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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기

설산을 찾아서(남령-남덕유-서봉-육십령)

 

 

 

고산설릉에 머무는 칼 바람과 천지에 가득한 흰 눈을 찾아 갔다가 속 절 없이 때 이른 봄바람만 가슴에 담고 봄볕에 얼굴만 그을려 돌아왔네

 

 

                                                                            덕유주릉

 

 

 

 

남령에서 남덕유는 처음 올라 본다.

눈 꽃은 바람에 바람에 날려가고

남령에서 바라보는 덕유 주능에는 눈의 자취가 희미하다

 

우리 팀 말고는 지나간 흔적이 없다.

바람 길 등산로에는 무릎까지 빠지는 곳도 있어.

깊이 파인 선답자의 발자국 따라 가는 길

아직 올라야 할 길이 아득하니

가득한 설원의 기대는 남아 있는 셈인가?

 

踏雪野中去

不須胡亂行

今日我行跡

遂作後人程

 

눈 덮인 벌판을 걸어 갈 때

발걸음 함부로 하지 마라

오늘 내가 가는 이 길은

뒤 사람의 이정표가 되느니

 

눈 길 위에 어지럽지 않은 발자국

서산대사의 시가 생각난다.

먼저 간 사람의 발자국을 조용히 따라 가는 길

눈 앞에는 능선을 따라 남덕유가 벽처럼  솟아 오르고

주능은 삿갓봉을 거처 동으로 유장하게 흘러 간다..

 

 

하봉에서 장쾌한 전망이 트인다.

긴 오름 길에서 잠시 휴식하며 덕유나라를 조망한다.

인적이 희미한 큰 산 한 가운데 있음이 

이렇게 장엄하다.

 

 

영각산 하산로가 만나는 길부터는 사람들로 붐빈다.

하봉 쪽 등산로는 폐쇄구간이다.

우린 금지구역을 무단침입 한 셈이다.

항상 바람이 많은 곳인데

날카로운 암릉 구간에 걸치는 바람결이 매섭지 않다.

이런 날도 있구나

 

건너편 영각사 철계단 위로 꼼지락 거리는 게 사람들이다.

남덕유 오르는 길은 겨울 풍광이 좋긴 해도 험준한 등산로가 미끄러워 겨울엔 위험한 구간이다.

나만의 겨울이 아니어서

겨울로 가는 덕유마차는 입추의 여지가 없지만 그저 후덕한 향적봉과 덕유 주능의 부드러운 눈 밭을 떠올리고 동참했을 많은 사람들은 눈길의 낭만과 거친 등산로의 힘겨움에 오늘 고달픈 하루를 보내겠구나.

 

 

 

 

남덕유산에서 서봉 조망

 

 

 

 

곡예를 하 듯 암릉사이 철 계단을 돌아 오르면 거기 동봉이 우뚝서 있다.

오늘은 바람 맛도 없이 흰 눈을 말의 갈기처럼 산주름에 간직한 능선들은 어디론가 말 없이 흘러 간다.

그래도 산 정상에 서면

세상의 시름이 한낱 미망이고

우리가 집착하는 것들이 뜬 구름과 같은 것이라.

 

수덕사 정자에 禪詩가 있다.

 

本是蕪南北

何處有東西

天地本虛空

白雲無定處

 

본디 남북이 없는데

동서가 어디 있을까?

천지가 본래 허공이라

구름은 정처가 없다.

 

불영사 천축선원 일운스님이 말했다.

가장 아름다운 날,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 언제인 줄 아느냐?

 

오늘 바로 이순간

 

숱한 날의 아름다운 기억들이 큰 눈이 머무르지 않는 심산의 아쉬움을 일깨우지만  눈부신 태양아래 큰 산 위에서 흘러가는 흰 구름을 만난 오늘도 멋진 날이다.

작은 기쁨과 슬픔들이 모인 날들이 한 해를 만들고 그 한해는 이리도 쉽게 흘러 가는 걸

깨달음의 길은 멀어 한 해가 지날적 참선하는 도인들은 두 다리를 뻗고 울었다는데.

깨달음의 먼 길을 피해가며 속세의 즐거움을 탐하고 가끔 그래도 이렇게 큰 산에 서서 작은 깨우침을 받고 있으니 난 스님들보다 속세의 凡人보다 행복 하구나 .

 

서봉 가는 길에 하도 배가 고파 식사할 자리를 찾아도 온통 눈 밭이라 마땅한 자리가 없다.

그 여름 장한 바람이 불던 서봉에 서면 세찬 바람에 날릴까 저어

기를 쓰고 자리를 찾아 길 넘어 다져진 눈 밭 한 켠에서 식사를 했는데 서봉엔 칼바람의 자취도 없다.

능선보다 더 평화스런 고원이 거기 있었다.

햇볕은 따사롭고 가끔 불어주는 바람은 봄바람처럼 감미롭다.

백두대간 종주 이후 처음 다시 오르는 서봉은 1500 고봉이 무색하듯 성급히 겨울을 보내고 봄을 맞이할 기쁨에 들떠 있다.

한참을 우두커니 앉아 흘러가는 말 없는 산릉들을 바라보다. 얼룩말처럼 갈기를 휘날리고 있는 육십령 능선길로 내려선다.

 

 

 

 

 

 

육십령 능선

 

 

 

남으로 흘러내리는 능선은 울고 있다.

겨울을 보내는 아쉬움인지

기다리는 봄의 반가움인지..

눈물이 흘러 내리는 능선 길은 질척거리고 너무 미끄럽다.

가슴 시린 겨울을 만나러 왔다가 봄바람만 가득 들어 집으로 간다.

봄 햇살은 고양이처럼 내 얼굴을 간지르고

봄은 그렇게 벌써 할미봉을 우회하여 육십령 능선을 오르고 있다.

 

 

 

 

 

 

돌아본 능선

 

 

 

 

한국의 걸출한 영산의 주 봉우리를 감돌아 흘러 내리는 길은 6시간 걸렸다.

요즘 컨디션이 괜찮은 편이라 선두그룹에 붙으려 했다가

능선에서 사진 몇 번 찍는 사이 사람들은 자취도 없고 나는 그들이 남기 발자국을 따라 혼자서 조용히 흘러 갔다.

덕유의 겨울은 너무 따뜻해서 외로움을 느낄 새도 없었고 혼자 이러 저러한 사유의 문턱을 기웃거리다가 아직 채워지지 심설의 그리움을 간직한 채 육십령으로 내려섰다.

이 겨울이 가기 전에 강원도로 다시 떠나야 겠다.

 

그 옛날 안의 감영 그리고 장수 감영에서 60리(24km)라 육십령

육십령을 넘기 위해 크고 작은 고개 60개를 넘어야 하는 육십령

산적이 많아 함부로 넘지 못하고 60명이 모일 때까지 주막에서 한 없이 기다려야 했다는 육십령.

 

거대한 쇼핑센터에 그 옛날 영화를 내어주는 재래시장처럼 차적과 인적이 드문 육십령은 멀리 대진고속도로를 쓸쓸히 바라보며 힘 없는 할미봉을 원망하고 있다.

흐르는 세월이 가져다 준 무심한 변화로 육십령은 이제 산꾼들의 주막으로 다시 돌아오고 있었다.

 

 

 

 

 

할미봉 조망

 

 

 

바람도 없는 육십령 고갯길

지나온 길에 할미봉만 우뚝하고

해는 저물어 가는데

그 옛날 내가 흘러간 길 따라

남으로 길을 나서는 이 없다

지난 세월은 아득해도

추억은 남아

산들은 떠남이 없는 육십령 고갯길엔

세월 따라 사람만 늙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