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노인이여 병자여?
내가 수도승이여?
이렇게 멋진 봄날에 어떻게 회색도시에 웅크리고 있냐고?
새벽의 들창을 열고 아름다운 산하를 떠돌 수 있다는 건
난 아픈데도 하나도 없고
이 봄날을 구속할 것 없이 하나도 없이 자유롭고
별다른 걱정 근심도 없다는 거
그라모 됐지
모시가 문젤껴?
다시 봄이 돌아 왔는디
봄은 어제 광양에 매화를 흩뿌리고 동백의 몽우리를 터뜨리더니 오늘 금남정맥길에서도 내 콧구멍으로
봄바람을 잔뜩 불어넣어 가슴을 풍선처럼 부풀게 했다.
수줍게 다가와 감미로운 언어로 속삭이고 부드러운 입술로 입마춤하는 그녀와 함께 길을 걷는 것 만으로
가슴이 설레이는 그런 날.
가끔은 잊는다.
내 안의 야성과 질주본능을…
세상은 자꾸 내게 이젠 나대지 말고 가만히 앉아 있으라고 하고
세월은 아직 연식이 오래되지 않은 배들이 좌초하고 난파되는 다큐멘타리를 연신 틀어대면서 고물선의
전성기가 이젠 지나고 있음을 자꾸 일깨워 준다..
하루아침에 현역에서 예비역으로 밀려나고
하루아침에 백두대간에서 내려온 변화무쌍한 삶의 트라우마가 내 안의 야성마저 길들이고 있다.
나의 역사를 잊고 세상에 세뇌 당하면 이젠 뒷동산이나 걸으며 메기의 추억을 흥얼거려야 한다.
가끔은 달려야 한다.
그래야 고물선이 아직 짱짱하다는 걸 가슴으로 느끼고
짱짱한 고물선을 관제하는 소프트웨어에 버그가 생기지 않는다..
산 행 일 : 2017년 3월 12일(일요일)
산행코스 : 피암목재-장군봉-큰싸리재-금만봉-왕사봉-무릉도원
산행거리 : 약 13.5km (접속거리 약 2km)
소요시간 : 약 6시간 30분
날 씨 : 봄날처럼 맑고 포근
동 행 : 귀연산우회 19명
오래 산에서 함께한 친구들과의 즐거운 봄날 산행이다..
군데 군데 뭉친 근육을 풀고 뱃살에 경고를 보낼 수 있는 다소 뻐근한 여행길…
출발부터 컨디션이 좋고 발길이 가벼웠다.
흡사 강원도 산군처럼 기골이 장대한 전라의 고원은 아직 갈색의 겨울잠에서 깨어나지 않았지만쏟아
지는 눈부신 햇살엔 봄기운이 완연했다
다이나믹한 산세
봄의 연무에 가리긴 했어도 첩첩산중의 바위봉에서 바라보는 장대한 산세상은 장쾌하고 후련했다.
해빙기의 고원에서 가슴 가득 느껴지는 봄이다.
내사는 가까이에 있는 숨어 있던 보석 같은 산하의 수려한 풍광에 탄성을 올리며 또 연신 사진을 찍으
면서도 난 바람처럼 가볍게 거친 능선을 날아 올랐다.
“봄의 기를 받아 회춘하고 있는 겨 ! “
굳이 의도한 바도 아니었는데 봄길에서 신체리듬이 되살아 나다 보니 산꼭대기,상아,산세상님과 함께
선두그룹을 이루었다.
풍경을 감상하거나 사진을 찍느라 한참을 뒤떨어 졌다가도 별로 힘들지 않게 따라 붙었다.
장군봉 인근의 등로는 거칠고 군데 군데 눈이 녹지 않아 위험했다.
백두대간 이후 간만에 느껴보는 짜릿한 스릴과 쾌감이었다.
그래도 왕사봉 까지는 완죤 봄날이었다.
서서서 산행대장의 설명과 지도에 따르면 하산지점은 대동금남 분기점인 금만봉에서 정맥길에서
벗어나 왕사봉을 찍고 20여분 더 가다가 은천리 무릉도원 쪽으로 내려서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근데 30여분이 지나도 내려갈 만한 길이 나타나지 않았다.
산세상님이 확인한 선답자의 산행기에서 620봉에서 분기되는 하산로가 있다고 하는데 종이지도
에서도 선답자의 산행기에서도 그 620봉의 실마리를 찾을 수 없다.
트랭글과 오룩스를 켜도 620봉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제서야 왜 작은싸릿재를 두고 왜 굳이 정맥길을 벗어난 지맥 중간을 끊었는지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
“이번 루트 누가 잡은겨?”.
우리는 비스무리한 봉우리에서 한참을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는데 뾰족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해발이 장난이 아닌데 길이 아니라면 하산길 개고생은 따 놓은 당상이다.
인간 네비 산꼭대기가 “GO!”를 외쳤다.
지나 온 길에서 두 눈을 부릅떴지만 하산로 같은 곳은 없었고 앞쪽으로 더 진행하면 내려다 보이
는 은천리가 더 멀어진다..
그렇다고 길도 없는 능선을 치고 내려가는 것도 영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
난 길이 없으면 다시 올라올 요량으로 잠시 앞서서 내려 갔는데 능선아래 산악회의 표지기 2개가
연달아 펄럭 인다.
“심봤다 !”
표지기를 보고 나서 그런지 그런대로 길의 형체가 있는 것도 같았다.
산꼭대기는 아애 표지기를 하산방향으로 돌려 놓고 일행들 모두들 몰고 내려오는데 표지기 방향
으로 잠시 진행하니 아뿔사 깎아지른 절벽이 막아선다.
그러고 나서는 길의 형체도 리본도 모두 사라졌다.
“으헉! 일헐수가?”
“길이 읍다!”
어느 산악회가 내려가는 길에 달아 매놓고 잘못된 줄 알면서도 표지기를 회수하지 않은 모양이다.
다시 올라가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혹시나 하고 계곡 쪽으로 길을 찾아 보아도 여전히 길의 형체는
보이지 않는다.
인간네비 산꼭대기는 계속 치고 내려가는 도리 밖에 없다고 했다.
잠시후 청산님과 서서서 산행대장 까지 합류를 했다.
두 분이 합류해서도 뚜렷한 대안은 나타나지 않았는데 청산님 말로는 왕사봉 직전에 은천리 하산로가
있다고 했다
“겨우 30분 능선길인데 그 곳으로 되돌아가야 하는 거 아녀?”.
벌써 능선에도 한참을 내려왔으니 산우들도 회군보다는 산꼭대기를 따라 모두 내려가는 분위기다.
“헐~~”
길의 흔적은 아얘 없었다.
7부 능선쯤에서 뒷골이 땡기기 시작했다.
그건 심마니 길도 아니고 멧돼지도 길도 아니고 그냥 급경사의 산비탈이었다.
그냥 산비탈도 힘든 판국인데 그 가파른 비탈에 벌목까지 해 놓아서 똑바로 내려 갈 수도 없었다.
시종 겹겹이 넘어진 나뭇가지가 바짓가랭이를 부여잡고 고정되지 않은 비탈의 돌들은 틈만 보이
면 발목을 비틀어 댔다.
잘못하다가는 큰 사고를 만날 것 같아 같아 잔뜩 긴장하다 보니 다리에는 있는 대로 힘이 들어가
고 거리는 줄어들지 않는다.
돌과 나무에 중심을 잃고 넘어지기도 수차례
불과 500미터를 진행하는 게 5km를 걷는 것보다 힘이 더 들었다.
아뿔싸 !
덫에 걸린 산짐승처럼 또 한 떼의 산꾼들이 길도 아닌 이 길을 내려서고 있다.
순전히 산꼭대기가 쳐놓은 귀연 표지기 때문이었다.
“ 오늘 산꼭대기가 사람 여럿 잡는다.”
그나마 벌목된 나무를 헤치고 계곡으로 내려서서는 상황이 조금 나아지긴 했는데 계곡 위에서 아랫
쪽으로 돌과 돌 사이를 건너 뛰다가 아랫돌이 허물어지는 바람에 체신머리 없이 나동그라지는 수모
까지 겪었다.
모처럼 필받아 선두그룹으로 나섰는데 이게 당최 뭔 일이래?
몇 번을 넘어졌는데도 다치지 않은 건 정말 다행이었다.
적상산 고삿발인지도 모르겠다.
하여간 우린 없는 길을 만들어 내려가는 악전고투와 고분분투 끝에 계곡 끝자락에서 임도로 올라섰다.
평지의 안정감과 안도감이라니!!!
평지풍파와 폭풍우가 밀려가고 천심만고 끝에 우린 드디어 약속의 땅에 도달하다.
계곡에서 탁족을 하면서 비로소 안도감이 들고 허기가 밀려왔다.
내려 와서 보니 벌써 내려와야 했을 후미팀도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중간에 엉뚱한 방향으로 진행했던 후미팀은 되돌아와 왕사봉에서 편한 임도 길로 내려온 줄 알았더니
웬걸 선두를 따라 진행하다 산꼭대기 표지기를 보고 우리 뒤로 내려왔다.
“양반곰 회장은 모했디야?”
“후배님들 못난 선배들 땜시 미안허이~~”
크로바님하고 낯도깨비님은 왜 거기 낑겨 있었어?….”
정상루트보다 알바 구간이 더 많은(?) 역쉬 한 수 위의 사람들….
젊음이라 그래서 좋은 거다.
길이건 아니건 천방지축 나대도 술 한잔 먹고 잠 잘자고 일어나믄 그것으로 끝잉게
얘기를 들어보니 단축산행 A팀도 엄청 고생하고 늦게 내려왔다..
전 대원이 알바한 역사에 기록될 만한 이런 날은 귀연 청립 이래 처음이다.
오늘은 귀연 집단 유격훈련의 날 !.
식객에서 그랬지
군대의 뻬치카 라면 맛을 느끼려면 엎드려서 빳다를 몇대 맞고 라면을 먹어야 한다고…
너무 늦게 점심을 먹으면 뒤풀이 음식 맛이 없다고 다소 일찍 점심을 먹은데다 길도 없는 산비탈에서
무장 게릴라처럼 날뛰었으니 그 체력소모가 오죽했을까?
눈이 쑥 들어가고 등가죽이 뱃가죽이 붙으려는 찰라에 황금색 오묘한 맥주와 더불어 서빙된 마실표
수육 거기다 제철 미나리 몸똥 배추 , 겉절이 등 봄냄새 물씬 나는 봄나물들…
맛의 오르가즘은 그렇게 황홀하게 다가왔다.
요 몇 년 동안 가장 맛있었던 수육
미각의 기쁨은 그렇게 고통과 아픔의 끝에서 완성되었다.
가까운 금남정맥에서 만난 기억에 남을 만한 멋진 날이었어.
화창한 봄날에…
오랜만에 다리 뻐근하게 잠자던 야성을 깨우고
스릴과 서스펜스 넘치는 모험산행에
좋은 산 친구들
그리고 도시 어디에서도 맛볼 수 없는 미각의 진수.
김시권 사장님이 삶아 낸 수육 레시피는 귀연의 비급이여
온갖 봄의 향기를 입으로 전해 준 단비총무는 귀연의 보배여
오래오래 복 받을 껴….
귀연 동지들 모두 수고했시요…
그래서 숱한 생사고락을 함께한 우린 산우이고 또한 전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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