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온다고 했다.
지지난 주 바다를 타고 뭍으로 살포시 올라 온 남해의 봄을 만났다.
하늘은 드높고 날은 왜 그리 화창했는지….
돌아와 봄앓이를 했다.
1주내내 컨디션이 좋지 않은 상태로 제주도에 갈 걱정을 했다.
몹시 상태가 안 좋은 토요일 아침 주최측에 예약된 비행기표를 확인하면서 일정이
일주일 연기되었음을 알았다.
전화를 안 했었음 바보처럼 청주까지 가서 망연자실할 뻔 했다.
내가 얼빵한 놈인지
메일도 넣지 않고 전화도 주지 않았던 협회 여직원들이 한심한 건지….
그래 한라 산신령님이 배려겠다.
상쾌한 기분과 정신으로 돌아 오라고….
뻔질나게 갔던 제주도에서 컨디션이 좋지 않은 날이 하루도 없었다.
언제나 가는 날부터 설레이고 머무르는 내내 종달새처럼 즐거웠다.
돌아 오는 날은 늘 배낭 가득 기쁨과 추억을 구겨 넣고 돌아 왔었지…
회복기의 한 주를 다시 좋아진 컨디션으로 청주의 맑은 하늘을 날아 올랐다.
이것저것 잡지를 뒤적이는 짧은 시간에 나는 제주도의 봄 한가운데로 날아 들었다.
밤에 혼자 용두암에 갔다.
바닷바람도 차지 않았고 어둠 속에 돌하루방만 길 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고
해변가엔 아무도 없다.
붉은 색과 초록색 조명이 용두암을 비추고 노란 불빛은 파도를 물들이고 있다.
그 옛날
10년도 넘던 그 옛날
어둠 속에 묵상하던 용두암보다 더 화려하지만
웬지 쓸쓸해 보인다.
어쩌면 내 마음 때문일지도 모르지….
세월이 흘러
그 젊음도 가고 …
그 때의 친구들도 떠나고……
2008년 3월 15일
날씨 맑음
성판악-백록담-관음사
5시 30분 출발 / 12시 하산 (6시간 30분 소요)
05시 30분 출발
07:40 진달래 대피소 (8시 10분 출발)
09:00 정상/백록담
09:25 출발
12:00 하산완료
새벽 5시에 택시를 오라고 했다.
김밥 두 줄 싸가지고…
시간도 많은데 나는 왜 항상 잠을 설쳐대며 새벽에 떠나려 하나?
7년 만에 찾았던 지난해 한라산의 감동을 기꺼이 어둠 속에 묻어 버렸다.
지루한 성판악을 보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장엄한 설원의 감동이 사라진 풀죽은 한라의 모습을..
오래 전 아무도 없는 산길의 두려움은 사라져 버렸다.
보이지 않음으로 오히려 느낌이 살아 있는 산행 길도 또 다른 매력 이었다.
혼자 가는 길
아직 눈이 쌓여 있는 길 위에 내 발자국 소리 이외에는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청정한 새벽 공기가 맞닿아 있는 제주도의 하늘 위에는 무수한 별들이 초롱거리고 있다.
오랫동안 불빛아래서 웅크린 어둠이 지루해 질 때쯤 조금씩 새벽이 다가 왔다.
잠시 멈추면 차가운 공기가 온 몸을 파고 들지만
지금이 새벽임을 감안하면 겨울의 본진은 이미 패주했고 패잔병들은 대오를 흐뜨린 채
퇴각하는 중이다.
혼자 걸어가는 길에 익숙해 지면 그 시간이 그윽하고 향기로워 진다..
황홀한 고독이란 말이 어울리겠다.
마치 그 느낌과 감동이 중독일 듯
오래지 않아 다시 그 유혹에 빠져들고 싶어진다.
그저 서두를 것도 없고
또 굳이 늘어질 발걸음일 이유도 없는 그냥 여유롭고 유유자적한 순례의 길이다.
어둠 속에서 개울물 소리도 들리고 가끔 바람에 나뭇잎이 후드덕 거리는 소리도 들린다.
어둠에 쌓인 한라산을 오르며 여명이 깨어날 때 쯤
아쉬운 후회가 스멀거린다.
작년 새벽 한라산길을 오르며 올해는 백록담에서 해맞이를 하리라 생각했는데…
1년이란 세월 동안 그 생각을 까마득히 잊고
동트는 하늘을 보고서야 비로소 기억이 되살아 난다.
새벽 3시 쯤부터 올랐으면 가능했을 텐데….
시나브로 다가 오는 새벽은 늘 신기하다.
조금씩 물상이 희미하게 깨어나고 어디선가 새 울음 소리가 들린다.
지난 해 두군 데 샘의 기억이 있어 물병을 한 개만 넣어 왔는데 관으로 흘러 나오던
물은 모두 얼어 붙었다.
새벽의 한기가 그다지 갈증을 불러 내지는 않는 터라 진달래 대피소 까지는 물이
부족하지는 않겠다.
숲 사이로 태양이 떠오른다.
지난 해 반도의 동 쪽 일본에서 장엄하게 떠오르는 태양을 보고
다시 외로이 섬 위로 떠오르는 태양을 본다.
마른 가지 사이로 쏟아지는 황금 햇살이 아쉽다.
내년에는 한라산 정상에 서서 바다에서 솟구치는 태양을 바라 보리라…
대피소 가는 길
하늘은 유난히 푸르고 돌아 본 바다 쪽은 운해가 장관이다.
아직 산길에는 많은 눈이 쌓여 있고 바다도 눈 밭이다.
한 사람이 나를 스치고 지나갔다.
진달래 대피소에는 7시 40분에 도착 했다.
컵라면을 사서 아침을 먹어야 하는데
매점 창구에 써 있는 안내문이 난감하다.
“8시부터 판매 시간이니 제발 그전에 깨우지 마세요”
라면 박스 위에 매직으로 쓴 글씨가 자못 처절하다.
대피소 밖으로 나가서 운해를 감상하다
이곳 저곳 사진기를 들이 대어 보기도 하다가
하릴없이 주변을 거닐며 시간을 보내 다가 7시 55분에 다시 들어 갔다.
안에서 인기척이 느껴지고 잠시 후 매점 창구가 열린다.
컵라면 하나 1500원
삼다수 500ml 한병은 단돈 500원인데 1인당 2병 까지만 판다.
너무 싸다.
왜 그리 싸냐고 물으니
이곳은 개인 장사가 아니고 국립공원 관리공당 직영 이라고….
사장한 참에 김밥 한 줄과 컵라면 한 개를 마파람에 게눈 감추 듯 먹어 버렸다.
택시 아저씨가 김밥집 문을 열지 않아 편의점에서 사왔다는 김밥
백록담 가는 길에는 살찐 까마귀들이 반긴다.
지난해 백록담 까마귀들은 사람을 별로 무서워하지 않더니
이곳의 까마귀들은 높은 가지 위에서 앉아 있으면서도 사진을 찍으려 나무 아래로
다가가면 푸드덕 날아가 버린다.
한라산에서는 늘 까마귀를 만나지만 그렇게 기분 나쁘거나 불길한 일이 생긴 적은
한번도 없다.
원기를 회복하고 백록담은 오르는데
하늘은 왜 그리 맑고 푸른 지…
왜 그리 바람은 시원하고 기분이 날라 갈 것 같은지….
백록담
다시 또 여기에 섰다.
멀리 반짝거리는 바다는 눈부시고
머리 위에 쏟아지는 봄은 황홀하다.
바람은 세차도 바람결은 부드럽고.
까마귀들은 변함 없이 신나게 환영의 군무를 추고 있다.
봄이 오는 게다.
다 떨어진 붉은 깃발이 바다를 바라보며 혼자 펄럭이는 이 곳으로
봄이 오고 있다.
한 사람이 보였는데 내가 백록담 위 동릉에 오르자 홀연히 관음사 쪽으로 사라진다.
내가 여기 있었다는 증거도 남길 수 없이 혼자 백롬담에 남겨졌다.
잠시 나무 등걸에 걸터 앉았다.
덕유산 향적봉에 혼자 있었던 때처럼
공룡능선 위에 혼자 남겨졌을 때처럼
나만이 바라보는 장엄한 대자연과 그 묵묵한 교훈에
조용한 감동이 밀려 온다.
마치 모든 어려움을 다 마무리 하고 나서 마주한 기쁨의 시간인 듯
긴장이 풀어지고 그냥 편안한 마음이 되었다.
턱을 괴고 한참을 앉아 있는데 한 산님이 올라와서 사념에서 깨어나게 한다.
관음사 내려가는 길은 멋들어진 눈밭이다.
지난해에는 처음 관음사 길을 내려 가면서 감탄사를 연발했다.
7년 만에 다시 찾은 한라산에 처음 보는 관음사 쪽 풍경 이었다.
내려 오는 산 능성이를 따라 내려다 보이는 백록담이 아쉬어
금지 구역 안으로 들어 서서 백록담을 한참 내려다 보다
다시 갈 길을 재촉했다.
따사로운 햇살을 안고 내려 가는 눈밭 길에서 아이들처럼 신이 났다.
스키를 타 듯
아직 봄을 피워내지 못한 나무들 사이로 빠르게 내려 갔다.
작년에 대피소가 있던 곳을 찾았는데
가득 쌓인 눈밭에 건물이 사라졌다.
지난해에 철거된 모양이다.
내려가는 길에 계곡의 바위에서 떨어져 내리는 시원한 물을
받아 마셨다.
산죽이 많은 곳에서 아이젠을 벗었다.
눈은 일정 고도까지만 녹지 않고 남아 있다.
겨울과 봄의 갈림길은 점점 고도를 높이고 있다.
굴거리 나무 인가?
언젠가 호남 정맥 길에 잠들어 있는 갈색 대지 위에서 홀로 번들거리는 초록의
큰 잎을 피워내는 나무들을 만난 적 있다.
이곳은 그 나무들의 천지다.
8년전 겨울
비가 추실거리는 성판악 오름 길에서 깃을 접은 새의 모습으로 비를 긋던 나뭇 잎
그 굴거리 나무들이 내게 제주도의 봄을 제일 먼저 알려 주었다.
올해는 용암으로 만들어 진 계곡들의 풍경을 좀더 가까이에서 감상하며
여유롭게 관음사 공원으로 내려섰다.
시간이 좀 남아 관음사에 들렸다.
지난 해에 세미나 시간이 촉박해서 들리지 못했던 관음사.
관음사 입구에서 이름 모를 노란 꽃을 만나고
한가롭게 마당에 노닐던 꿩도 만났다.
관음사에는 이름처럼 수많은 관음상이 있었고 절의 규모가 꽤 커 보이는데
육지의 절들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절을 두루두루 구경하다가 오늘 신도들의 법회 모임이라 절 마당에서 신도들이
산나물 부페로 식사를 하기에 나도 시장한 차에 불자들의 만찬을 함께 했는데
그 맛이 너무 기기 막히다.
새벽 같이 한라산을 넘고 관음사를 둘러 보고 맛있는 식사를 하고
세미나에 참석했던 무척 바쁜 봄날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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