눈에 많이 띈다. 그중 용아장성 민박이라는 집이 눈에 확연하다. 사하촌 주변 식당에는 숨두부집과 황태음식점이 많다. 아마 승용차로 왔다면 몇 해 전 찾았던 황태 맛집에 들렀을 것이다. 차창 밖으로 다시 산을 돌아본다. 설악산은 봄과 여름사이에 그렇게 서있었다.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사는 게 이게 아닌데 이러는 동안
어느새 봄이 와서 꽃은 피어나고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그러는 동안 봄이 가며 꽃이 집니다.
그러면서 그러면서 사람들은 살았다지요. 그랬다지요.
- 김용택 시인 "그랬다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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