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한 여성과 함께 도쿄의 프랑스 식당에서 점심을 먹을 때 메뉴판이 화제가 됐다. 식당 지배인이 여성과
나에게 건넨 메뉴판에 작은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에게 준 메뉴판에는 가격이 적혀 있었지만, 여성이 받은 메뉴판에는 가격이 없었다. 음식을
주문하면서 “왜 여성에게 준 메뉴판에는 가격을 적지 않았나요?”라고 물었다.
“남녀 손님 두 분이 오면 그렇게 합니다. 보통 대접을 하는 쪽이 남자분이니까요. 대접을 받는 쪽 메뉴에 가격을 표시하면 대접 받는 손님이
부담을 느낀다는 생각입니다.”
생각해 보니 그렇다. 대접을 하는 쪽은 식당 가격대를 어느 정도 파악하고 오기 때문에 가격이 정확히 적혀 있는 것이 좋다. 하지만 상대방
메뉴에도 가격이 표시돼 있으면 아무리 맛이 있는 음식을 추천하고 싶어도 저렴한 쪽을 선택하기 힘들다. 대접 받는 쪽 역시 가격을 알면 먹고 싶은
것이 비쌀 경우 쉽게 선택할 수 없다. 돈을 지불하는 사람에게 미안하기 때문이다. 대접 하는 쪽이나 대접 받는 쪽 모두를 배려한 ‘마음
씀씀이’인 것이다.
몇 달 전 내가 일하는 사무실의 빌딩 화장실에 작은 변화가 있었다. 변기의 물 내리는 손잡이가 사라졌다. 대신 손을 가까이 가져가면 센서가
감지해 자동으로 물이 내려가는 장치로 바뀌었다. “왜 이런 장치를 만들었을까?” 관리실에 물었다.
“사람들이 화장실 손잡이는 더럽다는 인식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발로 밟아 물을 내리지요. 다른 사람들이 그런다는 생각을
하면 그러지 않던 사람도 발로 물을 내립니다. 정직하게 손으로 손잡이를 잡는 사람만 손해를 보는 것이지요.”
‘손잡이는 손으로 만지세요’라는 표시를 해도 의구심은 사라지지 않는다. 화장실에 새로 생긴 감지기는 사용자의 고민, 서로를 향한 의심을
원천적으로 없애는 작은 배려라는 얘기다.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여자 화장실의 휴지통도 자동 개폐식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남성은 화장실 휴지통을
사용하는 일이 별로 없지만 여성은 생리적 특성 때문에 남성보다 휴지통을 훨씬 자주 사용한다. 여성 화장실에 배려가 하나 더해진 것이다.
한국에서 자주 듣다가, 일본에서 듣지 않는 질문 중 하나가 “아이가 몇이냐?” “왜 아이를 안 갖느냐?”는 것이다. 나는 결혼한 지 8년이
지났지만 아직 아이가 없다. 결혼한 지 4년쯤 지났을 때부터 워낙 아이 이야기를 많이 들어 한때 엄청난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물론 집안이나
회사의 어른·선배가 말씀하시는 것은 당연한 걱정이니까 거슬리지 않는다. 하지만 1년에 한 번 만날까 말까 하는 사람들까지 그런 얘기를 한다.
초면에 장광설을 펼치는 사람도 있다. 일본 친구에게 “왜 아이 얘기를 안 묻느냐? 너흰 개인주의라서 그러냐?”고 물었다. 대답이 이랬다.
“당신이 왜 아이를 안 갖는지 모른다. 귀찮아서 그럴 수 있고, 삶의 철학이 달라서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돈이 없어서 못 가질 수도
있고, 임신 능력이 없을 수도 있다. 궁금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내 질문이 자칫 당신의 불행을 건드릴 수도 있는 것이다.”
요즘 일본에선 결혼 여부도 잘 묻지 않는다고 했다. 이혼한 사람이 많기 때문에 결혼 질문이 상대방의 불행한 과거를 건드릴 수 있기
때문이다. 진짜 개인주의는 무엇일까? 남에 대한 배려 없이 질문을 툭툭 던지는 무감각이야말로 개인주의, 아니 이기주의가 아닐까?
선우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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