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연팀들이 설악산 금지구역 산행을 떠난다고 해서 허리 때문에 망설이다 합류하기로 했다.
근데 또 비가 온단다.
릿지화 까지 사 놓았는데….
거친 등산길에 비까지 맞는다고 생각하니 오금이 저린다.
지난 번에도 중국 무이산 다녀온 후 허리가 안 좋아 용소골 오지 산행을 취소하고 오대산 쪽 둥지봉 산행에도 합류하지 못했는데 취소 하기에도 면이 서지 않는다.
비를 맞기로 결심하고 나자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오히려 그 옛날 흠뻑 젖은 채 폭풍우를 헤치며 백두대간을 종횡하던 날이 콧날이 시큰하게 그리워졌다.
그 때처럼 내리는 빗 속에서 잊지 못할 풍경을 만날지도 모른다.
토요일에는 도서관에 갔다.
밀린 신문 좀 읽고 책도 좀 읽고…
비는 하염없이 내린다.
저녁 때 집으로 가니 마눌 왈 “귀연 설악산 산행이 취소 됐네!”
원타이정이 흔들리는 민심에 쐐기를 박았었는데 집행부에서 무리라 판단한 모양이다.
비가 쏟아지는 날 설악산 오지
암릉에 자일을 걸며 비 전문가 산객들 30여명을 이끌고 산행을 한다?.
“과연 그렇게 까지 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하는 원초적인 물음에 대한 상식적인 해답이 도출된 셈이다.
그냥 시원 섭섭했다.
비를 맞고 여전히 건재함을 확인하며 그 거친 날을 반추하고 싶다는 길망 이면에 또 괜히 무리했다가 점점 산에서 멀어질 수 있다는 불안감이 있었다.
팀들은 대신 오서산에서 우중산행을 한다고 했는데 합류하지 않았다.
아침에
비가 멈추고 하늘이 갠다.
책을 보다가 갑자기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눌은 할일이 있다 하여 혼자 떠나기로 했다.
비온 후의 흐린날이지만 산 위에서 바라보는 세상은 참으로 맑고 깨끗하리라…
갈기산 앞의 금강물은 탕탕하고 숨겨진 계곡엔 어제 비에 물이 많이 불어 있겠다.
갈기산 산행 : 2시간 30분
갈기산 입구 : 12:40
갈기산 정상 : 13:30
하산 : 13:10
천태산 산행 : 2시간 40분
천태산 출발 : 15:30
천태산 정상 : 16:44
영국사 : 17:49
하산완료 :18:10
모처럼 차를 몰고 수채화처럼 차분히 가라 앉은 도로변 풍광을 따라 가는 기분이 좋다.
작은 빗방울들이 모여서 고랑을 이루고 생명의 환희를 전해 주듯이
이런 작은 기쁨이 모여서 삶의 의미와 행복을 만들고 삶의 고뇌를 완충한다.
오르는 길에 바람은 상쾌하고 내려다 보는 금강의 풍경은 그림 같았다.
시야는 끝간 데 없이 막힘 없이 흐르고 생명의 물기를 머금은 초록의 산하는 풋풋하고 신선하다.
먼 하늘의 하얀 구름은 동화처럼 푸근하고 혼자 있음이 감미롭다.
어릴적 혼자 산에서 느꼈던 그 느낌이었다.
나를 위한 갈기산
계곡을 내려올 때 까지 아무도 만나지 못했다.
계곡의 물은 불어서 거침없이 흐르며 계곡을 빈번히 가로 지르는 하산로 징검다리를 타넘어 흐른다.
길에서 좀 떨어진 곳에서 알탕을 했다.
소스라치게 차가웠는데 놀랍게도 그물에서 한참을 있으니 온몸에 후끈 열기가 오르는 듯 하다.
작은 물방울들이 합수되어 용솟음치는 계곡의 물길에 씻는 것 땀만이 아니다.
대자연의 세례…
그 성수가 내 마음과 정신을 정화하고 있다.
날아갈 것 같다는 기분은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다.
콧노래를 부르며 내려가는 길에 부부 산님을 만났다.
아마도 내 앞서서 갈기산 능선을 탔던 사람들인 모양인데 월령산쪽으로 능선을 타다가 계곡으로 내려선 모양이다.
도로로 나가려면 반대쪽으로 가야 하는데 방향감각을 상실했는지 계곡 안으로 열심히 들어오고 있었다.
방향을 잃어 당황했었는지 나를 만나자 안도의 빛이 역력하다.
대전에서 왔는데 갈기산이 이렇게 멋진 산인 줄 몰랐단다.
지난번 가본 천태산 보다 훨씬 더 좋단다.
산의 모습이란 계절과 날씨에 따라 많이 다르다.
내 머리의 풍경지도 에는 여름날 비갠 후의 맑은 하늘과 구름 그리고 유유히 흐르는 금강의 여유가 표구되어 있다.
천태산마저 타기로 했다.
주차장에서 작별하고 천태산으로 차를 몰았다.
세시 반 부터 오르면 6시쯤 내려 오겠다.
가다보면 폭포
어제 비에 천태 신령님 회춘해서 오줌줄기가 세차다
천태산은 영국사의 은행나무가 유명하다.
오랜 시간의 공백을 깨고도 늘 한결 같은 건강함을 자랑하는 은행나무를 보면 든든히 고향을 지키는 옛 친구를 만나는 감동을 느꼈다.
세월이 많이 흘러도 그 무상한 시간과 잊혀진 아쉬움을 훌쩍 뛰어 넘을 수 있는 반가운 친구….
암릉을 타고 정상에 오르며 내려다 보는 풍경이 압권이다.
정상 아래 바위에서 바라 본 남쪽 산들이 가져다 주는 묘한 느낌이 있다.
옛날 어느 꿈에서 바람 부는 날
홀로 백두산을 가던 때 만났던 풍경을 닮았다.
그래서 그 바위 위에서는 그 신비한 느낌이 솟아 오른다.
정상
아무도 없는 표석 아래서 사 온 맥주 한 캔을 단숨에 비웠다.
격렬한 소모 후의 갈증
그 각별한 맛과 홀로 마시는 산상의 한잔 술의 감흥을 무엇에 비길까?
여기가 무릉도원이고 나는 무릉객이다
절제된 풍류와 낭만은 허공에 기쁨을 날리고 산이 보내는 충만한 기는 내 발을 타고
가슴으로 흐른다.
D코스를 내려가는 길의 암릉과 소나무
그리고 바라보는 갈기산 쪽 풍경은 가슴을 후련하게 한다.
영국사에 들러 삼배를 드렸다.
“욕심없이 살겠습니다”
“그냥 살아온 대로 살아가게 하소서”
갈기산과 천태산을 오르며 내 머릿속의 풍경지도와 다르지 않은 호젓하고 맑은 풍경을 만났다.
늘 준비 없이 떠난 날에도 어김 없이 잊고 있던 감동을 만나고 난 새로운 의욕에 충만해졌다.
그 속에서 모호하고 희미한 많은 것들은 늘 명쾌하게 정리되고 명징하고 단순한 깨달음은
찾아야 할 삶의 의미와 빛나는 얼굴을 되돌려 주었다.
세상의 아름다움과 기쁨들은 도처에 널려 있다.
먼 길에서도 가까운 길에서도 우린 그 기쁨을 쉽게 만날 수 있다.
늘 만남을 거부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고 작은 행복에 먼저 등을 돌리는 건 엉뚱한 것들로 채워진 가슴이다.
기쁨과 감동의 지도를 갖지 못한 사람들은 불행하다.
스스로가 불행함을 느끼지 못하는 무감각이 삶을 마비시켜도 알아채지 못한다.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공전하는 위성
한 번 사는 인생이기에 더 기쁘고 행복해야 하고
행복한 자란 영혼의 노래하게 하는 비밀을 찾아낸 사람
머릿속의 지도를 떠올리는 것 만으로 나의 영혼은 엉덩이를 씰룩이며 춤을 추니
내가 바로 그넘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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