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의 싱그럽고 화창한 날이다.
중국여행길에서 돌아와 한마음 교육 답사 가는 날
출근하는 대신 마눌과 주흘산으로 떠나니 새로운 기분인데
중국 여행길에서 악화되었던 허리의 통증이 자못 걱정스럽다.
평일에
증평 나들목을 나와
신록이 짙어가는 대지를 여유롭게 스쳐지나는 길엔 봄의 서정이 가득하다.
증평에서 괴산으로 가는 길이 많이 좋아졌다.
주흘산은
먼저번 희양산에 갈 때 보았던 연풍 삼거리 장승들을 지나 이화령 터널을 지난다.
5년전 백두대간을 따라 내리다 만났던 이화령
이제 그 아래엔 터널이 생겨 사람들은 구비구비 이화령을 넘을 이유가 없다.
육십령처럼
천둥산 박달재처럼
문경새재는 오래 전 가을
단풍이 흐드러지던 날 온가족들이 함께하던 길이다.
문경호텔을 둘러 보고 1관문을 향해 걷는다.
벌써 한여름의 열기가 느껴지는 성숙한 오월이다.
멀이 보이는 1관문 까지 그 넓은 광장에는 인적이 없고
푸른 산과 맑은 하늘만이 두팔 벌려 우릴 맞는다.
여궁폭포와 혜국사를 거쳐 주흘산 정상에 오르는 길은 4.5Km 이다.
평상속도로 소요시간을 알아보아야 하니 어짜피 천천히 올라야 할 길이라
마음이 편안하고 느긋해 진다.
일 자 : 2008년 8월 5월 15일 목요일
산행지: 문경 주흘산
날씨 : 말고 화창함
산행코스: 제1관문-여궁폭포-혜국사-주봉-2관문-1관문
소요시간: 4시간 40분
경유지별 시간
제1관문-여궁폭포 약 20분 정상-꽃밭서들 약 50분
여궁폭포-혜국사 약 25분 꽃밭서들-2관문 약 40분
혜국사갈림길-안정암 약 20분 2관문-1관문 약 60분
안정암 – 대궐터 약 30분
대궐터-능선 약 20분
능선 - 정상 약 15분
오름길 약 2시간 10분 내림길 약 2시간 30분
합계 4시간 40분
10:53 호텔
11:13 1관문
11:17 충렬사
11:40 여궁폭포
12:20 혜국사 갈림길
12:25 ~13:00 혜국사에서 중식
13:00 혜국사 갈림길 출발
13:16 안정암
13:45 대궐터
14:05 해발 989m 대궐터 능선
14:30 정상
15:50 정상아래 하산 갈림길(정상 200지점)
13:30 영봉 갈림길
16:35 꽃밭서들
16:20 제 2관문
17:20 제 1관문
등산 안내판에는 주흘산 주봉을 올랐다가 계곡 하산 길을 따라 꽃밭서들을 지나서 조령
2관문으로 내려서고 다시 1관문 까지 오는데 총 12.5km로 5시간 소요되는 것으로
표기되어 있다.
입구에 신길원 현감 충렬사가 있다.
문경현감으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고 임진왜란 때 고을을 지키다 순국하신
덕망과 충절을 기리기 위한 사당이다.
백성과 나라를 위한 그 마음이야말로 세상의 혼탁함에 한몫하는 정치인들의 귀감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여궁폭포 가는 길에 어디서 음악소리가 난다.
잠시 길이 헷갈렸다.
길 따라 혜국사가 먼저 나오는지 여궁폭포가 먼저인지 생각이 안난다.
길 옆의 이정표
좌측으로 혜국사 가는길 표시가 되어 있고 큰 길따라 계속 가는 길은 여궁 폭포란다.
음악소리 나는 산비탈엔 매점이 있다.
혜국사 가는 길 표시를 따라 너덜지대를 지나면서
음악은 길은 숲에 가리운 산비탈 매점의 존재를 알리고 위함이고
이정표는 사람들의 발길을 돌리려는 고육책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이 길을 따라 가면 여궁폭포를 건너 뛰고 혜국사로 갈 것 같다.
그래서 또 마음이 급해졌다.
여궁폭포를 보고 와야 하는데 마눌까지 되돌아 가기는 힘들어
마눌을 너덜 길 가운데 세워 놓고 다시 큰 길로 내려서서 여궁폭포로 간다.
예상대로 한참을 가니 큰 길은 은밀한 곳에서 묘상하게 생긴 폭포에 맞닿아 있다.
여궁
참으로 기발하고 그럴듯한 작명이다.
하지만 여궁폭포에서 떨어지는 폭포수는 갈수기라 할머니의 오줌줄기처럼 빈약하다.
갈수기의 주흘산은 세월의 풍상에 지친 여인의 모습으로 다가왔다.
갈림길의 나무이정표는 여기서 혜국사 까지가 20분 걸리고 주흘산 정상 까지는 1시간
50분 걸린다고 알려주고 있다.
항상 분주하기만 한 사람은 몸만 고달프고 별 실속을 차리지 못하는 법이다.
길은 여궁폭포 앞 나무다리를 건너 마눌이 기다리던 너덜지대와 다시 연결되고 있다.
이 길이나 저 길이나 모두 여궁폭포로 통하니 별도 이정표를 만들어 놓지 않아도
사람들은 여궁폭포를 거쳐 혜국사로 오를텐데 괜시리 사람을 헷갈리게 만든다..
예상했던대로.
사람들이 모두 무심코 큰길을 따라 지나가니 호객을 위해 음악을 크게 틀고
갈림길 아래 혜국사 이정표를 세우는 궁여지책이 필요했던 모양이다.
마눌과 함께 왔는데 주흘산의 명물을 그냥 지나치게 할 수 없어 함께 여궁폭포에
들러 사진 한 장 찍고 돠돌아 갈 길을 재촉한다.
혜국사앞 길에서 주흘산 주봉 까지는 2km
시장함이 몰려와 혜국사에 올라 점심을 들고 가기로 했다.
혜국사의 본당은 높은 지대에 있어 가파른 계단 길을 한참 올라야 한다
보수공사를 하고 있고 부처님 오신 날 연등을 아직 길게 걸어 놓고 있다.
혜국사앞 길에서 주흘산 주봉 까지는 2km
시장함이 몰려와 혜국사에 올라 점심을 들고 가기로 했다.
혜국사의 본당은 높은 지대에 있어 가파른 계단 길을 한참 올라야 한다
보수공사를 하고 있고 부처님 오신 날 연등을 아직 길게 걸어 놓고 있다.
큰 나무아래 바람 길에 앉으니 금새 몸이 서늘해 져서 햇빛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대웅전은 잠겨있고 아래에도 사람의 흔적은 없다.
바람이 큰 나무의 무성한 나뭇잎을 흔들고 지나가는 소리를 들으며
가끔 불규칙하게 맑은 소리를 내는 풍경소리를 들으며
그렇게 고즈녘한 초야의 한가로운 식사를 했다.
꼭 보려하지 않아도 둘러 쌓인 푸른 산과 파란 하늘이 바라보이는 대웅전 앞마당에서
가진 둘만의 만찬이었다.
안내 표석을 읽어보니 혜국사는 통일신라 때 보조국사 체증선사가 주흘산 기슭에
법흥사란 이름으로 창건한 절이라 한다.
그런데 사찰의 규모도 작고 유서 깊은 절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아마도 전란으로 소실되고 현세에 이르러 여러 번 중건을 거친 모양이다.
혜국사란 이름은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이 절로 피신한 적이 있는데
그 때 나라가 은혜를 입은 절이란 의미로 붙여지게 되었단다.
안정암은 혜국사에서 400m 곳에 공터만 남아 있다.
오래 산을 돌아 보면서
그 수많은 길을 혼자 묵묵히 걸어 가면서
암자에 들어 혼자 수행하는 불심을 조금은 알 듯도 하다.
법열은 깨달음에서 온다.
무릇 범인이야 빛처럼 확연히 드러나는 깨달음 한 가운데 설 수야 없겠지만
평온한 마음으로 혼자 있는 시간에 가끔 우리는 잃어버린 그 무엇인가를 찾은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그걸 마음의 평화라 해도 좋겠다.
세상의 이치와 삶의 한 편린에 대한 작은 끄덕임 이겠지만
그것이 혼자 있는 외로움 대신 차분하게 정리된 마음과 충만한 기쁨이 들어와 앉는다.
수행이란 홀로 느끼는 기쁨일지도 모른다.
세상의 바람에 흩날리는 건 무수한 혼돈과 번민이다.
그걸 모두 내던지고 가슴에 무심한 푸른 하늘과 맑은 바람만 들이고 살면
더 큰 행복을 만나지 않을까?
한겨울 장짓문에 우는 바람소리가 노래가 되고
떨어지는 빗소리가 시가 되고
허허롭게 날리는 눈발이 삶의 축복과 소소한 행복을 가져다 주지 않을까?
공민왕이 머물렀다는 대궐터에 닿는다.
한쪽엔 쫄쫄거리며 흐르는 샘이 있다.
물을 받으려다 보니 샘터 돌확에 누군가 '주흘산 백 번 오르니 이 아니 즐거우랴' 라는
글귀를 새겨놓았다.
100번?
한국의 산이 4400개라는데 한번 오르기도 바쁜 판에 어찌 100번이나 오르겠나?
아마도 왕이 머무르게 되어 대궐이라도 지으려 했던 모양이다.
전란을 피해 구중궁궐과 백성을 버리고 낯선 곳으로 숨어들어
바람 길에 쓸쓸히 앉아 도성의 전갈을 가져올 파발을 기다렸을 임금의 외로움과 처량한
심정이 전해온다
대궐터에서 주흘산 아래 능선안부 까지는 등로가 가파라 지는데 약 30분 정도 소요된다.
능선안부는 온통 푸른 녹색 빛으로 둘러 쌓인 넓은 공터이다.
나무 그늘 아래 앉으면 가끔 부드러운 바람이 산행 길의 열기를 조용히 식혀주는 곳이다.
주봉 가는 길에 연분홍 철쭉은 이제 막 꽃망울을 터뜨리려 하고 있다.
바위 사이로 아래 평야지대가 내려다 보이는 곳을 지나자 이정표가 선다.
주흘산 주봉 200m 전방. 오늘 등산기점 1관문은 3.5km.
계곡 길을 따라 꽃밭서들을 거쳐 2관문으로 내려서는 길은 4.3km 이다.
주봉
별 어려움 없이 주봉에 섰다.
천천히 걸어도 2시간이면 족한 거리이다.
오른쪽으로 관모봉이 바라다 보이고 두 줄기 낮은 능선이 앞으로 달려가는 모습이 보인다.
주흘산은 일대에 우뚝하나 지난 겨울 넘었던 부봉이나 백두대간 조령산과 신선봉으로 이어지는 장대한 암릉지대와는 사뭇다른 육산으로 등산길의 풍광과 스릴도 많이 떨어진다.
그래도 백두대간 상에 위치한 조령산이나 신선봉은 100대 명산의 반열에 오르지 못했어도 주흘산은 100대 명산에 속한다.
산림청에서 여러가지 사항을 고려하여 정했겠지만 그것도 사람이 정하는 일이다 보니 보는 관점에 따라서는 100대 명산에 대한 의견이 분분할 수도 있으리라.
능선에서 30~40분 위치에 솟아 있는 영봉은 울창한 나뭇잎들 때문에 자세히 보지 않으면 잘 보이지 않는다.
영봉(1106m)이 더 높은 곳이라 영봉을 정상으로 보는 게 맞겠지만 풍광이나 산세로 보아 사람들이 많이 오르는 주봉(1075m)이 자연스레 정상의 위치를 고수하고 있는 듯하다.
주봉이란 그 산의 생김새와 산세를 한데 모아 평할 때 높이와는 관계없이 가장 으뜸으로 여기는 곳을 일컫는다.
주흘산의 정면은 신라 이래로 문경현의 현아(縣衙)가 있던 문경읍소재지가 된다.
주흘산의 정면인 문경읍쪽에서 바라보면 산세가 더 두드러지고 좌측에서 우측까지 이어지는 봉들이 한 눈에 들어온다.
앞쪽에서 볼 때 이들 봉 중에서 주봉이 가장 높고 우뚝하게 눈에 들어오며 장대한 기운을 내비치고 있지만 주흘산 정상인 주흘영봉(1,106m)은 주봉 뒤쪽에 위치해 형체가 전혀 보이질 않는다.
특히 고지도인 해동지도(18C 중엽)에는 주흘산의 전체적인 봉들을 주흘산이라 표기를 하면서 우측의 주흘주봉인 1,075봉 있는 곳을 '蠶頭峯(잠두봉)'이라 별어로 표기를 하고 있는데 누에가 머리를 쳐들고 있는 모습에서 유래된 명명이라 한다.
일제시대 측량이 시작되면서부터 산 높이가 정해졌으나 그 이전에는 산 높이에 대한 개념은 전혀 없었으니 일대에 위용을 드러내는 주봉이 오랫동안 정상으로 군림해 왔을 것으로 보인다.
옛 사람들은 산을 우러름의 대상으로 보았지 요즘처럼 높이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일들은 없었다.
산 높이에 대한 것은 측량술이 발달하고 지적도가 생긴 일제 때부터의 일들인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정상은 산 높이에 대한 것으로 그 산 가운데 가장 높은 곳을 의미하고, 주봉이란 전체적인 산세로 보아 주(主)가 되는 봉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면 무방할 듯 하다.
주흘산 정상에는 아무도 없다.
아무리 평일이라도 100대 명산에 속하는데 오르는 길에 약초 캐는 주민 3명 만났던 것 말고는 아무도 만날 수 없으니 조선반도 100 명산의 위상이 무색하다.
볼거리가 많은 있는 곳인데 옛날 왕건 촬영시절에 사람들이 다녀가서 인지 산세가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아서 인지 산을 찾는 사람들이 그리 많지는 않은 모양이다.
외로운 고봉에 표석만 외롭고 마눌과 함께하는 백대명산 순례 길에 기념촬영을 해 줄 사람이 없어서 팔을 내밀고 셀프카메라를 찍었는데 표정이 우스꽝스럽고 땀구멍이 너무 크게 나왔다.
외로움을 달래주려 나비 한마리 찾아 주었다.
호랑나비
고봉을 오르다 지쳤는지 흡사 바위가 꽃이기라도 한 듯 조용히 날개쉼을 한다.
항상 정상에 서면 느껴지는 뿌듯함과 후련함에
오월의 무심 날 산객없는 정상의 호젓함이 더해서 그 느낌이 더욱 각별해진다.
어쩌면 바람직한 노년의 삶이란 가슴에 쌓인 욕심과 분노를 삭이고 정제된 기쁨을 쌓아가는
여정이어야 할거란 생각을 해본다.
잠시 표석에 앉아 흘러가는 묵묵한 산하와 들판을 내려다 보다 온 길을 되돌아 길을 잡는다.
초록의 새순으로 가득 찬 수림이 너무 싱그럽다.
잔돌이 많고 길이 고르지 않긴 하지만 계곡을 울창한 수림을 따라 내려가는 길은
편안하고 기분이 절로 좋아진다.
군데군데 누군가 소원을 빌려고 쌓아 놓은 돌탑들을 바라보며 40분 남짓 내려가니 영봉과 연결된 등산로가 나타난다.
영봉을 거쳐 내려오면 이 길에서 만날 텐데 1시간 이상 소요 될 것 같다..
꽃밭서들
갈림길에서 5분 정도 더 내려가면 꽃밭서들이 선다.
편안한 산세가 느껴진다.
가는 길 부봉이 바라다 보이고 가득한 너덜지대에 누군가 또 소원의 돌탑을 쌓았다.
살아가는 것이란 늘 한쪽 가슴을 허물어야 하는 것이라 했다.
세상의 일이란 무엇인가 정해진 이치대로 흘러가는 듯해도 항상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고
때론 작은 가슴으로 감당하기에는 너무 벅찬 것이기도 해서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을 때가 있는 법이다.
돌탑 하나하나는 누군가의 간절한 소망과 희망이 담겨져 있다.
그냥 저 탑에 담긴 희망과 소망의 좋은 기운들이 마눌과 내게 전해지면 좋겠다.
꽃밭서들은 봄에 진달래 꽃이 인상적인 곳이라 한다.
주흘산은 야생화의 보고로 알려져 있고 이 계곡을 따라 다양한 야생화가 자생한다고 하는데
계곡의 위 쪽부터 꽃이 피어 내려 온다고 한다.
제 2관문이 가까워 지면서 바닥을 드러냈던 건천이 군데군데 계곡웅덩이에 물을 갈무리하고 있다.
제 2관문
언젠가 걸었을 길이다.
부봉을 걸었던 날이나 아니면 기억이 가물가물한 그 어느 날에…
되돌아 가는 길은 인상적이다.
잘 정비된 산책로와 길 주변의 많은 볼거리들엔
역사의 향기와 선인의 체취가 배어 있다.
실폭이 흐르고
통나무 수로를 따라 차가운 계곡수가 흐르기도 한다.
산불됴심이라고 씌여진 조선시대의 표석도 있다.
오랜 세월 동안 많은 사람들이 하나씩 쌓아 올리고 다시 허물어지기를 수 없이 반복했을
소원 성취 탑에는 세월을 이어오는 뭇 서민들의 소박한 바램이 쌓여 있을 터이다.
청운의 뜻을 품고 그 길을 따라 과거 길에 올랐던 무수한 사람들은 세월 속에 떠나고
살아오는 동안 그 많은 길을 걸어왔던 내가 이제 불편한 허리를 한 채 이 길을 걷고 있다.
내가 걸어온 길처럼 지나온 흔적없는 길을 걸어가다 보면 세월은 또 그렇게 흘러 갈게다.
인생은 원대한 것도 아니고 무상한 것도 아니다.
바람처럼 물처럼 하늘의 구름처럼 그저 무심히 흘러 가는 것이다.
희로애락이란 세상의 바람에 흔들리는 가슴이 만들어 낸 마음 속의 풍경일 뿐이다
궁예촬영지 주변의 계곡은 자못 웅장하다.
촬영지를 지나 용추가 있다
갈수기 인데도 제법 수량이 많다.
산이 더 푸르던 그 시절에 수많은 시인과 묵객들이 가던 길을 멈추고 물가의 바위에
쉬어 갔을 경관이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새재 밑의 동화원 서북쪽 1리에 있다.
폭포가 있는데 사면과 밑이 모두 돌이고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으며 용이 오른 곳이라고 전한다.”
여기서 수려한 경개에 취해 이황(퇴계)이 읊었던 시한수가 걸려 있다.
큰바위 힘이 넘치고 구름은 도도히 흐르는데
산속의 물 내달아 흰 무지개 이루었네
성난 물 낭떠러지 입구에서 떨어져 웅덩이 되더니
그 아래엔 먼 옛날부터 이무기 숨어 있네
푸르고 푸른 노목들 하늘의 해를 가리는데
나그네는 유월에도 얼음이며 눈을 밟는다네
깊은 웅덩이 곁에는 국도가 서울로 달리고 있어
날마다 수레며 말밥굽이 끊이지 않는다네
즐거웠던 일이 몇 번이며 괴로웠던 일이 또 몇 번 이던가 ?
하는 땅 웃고 예와 오늘 곁눈질하니
큰 글자 푸르 녹은 듯 바위에 씌여져 있으니
다음날 밤에는 응당 비를 내리리라…
그 시절 이 길의 풍경과 선비의 풍류가 전해 온다.
교귀정을 지나면 새재 주막이 선다.
누군가 새재에 묵으며 썼을 싯귀에 묻어나는 나그네의 수심이 발길을 잡는다.
험한 길 벗어나면 해가 이우는데
산자락 주점은 길조차 가물가물
산새는 바람피해 숲으로 찾아 들고
아이는 눈 밟으며 나무 지고 돌아 간다.
야윈 말은 구유에서 마른 풀 씹고
피곤한 몸종은 차가운 옷 다린다
잠 못드는 긴 밤 적막도 깊은데
싸늘한 달빛만 사립짝에 얼비치네
표석에 뜬구름 같은 인생과 세월의 무상함을 자탄하는 시 한수 새겨 있다.
살랑살랑 솔바람 불어오고
졸졸졸 냇물소리 들려오네
나그네 회포는 끝이 없는데
산 위에 뜬 달이 밝기도 하다.
덧없는 세월에 맡긴 몸인데
늘그막 병치레 끊이지 않네
고향에 왔다가 서울로 가는 길
높은 벼슬 헛된 이름 부끄럽다네
삶이란 바람처럼 지나가는 거다
부귀와
영화도
모두 세월 속에 사라져 가고
모든 인생은 다시 동일 선으로 수렴된다.
세상에 내 것이란 아무 것도 남지 않고
병든 한 몸마저 흙으로 돌아 갈 텐데
나이가 들어도
사람들이란 원래 욕심을 버리기 힘든 모양이다.
오래 전에 있었던 것들과
함께 살아 가는 많은 것들이
어떤 길을 따라 걸어가야 할지 알려 주어도
잠시 그 길을 걸어 가다
우린 번번히 엉뚱한 길로 들어서곤 한다.
사람들은 그것을 삶이라고 한다.
가고 싶은 길만 골라 걸을 수 없는 길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살아갈 수 없는 날
조령원터를 지나면 동령정이 나오고 길은 지름틀 바위를 지나 조산으로 이어진다.
조산을 지나면 왕건 셋트장이 있다.
단풍이 불타던 어느 가을 날 온 가족들이 함께 찾았던 곳이다.
멀리서 보면 셋트장이 그럴 듯 하고 근사한데 가까이 가보니 기와며 건물들이 모두 프라스틱으로 만든 것들이라 실망스러웠던 기억이 있다.
잠시 내려가면 좌측으로 혜국사 오름길이 나타나고 대성산업 사유림 현황을 나타낸 표지판이 선다.
대성산업의 사유림이라 기업측의 많은 투자가 이루어지고 왕건셋트장 설치 이후에 수많은 사람들이 방문하면서 이곳 새재 관문을 잇는 길에는 다양한 볼거리가 잘 조성되어 있다.
교통과 군사의 요충지
그리고 문물교류의 통로였던 새재는 아마도 그 옛날에도 사람의 왕래가 빈번했을 터이다.
선비들이 과거보러 서울로 가던 이 길은 지나간 시간의 향기를 풀풀 날리는 이제 멋진
산책로로 변해 있었다.
모처럼 그다지 힘들지 않은 산행을 마치고 편안하게 출발지인 1관문으로 회귀했다.
할매집에 들러 돼지고기 숯불구이 정식 시켜 목을 축이고 대전으로 출발했다.
일부러 이화령을 넘었다.
그 옛날 나의 땀이 서린 곳에 서서 흘러가는 백두대간을 바라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그런 때가 있었다.
고통과 힘겨움이 역설적인 기쁨으로 훨훨 날리던 그 때
기운차게 뻗쳐오른 대간을 바라보면서 가슴은 뛰고 마음은 거친 능선으로 다시 달려가고 있었다.
변함없는 젊은이의 마음으로 언젠가 그 길을 꼭 한 번 더 걸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가슴으로 북바
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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