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휴가 3일
옛날 같으면 3일의 황금 연휴를 앞두고 얼마나 들떠 있었을까?
지리산 종주를 하기 좋은 최고의 날들
마음을 아는지 연휴 첫날부터 비.
아침부터 바보상자를 부여잡고 올림픽 금메달에 목이 멘다.
이젠 집에서 뭉개는 것도 이골이 나서 옛날보다 견딜만하다.
일요일엔 귀연에서 지리산 속살을 헤집는다는데…
애써 외면했다.
6시간 30분이라는 시간과 그들의 속도가 이젠 두렵다.
토요일엔 마눌과 속리산엘 가기로 했다.
겁이 없어진 마눌이 천황봉과 문장대를 찍자고 한다.
지난 겨울 내 기억으론 6시간이 넘게 걸렸는데….
일기가 불순한 날
마눌이 제안에 허리가 서늘해지고 잠시 내 코가 쑥 빠진다.
이젠 마눌의 전투력에도 추월 당할 판이다.
새벽까지 장하게 온 비라 밖은 온통 젖어 있다.
잔뜩 찌푸린 하늘이 미심쩍어 일기예보를 확인했는데
충북일원은 호우 경보가 발령되었었다.
일단 떠나기로 했다.
심한 비가 내리면 다시 돌아오면 될 일이다.
이틀을 집에서 뒹구느니 바람이라도 쐬고 나면 한결 기분이 나아질 것이다.
아침을 챙겨먹고 점심은 문장대에서 할 생각으로 물과 과일 그리고 약간의
빵만 챙겨 떠나는 길이다.
나의 애마도 나처럼 늙어가고 있다.
컴컴한 지하 차고에서 그 옛날 새벽길을 질주하던 날의 추억을 떠올리며
세월에 녹슬어 가고 있다.
마음대로 떠나지 못하는 아픔을 아는가?
새날의 기대가 탄식과 상심으로 변하면
애써 희망의 노래에 귀 막고 낮은 목소리로 비가를 웅얼거려야 한다.
화창한 날이 오히려 비탄을 부르는 역설을 넘어
척척한 날에
그래도 떠나고 싶은 갈망은 아직 남아 있어서 다행이다.
그냥 편한 여행길이다.
꼭 그 산길을 걸어야 하는 건 아니다.
마눌과 둘이 가는 길이니
시간에 쫓길 일도 없고 늦은 하산을 채근하는 이도 없다.
허리가 아파도 괜찮을 것이다.
먼 길이라도 쉬엄쉬엄 가면 될 터이다.
우울한 하늘 빛 아래
빗물에 씻기우고
저음으로 조용히 가라 앉은 대지를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길은
기분이 한결 좋아지게 한다.
그 여름의 전설은 아직 끝나지 않아
푸른 여름 빛은 아직 무성하다.
옥천을 지나가면서 더 큰 비가 있었던 증거들이 속속 드러나더니
속리산 터널을 지나며 빗방울이 떨어진다
일자 : 2008년 8월 16일 토요일
동행 : 마눌
날씨 : 비,흐림
소요시간 : 7시간
경유지별 시간
10:00 매표소 앞 표지판
10:44 세심정 천황봉 3.1km지점
11:25 상환석문
12:12 능선 갈림길 (천황봉 600m 전방,경업대 1.9km)
12:26 천황봉
14:00 문장대 휴게소 (식사 30분)
14:30 문장대
16:30 법주사 (약 15분)
17:00 속리산 호텔
법주사도 들리지 않을 텐데 3000원의 입장권은 아깝기도 하다.
속리
이름처럼 이 길은 흡사 구도를 위한 길이기라도 한 듯 마음이 경건해지는 길이다.
가랑비가 추실거리는 아침에 한 무리의 운동선수들이 길을 달리고 있다.
몇 년 전 까지 나도 이 길을 뛰어다녔는데……
조금은 지루한 세심정 가는 길은 처음 걷는 길 같다.
간밤의 비가 만들어낸 계곡의 탕류는 시종 아우성이고 나뭇잎은 빗물에 번쩍거린다
세심정에서 갑자기 빗방울이 굵어진다.
마눌이 큰비를 만날까 적정스러워 하는 기색이 역역한데 그냥 오르기로 했다.
다 무슨 수가 있다.
세상일이나 산을 오르는 일이나
부딪히면 늘 또 다른 대안이나 해결책이 나오곤 했다.
변화란 항상 즐거운 것이었다.
단조로움을 거부하는 대자연의 흔쾌한 변화란 예기치 않은 기쁨과 감동을 몰고 다녔다.
오늘은 또 다른 속리의 얼굴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천황봉 가는 길은 온통 물길에 휩쓸리고 성난 계곡은 표효하고 있다.
빗방울은 처음보다 가늘어 지고 우리는 물소리 가득한 인적 없는 계곡을
거슬러 올라 갔다.
무리에서 떨어진 두 마리 연어처럼….
모처럼 내린 비에 달아오르던 대지는 싸늘이 식어 버렸고
산 안개는 된비알에 상기된 피부를 서늘하게 식혀준다.
산중턱 밭은 누군가 개간을 해서 채소를 심어 놓았는데
스프링쿨러 까지 설치해 놓았다.
국토의 효율적인 이용도 좋지만 이건 만인의 땅인데
국립공원 훼손 아닌가?
물길은 정상이 가까와 졌는데도 마를 기미가 없이 계속 큰소리를 내며 흐른다.
천황봉 계곡이 이리 깊었나?
계곡에 이렇게 물이 많은 날은 오늘 처음 본다.
내리는 빗물 때문이 아니라 비에 젖은 산죽 길을 걸어 가느라 옷이 다 젖었다.
바위 조망대에서 휴식하며 위로부터 내려오는 안개 자욱한 속리산 세상을 바라 본다.
모든 걸 다 욕심 낼 수는 없는 일이다.
살아가면서 늘 얻기만 하랴?
때론 손해도 보고 내어주기도 해야 하는 것이다.
오늘은 한여름의 시원한 날을 얻은 대신 조망을 내어 주었다.
지난 겨울엔 천황봉의 장엄한 조망을 얻기 위해 감각 없는 얼굴과 얼얼한 귓볼을 감수해야 했다.
어쩌면 천왕봉에서 운무 사이로 신비하고 근엄한 속리의 얼굴을 마주할 지도 모른다.
바람이 거센 오늘 …
천황봉
오늘은 신비하고 근엄한 속리의 얼굴을 마주하지 못했다.
고난의 등정을 축하 해주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그저 무심한 안개만 흐른다.
허공엔 날카로운 바람소리만 가득하다.
그래도 26번째 속리 천황봉에서 마눌과 추는 춤을 증명해줄 사람이 있었다.
백두대간을 종주하는 5명의 산객
꿈 같이 밟고 지났던 지난날의 그 길을 따라 걷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만나는 행복과 누릴 기쁨을 안다.
지난 밤 폭우에 흠뻑 젖으면서 한편으로 후련했을 그 마음을 안다.
가득한 운무와 바람이 시가 되고
이슬 머금은 능선의 새벽 길을 열 때 쏟아지던 붉은 태양이
가슴 한 가운데 아름다운 그림으로 남았으리라
스스로의 영혼을 노래하게 할 수 있는 그 무엇을 한다는 것
그것이 삶의 기쁨이고 축복이었다.
떠나고 싶은데 갑자기 떠날 수 없는 날들이 올지도 모른다.
문장대 가는 길
지나고 나면 이 길의 기억은 쉽사리 사라지는 모양이다.
마치 속세를 떠나면 그 시간이 무의미해지는 듯이…
그 거리가 능선 길로 3Km 남짓 된다.
1시간 30분은 가야 하는 길인데 기억엔 한 시간 정도의 거리로 남아 있다.
마눌은 한술 더 떠서 30분 이면 갈수 있는 길이라 했다.
조망이 없어 서운한데 바람 부는 서늘한 날씨가 한여름 산행을 잊게 한다.
능선 길이지만 낙차가 크다.
산죽 길을 지나고
바위 길도 지나고
길은 가끔 흡사 계곡으로 다시 내려서는 듯 가파르게 떨어지기도 한다
입석대도 안개 속에 남기어 두었다.
비는 가랑비로 내리고 바람은 파도처럼 몰아친다.
문장대
1시 30분
4시간 만에 문장대 도착이다.
별로 쉬지 않은 걸 감안하면 꽤 먼길인 셈이다.
배가 고파 먼저 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6000원 짜리 된장 국밥
시장이 반찬이라 꾹꾹 누른 밥 한 그릇 뚝딱 비우고
막걸리도 한 사발 마셨다.
늘 문장대 상점과 식당은 철거해야 한다고 목청을 높이면서
오는 날엔 으레 빈 몸으로 와서 한끼 신세를 지고
정상주를 한잔 씩 마신다.
문장대에서 바람은 쇳소리를 낸다.
식사를 하고 나니 한기가 몰려와서
나는 자켓을 입고 마눌은 우비를 입었다.
배낭을 산장에 맡기고 문장대에 가는데
바람이 정말 장난이 아니다.
문장대 매운 바람 맛은 내 이미 알고 있지만
차지 않은 바람이 그렇게 세게 불 수 있음은 일찍이 알지 못했더라.
마눌 우비가 따발총 소리를 내고
철계단 난간에서 몸이 떠밀려
마눌은 결국 문장대에 오르지 못했다.
문장대에는 혼자 올라 보이지 않는 풍경과 바람만 찍고 내려왔다.
하산 길
좌표에 도달하고 목표를 상실하고 나면 긴장이 풀린다.
쌓인 피로가 몰려오면 다리가 무거워지고 갈 길이 멀어 보이기도 한다.
먼 길을 걸어 목적지에 발도장을 찍고 내려가는 길에 마눌이 힘들어 한다.
백두대간을 진군하는 전사처럼 힘이 펄펄 넘치더니 예상보다 길어지는
산행시간의 피로가 누적되는 것 같다.
한바탕 물길이 휩쓸고 지나간 어지러운 길을 천천히 흘러 내렸다.
그 길이 다소 지루하긴 해도 내리막이라 그다지 힘들지는 않지만
그간의 산행시간으로 보아 지금 쯤이면 다리가 아파 올게다.
뜽금없이 번데기가 먹고 싶었는데
번데기를 파는 가게가 없다.
항상 맛있게 먹는 비결 ?
먹고 싶을 때 먹고
배고플 때 먹고
풍경 좋은 곳에서 먹고…
다 좋은데 먹고 싶은 게 없다.
먼 거리였는데 허리에 느끼는 무리는 생각보다 덜하다.
천천히 걸으며 휴식하고 자주 허리운동을 해서 일지 모른다.
법주사
그냥 지나치기 아쉬워 부처님전에 문안인사라도 올리려
법주사에 들렸다.
지난겨울 어둠에 묵상하던 부처님은 다시 금빛 옷을 걸치고 내려다 보고 있다.
넓은 경내를 감도는 숙연함이 가슴으로 전해온다
다시 빗방울이 떨어진다.
우리가 하산한 걸 아시는 모양이다.
마눌은 보리수 아래서 보리수 열매를 줍고
나는 대웅전에 들러 삼배를 올렸다.
“허리 좀 낫게 해주세요”
소원이 달라졌다.
세월 따라 나의 바램은 더 소박해지고 원초적인 곳으로 회귀했다.
건강이 내 소원의 대상이라니…
처음으로 늙어가는 걸 인정하고 싶어진다.
이젠 예전처럼 빨빨거리고 돌아다니기만 할 나이는 아니지만
가고 싶은 곳들을 가지 못하니 인생의 기쁨이 반은 날아 간 것 같다.
아무러해도 지금은 견딜 수 있는데
훗날 자유로워 지는 날에도 마음대로 떠날 수 없다면
그 좌절과 상심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
부처님과 산의 자비와 굽어 살핌만을 바랄 따름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속리산 터널을 넘어 서며 다시 빗방울이 세차진다.
그래도 하루를 하고 싶었던 일로 채우고 나서 돌아오는 길은
뿌듯하고 상쾌한 기분이 계속 따라온다
창을 통해 바라보는 풍경은 평화롭고 아늑하다.
내 마음이 편하니
세상이 내 마음 같아 진다.
그래! 오늘 같기만 해도 괜찮을 것 같다
2007 년 12월 속리의 겨울
속리산 매표소-세심정-천황봉-문장대-법주사
동일 코스 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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