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악산은 은둔의 땅이다.
대전에서 가까운 거리에서 직지사라는 걸출한 사찰을 품고 1000m가 넘는 큰 산의 위용을 자랑하고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지 않는다.
사실 직지사란 절은 너무 유명해서 모두 잘 알고 있지만 그 고찰이 웅거하는 산이 황악산이란 사실과
그 황악산이 백두대간에 속해 있다는 사실은 많은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듯 하다.
설악을 다녀오고 그 가을이 여운이 잔상이 오래 남아
대전에서 그리 멀지 않은 황악산의 가을을 보고자 했다.
먼 산을 가고자 하면 산악회 버스에 묻어가는 방법이 가장 편하겠지만 마눌과 함께 손수 차를 몰면서
가는 길은 호젓한 여행의 기쁨과 자유를 가져다 준다.
직지사는 대학시절 자주 찾았다.
그 때는 잘 몰랐지만 내 유전자에 각인된 타고난 표박과 방랑벽은 늘 어디론가 떠남에 목말라 했고
직지사는 호주머니가 가벼운 가난한 대학생의 좋은 비상구였다.
아마 비둘기호였을 게다.
차창밖에 밀리는 풍경을 단 한 순간도 놓치지 않으며 직지사로 갈 때 타고 갔던 그 느린 열차
간이 정거장 마다 서던 그 열차는…
계절에 바뀌어 가는 들판과 오르내리는 사람들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높은 음으로 “뽀옥” 하는 기차의 기적소리와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를 듣는 것이 좋았다.
마음이 푸근한 시골길을 걸어 어느 굴다리 밑을 지나서 직지사에 도착했엇을 게다.
절이 좋아서가 아니라 구경하기 좋은 느린 기차를 타는 기쁨과 호젓한 들길을 걸을 수 있는 자유 때문
이었다.
그 때 공부를 가르치던 아이들을 데리고 몇 번쯤 갔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오랫동안 그 편안한 방랑의 은신처를 잊었다가 결혼 한지 얼마 안된 어느 봄날 그 여행길을
다시 열었다.
마늘과 장인 장모 모시고 처갓집 식구들과 함께…
그 때 절에서 조금 벗어난 모퉁이에서 고기를 구워 먹었다.
그리고 2002년도 월드컵의 개막과 더불어 백두대간 종주를 시작했고 2003년도 어느 날 새벽을 열고
궤방령에서 황을 올라 그 부드러운 능선 길을 걸어 내렸다.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3월의 황악산은 겨울의 큰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여기저기 부러진 소나무
들과 군데군데 잔설이 남아 있던 등로의 모습이었다.
정상부근에 피어 계절의 운치를 더하던 억새군락과 넓은 산정의 모습도 기억난다.
황악산을 넘어서며 부드럽게 흘러가던 백두대간 주유 길은 별로 힘들지 않고 편안했었다.
요즘 같이 자동차 유지비가 많이 드는 때 마티즈 여행은 안성맞춤이다.
완전히 변해버린 길에서 그 옛날의 기억은 아무런 실마리를 찾을 수 없었다.
세상의 변화는 숨가쁘다.
주차장은 엄청 크고 관광버스에 사람들은 북새통이다.
소박한 입구의 식당들은 새롭게 단장하고 규모를 키워서 그 옛날의 모습을 떠올릴 수 조차 없다.
사람들은 보수적인 것 그리고 지켜야 할 것들에 조차 여지 없이 변화의 논리를 전도한다.
훗날 점점 더 볼거리가 적어지는 이 나라에서 아직은 좀 덜 알려진 명승지나 종국엔 사람들이 몰릴 수
밖에 없는 곳에 투자하고 시간으로 승부하면 성공할 것이다.
우리는 절에서 멀리 떨어진 주차장 외진 곳에 차를 세우고 천천히 걸어 올라갔다.
절로 올라가는 길에는 볼거리가 많다.
시에서 적극적으로 개발하여 가족 쉼터로 만들어진 직지공원에는 분수가 뿜어 올라가고 잘 조성된
잔디밭과 벤치들이 여유롭고 편안한 관광지의 분위기를 만들어 준다.
길가에 즐비한 할머니들 좌판 위에서 눈길을 끄는 과일 약재 그리고 황악의 특산물들이 있어 가는
길이 심심치 않은데 벌써 은행 잎은 노랗게 물들어가며 황악의 가을을 기별한다
돌아오는 길에 경내를 찬찬히 구경하기로 하고 먼발치에서도 가을이 달려가는 모습이 보이는 황악의
능선을 바라보며 은둔의 숲으로 잠행했다.
산중의 절에 가져갈 것이 무엇 있고 또 가져가려는 사람이 있기나 한지 높이 쌓아 놓은 사찰의 돌담을
지나갔다.
우리가 가는 길이 늘 그러하듯이 인적은 없고 아직 가을이 내려오지 않은 숲은 아직 상기된 푸른
빛이다.
황악산 등산로 안내도가 잠시 살펴 보고 오르는 길은 생뚱맞은 콘크리트 포장길이다.
“뭐할랴고 그랴요?”
주지스님을 만나면 물어 보고 싶다.
자연으로 돌아가 사람들에게 숲의 편안함과 신선함을 되돌려 준 오대산 전나무 숲을 벤치마킹하라고
말해주고 싶다.
어머니 같은 넉넉한 산에 대한 예우를 이렇게 밖에 할 수 없을까?
이 멋진 가을날 공원과 경내는 장터처럼 붐비는데 이 푸근한 숲길을 수 많은 사람들과 굳이 유리시킬
필요가 있을까?
산 행 일 : 2008년 10월 26일 (일요일)
산 행 지 : 직지사 황악산
동 행 : 마티즈 몰고 마눌과 두리
날 씨 : 다소 바람이 강하게 부는 맑은 가을
정상의 나무들은 이미 낙엽으로 갔으나 아래 쪽 단풍이 조금 이른 듯
소요시간 : 약 4시간 30분
산행코스 : 직지사 – 정상 – 백련암 -형제봉 – 직지사
경유지별 시간 :
11:48 : 공원 길
12:08 : 직지사 경내
12:40 : 황악산 3000 전방 “힘내세요” 이정표
13:02 : 바람부는 능선, 황악산 여시골산 갈림길
14:30 : 황악산 정상
14:58 : 황악산 정상 <- 9km 바람재 ->1.3km
15:04 : 형제봉 아래 폐쇄 등산로 하산
16:10 : 비탈길을 내려와 계곡 등산로 만남
16:20 : 폐쇄통로 하산완료
16:36 : 다시 직지사
16:58: 직지 공원
애교 있는 표지판이 선다.
“황악산 3000m 힘내세요!”
이미 오래 전부터 궁극의 목표는 정상에 있지 않다.
우리는 그 과정을 즐기는 것이다.
함께 늙어 가는 마눌과 함께 떠나는 길의 편안한 즐거움이 있고
계절이 흘러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낭만이 있다.
세상의 시름을 숲에 내려 놓고 더 소중한 것들을 담아올 수 있다.
바람불어 재수 좋은 날이면 문득 어느 모퉁이를 돌아
잊었던 반가움을 만날지 모른다.
능선에 올랐다.
바람이 거칠게 인다.
몸은 바람에 떠밀리고 모자는 저만치 날아 간다.
가지는 휘어지고 잎은 등을 보이고 누워 바람의 힘과 가는 길을 확실히 알려주고 있다.
바람결이 차갑지 않은 세찬 바람은 가슴을 후련하게 했다.
과일을 깎아먹고 능선을 오르다 안부 공터에서 점심 식사를 한다..
여유로운 길이다.
재촉하는 이 없고 날이 저물기 까지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 있으니 쉬엄쉬엄 황악의 풍광에 취하며
발길이 밀려도 좋은 길이다.
멀리 황악산이 보이는 능선 길을 감돌아 한참을 올라야 본 능선의 허리에 오른다.
아쉽게도 깊게 파인 상처를 드러낸 채 훼손에 속수무책인 능선 길을 오르면서 시야를 막던 산릉이 사라지고
조망이 터진다.
등로 한켠 공터에 돌탑이 쌓아져 있다.
앞으로 멀리 분지가 보이고 옆으로는 웅장하게 휘감겨 도는 황악의 산세가 막힘없이 바라다 보인다.
좀더 올라 정상부근으로 가자 낯익은 억새의 숲이 보인다.
태양을 받아 부드럽게 빛나는 억새의 갈기와 넉넉한 정상
여기가 나의 땀과 열정이 남겨진 곳이다
억새 숲에 휴식하는 사람들이 정겹고 휘어 도는 산릉을 넘어 포개진 산주름이 자못 웅장하다.
정상에서 조락해가는 갈색의 잎들은 벌써 겨울을 준비하고 있다.
수려한 풍광이라 할 수 없어도 넉넉하고 후덕한 산세에 마음이 푸근해 진다.
갈대 숲을 넘어 능선 한 켠에 표지석이 서 있고 돌탑이 쌓아져 있다.
그렇게 많지는 않지만 일단의 사람들이 정상에 선 기쁨을 만끽하고 있다.
직지사 경내에서 두 시간 남짓 걸렸다.
우리는 황악의 능선에 걸터앉아 조용히 황악이 주는 기쁨을 받았고 난 그 옛날의 추억과 감동의 실마리를
찾아내려 애쓰고 있었다.
그날은 2003년 아직 바람결이 따뜻해 지지 않은 3월의 이었다
나의 블로그에는 그날의 감회와 느낌이 담긴 긴 기록이 남아 있다.
구 간: 제 20구간 (궤방령-황악산-우두령)
도상거리: 14km
일 자: 2003년 3월 23일(일)
날 씨: 흐림
기 온: 2~15c
10 : 10 괘방령 출발
10 : 40 여시골산
11 : 10 운수봉(740m)
11 : 55 백운봉(770m)
12 : 15 황악산(1111.4m 비로봉)
헬기장에서 식사후 12시 15분 출발
12 : 50 형제봉
13 : 05 바람재 삼거리
13 : 20 바람재(헬기장)
13 : 45 무선 중계탑
14 : 00 1030m봉
14 : 25 985.6m봉
15 : 10 우두령
삶. 그것은 마치 파도처럼 넘실거리며 다가오고 햇살처럼 퍼져 나간다.
그것은 세차게, 도도하게 흘러가는 강물이나 거세게 휘몰아치는 회오리바람이기보다는 섬세
한 작은 물방울들 같은 것이다.
그것은 강한 힘이기보다는 부드러운 빛과 같은 것이다.
피에르 쌍소 -느리게 산다는 의미-
인생에는 수 많은 즐거움과 고통과 그리고 빛나는 순간들이 점철되어 있다.
인생은 언제나 동일한 속도로 현재로 흘러들고 같은 흐름으로 미래를 향해 나아간다.
그 흐름을 빠르게 혹은 느리게 함은 그저 그 시간 속에 머무르는 사람의 마음일 뿐이다.
작은 빗물이 도도한 강으로 흐르듯
순간의 작은 시간의 흐름들은 벌써 이만큼 인생의 나이테를 그었고 내 몸 구석구석에 세월
의 흔적을 남기고 있다.
몸은 늙어 가도 마음은 늙지 말아야 하는데…
수 많은 인생 길에서 그 숱한 선택의 길을 걸어 오늘의 내가 있음은 내의 의지라기 보다는
운명과 섭리와 같은 것은 아닐까?
그런 선택을 할 수 밖 없도록 프로그램 되어진 운명….
삶이 갑갑하게 느껴지는 날에는
그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자
거기 높아 있는 산이 있고 뭉게구름을 스치는 산들바람이 있다.
검은 구름과 폭풍우가 몰려와도 또 어떤가?
아침햇살이 저녁노을로 사그러지듯 어둠 속에 다시 새벽이 밝아오듯 그렇게 밀려오고 밀려가
는 것이 인생인걸.
바람이 불어도 좋고, 붉게 타는 단풍을 보며 가랑잎을 밟아도 좋다. 눈이 오면 늙어 메말
라 가는 가슴마저 두근거리고
이제 꽃피는 봄이 오려니 산과 하늘이 더 누부시구나
깊이 사랑하고 간직할 수 있는 따뜻한 가슴이 있다면 , 아직 오를 수 있는 많은 산들과 추억
할 수 있는 시간들이 가득하다면 우리 인생이 어찌 즐겁지 않을까?
우리가 한탄할 건 남지 않은 시간이 아니라 잃어버리는 시간들이 아닐까?
난 오늘도
가득한 봄의 희망과 大自然을 품에 가득 안고 저 넓은 벌판으로 떠나고 싶다.
어려움 속에 하산해서 더 이상의 비상에 실패하고 날개를 접었던 괘방령에는 10시 10분에
도착했다.
괘방령은 977번 지방도가 지나며, 옛날 도보로 다니던 시절에 서울과 부산을 오가는 세
관문 중의 서쪽 관문으로 주로 상로(商路)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에는 박이룡이 의병을 일으켜 이 고개에 방어진을 치고 왜적을 막아 큰 공을
세웠다고 하는데 영동-김천간의 주요 교통로로 이용되고 있다.
온통 흰 눈으로 덮여있던 황악산은 그간 따뜻했던 봄기운에 흰 눈 옷을 말끔히 벗어버렸다.
여시골산 가는 길이 하도 가파르다 보니 모두들 힘겹게 오른다. 지난 출정 때 무리해서 감행
했더라면 아마 고생께나 했을 듯 싶다.
여시골산을 지나 산행을 계속해가는데 해발이 높아 지면서 아직 녹지 않은 만은 눈들이 남
아 있다.
이제 우리 팀들이 많이 단련이 되어서인지 가파른 능선을 몇 굽이 넘어서도 휴식할 줄 모른
다.
오르는 길목에서 이채로웠던 자연 굴은 꽤나 깊다.
“저 굴 속은 미국의 벙커 버스터에도 안전할까?”
나중에 전쟁 나면 계룡대가 있는 대전은 위험하니 황악산에 와서 숨을까 보다.
대표적이 육산인 이 구간은 눈도 녹고 인적도 드물어 드문드문 지나치는 대간 종주팀과의
마주침 이외에는 한적하다.
운수봉 못 미쳐서 조망이 트인 언덕에서 휴식했다.
저 멀리 지난번 우리들을 혼냈던 가성산이 보인다. 무척이나 아름다웠던 저 산록이 날리던
눈발과 쌓인 눈에 그렇게 험하고 힙겹게 다가올 수 있었다니….
그래도 멋진 풍광과 기억에 남을 추억 이었다.
운수봉을 지나니 직지사 방면에서 올라온 등산객들이 많다. 백운봉에는 사방을 두루 조망할
수 있어 종주팀과 등산객들이 한무리 가득하다.
날은 흐리지만 봄기운이 완연하고 인근에서 단연 걸출한 산이라 제법 많은 등산객들이 산을
찾고 있는 모양이다.
모두 산을 닮아 가는 편안한 모습들이다.
두 시간 정도 오르니 억새가 하늘거리는 넓은 분지와 헬기장이 주변의 멋진 조망에 둘러
쌓여 홀연히 나타난다.
평화롭다
내 사는 곳에서 멀지 않은 곳의 마을과 들판 그리고 흘러내리는 산주름이 정겹다.
그냥 평화로운 고봉의 편안하고 넉넉한 그 모습을 간직하고 싶어 셔터를 눌렀다.
황악산(黃岳山)은 경북 김천과 충북 영동면 상촌리 그리고 매곡면을 경계로 하며, 한반도
중추 태백산맥에서 갈라져 내린 소백산맥 허리 부분에 자리잡고 있다.
해발 1111.4m의 비로봉과 백운봉, 신선봉, 운수봉, 형제봉, 바람재를 아우르는 부드러운
능선의 흐름과 명찰 직지사를 품고 있다.
황악산은 옛날에 학이 많이 서식했다 해서 황학산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높이에 비해 산세가
완만하고 평탄하여 부드러운 느낌이 들고 토질도 좋아 산더덕과 나물이 많다.
1000고지를 넘고 있지만 별 특징 없는 육산 이라 황악산 비로봉은 그 산세에 비해선 많은
사람이 찾지 않는 셈이다..
민주지산 ,석기봉 ,삼도봉의 거봉과 큰 흐름으로 넘어 덕유로 연결되는 장대한 지맥의
힘찬 시발인 황악산은 상대적으로 주목 받지 못하긴 해도 그저 구수한 시골 아저씨와 같이
소박하고 후덕한 인상으로 실제 높이보다 낮아 보이는 그저 넉넉한 그런 느낌의 산이다.
비로봉 정상에서 바라보면 서쪽으로 민주지산이, 남쪽은 수도산이 위치한다. 길게 이어지는
백두대간 능선이 한반도 중간 허리를 탄탄하게 받혀주는 형상이다..
오랫만에 모두 함께 점심을 먹는다.
대부분 김밥이 주종이지만 따뜻한 봄날의 산들바람과 일찌감치 올라서서 바라보는 고원의
아늑한 풍광이 입맛을 한껏 돋운다.
식사후 정상에서 한 컷 때리고 나니 아래로 흐름을 잡는 능선을 따라 눈길이 간다.
남쪽으로 형제봉과 바람재가 발아래 내려다 보인다.
능선을 따라 편안하게 내달릴 수 있는 길이려니 했더니 의외로 길가에는 높은 눈두덩이가
남아 있다.
바람에 실려 능선 끝자락에 형성된 커니스
마지막 뒷꼬리를 감추고 있는 겨울의 모습이다.
그렇게 장쾌한 설국을 열어 주었던 겨울이 가는구나
웬지 코끝이 찡하다.
형제봉 가는 길에
곳곳에 폭설로 인하여 부러진 나무가 널려 있다. 가지만 부러진 게 아니라 나무의 큰 등걸
이 사정없이 쪼개져 흡사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것 같은 처참한 모습이다.
폭설로 담을 수 있는 최대한의 적설을 머리에 인 나무가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면서 가지
가 뿌러지거나 등걸이 쪼개지는 것이다.
최전방에서는 한겨울 심야에 보초를 설 때면 눈을 이기지 못한 나무가 스스로를 갈라내는
소리가 골짜기에 날카로운 비명처럼 울려퍼진다.
산불에 홍수에 그리고 태풍과 심지어 내리는 눈에게 까지 수난을 당하는 나무의 운명도 서글
프고 고단하다.
작년 여름 수해가 할키고 간 처참한 상흔을 보고 오늘 또 형편없이 찢기어진 나무들의 아픔
을 본다.
불어오는 봄바람과 돋아나는 새순이 이제 그 아픔을 보듬어 주리라
한참을 내달려 형제봉을 지나니 신선봉 가는 길과의 갈림길이 나타난다. 신선봉 쪽으로 하산
하면 직지사로 연결된다.
바람재에는 멋지게 단장해 놓은 넓은 헬기장이 있다. 주변에는 목장을 조성하여 목초지가
무성하고, 간간히 아직 녹지 않은 눈 위로 억새밭이 능선을 가득 메우고 있다.
바람재에는 간간히 바람이 목을 스친다.
상쾌한 느낌으로 기분이 날아갈 듯하다.
바람이 많아서 바람재 일까?
양쪽 능선이 막아선 분지 형태 인데 앞 뒤가 열렸으니 자연스런 바람 길이다.
꼭대기에는 중계탑과 간이 화장실이 있다. 군데군데 임도를 따라 대간길은 허리가 잘리고
일부만 남아 종주팀을 맞고 있다.
대간팀 모두 기분 좋은 멋진 산행이다.
밝은 아침과 함께 산뜻한 모습으로 맞이하는 산하의 풍광이어서 더욱 가벼운 발길이다.
1030m봉을 지나니 능선의 내리막길이 한눈에 보인다. 멀리 삼도봉과 민주지산이 보이고
그 너머로 덕유산 자락이 웅장하게 시야에 들어온다.
능선 길을 따라 경북과 충북이 구분된다.
점점이 보이는 민가가 너무도 한가롭다.
속세를 떠나 이 자연 속에서 나무와 농토를 가꾸며 사는 인생
은퇴와 함께 찾아야 할 내 삶의 모습이 아닐까?
아마 앞으로 머지 않아 서울이며 대도시는 사람이 살기에는 열악한 환경이 될 것이다.
좋은 공기와 맑은 물 이상 인간의 건강에 더 소중한 것이 있을까?
열심히 산 좋고 물 좋은 곳을 찾아 주유하면서 노년에 기거할 좋은 터를 한번 생각해 둘
일이다.
저 아래 영화 "집으로"의 실제 촬영장이 있다고도 한다.
계곡물이 흐르는 하천에도 곳곳에 복구 사업이 한창이다. 국토의 동맥이라는 경부 고속철
공사도 이젠 제법 골격을 갖추어 가고 있다.
누구랄 것 없이 이젠 종주팀의 실력이 평준화가 되어 간다.
이젠 집녑과 의지가 강한 골수 멤버 15명이 남았고 모두들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등산의
고수가 되어 가고 있다.
피치 못한 소백권과 지리산권을 제외하고 이동거리가 짧다면 10시간 이상의 대간 구간도 야
간산행 대신 새벽 4시에라도 기꺼이 출정하자는 열정을 보이는 걸 보면 백두대간 종주에
만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들 그 눈부신 대간의 풍광에 매료되어 진정한 산꾼
으로 거듭나고 있는 것이리라.
한 사람의 낙오자도 없이 모두들 올해 안에 모두들 백두대간을 무사히 완주하고 국토혈맥의
종단 천왕봉을 하산해 중산리 골짜기에서 성대한 축하파티를 벌일 수 있을 것을 믿어 의심
치 않는다.
우두령에는 맛있는 김치찌개가 끓고 있고 무사히 구간종주를 마친 대원들의 구수한 대화와
돼지고기가 실린 김치찌개 향기가 봄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지도로 보아 바람재를 가는 중 형제봉 아래 하산길이 있다.
등로 입구의 개념도에는 폐쇄되어 통제하는 길로 표시되어 있었다.
하지만 온 길을 리바이벌하는 단조로움은 참을 수 없으니 금지구역을 돌아 내릴 수 밖에..
반대 능선을 따라 가는 산객들은 아무도 없다.
괜히 마눌 고생 시키는 건 아닌지 슬그머니 걱정이 된다.
바람은 적당하게 불고 하늘은 드맑다.
부드럽게 고도를 낮춰가는 능선을 따라 걸으니 기분이 너무 좋다
황악산을 넘어 흘러가는 백두대간은 부드럽게 구비치며 남하한다.
내려선지 얼마 안되어 좌측으로 직지사 하산길이 하나 있다.
시간 상 형제봉은 아닐 것 같고 또 하나의 갈래 길 같은데 그냥 지나쳤다.
가다가 바람재 쪽에서 올라오는 산객을 만난 김에 하산길을 물으니 조금 전에 지나친 하산로는 거칠고
험하단다.
형제봉 아래 길이 하나 있는데 등산로가 폐쇄되긴 했어도 그 길이 훨씬 편하다고 한다.
정상에서 900m 내려와서 바람재를 1.3km 남겨둔 곳에서 능선은 고도를 조금 높인 곳에서 이정표를
걸고 있다.
제대로된 봉우리 같아 보이진 않는데 이곳이 형제봉인 모양이다.
우측으로 내려다 보이는 풍광은 수려하다.
아직 푸른 빛을 잃지 않은 능선의 산주름은 뚜렷한 윤곽으로 눈부신 햇살 아래 부채살처럼 펼쳐져
아래로 흐르고 먼 곳에는 하늘 빛 호수가 보인다.
산기슭 아래에는 마을이 있다.
우리가 선 봉우리에는 내려다 보는 고요한 세상의 평화가 머무르고 있었다.
이정표가 선 언덕에 오르기 바로 전에 하산길이 있다.
쇠사슬이 쳐 있고 “폐쇄통로, 상수원 보호구역”이라고 씌여 있다.
형제봉에서 돌아 온 길을 바라보니 부드러운 갈색의 능선이 완만한 오름으로 정상으로 이어진다
폐쇄통로를 따라 내려 갔다.
이건 사람길이라기 보다 멧돼지가 다니는 길이다.
우리가 만나 건 인적이 드문 호젓한 자유
심산의 향기
가끔 주체하지 못하는 계절의 흥에 겨워 스스로 불타는 단풍 같은 것들이었다.
다소 경사가 있기는 해도 갈만한 희미한 길이 계속되더니 한 굽이 날 선 능선을 지나면서 경사는
급격해 졌다.
좁은 길에 내 몸 하나 추스르기 힘드니 별달리 마눌의 하산을 도울 방법이 없다.
+-
때로는 사고의 위험을 느끼며 미끄러운 진흙 길과 거의 길이라고 할 수 없는 바위 사이 희미한 흔적을
따라 가파른 비탈을 한참 내려서야 계곡을 따라 이어지는 등산로를 만나게 된다.
아마도 정상 바로 아래서 연결되는 등로인 듯 싶다.
아까 능선에서 만나 산님이 그래도 이 길이 더 편한 길이라고 했는데 계곡 길을 따라 정상 바로 아래로
이어지는 등로는 얼마나 험악할까?
물들어 가는 가을과 푸른 여름이 혼재하는 파스텔톤 계곡 길을 따라 한참을 더 걸었다.
그 길은 우리가 황악산에 들기 위해 절을 지나 아스팔트 길을 따라 계속 올라가면서 좌측으로
만났던 그 샛길과 연결되는 길이었다.
거기에도 줄이 쳐져 있고 “통제구역,상수원 보호구역”이라고 씌여져 있다.
어쨌든 우리는 은근한 빛으로 깊어 가던 황악의 가을을 돌아 내렸다.
가까운 곳이라 늘 아껴두어 마음에서 잠시 잊혀져 있던 추억의 그 장소에 마눌과 함께 다녀왔다.
황악의 호젓한 길을 걸으며 작은 목소리로 잠시 살아가는 날의 작은 기쁨을 불러보았다.
그런 사람이 있다.
뻐기지 않고 늘 겸손해서 잘 드러나지 않는 친구
항상 조용하고 말 수 가 없어도 신뢰가 가는 ….
황악은 그런 산이었다.
1000고지의 큰 산을 내세우지도 않고
현란한 풍경으로 사람을 발길을 잡으려 안달하지 않고
다가 온 누구에게나 넉넉함과 휴식 같은 편안함을 주었다.
그 길을 걸어가며 산이 주는 마음의 안정과 호젓한 자연 속을 소요하는 명상의 기쁨을 누렸다.
직지사가 그렇게 큰 절인지 몰랐다.
예전에 절이란 나의 관심사가 아닌 듯 했다.
우린 저물기 전에 내려온 안도감과 유서 깊은 고찰이 풍기는 경건한 분위기 속에서 차분히 경내를 둘러보고
무사 산행을 지켜주신 부처님께 삼배를 올린 후 귀로에 올랐다.
오늘은 서우모임이 있는 날이라 서두르긴 했어도 시간이 넉넉하다 싶어 새로 난 국도를 따라 대전으로
귀향하다 보니 모임시간에 조금 늦게 도착했다.
멋진 산행 후에 반가운 사람들 함께하는 즐거운 만찬이었다.
산행 후에 먹는 소고기와 한 잔의 술은 최대 효용가치에 근접하는 최고의 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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