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당나라 휘종이 어느 날 양자강 강변 소주에 있는 금산사에 거동한 일이 있었다.
누상에 올라서 강 위를 오가고 있는 수많은 배를 바라보며 "강 위를 오가는 배의 수가 몇 척이나 되겠습니까?"라고 묻자 주지 스님인 황백선사는 "두 척밖에 안됩니다"라고 답했다.
황제는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해 어째서 두 척밖에 안 되느냐고 다시 물었고 황백선사는 "하나는 명문(名聞)의 배요, 또 하나는 이양(利養)의 배입니다"라고 말했다.
양자강에 무수히 많은 배가 오가고 있지만 결국은 모두 명예와 이익을 위해 움직이고 있다는 뜻이었다.
황백선사의 지적처럼 사람들의 살림살이를 들여다보면 하나같이 명예와 이익을 위한 행위에 다르지 아니하며 그것을 쟁취하고자 평생을 수고한다.
상대방에 대한 배려감 없이 명예와 이익만을 쫓는 삶은 끝없는 분란만이 야기되고 이익이 있는 곳에는 벌 떼 같이 몰려들지만 손해나는 곳에는 황량한 벌판처럼 외로움만 감돌게 된다.
인생을 다 바쳐 추구하던 이익과 명예도 늙음과 병고와 죽음 앞에선 마치 한 조각 뜬 구름처럼 허망한데, 인생을 하루살이 불나방처럼 욕망으로만 채우려 한다면 얼마나 허망한 일일까?
다행스럽게도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 라고 정의한 파스칼의 말처럼 인간은 생각할 수 있는 지혜가 있는 존재이기에 명리의 덫에서 벗어나 무한한 가능성을 발현할 수 있다.
능가경에 "마음이 생기면 만 가지 현상이 따라서 생기고, 마음이 사라지면 만가지 법이 따라서 없어진다"라는 말이 있다.
이치를 깨달으면 지옥이 극락으로 변하고 원수가 은인이 되는 묘한 도리를 말하는 것이다.
묘한 도리를 깨치면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하며 존중해주는 정토세상이 열리게 된다.
그러한 세상을 이루기 위해서는 끝없는 자기수행이 필요한데 세속에서는 자기성찰이라고도 한다.
자기성찰이 투철해지면 비로소 '나'만이라고 하는 소아적인 집착에서 벗어나 타인을 인정하고 섭수할 수 있는 대승적인 안목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지금은 세계가 한 지붕 아래서 서로 소통하는 글로벌 시대다.
글로벌 시대는 인종간 차별이나 종교사상의 벽조차 허무는 소통의 시대를 말한다.
소통이라는 단어는 세계인의 일상화된 화두로써, 특히 지도자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덕목 중 하나다.
이천년 전 부처님께서는 후세인들을 위해 지도자가 꼭 지켜야할 덕목으로 장아함 유행경에서 소통을 말씀했다.
옛 선조들은 민중들과 소통하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했다.
갑사 팔상전과 신원사 대웅전의 후불탱화를 보면 순경의 복장을 한 신장이 모셔져 있다.
지금도 사찰에서 탱화를 조성할 때 조금이라도 격을 파하면 이야깃거리가 되곤 하는데, 백 년 전에 그러한 시도를 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현대는 부처님 당시의 단순한 농경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는 다양성이 존재하는 글로벌 시대로써 서로가 소통하지 않고는 불통의 과보로 시대의 미아가 될 수밖에 없다.
인간 삶의 참 가치를 느낄 수 있는 대승적인 안목을 개안해 글로벌 시대에 맞는 소통을 한다면 삶은 더욱 풍요로워질 것이며 세상은 행복으로 가득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