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대산 전나무 숲 길
그 옛날 오대산 속으로 차를 몰고 가면서 투덜거렸었다.
“사람들은 어디든지 차 길을 만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모양이다”
“이 좋은 산을 흙 길도 아니고 아스팔트로 도륙을 내다니…”
늘 먼 걸을 수 있는 날 만이 있는 건 아닌데 대자연 속으로는 차 길을 만들지 않아야 한다는
변함없는 생각 이었다.
월정사 가는 길도 그랬고 단풍이 가슴저리던 상원사 가는 비포장 길에서도 가슴이 아렸다.
지난날을 추억하며 살아가는 먼 훗날에도 그런 생각이 날까?
오대산 전나무 숲길은 참으로 멋진 길이었다.
아름들이 전나무 들이 줄지어 서 있고 숲은 코가 뻥 뚫리는 심산의 향기를 날린다.
태고의 숲으로 난 그 길에 포장도로가 너무 아쉬웠는데 이제 문명의 잔해는 모두 해체 되었다.
건강한 황토길이 푸른 소나무 푸름과 조화되고 사이사이 활엽수들은 계절의 흥취를 주체하지
못한다.
살다 보면 수 많은 길을 걸어 가는데 다시 걷고 싶은 길들이 있다.
호남 여행길에 만난 메타세콰이어 길
소백산과 덕유산의 능선 길
내 태어난 고향 길
내소사의 전나무 숲 길처럼 걸어가는 것 만으로도 상쾌해지는 길이다.
지나간 시간의 영상들이 바래지 않은 맑은 채색으로 다가오고 어떤 기억이 떠올라 입가에 미소를
만들기도 한다.
그 길 위에서는 편안한 마음이 된다..
아무 생각 없어진다.
살아 가는 것은 꼭 고행이 아니다.
살아 있음으로 느끼는 기쁨들이 더 크고 지나는 부질 없는 것들에 마음상하지 않아도
됨을 숲과 길은 깨우쳐 준다.
이 길을 걷는 것 만으로도 살아 있음의 축복과 기쁨을 만난다..
조용히 가슴으로 밀려오는 무언가를 느낄 수 있다.
아직 걸어야 할 무수한 아름다운 길들이 남아 있다.
다시 진한 인생의 감동을 위해선 좀더 기다림이 남아 있을 뿐이다.
월정사
세월에도 변함 없는 것들을 만나는 기쁨을 아는가?
평일인데도 월정사 경내는 사람들로 소란스럽다.
그날 탕탕히 흐르던 계곡의 다리를 건너서 기억 속에 남겨진 시간을 더듬어 본다.
비오는 그 날 경내 찻집에는 뜨거운 난로에 따뜻한 차가 끓고 있었다.
경내에는
역설적인 훈련한 감동을 몰고 온 차가운 비를 맞고 나서 마주하는 한잔의 뜨거운 차와
고요하고 정갈한 시간의 적요가 머물고 있었다.
폭우도 즐기며 길을 떠났던 젊은 날의 열정은 이제 세월에 순화되고 교화되었다.
늘 세월을 거부하던 나의 삶의 방식이 세월의 분노를 샀는지 모를 일이다.
입밖에 내지 않아야 할 기쁨과 감동을 너무 떠벌려 신들의 질시를 받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부처님께 삼배를 올렸다.
살아 가면서 부처님의 자비를 빌어야 할 것들이 자꾸 늘어난다.
잔인한 세월에 전의를 상실해 간다.
젊은 날의 욕심은 이미 버렸는데
이젠 채우기 보다 내려 놓아야 하는 것들이 더 많아지는 나이인데 척박한 삶의 의외성들에
아직 너그럽고 담대하지 못하다.
아직 수양이 덜 되었다.
잠시 깨달음의 지경에 다가간 것 같은 법열을 느끼고도 환속하고 나면
다시 부질 없는 미망들에 가슴을 내어야 한다.
그래서 부처님을 보면 다시 그 앞에 머리를 조아린다.
늘 내가 비는 소원이란 침해 받지 않는 평화와 살아가는 날의 기쁨일 뿐이었다.
상원사
경내를 둘러 보고 상원사로 길을 떠났다.
저물기 전에 진고개를 넘어야 불타는 능선의 단풍을 마주할 수 있다.
잠시 포장길이 이어지더니 비포장 도로가 나타난다.
계곡을 따라 가는 길 위에서 바라보는 눈부신 가을에 연신 탄성을 올린다.
오대산의 가을은 계곡아래서 절정이다.
강렬하지 않는 색감으로 조화된 아름다운 수채화는 바쁜 시간을 잊게 만들고 그 잔상을 남기
려는 부질없는 욕심을 키운다.
늘 고원의 단풍 숲을 바라보며 숨가쁘게 보냈던 가을이었다.
늘 무언가에 허기져 업보처럼 욕심사납게 헤매던 가을을 오늘은 물끄러미 차창 밖으로 바라보고
있다.
떠나가는 것들은 아름답다.
남아 있는 세월들은 지나간 세월보다 더 아름다워야 하지 않을까?
숱하게 살아온 날의 지혜가 있고
내게 남기어진 시간은 점점 더 줄고 있음에…
상원사는 보수공사가 한창이다.
경내를 돌아보는 것 만으로 월정사나 상원사나 풍요로운 재정이 느껴진다.
올 때마다 어디 한군데는 보수공사를 하고 있다.
명산대찰이라 평일에도 사람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상원사에서 바라 본 앞산의 풍경은 자못 웅장한데 공사가 한창이라 고즈녘한 옛가람의
풍치는 느껴지지 않는다.
오랜 기억을 더듬어 가며 상원사를 돌아보고 현란한 오대의 가을 바다를 유영했다.
속초
진고개의 가을을 넘어 속초로 간다.
마티즈로 넘어 가는 고갯길….
이제 태양은 풀죽은 모습으로 붉은 사선의 빛을 능선의 어깨에 건다.
소금강의 가을은 한창이겠다.
바다로 가는 길은 낙엽이 후드득 날리고 인적이 없다.
물들어 가는 단풍나무들을 바라보며 먼 이향의 설레임과 계절의 수심에 취하다 보니
시나브로 어둠이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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