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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영화

봉준호의 압도적인 세계 - '괴물'이 권력을 보는 시선(이형석)


<괴물>의 핵심은 (국가) 권력에 대한 태도와 시선이다. <괴물>이 국가주의에 대한 절망과 민중의 자구 혹은 자위에 대한 어떤 믿음을 드러낸다고 볼 때 이 영화의 권력에 대한 비판적 언술은 민족주의적 반미의 차원을 넘어 보편적 의미로 확장된다.

그의 첫 단편 제목을 빌자면, 봉준호의 영화는 '지리멸렬'한 것들의 성스러움과 성스러운 것들의 지리멸렬함을 증명하는 데 바쳐진다. 영화적 흥분 또한 그 역설에서 발생한다.

성의(聖衣) 혹은 법복으로 위장했던 존재들이 실상은 하잘 것 없고 비루하기 짝이 없는 것들이었음이 폭로되는 순간 관객은 웃거나 분노하거나 속시원해한다.

반대로 열등하고 우스꽝스러웠던 것들이 숭고한 의도와 행위를 보여줄 때 관객은 안타까워하고 슬퍼하며 감동받는다.

이것은 봉준호의 영화가 매우 사려 깊고 지적인 성찰을 담은 빼어난 정치, 사회적 텍스트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왜 놀라운 정서적 파괴력을 갖는 상업 영화인가에 대한 해답이기도 하다.

 

<괴물>의 초반부에 제시되는 박강두의 모습은 모자라기 때문에 우스꽝스럽다.

하지만 그가 괴물에 잡혀간 딸이 살아 있다고 하소연하고 국가가 이를 외면할 때 관객은 더 이상 웃지 않는다.

모자란 인간의 가슴 속에 있는 것이 실상은 진실과 진심이고, 과잉된 권력체계 속에서 작동하고 있는 것이 거짓과 왜곡이라는 사실을 두 눈으로 낱낱이 확인한 관객의 가슴엔 웃음 대신 안타까움과 답답증, 분노가 들어선다. 딸을 구하기 위한 강두와 그의 일가족들은 괴물과 악전고투를 벌여갈수록 단련되고 유능해지며 숭고해진다.

박강두의 아버지와 동생 남일, 누이동생 남주, 딸 현서 등은 대체로 희극적으로 등장했다 비장하게 퇴장한다.

반면 군병력 출동으로 거창하게 등장한 국가권력은 갈수록 시시해지고 무력해지며 우스워진다.

첫 단편 때부터 보여준 봉준호 영화의 역설은 규모가 거대해진 세 번째 장편영화에 와서 한층 명징하고 풍부하다.

그러므로 <살인의 추억>에 이어 이 작품에서 여전히 핵심적인 것은 (국가) 권력에 대한 태도와 시선이다.

용산 주한미군기지에서 무단 배출한 포름알데히드에 의해 한강에 돌연변이 괴생물체가 생겼다는 것이나 괴생물체로 인한 바이러스 퇴치를 위해 미국이 개입한다는 등의 설정은 노골적으로 미국을 겨냥한 듯 보인다.

자칫 이 영화를 민족주의적 시각에서 반미적인 텍스트로 오독할 여지다.

특히 먼저 개봉하는 강우석 감독의 매우 국수주의적이며 반일선동적인 <한반도>와 나란히 놓고 ‘반일’과 ‘반미’라는 먹기 편한 사냥감을 포획하려는 일부 언론과 평단의 의지를 비껴가기 어려운 듯 보인다.

하지만, 이 영화가 국가주의에 대한 절망과 민중의 자구(自求) 혹은 자위(自衛)에 대한 어떤 믿음을 드러낸다고 볼 때 이 영화에 내포된 권력에 대한 비판적 언술은 ‘민족주의적 반미’의 차원을 넘어 보편적인 의미로 확장된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권력의 속성 중 하나는 ‘과시’다.

괴생물체가 출현해 한바탕 난리법석을 겪은 뒤 거대한 군병력이 한강변에 배치될 때 권력은 힘과 규모를 과시한다.

주한미군이 ‘(괴바이러스의 정체에 대해) 본국의 승인 없이는 알릴 수 없다’고 발언할 때나 ‘휴대전화 번호추적은 아무에게나 허용되는 것이 아니’라고 공무집행자가 말할 때 권력이 노리는 것은 ‘당신들의 배후엔 당신들이 알 수도 없고 접근할 수도 없는 모종의 복잡한 시스템이 작동하고 있다’를 암시하는, 즉 ‘과시의 진술’이다. 행정절차 혹은 경영기술, 과학기술의 복잡성과 전문성을 물신화하는 것은 자본주의와 관료제의 고유한 특성이다.

이 때 중요한 것은 권력은 늘 앎의 대상을 규정하면서부터 비로소 권력으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영화에서 미군은 괴생물체에 침묵하는 대신 ‘괴바이러스’를 언급함으로써 앎의 대상을 정의한다.

다시 인용하자면 ‘본국의 승인 없이는 알릴 수 없다’는 말은 앎의 대상과 함께 주체가 누구인지 명확하게 보여준다.

권력은 대상을 창조 혹은 정의하고 분류하고 체계화하지만 문제는 앎의 대상은 괄호 쳐지고 출현은 끊임없이 지연되며 분류된 항들은 모두 텅 비어 있다는 사실이다.

실상을 말하자면 그곳은 비어 있기 때문에 권력은 권력일 수 있다.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화학공장’을 향한 폭격과 같고, ‘없는 괴바이러스’의 치료 같은 것이다(물론 ‘없는 괴바이러스’라는 설정은 미국의 이라크전을 연상시킨다).

끊임없이 유발되는 공포는 마이클 무어의 <볼링 포 콜럼바인>에서도 잘 지적됐듯 권력이 스스로를 작동시키고 유지시키는 일상적 테크닉이다.

박강두가 알아들을 수 없도록 영어로 이야기하는(이는 마치 의사가 환자 앞에서 처방전을 마구 흘려 쓴 필기체 영어로 쓴다든가 굳이 영어로 된 의학전문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얻는 권위를 연상시킨다) 주한미군 스탭에게서 ‘노 바이러스’라는 말을 캐치해내고 서슴없이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이 통쾌한 것은 그 때문이다.

물신화된 지식과 전문성이라는 관료제의 은밀한 권위는 순식간에 조롱당하고, 권력이 정의하고 분류시킨 항목들이 실상은 텅 비어 있다는 사실이 폭로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한미군이 한강에 독극물을 방류한 2000년 맥팔랜드 사건과 베트남전에서 미군이 살포한 고엽제의 일종인 에이전트 오렌지(영화에서는 괴바이러스 치료제인 ‘에이전트 옐로우’로 등장한다), 그리고 이라크전에 대한 명백한 참고와 인용에도 불구하고 <괴물>은 민족자주의 시각에서 반미적 텍스트로 읽을 여지는 별로 없어 보인다.

오히려 미국을 빌어 권력에 대한 보편적 비판을 수행하고 풍자하는 텍스트에 가깝다.

결국 권력은 가공의 적을 만들어 내거나 잘못된 타깃을 향함으로써 늘 오작동 하지만 오작동 그 자체가 개인과 대중을 통제하는 가장 효율적이며 일상적이고 정상적인 방식일 텐데, 그렇게 본다면 극 초반부에 등장하는 한 한강 투신자살자의 유언(“끝까지 둔해빠진 새끼들”)은 (국가) 권력을 향한 조소처럼 들린다.

반면 좀 과장하자면 얼빠지게 보였던 박강두 일가족은 오히려 직관적인 영리함을 가진 듯 보인다.

이는 마치 슬라보예 지젝의 논의에서 상징계의 빈 구멍 속으로 실재계가 침입함으로써 이데올로기를 가로질러 새로운 주체가 형성되는 순간을 떠올리게 한다.

봉준호의 세계에서의 역설과 대비가, <괴물>에서 한편으로는 ‘싸는 것’과 ‘먹(이)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도 흥미롭다.

<살인의 추억>에서 박두만(송강호)이 무심결에 내뱉었던 "밥은 먹고 다니냐"가 화두라도 된 것처럼 이 영화에는 ‘먹(이)는 행위’가 유난히 많이 등장한다.

 봉준호 감독의 설명에 따르면 권력 혹은 시스템이 포름알데히드를 방류하는 것으로부터 후반에 에이전트 옐로우를 살포하는 것까지 싸는 것, 곧 배설의 악순환 고리로 이뤄져 있다면, 박강두와 딸이 그 어디쯤 놓인 개인들의 고리는 먹(이)는 것, 곧 보호(양육, care)자가 되는 동시에 피보호자가 되는 선순환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다른 말로 반복하자면 이 영화는 국가주의에 대한 절망과 민중의 자구 혹은 자위에 대한 낙관적 믿음에 바탕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관객들의 시선은 초반부에 서슴없이 모습을 드러낸 괴물에 일단 꽂히지만 오히려 딸의 입장에서 볼 때 아버지-아버지의 아버지-삼촌-고모를 거쳐 아버지로 끝맺는 개인들의 개별적 전쟁들과 먹(이)는 고리로 형성된 가족 모두의 분투야말로 이 영화의 드라마가 가진 압도적 감동과 힘의 근원일 것이다.

끝으로 수평적인 움직임이 주는 활력과 수직의 비극성을 교차시켜 한강에 숨을 불어넣은 카메라 워크의 탁월함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요컨대 봉준호는 스필버그적 세계 안에서 비스필버그적인, 굉장한 세계를 발명한 것이다.


이형석 기자(헤럴드경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