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길은 산행 길을 닮았습니다.
힘들 때도 있고 콧노래 부르는 흥겨움에 남겨질 때도 있습니다.
가슴 벅찬 기쁨을 만나기도 하고 스스로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막막함에 남겨지기도 합니다.
나의 역사는 내가 넘고 건너 온 무수한 산과 내가 걸어왔던 아득히 먼 길이고 나의 미래는 내게
앞으로 허락 될 산과 강 그리고 남아 있는 길을 걸어 갈 나의 마음 입니다.
나는 이만큼 걸어 와서 오늘 여기 서 있습니다.
인생이 많은 부분은 이미 정해졌습니다.
걸어 온 나의 길을 가늠하면 남아 있는 나의 길도 어느 정도 유추가 되겠지요.
대한민국에서 인생 후반부의 삶은 결코 녹록치 않을 겁니다.
줄어드는 수입과 남아도는 자유
침침해지는 시력과 흔들리는 다리
조금씩 식어가는 열정과 메말라가는 감성
날씨는 더 추워지고 길은 단조롭고 건조해 질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돈도 중요하고 취미도 중요하고 가족도 중요하고 친구도 중요할
것입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길을 걸어가는 자신의 마음과 세상을 향한 사랑입니다.
누가 그랬지요 ?
세상에 없는 건 정답과, 비밀이고, 세상에 있는 건 나와 죽음이라고 ….
수 많은 날들을 고뇌하면서 인생의 비밀을 찾았습니까?
돈과 건강과 찬구와 가족, 그리고 남아도는 자유와 부족한 시간 등과 같은 무수한 변수가 조합하고
분열하는 노후 삶에 관한 함수를 풀었습니까?
정말 정답은 없지요?
나뭇 잎이 떨어지고 꽃이 시드는 것처럼 우리가 늙어가고 죽음에 드는 것은 자연의 섭리 입니다.
무릇 세상사 길흉화복과 생로병사의 순환이고 태어나고 살아감은 나무가 자라고 꽃이 피듯 그냥
무심한 자연입니다.
희노애락은 구름과 어둠 속을 넘나드는 태양이고 서로의 가슴을 부둥켜 안고 흐르는 강물 입니다.
그건 마음 속에서 무수히 피어나는 생각의 구름일 뿐입니다.
우린 인생이란 무대에서 서로 어우러져 춤을 춥니다.
남을 의식해서 더 잘 추려고 할수록 스텝은 더 엉겨 버립니다.
어쩌면 다른 사람은 당신의 춤에 별로 관심을 갖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삶이란 잘 추건 못 추건 제 장단과 제 신명으로 추는 한바탕 춤 입니다.
공연시간은 그리 길지 않습니다.
다리에 힘이 빠진다고 주저앉거나 무대의 불이 꺼지기도 전에 내려온다면 참으로 애석한 일이지요.
젊을 때나 늙을 때나 춤추는 시간은 여전히 즐거워야 합니다.
젊어서도 늙어서도 내가 서 있는 이 곳이 광활한 세상의 중심이고 삶의 최고 선은 나의 기쁨과
나의 행복입니다.
세상에 전적으로 잃기만 하는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늙어간다는 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아무도 나를 쳐다 보지 않는데 내 스스로 내 머리 위에 누군가 설치 했다고 믿었던 나의 감시카메라를
철거한 건 조용히 흘러가는 세월이었습니다.
체면과 자존심이란 두 채널만 가지고 간신히 명백을 유지하던 낡은 CCTV는 용도폐기 되었습니다.
젊은 날의 거울에 비쳤던 초조하고 창백한 얼굴은 사라졌습니다.
세월에 풍화되고 햇빛에 바래서 쭈글거리는 얼굴은 이젠 산을 닮아 가고 세상을 달관한 부처님을
닮아 갑니다.
세상에 정답은 없지만 삶에 관한 자기만의 정답 하나쯤은 알 수 있고 행복의 문을 열 수 있는 열쇠
하나쯤은 손에 넣을 수 있는 건 많은 세월을 보내고 나서야 가능한 일입니다..
욕심을 버릴 수 있으니 나름 부족함 속에서 풍요와 만족을 누릴 수도 있습니다.
물불을 안 가리고 저돌적으로 돌진하는 패기와 젊음이 쇠하여 크게 분노할 일도 좌절할 일도 없으니
세상의 두루 평안하고 여유롭습니다.
나이가 먹어도 시들지 않고 나이가 먹어도 욕심이 줄어들지 않는다면 어쩌면 우린 항상 지옥 속에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젊음이 좋다고 다시 돌아갈 수도 없고 또 돌아가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제 조금 세상의 이치를 알 듯도 한데 오랜 시간 동안 전해 들은 산이 하는 말 바람이 전하는 말을
잊어버리고 몽매함과 어리석음 앞에 다시 서고 싶지 않습니다.
단지 세상의 치열함 속에 줄 서고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 내 삶과 영혼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학문을 연마하느라 내 젊은 날의 열정과 사랑을 구금하고 아름다워야 할 청춘을 고뇌와 방황 속
에 되돌려 보내고 싶지 않습니다.
오랜 시간을 살아가노라면 인생은 그저 우리가 걸어가는 호젓한 산길 같은 것입니다.
이것저것 익숙한 풍경들을 더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게 되고 오래된 어떤 것을 만나면 추억에 가슴이
울렁거립니다.
가끔 그 길이 맞닿아 있는 곳이 몹시 궁금해지기도 하고 그곳에서 만날 아름다움과 감동에 가슴이
설레기도 합니다.
그냥 남아 있는 시간에 감사하면서 산과 자연이 용인하는 날까지 멋진 세상의 언저리를 떠돌며 행복하
게 늙어가고 싶습니다.
죽는 날 까지 의미 있고 아름다워야 할 우리의 인생이고 내겐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날들만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산 행 일 : 2015년 1월 10일 일요일
산 행 지 : 아들과부르는 노래 31- 백두대간 17구간
코 스 : 밤티재-문장대-신선대-천왕봉-피앗재-형제봉-갈령
날 씨 : 흐리고 눈. 바람불고 춥다.
거 리 : 16.7km (대간거리:15.1km, 접속거리;1.6km)
소요시간 : 약 10시간 6분(식사 약 25분 휴식 50분)
시간 |
경유지 |
비 고 |
06:30 |
밤티재 |
|
09:10 |
문장대표석 |
|
09:15 |
문장대 |
약 15분 휴식 |
10:00 |
신선대휴게소 |
약 25분 식사 및 휴식 |
10:24 |
신선대출발 |
|
10:45 |
입석대 |
|
11:06 |
천왕석문,이정표 |
입석대 0.7km, 천왕봉 0.9km |
11:30 |
헬기장 |
|
12:06 |
천왕봉 |
|
12:36 |
형제봉가는길 전망바위 |
|
14:21 |
피앗재 |
|
15:28 |
형제봉 |
|
15:56 |
갈령삼거리 |
|
16:22 |
암봉 소나무 |
|
16:36 |
갈령 |
|
요약표
총 10시간 6분 소요
산행시간 :약 9시간
식사시간 : 25분
휴식시간 : 50분
밤티재-문장대 3.8km 2시간 40분
문장대-천왕봉 3.6km 2시간 56분 (약 25분 식사 및 10분 휴식)
천왕봉-피앗재 5.5km 2시간 20분 (약 30분 휴식)
피앗재-형제봉 1.5km 1시간 7분 (약 10분 휴식)
형제봉-갈령 2.3km 1시간 8분
9시간 20분
세상에는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닌 게 생각 보다 많다.
속리산이 이름처럼 깊은 산이란 걸 알았던 건 10년도 더 넘었던 백두대간 길과 홀로 주유했던 충북
알프스 길에서였다.
문장대와 천왕봉을 두 축으로 하는 산행로만 놓고 보면 눈감고도 훤한 그 길이라 속리산이란 그저
계룡산처럼 언제든지 쉽게 갈 수 있었던 동네 산으로 폄하되기 일쑤였다..
하지만 속세에서 멀리 떨어진 산이란 이름은 그냥 붙여진 것이 아니었다.
깊고 내밀한 아름다운 비경들 …
통제구역이란 이름으로 남겨진 그 봉우리와 골짜기를 따라 신선의 땅을 소요하는 신비와 절절한
감동은 오랜 세월에도 긴 여운과 잔상을 남겼다.
어리석은 난 오래도록 문장대와 천왕봉이 불국의 극락정토였음을 깨닫지 못했다.
충북알프스를 차고 오르는 묘봉과 관음봉 능선
수없는 직벽과 골짜기를 누비고서야 비로서 불국의 평화를 바라볼 수 있는 동릉
암릉으로 이루어진 성채와 동굴 같은 바위들의 틈새를 따라 유장하게 이어지는 백두대간 길
그 길을 걸어 보아야 옷깃을 여민 채 큰 산의 가르침에 경배하게 된다.
그 길을 걸어보아야 가슴의 미망과 집착을 내리고 속리와 부처의 진심으로 돌아갈 수 있다.
불국에 들기 위해 불면의 밤을 지새고 정수박이에 샘물을 쏟아내는 신선한 속리의 차가운 새벽을
가슴 가득 들이 마셔야 한다.
문장대 가는 길
역사는 반복한다고 했던가 ?
칠흙 같은 밤
예나 지금이나 밤나무의 형제조차 알아 볼 수 없는 밤티재에 우리는 다시 버려졌다.
차가운 바람이 승냥이 울음을 운다..
힘든 중에도 이어지는 불꼬리가 비장하고 낭만적이다.
무릉 입적이 어디 쉬우랴?
쇳소리 나는 바람은 비몽사몽을 헤매며 흐느적거리던 정신의 날을 다시 세우고 가파르게 차고 오르는
길은 거친 숨소리를 불러 속리의 새벽을 깨운다.
새벽산은 새벽바다처럼 신선하다.
바위 위에서 우수에 찬 채 달려 오는 푸른 새벽을 만났다.
속세와 멀리 떨어진 곳에서 바라보는 첩첩 바위산의 새벽은 태초의 새날처럼 성스럽고 장엄하다..
그 멋진 풍경이 여행의 목적이 될 수도 있지만 오늘은 그 풍경이 백두대간의 추억을 불러내는 실마리가
되고 아들과 함께 부르는 노래의 배경음악이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린 그 멋진 풍경을 만나기 위해서 불면의 밤과 거친 호흡을 기꺼이 통행세로 지불해야 하는
것이다.
바위능선을 오르락 내리락 하는 끝에 집채 같은 바위가 포개진 바위 협곡에 도달한다.
악귀와 나찰의 범접을 애초부터 막으려는 것일까?
불국의 중심으로 가는 속리의 무수한 능선과 계곡에 도열한 바위들은 불심의 도량을 지키는 사천왕문의
나한상처럼 험상궂게 버티고 있다.
거칠고 도발적인 길이지만 머리를 숙이고 마음을 내리고 그 어려운 관문을 하나씩 통과 해가면서 만나는
풍경은 그 하나하나가 빼어난 경승이고 절경이었다.
세속과 멀리 떨어져 광활한 산세와 수 많은 청정의 계곡을 품고 있는 속리의 아름다움이 그리 깊기에
그 곳에서 나를 기다리던 살아가는 날의 기쁨과 감동도 그리 절절 했으리라..
개구멍을 지나 언덕을 오르자 앞 산 봉우리 능성이를 흘러 내리는 바위벽이 장관이다.
해는 구름 사이로 잠깐 붉은 빛은 보여주더니 우울한 하늘 빛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우리는 차가운 바람에도 아랑곳 없이 속리의 강건한 산세에 가슴 부푼 채 연신 탄성을 올리며 차가운
바위 능선을 지난다.
산죽로를 지나 산행로는 점입가경으로 거칠어 진다.
다시 돌아가기에는 너무 깊게 속리로 들어왔음을 아는지 불국의 수호자들이 축조한 대자연의 불전은
점점 더 엄중해 져서 그 길을 지나는 중생들은 허리를 굽히고 무릎을 꿇어 부처님에게 예의를 표하는데
한치의 소홀함이 있을 수 없었다.
아주 힘들면 잠시 눈을 붙였다 가라고 쉼터처럼 남아 있던 암릉 사이에 끼어 있는 평반은 13년의 세월
에도 변함 없이 그대로였다.
마지막 암봉을 어렵게 넘자 문장대가 코 앞에 바라다 보인다.
불국의 수미산으로가는 마지막 관문이 남아 있을 줄 알았는데 길은 부드러운 오르막을 따라 문장대로
이어진다.
우린 새벽 별을 보고 밤티재를 차고 오른지 2시간 40분 만에 문장대에 도착 했다.
문장대
3번 오르면 극락에 간다는 문장대에 올랐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극락에 내 한 자리는 오래 전에 예약되어 있을 것이다.
사방에서 차가운 바람이 불어온다.
내 가슴속의 답답함과 응어리마저 모두 날려버리는 후련한 바람이…
머릿속 까지 청명해지는 맑고 세찬 바람이다.
아들과 나는 사위가 확 트인 불국의 중심에서 두 손을 높이 들었다.
나 홀로 혹은 숱한 나의 친구들,그리고 직장동료들과 셀 수 없이 올랐던 무수한 추억이 떠도는
봉우리이다.
어느 겨울 백대명산 길에 마눌과 올랐던 그 문장에는 사람의 몸마저 날려버릴 정도의 세찬 바람이
불어서 나만 홀로 난간을 부여잡고 올랐었고 3년전 추석연휴에는 거북이와 함께 올라 기필코
해돋이를 보았던 그 멋진 산봉우리이다.
다시 걸어보고 싶은 길이 있고
불면을 마다하지 않는 열정과 체력이 아직 남아 있고
오늘은 아들과 함께 이 길을 걸으니 나는 오늘도 변함없이 세상의 아름다운 무릉도원을 소요하는
무릉객이 된다.
분명 어릴 적에 한 두 번은 데리고 왔을 터인데 나에게도 아들에게도 함께 오른 기억이 가물 가물하다.
밤티재에서 문장대로 이어지는 3.8km구간은 역동적인 산행의 스릴과 거친 자연미가 살아 있는 멋진
암릉 구간이었다.
어둠의 장막을 헤치고 새벽을 들창을 열어서 만난 많은 것들이 나에게 감동과 기쁨을 가져다 준 것처럼
아들에게도 새로운 세상을 만나는 기쁨을 일깨워 줄 수 있으면 좋겠다.
백두대간을 마무리 한 후에도 그 감동이 중독처럼 남아서 속세에서 멀리 떨어진 자연 속에 묻혀 있는
보석을 캐기 위한 가치 있는 여정을 아들이 계속해 나갈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충청북도 보은군과 경상북도 상주시 사이에 있는높이 1,054m의 속리산 주봉이다.
큰 암석이 하늘 높이 치솟아 흰 구름과 맞닿은 듯한 절경을 이루고 있어 운장대(雲藏臺)라고도 하고,
세조가 속리산에서 요양을 하고 있을 때 꿈속에서 어느 귀공자가 나타나 “인근의 영봉에 올라 기도를
하면 신상에 밝음이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듣고 찾아 올라와보니 정상에 삼강오륜을 명시한 책 한권이
있어 세조가 그 자리에서 하루종일 글을 읽었다하여 문장대(文藏臺)라 불리게 되었다고도 한다.
문장대는 비로봉(毘盧峰)·관음봉(觀音峰)·천황봉(天皇峰)과 함께 속리산(俗離山)에 딸린 고봉이다.
산마루에는 약 50여 명이 앉을 수 있는 빈터가 있으며 속리산의 절경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다.
쇠다리가 놓여 있어 오르내리기에 안전하며, 북쪽 절벽 사이에 있는 감로천(甘露泉)이 유명하다.
1970년 3월 속리산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속리산의 절경은 8봉, 8대, 8석문으로 대표된다. 8봉은 천왕봉, 비로봉, 길상봉, 문수봉, 보현봉, 관음봉,
묘봉과 수정봉이고, 8대는 문장대, 입석대, 신선대, 경업대, 배석대, 학소대, 봉황대, 산호대다.
그리고 8석문은 내석문, 외석문, 상환석문, 상고석문, 상고외석문, 비로석문, 금강석문, 추래석문 등이다.
8봉, 8대, 8석문 등 모두 '8'자에
맞추어져 있다.
수 많은 절경을 8개씩으로
함축한 것은 수행과정인 8정도(八正道)를 의미한다고 한다.
8정도 수행을 거쳐 열반에 들듯이 8개의 어려운 관문을 거치며 불국에 들어서고 8개의 대에 오르며
오욕과 칠정의 미망을 버리고 8개의 봉우리를 넘어가며 참된 자아를 만나고 불심을 이치를 하나씩
깨달아 간다는 뜻인 아니련가?..
속리의 감회에 찬 무릉객의 믿거나 말거나….
천왕봉 가는 길
차가운 바람에 떡가루 같은 눈발이 흩어진다.
길은 편안 해졌고 더 흐려진 날씨는 눈을 뿌리며 분위기를 낭만적으로 띄운다.
아침에 떡을 먹고 출발했는데 3시간여 격렬한 산행을 하면서 조금씩 허기가 밀려 왔다.
긴장이 풀어져서인지 체력이 떨어져서 인지 아들녀석은 발길이 조금씩 밀린다.
차가운 바람에 눈발마저 날리니 밥 먹을 때라곤 신선대 밖에 없을 터이라 신선대에서 아점을 먹기로
하고 아들을 독려했다.
신선대
구중심처 산 속에서 익숙한 가요의 멜로디가 흘러 나온다.
이름하여 신선들이 노닐었다는 신선대인데 신선님들도 뽕짝을 좋아 하실까?
“아서라 신선대에 서면 나도 신선이 되는 거지 !”
“난 트롯트나 뽕짝보다 발라드가 더 좋은데…”
문장대 표석 앞 공터에도 훨씬 규모가 큰 상점과 식당이 있었다.
빈 배낭으로 문장대에 올라 뜨끈한 국밥을 한 그릇씩 사먹던 편안함이 있었으면서도 정작 매점이 사라
지고나서 가슴은 후련했었다.
극락이 따로 없다
창 밖은 매서운 바람에 눈발이 날리고 매점 안 난로 위에는 하얀 김을 내 뿜으며 주전자가 끓고있다.
우린 뜨끈한 라면과 오뎅국물의 향기가 진동하고 난로의 열기와 사람들의 체온이 어우러져 더 없이
훈훈하고 따뜻한 휴게소 안에서 배낭을 내리고 다소 때이른 식사를 했다.
서서서님이 오뎅국물을 주문해서 함께 뜨거운 국물로 몸을 녹였고 난 아들녀석의 따뜻한 식사을위해
컵라면을 하나 주문했다.
날씨가 그리 추운 줄은 몰랐는데 물통에 든 물은 반쯤 얼었고 새벽에 싼 보온밥통은 온기를 많이 잃어
가고 있었다.
아들녀석의 얼굴에도 급 화색이 돈다.
이렇게 춥고 배고픈 산객들을 위해 신선대는 오래도록 남아 그 곳에서 부처님의 자비를 설법했으면
좋겠다.
우린 약 25분간 휴식하면서 식사를 마무리하고 다시 천왕봉으로 가는 길을 재촉했다.
눈발이 흩뿌리는 산 길을 따라 천왕봉으로 간다.
많이도 걸었던 길이지만 조망과 풍경이 사라진 채 눈발이 날리는 오늘의 그 길은 담묵의 수채화처럼
고요하고 그윽하다.
배부르고 길이 조금 편해진 탓인지 아들은 자꾸 졸음이 몰려오는 모양이다.
비틀거리면서 자꾸 쉬어가자고 하는데 쉬게 되면 또 눈길에 웅크리고 잠을 잘까 봐 그냥 걸으면서
잠을 쫓으라고 길을 재촉했다.
새벽 3시출정이니 새벽 2시부터 설쳤고 늦게 잠들고 아침잠이 많은 아들은 또 잠을 거의 자지 못
했을 것이다.
입석대를 지나자 산 안개가 자욱하게 밀려왔다.
길에는 금새 하얗게 눈이 덮히고 산죽 위에도 눈이 쌓여 간다.
불국을 호휘하는 무사들인듯 운무 속에 도열한 바위들의 자태가 자못 웅장하고 신비롭다
14년 만에 다시 걸었던 밤티에서 문장대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길은 이제 마지막일게다.
문장대에서 천왕봉에 이르는 이 길은 앞으로 몇 번 더 걸을 수 있을까?
찰라의 바람에 사라져 갈 한 철 나비가 조용히 광할한 대자연을 스쳐 지나며 비바람에 풍화 된 채 억겁을
버티고 선 담대한 바위의 위용을 바라본다.
“난 아직 살아 있구나!”
적막한 산 길에는 우리 말고 아무도 없다.
마음이 허한 날에 자연과 산보다 그 마음을 알아주고 위로해 주는 것이 또 어디 있을까?
잠시 머리숙여 부처님의 자비와 평화를 염원해 본다.
천왕봉(1058m)
아직 한 번도 해돋이를 만나보지 못한 곳이다.
속리산의 주봉이고 한남금북정맥의 시발점이 되는 삼파수의 산이다.
한남금북정맥은 한강과 금강의 분수령으로 말티고개 ,선도산,상당산성,좌구산,보현산을 지나 칠현산에서
마무리 된다.
칠현산에서 한남금북정맥은 한남정맥과 금북정맥으로 나누어진다.
그 뿐이 아니라 천왕봉은 세 개의 큰 강을 품어 흐르게 하고 있다.
천왕봉 표지석에는 이곳이 조선의 삼대 명수(名水)인 삼파수와 충주 달천수와 한강 우통수(牛筒水) 중
삼파수(三波水)의 발원지라고 적혀있다. 삼파수란 이곳에 내리는 빗물이 세 갈래로 나뉘어 흘러든다는
뜻이다.
천왕봉의 동쪽으로 흘러내린 물은 낙동강으로 흘러가고, 남쪽으로 흘러내린 물은 금강과 하나가 되며
서쪽으로 흘러내린 물은 남한강으로 흘러 들기에 이 걸출한 산 봉우리 하나가 금수강산을 적시는 세갈래
생명을 젖줄을 잉태 한다는 것이다.
천황봉이라던 봉우리는 2007년부터 천왕봉으로 바뀌었다.
옛 기록에도 혼선이 있었던 모양이다.
고산자 김정호의 '대동지지'와 '대동여지도'에는 '천왕봉'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같은 조선시대에도 윤휴의
<백호전서>와 오주·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 등에는 ‘천황봉’으로 기록되어 왔다.
더 이전의 고증을 참조하여 우리 산하 제 이름 찾기에 만전을 기했으리라 생각하지만 천황이란 옥황상제를
의미하는 민간 신앙과 관련되어 있는 것인 만큼 대한 민국의 수많은 천황봉이 예전부터 사용한 이름이라면
굳이 일본왕과 연결지어 비분강개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아무런 조망도 없이 안개 자욱한 그 곳에서 일단의 산님들이 사진을 찍느라 분주하다.
14년 전 고통의 기억은 훨훨 머리를 풀고 날아 갔다.
“난 그 여름에 네가 한 일을 알고 있다.”
머나먼 순례의 그날 깨달음의 궁극에 도달하기 위한 중생들의 고행은 이글거리는 태양아래 당당히 버티고
서 있었던 바로 이 천왕봉에서 시작 되었는데…
눈발 날리는 천왕봉은 웃음소리 낭자하고 우린 까마득히 먼 형제봉도 잊은 채 마치 거친 산행이 모두 마무리
되기라도 하는 듯 축제 분위기에 들떠 있었다.
천왕봉에서 반도를 적시는 생명의 젖줄이 이어나가 듯 이곳에서는 다시 또 다른 시작이 준비된다.
날씨가 도와 주겠지만 지금 걸어온 길과는 확연히 다른 새로운 형태의 길이 시작되는 것이다.
피앗재 가는 길
등로는 400여 미터 급하게 내려간다.
눈이 조금씩 쌓여가는 가파른 산길이 위험할 것 같아 아이젠을 했다.
한북정맥 분기점과 천왕샘을 지난다.
대목리와 장각동을 연결하는 고갯길을 지나고 바위 위에 서자 후련한 전망이 터진다.
만수계곡은 거대한 골을 이룬 채 산의 파도 사이로 굽이쳐 첩첩 산중으로 흘러가고 한 참을 내려왔어도
앞을 가로 막는 계곡의 비탈 사면은 차가운 겨울에도 잎새를 떨군 빈 나뭇가지와 청솔만으로도 큰 산의
위엄을 잃지 않은 당당한 모습이다. .
춤추며 이러저리 흘러가는 능선들 어느 곳에 오늘 우리가 가야 할 형제봉이 있다.
빈 가지에 바람만 가득한 황량한 겨울 산도 이렇게 아름답다.
바람이 흔드는 건 숲과 나무 일 뿐
산과 바위는 거기 그대로 서 있다.
산에 깃드는 모든 만물이 조화롭게 자연을 만들어 가고 그 질서에 말없이 순응한다.
오랫동안 산에 들었으니 이제 내가 산이 되어야 한다.
꽤 오랫동안 풍경에 취하며 충분한 다리쉼을 하고 피앗재를 향해 출발했다.
천왕봉에서 피앗재는 5.5km다.
뒤를 돌아 보면 천왕봉이 까마득히 멀어져서 몇 개의 봉위를 차고 넘으면 형제봉 아래 피앗재에 도달
하려니 했는데 바라보이는 형제봉은 아직 멀리 까마득하다.
“아들아 저 길이 멀리 보이느냐? 가까이 보이느냐?
네가 어떤 목표를 설정하던 그 것은 네가 생각한 데 보다 먼데 있을 것이다.
네가 그 만큼의 땀과 고통과 인내의 대가를 지불해야 네가 원하는 것은 비로소 네 앞에 나타날 것이다.
애써 목적지에만 집착하지 말아라!
노력 없이 결과를 욕심내지 말아라!
시간은 견디는 것이 아니라 즐기는 것이다.
멀리 있는 목적지를 의식하지 말고 한 걸음마다 변하는 풍경과 후련한 바람을 즐기면서 네 스스로와
많은 대화를 나누며 걷다 보면 너는 어느새 목적지에 도달할 것이다.
꼭 명심해라!
산길을 걷는 것이나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나 다 같은 이치라는 것을…
더 나은 풍경을 만나고 더 멋진 삶을 누리기 위해서 더 많은 노력과 인내가 필요하고 그 과정은 견디는
것이 아니라 즐기는 것이라는 걸….”
평소 열심히 학업을 닦고 체력을 준비하면 산길과 인생길을 더 즐겁게 걸어갈 수 있을 것이다.
부처님 반토막처럼 아들에게 열심히 설교를 했는데 길은 가도 가도 끝이 없이 수 많은 크고 작은 봉우리를
넘어 하염 없이 흘러 간다.
“아이고 늙은 애비가 먼저 지친다 지쳐 !”
날씨는 점점 스산해지고 바람은 더 강해졌다.
눈은 거의 사라졌는데 형제봉에서 또 미끄러운 빙판길을 만날까 저어서 아이젠을 계속 차고 가서그런지
발이 점점 무거워지고 자꾸 기력이 떨어졌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건 아이젠이나 날씨 때문이 아니라 허기가 밀려든 탓이다.
아이젠을 걷고 바람이 막아지는 곳을 골라 아침에 먹던 떡덩이를 베어물고 얼음이 얼은 차가운 물을 마셨다.
아들에게는 남은 빵을 건네 주었다.
오늘은 허둥대다가 귤도 챙겨오지 못하고 도시락 두 개에 딸랑 빵 두개 가지고 왔다.
지나온 봉우리에서 아들에게 빵을 하나 건네주고 하나는 내가 먹다가 남긴 것이다.
아들 녀석이 떡은 잘 안 먹는 생각이 뒤늦게 불현듯 들었던 탓이다..
찬물에 굳어가는 떡덩이일 망정 빈 속을 채우니 다시 힘이 살아 난다.
우리는 다시 전열을 가다듬어 피앗재에 도착했다.
피앗재
충북보은 만수동과 충북상주 상오리를 연결하는 고개다.
난을 피했던 곳이라 파화치라고 부르기도 하고 피가 많다고 하여 붙여진 피밭골에서 전도되어 피앗재란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지난 백두대간 때와 홀로 충북 알프스를 이어가던 어는 가을 날 만수동 계곡을 따라 내려섰던 바로 그
고갯 길이다.
형제봉은 이 피앗재에서 흉물스런 모습으로 일어나 앉아 있다.
오늘 산행이 하이라이트
바닥난 체력으로 마지막 남은 힘을 짜내어 차고 올라야 하는 고행의 봉우리 이다.
불국을 나가 속세로 돌아가기 위해 우린 또다시 고난의 통행세를 지불하여야 한다.
형제봉 오르는 길
지친 몸으로 오려다 본 산길이 아득하다.
지금 까지도 생생한 기억이고 보면 예전 백두대간 때에는 목마름과 무더위가 이 형제봉 오르는 길을
힘들게 만들었는데 오늘 나를 힘들게 만드는 건 아마도 흘러간 세월인 모양이다.
세월의 비바람은 형제봉 오르는 된비알보다 확연히 나를 더 풍화시키고 약화시켰다.
오늘은 이렇게 차가운 바람까지 파이팅을 외쳐 주는데 속도는 현저히 느려지고 기력은 쇠잔하다
어디 흘러간 세월이 무정하다 할 수 있으랴?
산길에 고목이 죽어 거름이 되고 그 위에 초목이 다시 움을 티워 숲이 만들어 지는 것이 대자연의 섭리인 것을…
아들이 강성해가는 만큼 내가 쇠약해 가는 것이 계절이 바뀌는 것만큼 자연스런 생명의 순환 이거늘….
그래도 70세 까지는 백두대간 다시 주유할 수 있는 체력이 유지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아직도 돌아보지 못한 세상의 아름다움이 너무 많이 남아 있으니…..
형제봉
드디어 머나먼 봉우리에 섰다.
첩첩이 산자락이 한 폭 신명나는 춤사위에 펄럭이는 소맷부리인 듯 멀리 천왕봉에서 춤추며 내려오는
능선의 굽이들이 아득하다.
사위가 후련하게 조망되는 형제봉의 풍경은 지금 까지의 고난과 힘겨움을 세찬 바람에 훨훨 날려 주었다.
道不遠人 人遠道(도불원인
인원도)
山非離俗 俗離山(산비이속
속리산)
도는 사람을 멀리하지 않건만,
사람이 도를 멀리하고
산은 세속을 떠나지 않는데,
세속이 산을 떠난다.
조선 중기 문인 백호 임제님이 보운에 머물며 남긴 시다.
내 늙어가도 내 남은 여생의 행복을 위해 도(道)와 산(山)을 멀리하지 않아야겠다.
아니 이젠 그러기엔 너무 산 속에 깊이 들어왔다.
산 속에서 길을 잃었으니 나아갈 그 길(道)을 찾아야 한다.
이젠 내 몸에서도 풀냄새가 풀풀 나지 않을 까?.
나이가 먹어가도 자꾸 큰 산이 눈에 어른거리고 힘이 예전 같지 않음을 느끼면서도 그 교훈과 위안을
받지 않으면 답답함이 늘어가는 걸 보면 마음은 아직 세월을 아랑곳 하지 않는다.
우린 형제봉에서 코가 빩개지도록 센 바람을 맞으며 호젓한 산중의 고독을 즐기다 하산의 길을 았다.
갈령 가는 길
여유롭게 바람을 맞으며 내려 가는 길이다.
형제봉에서 내려 좌측으로 능선을 따라 20여분 하산하면 눈에 익은 갈령 삼거리가 선다.
아들과 나는 머나먼 묵상과 구도의 길을 걸어 다시 속세로 돌아왔다.
우리는 변화무쌍한 힘겨운 순례의 길에서 속세에서 멀리 떨어진 깊은 겨울 산의 역설적인 따뜻함을
가슴으로 느꼈고 그 길 위에서 부처님의 자비와 고요한 마음이 평화를 만났다.
몸과 발은 무겁게 가라앉았지만 마음은 더 홀가분해지고 깊어졌다.
아들아 애썼다.
험한 등로와 혹독한 날씨 그리고 잠들지 못하고 고스란히 어둠을 밝힌 힘겨운 여정은 다시 우리의
인내와 체력을 시험하였지만 우린 지금 지금까지 잘 해 온 것처럼 오늘도 오늘의 긴 여정도 아무런
사고 없이 무사히 마무리 하였다.
마음을 잃지 않으면 우린 어떤 상황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다.
아빠의 바램처럼 네가 앞으로도 산과 자연을 친구로 둘 수 있다면 네가 살아갈 세상은 한결 더 가볍고
아름답고 풍요로울 것이다.
백두대간 만세!
무릉객 부자 파이팅 !!!
'아들과 백두대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들과부르는노래33-백두대간제21구간(이화령-백학산-이만봉-희양산-은티마을 (0) | 2016.02.29 |
---|---|
아들과부르는노래32-백두대간18구간(밤재-늘재-청화산-조항산-밀재-용추) (0) | 2016.02.15 |
아들과 부르는 노래30 - 백두대간 33구간 (백봉령-상월산-이기령-이기동) (0) | 2015.12.27 |
아들과부르는노래29- 백두대간32구간(댓재-두타산-청옥산-고적대-이기령-이기동) (0) | 2015.12.18 |
아들과 부르는노래 28 -백두대간 16구간(화령-봉황산-비재-갈령) (0) | 2015.11.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