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행 일 : 2016년 5월 22일 일요일
산 행 지 : 아들과 부르는 노래 39 - 백두대간 37구간
코 스 : 진고개-노인봉-소황병산-곤신봉-매봉-선자령-대관령)
날 씨 : 맑고 무덥다. 그늘은 시원하고 언덕엔 바람
거 리 : 25.5km (접속거리 없음)
소요시간 : 약 8시간
동 행 : 아들과 귀연산우들 52명
시간 | 경유지 | 비 고 |
07:02 | 진고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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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5 | 노인봉 삼거리 | 노인봉:0.2km, 소황병산: 10km 진고개탐방센터:3.9km |
08:10 | 노인봉(1,338m) | 휴식 및 기념촬영 |
08:22 | 다시 노인봉 삼거리 | 왕산제2쉼터:1.7km,닭목령:3.4km |
08:23 | 노인봉 무인관리대피소 | 노인봉:0.3km, 소금강분소:9.9km |
09:16 | 초지 감시초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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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0 | 식사 | 약 15분 |
11:27 | 풍차지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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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7 | 동해 일출 전망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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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3 | 곤신봉(1,131m) | 풍차그늘에서 약 20분 휴식 |
13:35 | 선자령(1,400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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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1 | 선자령 전망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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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5 | 선자령 입구 표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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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도협과 옥룡설산에서 돌아왔다.
중국의 산과도 교감이 가능하고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건 신비한 경험이었다.
호도협은 내내 신과 동행하는 느낌이었다.
3일차 갑자기 심사가 튀들린 옥룡설산 신령님은 하루 종일 비와 안개를 뿌렸다.
모두들 중간에 회귀했는데 신의 경고도 무시한 채 정상을 욕심 내던 우린 안개 속에서 길을 잃었다.
“이 나이에도 뱃속을 스멀거리는 욕심이라니…”
어짜피 오를 수 없는 정상이었다.
절벽이 막아선 눈 덮힌 언덕이 오를 수 있는 한계였음에도 그 곳에 오르고자 사나운 욕심을 부리던
세 사람은 낙엽처럼 안개 속으로 흩어졌다.
그래도 옥룡산신령님의 보살핌이었다.
비는 점점 거세지는 가운데 드넓은 산 언저리 안개 속을 방황하다 운 좋게 가이드를 만나 가까스로
조난의 위험에서 벗어났다. .
흠뻑 젖은 몸을 불가에 녹이며 사시나무 떨던 중에도 한 친구는 내려오지 않았다.
망연자실했다.
그게 나였을 수도 있었던 운명은 간발의 차이로 비켜갔지만 나는 이빨을 부다닥 거리며 무모하고
어리석은 나의 행동에 몸서리 쳤다.
생,멸의 경계를 명확히 그어 놓은 이국의 고산
하염없이 내리는 빗 속에 거대한 산이 저물어가자 도저히 그를 찾을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추위와 허기 그리고 깊이를 알 수 없는 막막한 고독 속에서 그는 오랫동안 침묵했다.
그리고는 레버넌트처럼 홀연히 죽음에서 돌아왔다.
그는 모두들 체념했던 순간에 전혀 엉뚱한 계곡 아래서 원주민 할아버지에게 구조되었고 반가운 전화벨은
그날 밤 11시 30분에 지쳐 널브러진 채 잠에 빠진 나를 깨웠던 것이다.
그건 신이 내게 보낸 경고였다.
“무릉객 너무 나대지 말아라!”
몸무게가 3kg 빠졌다.
올해 목표체중은 단박에 갱신되었다.
이열치열이라고 했던가 ?
산에서 받은 상처는 산에서 위로 받아야지
“그래 신토불이여!”
이번은 산행이 아니다.
어쩌면 여행이라 불러도 좋을 것 같다.
하지만 먼 여행의 피로가 쌓인데다 조카 결혼식이라 친척들과 낯 술을 많이 마셔서 컨디션은 가히
좋지 않았다.
언제나 그랬듯이 또 산과 바람이 치유해 줄 거란 믿음으로 나선 길이다.
노인봉 가는 길
눈부신 아침 햇살이 초원에 퍼져 나간다.
싱그러운 오대산 자락에서 시원한 아침공기가 아직 몽롱한 정신을 흔들어 깨웠다.
눈부신 초록이 온 산을 번져가고 해발이 높은 산이라 이제 막 연다래가 화사한 꽃망을을 터뜨리고 있다.
노인봉
쉬지 않고 속도감을 즐기며 올라온 노인봉에서 후련한 조망이 터졌다.
멀리 바다 쪽에서 불어 온 시원한 바람이 몸의 뜨거운 열기를 식혀주었고 아직 붉은 기를 머금은 태양은
첩첩이 포개진 산릉 위에 부드러운 황금 빛 햇살을 맑게 채색했다.
또 하나의 아름다운 백두대간 가경이었다. .
노인봉은 청학동 소금강이라 불리는 걸출한 풍광의 계곡을 품고 있다.
금강산의 절경에 견줄 수 있는 계곡의 빼어난 풍경은 가본 사람이 아니면 도저히 설명으로 납득시킬
방법이 없다.
단풍이 불타는 가을과 초록이 번져가는 소금강 계곡은 죽기 전에 한 번은 보고 가야 하는 이승의
절경이 아닐까?
정상의 바위 봉우리가 멀리서 보면 백발의 노인 같다 하여 노인봉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했다.
어쩌면 진고개에서 노인도 쉽게 오를 수 있는 봉우리라 이름 붙인 건지도 모르겠다.
30대에 처음 올랐던 바위봉 정상에는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는 다람쥐가 살고 있었다.
그날 소금강을 흘러내리며 그 풍경에 넋이 나가 얼마나 감탄사를 연발했는지….
14년전 백두대간 종주 때 어둠 속에서 세 사람의 산님들과 함께 올랐던 노인봉
그 하늘엔 쏟아질 것 같은 무수한 별이 빛나고 있었다.
근데 문제는 나와 함께 노인봉에 오른 사람들은 우리 일행이 아니고 부산에서 온 산님들이었다는 거.
갈 생각을 안 하는 그들을 두고 혼자 노인봉을 내려 오는데 이미 우리 일행들의 불빛은 모두 어둠 속
으로 모두 사라져 버렸다.
두려움 속에 막막한 어둠을 뚫고 혼자 노인봉 산장에 내려섰는데 인적은 묘연하고 적막 속에 스산한
바람만 불어 갔다.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난감한 상황이었다.
당시엔 앞에서 표지기를 놓아 주는 사람도 없었고 지도를 미리 챙겨보는 버릇도 없이 무턱대고 따라
나선 대간 길이었다..
어둠 속에서 방향을 찾아 고심하는데 그 때 어둠 속에서 홀연히 커다란 개가 한 마리 나타났다.
갑작스런 돌발상태라 바로 사태파악이 되지 않았다.
혹시 울프? 아니면 집 나온 광견?
바짝 쫄아 붙은 와중에도 상대를 자극할 돌출행동을 자제하면서 조심스런 방어자세를 취하는데
이 녀석이 조용히 내 옆으로 와서 점잖게 내 주위를 한 바퀴 돈다.
“아이구 이노무 개가 사람잡네…!”
어둠 속에서 모골이 송연한 채 얼어 붙어 있을 때 할아버지 한 분이 나타나서 개의 이름을 부른다.
도사같이 한복에 수염까지 기른 할아버지가 어둠 속에 나타나 개를 불러 세우고 나서야 고슴도치처럼
잔뜩 긴장한 몸이 조금 누그러 졌다..
“개 주인이 있었어!”
완죤 한여름 밤의 납량 시리즈 였다.
그 할아버지에게 길을 물어 대간 길을 잡았는데 나중에 산우들에게 물으니 할아버지가 아니라 노인봉
산장에 기거하는 젊은 사람이란다.
“젊은 친구가 잠도 없어요!”
하여간 노인봉 산장은 그 땐 유인 산장 이었다.
어둠의 장막을 걷다.
산장에서 삼양목장 초지 까지가 어둠 속에 묻어 놓은 길이었다.
십 수년의 세월에도 그 어둠의 베일을 걷어낼 생각을 하지 못했다.
사는 게 바뻤다는 것 보다 그게 우리 인생이다.
다시 그 길을 걷는 걸 말고도 돌아볼 것이 너무 많고 또 해야 할 일도 많다.
아니 세월이 그렇게 빠른 게다.
난 중간에 다치는 바람에 정맥을 다 끝내지도 못했지만 산우들과 9정맥을 마무리하는데 꼬박 10년
이란 세월이 흘렀다.
동분서주 하며 30년 가까이 산을 빠댔어도 부처님 손바닥 안이었다.
수억의 은하계 중의 한 점 지구
그 지구의 한 점 대한민국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돌아다녀도 조막만한 한반도 금수강산도 다 돌아보지 못한다.
지구상의 세상 100분의 5의 땅도 제대로 걸어보지 못하고 눈감아야 하는 짧은 인생인 거다.
우리는 늘 그렇게 말하며 살아간다..
난 너무 바뻐 거기 갈 시간이 없다..
바쁘기는 개뿔!
집에 누워 리모콘 가지고 뒹굴거리면서 수박쪼개 먹는라 바쁘지…
그러다가 정작 떠나고 싶어질 때는 벌써 다리가 후들거리는 거다.
누워서 뭉기적 거리고 아얘 드러누을 날이 점점 가까이 와도 미리 눕고 싶은 게 인생이고 팔자인걸
또 어쩌랴?
어둠에 묻어 놓은 그 길은 별다른 특징이 없는 편안한 길이었다.
옛추억에 잠기며 걷는 사이 홀연히 목장지대가 나타났다.
숲 속을 가로지르느라 잘 몰랐는데 태양은 벌써 한낮의 뜨거운 열기로 바뀌고 있다.
감시 초소 같은 건물 한 켠에서 산골타잔이 따라 준 한잔의 맥주는 목젖과 심장에 찌릿찌릿한 전기
충격을 주었다.
거긴 또 하나의 추억이 있다.
이카루스처럼 태양을 향해 뛰어가던 내 젊은 날의 추억
14년전의 우리는 그날 새벽 5시에 소황병산에 도착했다.
동편 하늘을 엷게 번져가는 은은한 여명으로 멋진 일출을 예상하긴 했는데 매봉 까지 가기 전에는
일출을 볼 마땅한 곳이 없다고 했다.
우린 그렇게 어둠 속 속도 행군을 하고도 성스런 동해의 일출을 보기 위해 또 가속 페달을 밟았다.
긴 숲을 통과해서 시야가 트인 곳으로 나오자 어느덧 날은 밝아 있었다.
5시 40분 쯤엔 낮은 구릉의 초원지대가 나타났다.
1000고지에 조성된 목초지
그 위로 작은 언덕 같은 봉우리 하나가 보였는데 그 위에 오르면 해돋이를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날이 더 훤해지고 마음은 더 조급해 지는데 앞에 있는 누군가가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누구랄 것도 없이 우리 모두는 그 무거운 배낭을 메고 동편을 향해 일어나 앉아 있는 구릉을
향해 뛰어 오르기 시작했다.
지금도 선명히 내 뇌리에 남아 있는 하나의 우수꽝스러운 풍경 하나
목초지를 가로질러 질주하던 무리는 말도 아니고 염소도 아니고 정신 나간 사람들이었다는 거.
나는 그 중간 쯤에서 사력을 다해 말처럼 뛰었다.
우린 기어코 그 봉우리에 올랐다.
???
아뿔사 ! 근데 이게 뭐시여?
“메롱 속았지롱 !”
백두대간 산신령님 천연덕스럽게 앞에 또 다른 목초의 언덕과 봉우리를 준비하시고 즐거워하셨다.
알렉산더 포프가 그랬지 ?
학문이 어려움을 빗대어 산 넘어 산이라고…
인생도 공부도 그래서 산을 닮았다.
“고지가 바로 저긴데 예서 포기할 수은 없다.”
우린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내 앞에서 내달리던 몇몇이 지쳐 걸어가는 사이 나는 힘을 내어 더 달렸다..
내가 그 유명한 이기자 부대 출신 아니냐구?
행군과 구보를 밥 먹듯이 하고 TV “진짜사나이” 프로에도 나왔던 그 부대
그리고 나는 훈련병 때부터 선착순에 일가견이 있었다.
세 번의 선착순 일등 끝에 따낸 영광스런 일빵빵 보직은 산과 대자연을 향해 내 운명의 지침을 돌려
놓았다.
백두대간을 태백산백이라 부르고 자욱한 최루탄 연기로 호랑이가 담배 피던 시절
훈련을 끝내고 7명의 동기와 함께 연대 전입 신고하러 갔던 한 신병이 있었으니..
그날 우리를 인수하러 왔던 기관병 하사관이 우릴 선착순 구보를 시켰는데 난 거기서도
내 평소 실력대로 열심히 뛰어서 일등을 거머쥐었다.
일등이니 당근 2차 선착순은 빼줄 걸로 생각했는데…
근데 웬걸 꼴찌 한 놈만 꼬라 박아 시키더니 다시 뛰라고 했다.
“이럴 땐 꼬라박아가 더 쉬운 거 아녀?”
나는 다시 질풍노도처럼 휘몰아쳐서 또 일등을 했다.
그쯤 되면 사태의 추이를 짐작했어야 하는데 고지식한 도신병 컥컥막히는 숨을 참으며 세 번째도
일등을 한 것이다.
“이기자 부대 무능객 신병 만세!”
“헐 ~~!”
나중에는 꼬라 박은 세 명만 일으켜 다시 선착순 시키더니 꼴찌한 두 명만 전투지원중대 보내고
나머지는 모두 소총부대로 배속 시켰다.
그 선착순이 우리의 운명을 갈랐다.
우린 3년 내내 걷구 달리고 그 두 놈은 늘 트럭타고 다니고…
행군 때 마다 녀석들은 내게 손을 흔들었다.
그 때 배운 인생 교훈은 “인생 열심히 한다고 다 잘 풀리는 건 아니다.”
1000고지 초원 선착순 구보에서 열쓈히 산우들을 다 젖히고 세 번째로 두 번째 봉우리에 도착했는데
흐미 그 곳에서도 동편 시야가 열리지 않았다.
맥은 풀리고 이기자 부대의 악몽이 망령처럼 다시 살아 오는데…
그 때 반대편에서 올라오던 산님이 동쪽편 아랫 쪽에 일출을 볼만한 곳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 우린 다시 그곳을 향해 발바닥에 고무탄내가 나도록 또 내달렸다.
그날은 산행이 아니라 그 옛날 전투체육의 날처럼 완죤 산악구보의 날이었다
아니 목가적이고 낭만적인 소풍의 날에 우린 몸소 들짐승과 가축 체험학습을 하며 드넓은 초지를
종횡 했다.
어쨌든 우린 동해에서 떠오르는 찬란한 일출을 바라보며 힘차게 늑대의 울음으로 영역표시를 했던 것이다.
“ 아아 우우우우우 …….”
난 그날의 감동을 이렇게 적었다
오히려 능선의 안부에서 동해 바다 쪽 시야가 활짝 트인 곳을 만났다.
내가 막 도착했을 때 얇은 구름 층 위로 붉은 태양이 막 솟아 오르는 중이었다.
우리 등뒤로 계곡과 아름다운 초록의 초원을 안고 동해의 붉은 태양이 솟아오르고 있다.
안개의 흔적도 없는 맑은 가을 하늘 아래 1000고지 산상 초원에서 그 찬란한 감동을 만난다.
푸른 초원으로 번져가는 붉은 태양의 황금 빛
수마의 상처가 아직 드리워진 우울한 계절을 밝혀주는 성스런 초원의 빛이었다
"오늘의 이 아름다운 빛의 축복으로
항상 기쁨과 희망의 충만함 속에 살아갈 수 있도록 해 주소서 “
항상 자연의 아름다움을 지켜 갈 열정과 건강을 지켜주소서"
난 그 순수한 열정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지금도 힘들고 지칠 때 그날의 순수했던 열정과 성스런 감동이 떠 오른다.
난 안다. 세상의 기쁨과 아름다움들을 어떻게 찾아가고 어떻게 만나야 하는 것인지…
힘겨움의 끝에서 나의 가슴을 흔들던 그 무수한 풍경들은 내 인생의 별이 되고 등불이 되었다.
그래서 늘 힘들었던 추억은 오래 가슴에 남고 시간이 지나면 그 힘겨웠던 순간들은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으로 채색되어 기억 속에 표구되는 것이다.
대관령 가는 길
내 기록에 남겨진 그 아침의 목장 길은 이렇게 동화처럼 사랑스러웠다.
대관령 가는 길은 목가적이고 낭만적이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엔 시원한 가을바람이 불어가고
초록으로 단장한 고원의 초원은 신의 정원처럼 평화롭다.
이름 모를 들 꽃들이 피어 있는가 하면
따사로운 태양아래 억새가 가을바람에 하늘거린다.
이렇게 부드럽고 감미로운 가을 길을 무심하게 걸어 가노라니
어디선가 요들송이라도 들려올 것 같다 .
어릴적 보았던 만화영화 알프스 소녀 하이디가 떠오르고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과
송 오브 노르웨이 생각이 난다.
알프스의 그림같은 풍광을 느끼게 하는 고지의 초원들 때문일까?
마음은 하늘처럼 한 점 티없이 평화롭고 기분은 날아 갈 것처럼 상쾌하다.
오늘은 멋진 시상이 충만할 것 같다.
수 많은 산행에서 감동 속에 만났던 그 숱한 비경들에 오늘 나는 또 기억할 만한 한국의 아름다운
산하를 가슴에 담는다
난 늘 백두대간의 고원은 국가와 국민이 돌려 받아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언제가 이 목가적인 초지는 다시 숲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래서 점점 더 메말라가는 우리 후손들의 가슴을 촉촉히 적셔주고 그 땅은 자연으로 돌아가 수많은
물과 곤충 그리고 동물들의 터전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 날의 추억과 낭만을 떠 올리면서 아들과 그 길을 걸었다.
햇살은 눈부시고 언덕 위에서는 바람이 불어주어지만 좀더 시원한 바람이 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뭉게구름 두둥실 떠가고 가끔 태양이 구름 속을 들락거렸으면 그날의 감동과 느낌을 다시 살아 올 수
을 것 같았다.
백두대간 신령님도 반가워하셨다..
손님 맞을 준비는 많이도 하셨다.
바쁘신 일 많은 텐데 비라도 올까 봐 아침 일찍부터 벌건 태양을 끌어다 꼼짝없이 불침번 서게 만드시고.
푸른 하늘을 활짝 열고 숲과 언덕에는 바람을 풀어 놓으셨다.
온갖 야생화를 도열시켜 환영에 마지 않고 나비도 날려 장도를 축하해 주셨다.
이런 길은 느리게 걸어야 제 맛이다.
산이 그리는 그림도 보구 바람이 전하는 말도 듣고….
사진을 찍느라 속도가 느려졌다.
아들은 산꼭대기와 호나우드와 함께 풍차길 옆 한 점으로 사라 졌다.
전망대에 가까이 가자 사람들이 많아지고 목장 측의 셔틀버스가 먼지를 피워 올린다.
장터 같은 내 머릿 속에 남아 있지 않은 풍경이다.
전망대에서 쉬고 있는 아들과 일행들을 만나 잠시 다리쉼을 했다.
곤신봉 까지는 다시 구불거리는 황토 길을 따라 오르는 길이다.
산꼭대기와 호나우드는 곤신봉 언덕에서도 쉬지 않고 내처 가버렸다.
남한강 상류가 되는 송천이 발원하는 역사적인 봉우리
노란 꽃들이 지천에 피어 있고 시원한 산들 바람이 불어가는 이 봉우리도 무심하게 지나치다니…
산꼭대기와 호나우드는 오늘 극기훈련 중이다
“아들아 ! 풍경 좋은 곳과 바람길에서는 쉬어 가야 한다.”
아들과 나는 곤신봉 언덕에 있는 풍차 아래 풀 밭에 주저앉아 가방을 베고 비스듬히 누웠다.
시원한 바람이 마구 불어 왔다.
한 20여분 푹 휴식을 취하는데 으실으실 추울 지경이다.
마치 그 옛날의 하와이처럼 그늘과 땡빛 아래는 이렇게 차이가 크다.
등짐을 내리고 편하게 내려다 보는 초원의 풍경이 비로소 편안하고 여유롭게 다가온다.
얼마 전 6년 전에 영화관에서 본 영화를 TV에서 다시 보았다.
주인공들과 스토리는 모두 기억이 나는데 조연들과 디테일 한 사건 전개는 전혀 보지 않은 영화 같았다.
10년이 넘은 이 길도 풍차가 걸린 풍경의 이미지만 빼면 흡사 새로운 길과 다름없다.
세월의 바람에 날려가는 기억의 유한함이라니….
그래서 우린 같은 길 위에서도 또 새로운 풍경을 만나고 다시 새로운 희망에 부풀 수 있다.
생각보다 빨리 도착할 것 같았지;만 역시 느낌이나 기억은 시간의 기록을 따라가지 못한다.
곤신봉에서 멀리 솟아오른 산 위에 피뢰침처럼 선자령 표석이 보인다.
아직 선자령이 저렇게 멀리 있으니 세시는 넘겨야 대관령에 도착할 것이다.
태양은 이글거리며 여름을 재촉하지만 속도를 늦추면 뜨거운 열기 아래서도 가끔 여유와 바람을 느낄
수 있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길을 더 걷고 얼마나 많은 감동을 더 만날 수 있지는 모르겠다.
그 동안 살아온 것처럼 기쁨과 평화가 언제나 함께하는 가운데 좀 더 넓은 세상과 좀더 낯 선 세상을
만나보고 싶다.
살아보니 세상의 모든 것들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더 빨리 변한다.
아직은 짱짱하다고 큰 소리 쳐도 대간 길 기록은 늘상 평균 1시간 30분 가량 뒤쳐진다.
난 1년에 10분씩 느려진 셈이다.
인디언은 길을 걷다가 영혼이 따라 오는지 보려 가끔 뒤를 돌아본다는데
어느 길목에서도 세월은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았다.
그 넘은 늘 같은 속도로 걸어가는데 내가 느려지니 그 넘이 더 빨라 보일 수 밖에…..
결국 그 넘이 다 먹어치울 것이지만 난 마지막 까지 호기심과 튼튼한 내 다리는 내어주고 싶지 않다..
그래도 내 가슴을 흔드는 무언가를 일찍 찾아 낸 것은 나의 행운이었다.
그리고 싼 값으로 많은 풍경과 추억을 사 놓은 건 참으로 잘한 일이었다.
그건 나중에는 웃돈을 주고도 절대 살 수 없는 것이라…
선자령 오름 길에는 달아 오른 땅에서도 열기가 일었다.
그래도 멀리서 보았던 황토길이 아니라 숲으로 길이 난 길이 있어서 가끔 바람과 같이 걸었다.
“ 아들아 살아 가는 동안 많이 걸어라
다리가 아파도 그 걸음이 너의 머리를 맑게 하고 너의 가슴을 넓어지게 할 것이다.
가끔 어떤 복잡한 생각들은 더 높이 올라가고 더 멀리 걸어 갈 때 아무렇지 않게 정리될 것이다..”
백두대간은 말없이 흘러가고
우린 함께 그 길을 걷는다.
거긴 우리의 삶과 문화가 소박한 들꽃으로 피고지고
역사는 구비구비 우리의 기쁨과 한을 부둥켜 안고 흐른다.
어디 그것 뿐이랴.
거긴 문학이 살고 철학이 살고 우리의 영혼이 사는 곳이다.
우린 그 길을 그냥 걷는 것이 아니다.
우린 그 길 위에서 시인이 되고 도인이 되고 또 신선이 된다.
선자령
선자령 길에서 철쭉은 우리에게 환영의 꽃다발을 걸어 주었다.
선자령에 서서 지나 온 길을 바라 보았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애잔하고 가련한 우리 국토의 등줄기
아무도 없는 선자령에서 여전히 기세등등한 땡빛도 우리에게 우뢰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
멀 때 같이 훌쩍 크기만한 낯익은 선자령 표석은 우리에게 한 평의 그늘을 내어 주었다.
“아들아 인증샷 찍어 줄 사람이 올 때 까정 기다리자!”
바람이 살랑거리며 먼저 찾아와 주어고 오래 기다리지 않아 부부 산님이 반대편에서 올라왔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조금 더 쉬려 했는데 생각보다 더 일찍 우린 다시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파이팅을 외쳐야 했다.
기념촬영을 하고 나니 한무리의 산님들이 왁짜지껄 올라 오는 통에 우린 서둘러 대관령으로
하산의 길을 잡았다.
선자령 숲길은 뜨거운 태양의 열기 아래서도 피톤치드 가득한 쾌적한 강원도 공기를 잘 보존
하고 있었다.
바람은 제 흥에 겨워 숲 사이로 이리저리 헤집고 다녔다.
선자령 길은 눈 감고도 훤한 길이다.
무릎까지 빠지는 눈이 보고 싶을 때
늑대 울음소리를 내는 칼바람이 그리워 질 때 찾아 가는 길
어느 가을 몽환의 안개 속에서 붉은 단풍이 신의 정원처럼 아름답고 신비로웠던 그 선자령이다.
짙푸른 선자령 계곡의 숲 길이 그리웠지만 백두대간 정코스는 능선을 따라 이어지는 길이니 우린
빈번히 햇빛에 노출되는 능선 길로 전망대에 올랐다.
뜨거운 열기에 동해 쪽은 뿌연 연무에 가리웠어도 선자령 산세상은 아직 연록의 푸르름이 살아
있는 5월의 봄날 이었다.
우린 길 위에 흩어진 아름다운 추억을 밟으며 푸른 물이 뚝뚝 떨어지는 단풍나무 숲 길을 걸어
여유롭게 다시 대관령으로 내려섰다.
피로가 겹치고 때 이른 무더위가 동행한 길이었지만 우린 여유롭고 즐겁게 그 길을 걸었다.
얼음 얼린 물이 오늘 길의 톡톡히 도우미 역할을 했지만 사단은 내려와서 났다.
넘치게 정을 담은 산친구들의 권주와 긴 여행길의 갈증으로 다섯 잔의 쏘맥 하산주를 연거푸
마시고 아들과 도로 건너 계곡으로 간 것 까지는 그래도 좋았다.
계곡의 수량이 다소 적긴 했지만 물이 너무 차가 와서 알탕은 엄두도 못 내고 머리 감고, 웃통 벗고
땀을 씻어 내기만 했을 뿐인데 몸이 으실으실 추워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배가 아프면서 오한이 밀려 왔다.
한바탕 소나기가 퍼부을 것 같이 천둥이 으르렁 거렸다.
난 서둘러 내려와서 고뇌에 찬 신음과 마후라 터진 오토바이의 굉음으로 대관령에서 그렇게 영역
표시를 했던 것이다.
“아 으으으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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