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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글(펌)

변산기행 - 내소사 (조선 블로그 세상만사에서)

변산기행(邊山紀行)-내소사   2006/08/09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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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소사 대웅보전 ⓒ 삼척동자

 

<변산반도>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방을 구하러 인터넷으로 들어갔다.

한참 시즌에 여행을 떠나기 몇 일을 앞두고 방을 구하는 무모함이라니.


<모항>이라는 바닷가의 작은 호텔에 빈 방이 남아 있었다.

그곳이 어딘지, 갈만한 곳인지 아닌지 셈할 겨를이 없었다.

일단 예약부터 마치고 1차 행선지를 그곳 모항으로 정했다.


여행의 즐거움은 미지의 곳을 찾아나서는 데 있다.

그런 의미에서 한 번도 들어 보지도 가보지도 않은 모항은 미지의 세계였다.

그곳을 모른다 해도 여름 바다가 있다는 그 하나의 이유만으로도 가슴 설레는 일이었다.

   

이른 아침에 출발 한 탓인지 서해안 고속도로는 생각보다 소통이 잘됐다.

하늘로 치솟은 웅장한 교각과 쭉 뻗어 나간 서해대교의 위용은 언제 봐도 장관이다.

행담도 휴게소에서 들러 아침을 먹을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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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가산 ⓒ 삼척동자


대교를 건너 행담도 휴게소에 들어서자 곳곳에 붉고 푸르고 흰 깃발이 나부끼고 있었다.

휴가철을 맞이해서 마치 무슨 축제라도 벌어지고 있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축제가 아니었다. 종업원들의 파업으로 깃발을 내건 것이었다.


휴가철 여행객들을 위한 편의시설이 여행객을 볼모삼아 파업을 한다는 게 마음이 편치 않다.

여행객들도 이젠 밖에 나오면 밥을 사먹어야 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할 것 같다.

옛날에 괘나리 봇짐 싸들고 먼 길을 가듯 간단히 도시락을 가지고 다니는 운동이라도 했으면 좋겠다.


모항으로 가기 위해서는 줄포 인터체인지로 나가야 한다.

줄포에서 곰소를 지나자 내소사가 있었다.

변산반도에 와서 내소사를 보지 않고 갈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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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가산 ⓒ 삼척동자


차를 내소사 방향으로 돌린다.

어느 해든가? 겨울에 그날따라 함박눈이 그리도 많이 내렸었지.

하얀 눈에 덮인 적막 속의 내소사는 설국이었다.


폐 기와로 무늬를 낸 눈이 쌓인 황토담장이 황홀했었다.

눈으로 가지가 휘휘 늘어진 전나무 숲 눈길을 헤집고 걷는 발길이 꿈길 같았다.

그러나 여름의 내소사는 초입부터 분망했다.


사하 촌 식당들은 때 아닌 전어 굽는 냄새가 진동을 했다.

식사를 하고 가라는 함성들이 귓전을 때렸다.

땅에서 올라오는 지열과 뜨거운 햇볕이 벌써 몸을 지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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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나무 숲 ⓒ 삼척동자


일주문을 들어서자 시원하고 청량한 기운이 감돈다.

옛 가람이라면 이만한 숲이 제격이다.

어설픈 중창불사 한답시고 옛 정취를 잃어가는 가람들에 비하면 내소사는 아직 신성감이 든다.


하늘을 향해 쭉쭉 뻗어 올라간 전나무 숲 사이로 밝은 햇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긴 숲을 지나면 저만치 능가산의 우람한 바위산이 눈에 들어온다.

정면으로 보이는 것은 커다란 승방의 지붕이고 그 서쪽으로 능가산 아래 대웅전이 비켜서있다.


어느 절집이나 창건이나 중창에 얽힌 설화가 한두 가지 씩은 있게 마련이다.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내소사 대웅전은 1633년에야 중건되었다.

법당을 새로 짓는 역사를 어느 유명한 목수에게 맡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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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래루 주춧돌, 적묵당 요사, 대웅보전 우물천장, 대웅보전 공포 ⓒ 삼척동자

 

목수는 묵묵히 3년 동안을 목침덩어리만 다듬어 냈다.

어린 중 사미승 하나가 장난기가 동하여 목수가 만든 나무토막 하나를 감췄다.

목수가 토막수를 세어 보고는 깊은 시름에 잠겼다.


목수는 일을 포기하겠다고 했다.

주지 스님이 까닭을 물으니 <물목내기>를 잘못해서 나무토막 하나를 덜 만들었다고 했다.

사미승이 감추었던 토막을 내놓아 공사를 계속했다.


목수는 그 부정한 나무토막을 사용하지 않고 지난한 공사를 마쳤다.

내소사 대웅전에는 지금도 법당 안 오른 쪽 천장 밑에 첨차 하나가 부족한 채로 결구되어 있다.

목수의 실수를 미화한 것인지 실화인지는 알 수 없지만 장인의 자부심과 외고집을 짐작할 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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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보전 꽃살문 ⓒ 삼척동자

 

법당 외부는 단청이 없는 백골집이다.

그러나 내소사는 백골집이어서 아름답다.

형형색색의 단청의 빛깔 보다 나뭇결이 그대로 들어난 목리의 자연스러움이 그만이다.


내소사 꽃살문의 아름다움은 최고로 친다.

내소사에 가면 꽃살문을 보고 올 일이다.

법당 동쪽 앞에 자리한 적묵당은 어떤가?


내소사 꽃살문이 좋다 해도 적묵당의 아름다움 또한 지나칠 수 없다.

적묵당은 네 면이 모두 다른 승방과 연결되어 있고 건물 중앙에 우물이 있다.

바른 쪽 날개는 2층인데 1층은 승방과 식당 그리고 큰 아궁이가 있는 부엌이고 2층은 곳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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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묵당 ⓒ 삼척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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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묵당 월방(문지방) ⓒ 삼척동자

 

적묵당의 승방으로 통하는 문지방은 아래로 휘어져 내렸다.

시골집 부엌에도 그런 문지방들이 있었는데 월방(月枋)으로 불린다.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다 보면 닳기 마련인 문지방을 미리 휘어진 모양으로 만들어 놓은 셈이다.


휘어진 문턱은 아무리 닳아도 휘어진 채로 문턱이라는 역설이야 말로 삶의 지혜다.

수직과 수평의 맞춤과 이음으로 자칫 지루하기 쉬운 건축에 역동성과 변화미가 베어난다.

왼편의 요사 날개는 높이 솟아 있고 지붕 아래로 서까래가 그대로 들어나 있다.


아무렇게나 끼워 세운 듯한 나무 살창이 정답다.

살창 위 하얀 벽체 가운데 열십자로 박혀 있는 나무가 어느 교회의 십자가를 보는 듯하다.

절집에서 십자가를 보았다면 불자들의 나무람을 들을까? 


법당 앞 봉래루는 후대에 변형을 가져왔다.

원래는 지금보다 낮아 이름난 누각이지 보통의 1층 건물이었다.

부석사나 봉정사 같은 경상도 가람들에서 흔히 보는 누하진입을 염두에 두지 않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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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래루 ⓒ 삼척동자


누하진입은 산지의 경사가 심한 곳에서 잘 어울리는 기법이었다.

내소사와 같이 평지에서 누하진입 수법을 쓰려면 누각의 높이를 사람 키만큼 더 높여야 한다.

지금의 봉래루는 일부러 기둥을 높여서 사람들을 누하진입을 유도한다.


대웅전과 봉래루 사이 서쪽에는 범종각이 자리한다.

동종과 법고 그리고 목어가 한 집에 사이좋게 거처한다.

복효근 시인의 ‘내소사 목어 한 마리’로 시작되는 시가 있었다.


내소사 목어 한 마리 내 혼자 뜯어도 석 달 열흘

우리 식구 다 뜯어도 한달은 뜯겠다.

그런데 벌써 누가 내장을 죄다 빼먹었는지

텅 빈 그놈의 뱃속을

스님 한 분 들어가 두들기는데.....


소리가 하,

그 소리가 허공중에 헤엄쳐 나가서

한 마리 한 마리 수천 마리 물고기가 되더니

하늘의 새들도 그 물고기 한 마리씩 물고 가고

칠산 바다 조기 떼도 한 마리씩 온 산의 나무들도

한 마리씩

구천의 별들도 그 물고기 한 마리씩 물고 가는데...


온 우주를 다 먹이고 목어는 하,

그 목어는

여의주 입에 문 채 아무 일 없다는 듯

능가산 숲을 바람그네 타고 노는데......


숲 저쪽 만삭의 달하나 뜬다.

                                       <복효근/소리물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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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종각 ⓒ 삼척동자


시인의 상상력은 무한대다. 무엇 하나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다.

우리 같은 범인들은 ‘범종각에는 목어가 있구나’ 하지만 시인은

수천 수만마리의 살아 있는 물고기로 변신을 시킨다.


지금 하늘에는 낮달이 상현(上弦)이 되어 볼록한 얼굴을 내밀고 있다.

지금쯤 능가산 숲에서 바람그네 타고 노니는 목어 구경이라도 하고 있을까?

그도 아니면 월인천강(月印千江)되어 불법을 알리는 걸까?


내게 내소사는 늘 가 보고 싶은 곳이고 머물고 싶은 곳이다.

아쉽지만 그만 내소사를 나서야 한다.

언제 다시 와 볼 수 있을 런지 아쉬운 마음에 자꾸만 뒤를 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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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보전 충량 용두장식 ⓒ 삼척동자

 

숲 길 옆 작은 개울가로 가서 세수도 하고 내친 김에 탁족도 한다.

흐르는 물에 더위를 떠내려 보낸다.

어릴 때는 소나무 껍질로 배를 만들어 흐르는 물에 띄어 보냈다.


아이들과 누구 배가 빠른지 흘러가는 배를 따라 뛰어가기를 했다.

숨이 턱에 차면 개울에 들어가 물장구를 치고 멱을 감았다.

흐르는 세월만큼 내 인생살이도 앞만 보며 바삐 뛰어 왔을 것이다.


내소사를 나와 모항으로 향한다.

해변을 끼고 가는 길이 구불거린다.

수평선을 인 바다가 숨바꼭질하듯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사라졌다가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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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항 언덕 ⓒ 삼척동자


차창 밖으로 보이는 산과 들과 바다가 온통 여름을 말하고 있다.

연두 빛 봄은 이내 한 여름으로 접어들어 온통 숲과 들판에 검은 빛이 감돌고 있다.

이글거리는 태양이 온 산하를 불태울 기세이다.


저만치 수평선 너머 하늘에는 뭉게구름이 일고 있다.

하얀 뭉게구름 아래로 검은 구름이 이는가 싶더니 하늘에서 번쩍하고 한줄기 빛이 내리 꽂는다.

금방 소나기라도 내릴 기세다.


여름은 소나기의 계절이다.

허허 벌판에 지나가는 구름이 뿌리는 소나기야 말로 여름을 더욱 여름답게 하는

아름다운 풍광의 하나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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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항 바다 ⓒ 삼척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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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항 갯벌해수욕장 ⓒ 삼척동자

 

자동차는 바다를 따라 난 굽이굽이 산길을 오르고 내린다.

모항이라는 안내판이 우리의 목적지가 가까워 왔음을 알려준다.

저만치 언덕바지에 예약한 호텔의 간판이 들어온다.


마음씨 좋아 보이는 여주인의 안내로 객실로 들었다.

객실 너머로 내다 보이는 모항은 천혜의 요새이다.

내변산과 외변산이 마주치는 바닷가에 송림과 모래사장이 잘 어우러져 아름답다.


갑자기 폭우 같은 소나기가 쏟아져 내린다.

잔뜩 끼어있는 비구름 때문에 아름다운 서해의 낙조를 보지 못하는 아쉬움이 크기는 해도

아득한 바다마을에 내리는 소나기도 낙조 못지않게 아름답다.


오늘은 이곳 모항에서 한 여름 밤의 꿈을 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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