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간 : 충북알프스 제2구간 도상거리 : 20.3km 일 자 : 2004년 10월 19일 (화) 동 행 : 없음 소요시간 : 11시간 20분
05: 00 : 대전출발 06: 40 : 만수리도착 산행시작 07: 10 : 피앗재 07: 35 : 최초 무명봉 07: 50 : 전망봉 08: 20 : 천황봉 앞 봉우리 09: 00 : 무덤 09: 25 : 천황봉 10: 05 : 첫 가을남자와의 조우 10: 25 : 입석대 11 :05 : 문장대 휴게소 11: 30 : 문장대 출발 12: 15 : 관음봉 앞 평반 12: 55 : 관음봉 멀리 속세가 보이고 문장대 신선봉 비로봉 천황봉으로 흐르는 능선 13: 45 : 무명봉 1 춤추는 가지를 가진 나무들 봉우리 뒤 바위그늘로 장대하게 솟구쳐 오르는 바람. 14: 10 : 무명봉 3 최고의 절정을 노래하는 멋진 단풍의 숲 15: 00 : 북가치 15: 20 : 묘봉 (874m) 16: 00 : 상학봉(834m) 16: 18 : 멋진소나무 와 평평한 바위의 풍경 16: 00 : 직벽타기 : 손힘이 이렇게 없을 줄이야 16: 50 : 매봉지나 능선에서 신정리 방향 하산 17: 20 : 임도 충북알프스 팻말 (묘봉 3.4km)
아무런 준비 없이 떠난다. 서글픔과 서러움 그리고 상심과 상처마저도 넉넉히 보듬을 수 있는 산이 거기 있기에 …
가을을 기다려 준비한 휴가는 돌이킬 수 없는 상처만 남기고 후회와 한탄 속으로 날아가 버렸다 삶을 살아 가면서 항상 기쁘고 좋은 일 만 생기길 바라는 것은 지나친 욕심인 모양이다 철 지난 바다의 쓸쓸함과 황량함이 가져다 주는 역설적인 낭만과 그 호젓함 여름 바다 보다 훨씬 더 바다다워 보이던 인적 없는 바닷가의 검푸른 파도는 폐쇄된 해수욕장의 을씨년스러움으로 만 남았다.
동해바다
그래 그만하길 다행이지 하면서도 그 안타까움과 자책은 미련으로 스멀거린다. “그건 후회와 아쉬움을 넘어선 운명과도 같은 것일지 모른다.” 돌아 오지 않는 시간처럼…… 하지만 마지막 마음 한 구석 만큼은 아직 시간에게 맡길 준비가 되질 않는다. 10월은 잔인한 달인 모양이다. 휴가지에서 사고를 당하고 또 직원이 다쳤다는 소식을 들어야 했으니…..
의기양양하게 떠났던 휴가 길 펄떡이는 동해를 마시고 바리바리 추억을 담아 오리라던 여행 길 마누라에게 보여주리라 던 천불동의 불타는 단풍을 남겨 둔 채 조용한 해안도를 따라 그렇게 풀 죽어 돌아왔다. 최악의 가을이었지만 인정하고 흘려버려야 할 시간만이 남았을 뿐이다.
남아 있는 휴가 기간 함께 하려 했던 피아골 단풍산행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지만 집에 있는 것이 더 답답할 것 같아 집사람이 끓여준 된장찌개를 한 술 뜨고 새벽 네시 30분에 차를 몰고 나선다. 준비 없이 나선 길에서 나는 다시 충북 알프스를 떠 올리고 있다. 털어 버려야 할 것이 많은 오늘은 숨이 턱에 찰 때까지 내달려 기진맥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서원리 입구를 지날 때쯤 희끄무레하게 날이 밝는다. 새벽을 깨우며 첩첩의 산길을 홀로 돌아 만수리에 도착하자 날이 훌쩍 밝았다. 6시 30분이다.
마치 저번 1 구간 종주 때처럼 그렇게 시원한 바람이 불어 가고 날은 흐리게 가라 앉아 있다. 날씨로 보아서는 영락 없는 연결 종주인 셈이다.
“그래 떠나 길 잘했어 !” 맑은 계곡에 머무는 숲의 향기를 들이 마시자 가슴이 후련해진다. 이 수려한 산세와 청명한 공기는 무엇인가를 잊고 싶을 때도 도움이 될 거다.
사람의 행 불행은 결국 사람의 마음 속에 있다. 돌이킬 수 없는 일이라면 훌훌 털어버리자. 불어가는 저 바람에….. 순환하는 계절의 변화를 묵묵히 받아들이며 잎새를 털어내는 저 나무들처럼….
계곡에서 흐릿한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조용히 가라 앉은 만수리 계곡길을 따라 피앗재에 오른다. 현란한 붉은 빛의 가을은 훨씬 더 가까이 와 있다. 수채화 화폭처럼 조용히 가라 앉은 날씨가 청솔의 무리 가운데 붉은 단풍을 더 두드러지게 한다.
피앗재에는 30분 만에 올라섰다. 그 여름의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피앗재 무성한 수림 속에 매미가 울어대던 그날처럼 오늘도 혼자 남겨졌다. 물드는 가을 속에 쓸쓸히 낙엽이 뒹구는 그 고갯길에는 그 옛날 보지 못했던 표지판이 서 있다. 이제 막 깨어 나는 능선의 아침에 기대어 표지판은 천왕봉이 5,8km에 3시간 40분 거리 임을 알려 주고 있다. 천황봉 가는 길엔 부드러운 능선길이 이어지고 지난 번과 같은 서늘한 바람결이 따라온다 달라진 것이라곤 이미 낙엽으로 간 능선의 수북한 잎새들과 그 잎새가 사라진 고원의 나뭇가지 사이로 내려다 보이는 물들어 가는 가을. 백두대간 종주 때 한 번 흘러간 능선이지만 기억이 별로 나지 않는다. 마치 옷을 갈아 입은 것 같은 계절의 변화는 산의 얼굴을 금새 바꾸어 버린다 산이 가장 아름다워 지는 계절에 속리의 깊은 속살을 헤적이며 인적 없는 호젓한 길을 간다. 아직 떨치지 못한 속세의 근심을 배낭에 달고…..
사실 심란한 마음에 훌쩍 떠난 길이라 선답자의 여정을 꼼꼼히 기록해 놓은 개념도며 지도를 모두 두고 왔으니 문장대부터 활목재 까지의 통제 구간 에서 제 길을 잘 찾아 갈 수 있을지 걱정스럽기도 하다 기억나는 거라고는 꽁지 빠지게 줄달음쳐야 11 시간쯤 걸려야 활목 고개에 떨어질 수 있다는 사실 뿐. 가을과 절경에 넋이 나간다면 가는 걸음이 늦어질 것이다 이 가을엔 어느 봉우리를 몇 시에 통과했다는 것이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닐 게다. 대부분 산에서의 봉우리나 지명은 역사적인 사실이나 전설에 근거하여 절묘하게 작명된 것이긴 하지만 이름을 모른다 한들 아니 그저 내가 다시 이름을 붙인들 또 어떠랴… 내면의 실체는 언제나 거기에 있는데…….
갈색의 가을 색조는 사람의 마음을 푸근하게 한다. 인적 없는 가을 한 가운데로 흐르는 것 만으로도 산란한 마음은 정리되고 마음은 조용히 가라 앉는다. 유난히 청솔이 많은 속리이긴 해도 고지대라 낙엽을 떨구는 참나무들이 더 많은데 군데 군데 절정을 시새우는 고운 빛깔의 단풍나무들은 갈색의 가을 한가운데서 청솔과 조화되어 보석처럼 빛나고 있다.
불타는 단풍
무명봉을 지나고 전망봉을 지나고 8시 20분에 천황봉 앞 봉우리에 올랐다. 가는 앞길을 단단하게 막아선 천황봉 모습이 땀 깨나 흘러야겠다. 산중고원 첩첩히 포개진 산과 갈지자로 흘러가는 계곡 언저리 노랗고 붉은 단풍들이 지천이다. 어디선가 싸리나무에 옥수수라도 구워내는 냄새가 날 것 같아 코를 벌름거려 본다. 민간인의 발길이 통제된 강원도 산간에서 계절의 흥에 겨워 저 혼자 불타다가 스러져 가는 단풍들 속에서 싸리나무에 옥수수를 구어 댔었다. 억눌린 청춘은 분기탱천하여 돌맹이 같은 단단한 근육과 구릿빛 피부로 산화되고 해갈되지 않는 젊음의 허기는 산으로 가는 날에나 쓸 수도 없는 배암의 정력과 싸리나무에 구운 누런 옥수수로 겨우 채울 수 있었던 그 때 계절의 풍상을 묵묵히 인내하다 한으로 내지르는 그 선홍색 단풍은 서글픈 청춘의 눈에도 황홀한 장관 이었다. 세월이 가도 이미 기억 속에 표구되어버린 그 시린 풍광의 가을 산을 잊지 못해 숙명처럼 이렇게 어느 능선에서라도 가을을 만나 야 한다. 가을! 그 고혹 그 계절의 유혹 때문에 산을 대하는 안목이 출중해졌고 눈이 높아졌다. 가을이 살아 있음의 축복을 느끼게 한다.
비탈길을 올라서자 찍어낸 나무 사이 쓸쓸한 무덤 그리고 바람소리 잘 다듬어진 잔디 위로 가을은 쌓이고 길손은 낙엽을 깔고 앉아 계절의 홍조에 취한다
피앗재에서 두시간 만에 도착한 천황봉엔 아무도 없다. 3시간 40분이나 걸린다더니….. 세찬 바람 한가운데 고원을 굽어 보고 침묵하는 산 뜨거운 태양이 이글 거리던 그날의 들뜬 봉우리엔 쓸쓸한 표석과 바람 뿐 이 속리의 최고봉에서 나는 고토를 회복한 제왕이 된다.
천황봉 높아 있는 산에 서면 내가 통치하는 멋진 세상을 본다 내 발아래 비좁은 세상은 숨죽여 엎드려 있다. 보아라 저 퇴각하는 무리들…. 내 위세와 덕망은 천하를 떠돌고 제국의 영광은 온 누리에 당당하다. 푸른 하늘은 넓은 가슴을 열고 내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천지에 나를 깨우는 것들 바람은 숲의 향기를 날리고 산릉은 장엄하게 흐른다. 내 눈은 더 먼 곳을 지배하고 가슴은 힘찬 고동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다시 진군의 나팔 소리 고동한 제왕을 위한….
천황봉 조망
산죽시립 천황봉에서 경업대 가는 길엔 키 높이를 넘는 산죽이 도열하고 있다. 독야청청 청솔처럼 순환하는 계절에 맞서서 변치 않으려는 산죽들의 고집 마저도 이 가을 속에서는 자연의 훌륭한 조화일 뿐이다.
경업대를 얼마 남겨 두지 않아서 첫 사람을 만났다. 둘은 서로 처음 만난 사람이라 반가웠다. 어디 까지 가냐니까 정해진 목적지 없이 단풍을 따라 내려 간다는 말이 돌아 온다. 잠시 서서 이야기를 나누다 우리는 헤어졌다. 지지 난 주 공룡을 타고 지난주와 이번 주엔 바다만 보았다. 나보다 더 가을을 타는 한 남자를 가을 속으로 보내고 나는 단풍을 따라 다시 길을 재촉한다. 임경업 장군이 기나긴 수도 끝에 세웠다는 입석대 그 장군의 위용은 당당하게 속리의 아침 한 가운데 버티고 있다. 긴 바람에 벌써 가지를 털어 버린 나무들은 스산한 소리를 내며 운다
문장대 가는 길
시장한 차에 문장대 휴게소에서 시래기국을 한 그릇 게눈 감추듯 비웠다. 수려한 경관의 한 가운데서 자연을 훼손하는 주범이란 생각에 산속의 음식점들을 지독히 싫어하다 보니 문장대 바로 아래 서 있는 이 음식점들이야 말로 내 눈에는 항상 가시 같은 존재였다. 한 번도 눈길을 준 적이 없는데 황망한 오늘은 이곳을 염두에 두고 점심 일정을 잡아버리는 간사스런 선택을 하고 말았다. 하여간 음식점에서 뜨거운 점심으로 허기를 해결하니 원기가 충만해진다.
문장대 정상을 떠나 얼마간 가다가 초입에 만난 암릉지대에서 개구멍으로 올라 왔는데 나갈데도 없고 리본도 없다. 분명 온 길엔 화살표가 있었는데 막다른 골목처럼 바위가 막아서니 참으로 무엇에 홀리기라도 한 듯 괴이하다. 억지로 바위를 타고 길을 내여 비탈길을 오르니 위에 능선위로 길이 있고 리본이 나부낀다. 관음봉 앞 길에서 어렵사리 오른 바위에서는 문장대가 아득히 보이는데 1개중대가 족히 야유회를 할 수 있는 평평한 넓은 바위였다. 그 바위 위에는 몸이 떠밀릴 것 같은 바람이 불어가고 있다. 사지를 펴고 누워 하늘을 본다. 을씨년스러운 바람이 조금은 외로움을 느끼게도 하지만. 그래도 가을은 혼자 떠나고 싶은 계절일 수 밖에 없다 . 어느 틈에 구름 밖으로 얼굴을 내민 눈부신 태양 아래 갈색의 가을과 붉은 단풍이 조화롭고 그 위로는 인적 없는 심산의 고독이 드리워 있다.
새로운 길 기골이 장대한 낙차 큰 능선을 따라 가는 가을 여행 길은 온통 경이로움 가득한 감동의 물결 이었다. 기암과 노송이 어우러진 풍광 자체가 한 폭의 동양화 인데 그 위로 원색의 가을이 흘러가고 있으니 신선의 나라는 현란한 축제 분위기다. 백두대간의 어느 구간에 내어도 손색이 없는 구비구비 빼어난 절경 충북알프스라 칭하는 은둔과 신선의 땅의 진면목은 가히 아연실색이다.
가야할 능선 길
12시 55분 관음봉 멀리 속세가 보이고 문장대 신선봉 비로봉 천황봉 그리고 구병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은 무거운 하늘 빛으로 흐르고 있다. 여기가 신선국의 전망대 아닌가? 설악과는 또다른 강건하고 부드러운 암릉의 흐름 계곡을 달려가는 단풍 그리고 가을
세상은 내 마음 안에 있다. 비좁은 내 가슴이 세상을 담고 있는 것이다. 내 가슴이 따뜻하면 세상이 따뜻하다. 내 마음이 슬프면 이 서정적인 가을이 슬픈 색깔을 띤다. 내 마음에 사랑이 가득하면 세상은 평화롭고 온갖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 있다. 세속의 진폐는 모두 비워내고 오늘은 무심에 저 바람과 푸른 하늘 그리고 맑은 가을만 담자 눈부신 가을 산을 바라 보는 벅찬 가슴으로 대하는 이 아름다운 세상에 내가 있음이 축복인 것을…
지도도 없으니 무슨 봉우리 인지도 어디쯤 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선녀봉이라 이름 붙인 봉우리에는 계곡 아래서 웅장하고 시원한 바람이 솟구쳐 오르는데 그 장쾌한 바람 맛은 답답한 가슴의 문을 활짝 열어 젖히고 만다. 가을이 흘러 다니는 길목에 서서 그 가을을 비웃는 청솔들
청솔은 바위에 비스듬이 기대어 푸르고 가을 나무들은 그 여름의 미련을 묵묵히 떨구고 있다. 아직 남아 있는 계절의 고뇌 바람은 속리의 청천으로 가을을 날리고 멀리 산 위엔 구름의 그늘이 산을 반쯤 덮고 있다. 선녀와 신선은 간데 없고 갈 길은 아득한데 적막한 바람 길에 애 끓는 단풍이 나그네 발길을 더디게 한다.
되돌아 본 문장대
어느 날망 바위에 걸터 앉았다. 사람들과 떨어져서 홀로 보내는 어느 날 오후
한 섬의 상처도 없는 최고로 멋진 단풍 그 단풍 그늘 아래 누워 하늘을 올려다 본다 하늘은 온통 눈부신 붉은 빛이고 그 나뭇잎 그늘 마저 붉다 묘봉 가는 길엔 죽이는 단풍 숲이 지천이고 사방엔 혼자 깊어 가는 가을이 흩어 놓은 계절의 회한이 바람 길에 무심히 날린다.
산세의 오르내림 폭이 큰 탓에 체력 소모가 제법 있는 산행로라 멋진 풍광을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는 문장대와 활목고개 구간 만을 끊어서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산을 대하는 여유가 필요할 듯 싶다
청솔에 드리운 태양
북가치는 완만한 능선의 흐름을 내려서서 묘봉으로 올려 붙이는 길목에 조용히 앉아 있다 북가치에서부터 고요한 산중고독은 깨어졌다. 그 무수한 인파 부산에서 온 산악회는 수 많은 아저씨와 아주머니들로 등산로는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 세시에 북가치에 도착 했고 20분을 더 걸어 묘봉에 올랐다
묘봉에서는 장한 바람 속에 온 사방이 한 눈에 들어온다 지나온 능선의 파노라마는 장쾌하고 아직 가야 할 길의 지난함으로 저무는 날에 나그네 얼굴에 수심이 뜨는 곳이다 상학봉 그리고 상학봉을 지나 만난 넓은 바위 평반 위의 멋드러진 청솔 낙엽 밟고 가는 발걸음 마다 드리운 수채화 같은 가을 풍광 속리의 능선에서 가을은 세월의 깊이와 향을 간직한 원숙한 여인의 모습이다.
아름다운 꽃이 가시를 품 듯 만인의 사랑에서 남겨질 상처를 두려워했는지 속리 산신령님은 조화로운 능선의 군데군데 간담이 서늘한 직벽과 험로를 만들어 뭇 사람의 범접을 경계하고 있다. 절벽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니 간담이 서늘하다 오랜 훈련으로 단련되고 진화된 두 다리와는 달리 심각한 퇴행을 거듭한 두 팔은 깎아지른 직벽에서 육중한 내 몸을 로프에 지탱하느라 볼성사나운 버둥거림과 추락의 공포를 동반한 고통을 들추어 내 자존심 까지 여지없이 허물어뜨렸다. 나는 한쪽 골이 비대해진 이 시대의 지식인들처럼 대칭을 상실한 기형아가 되어가고 있는 걸까? 하여간 나의 체중과 나의 팔의 근력 사이에는 무언가 심각한 불합리가 내재하고 있다
참 위험한 구간이다. 조심해야지 자칫 가을의 서정에 넋을 놓고 있다간 큰 일낼 곳들이 너무도 많다 오랫동안 산과 함께하려면 무모함을 경계하는 안전산행이 최우선 아닌가? . 속리권의 이미지는 충만하되 탁월한 카리스마가 살아 있는 능선에는 강한 에너지가 느껴진다. 한국의 산하 다른 곳에서 만날 수 없는 그 독특하고 걸출한 풍광은 도무지 내가 어떻게 이곳을 아직 미답으로 남겨둘 수 있었는지 신기하기만 하다. 물들어 가는 그림 같은 가을 속에 거침 없이 흐르는 웅장한 암릉들과 그 난간에 기대어 고고한 청솔들 난 무심결에 오랜 세월의 휘장을 걷어 내었다가 감추어진 태고의 내밀한 아름다움에 흠뻑 빠져 버렸다 평일이라서 그렇겠지만 이런 풍광이 아직도 속세에서 멀리 떨어진 호젓함을 유지할 수 있다니… 오늘 나의 하루는 수 많은 감동과 감탄으로 점철 되었고 수 많은 감상과 아름다움들이 가슴 속에 가을의 상념과 파동을 전해 주었다. 울적하고 무거운 마음을 어느 사이 사라지고 걸음 걸음 마다 새로운 감동에 대한 기대와 기쁨이 종일 따라 다녔던 신비한 하루였다.
활목 고개로 고도를 떨어뜨리는 능선의 흐름이 아직 아득하게 보일 때쯤 저무는 날이 걱정되어 아쉽지만 신정리로 하산을 결정했다. 지금쯤이면 활목고개가 얼마 남지 않아야 하는데 빼어난 가경에 취하다 보니 가는 걸음이 많이도 늦어진 모양이다. 만수리를 출발한 지 11시간 20분 아직 해거름이 남아 있는 시간에 넓은 개활지와 억새가 긴 여정의 마무리를 축하해주는 신정리 임도에 내려섰다. 신정리는 큰 산에 기댄 아늑하고 평화로운 마을 모습으로 내 노년에 정착 할 후보지로 손색 이 없다는 생각을 갖게 하는 조용한 마을 이었다. 미리 적어 놓은 기사 아저씨에게 전화를 걸고 나서 신정리 길 모퉁이에 허물어진 모습으로 앉아 저물어 가는 날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수 많은 삶의 의미들을 부여하고 깨달아가는 긴 여행 길의 작은 마무리가 가져오는 충만함 그리고 그 나른한 피로가 무념과 무아의 경계를 기웃 거리게 한다. 속리 끝 자락에 매달린 망중한
쉴 새 없이 떠들면서도 꾸불꾸불한 도로를 미꾸라지처럼 잘도 빠져나가는 사람 좋은 기사 아저씨 덕분에 이미 어둠이 내려선 만수리에 지루하지 않게 도착했다. 하루 동안 심심했을 애마 그렇지 않아도 심란한데 나 혼자 훌쩍 떠나 버려 울적해 있을 가족들 하루만의 긴 여정이 또 애틋함과 그리움을 만든다. 세월은 이렇게 후회하고 흐느끼고 또 감싸 안고 등을 쓸어주며 흘러가는 것이리라
문장대에서 관음봉-묘봉 – 상학봉- 신정리로 이어지는 충북알프스 후반부는 속리의 비단길이었다. 그 길 위에서 나는 또 다른 깨달음을 얻었고 내가 받은 상처와 아픔을 조용히 치유할 수 있었다. 우리가 잊을 수 있을 만큼의 잔혹한 시간을 보내지 않고도 산은 상처를 덧나지 않게 보듬어 생각보다 훨씬 빨리 아물게 해 주었다. 나는 다시 영혼의 치유력을 가지고 있는 큰 산의 넉넉함을 보았다. 언제나 내 인생의 가장 위대한 스승은 산이었다.
이제 해마다 또 내가 찾아야 할 곳이 하나 더 늘어난 셈이다. 그 능선을 바람처럼 주유할 수 있었던 오늘은 기쁨과 축복의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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