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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글(펌)

말의 무게

출처 : 조선 이지연 블로그

 

낯달

moon001.jpg

                 

 *  어느날, 오후 미리 나와 서성거리는 낮 달을 찍었다.

모두에게 즐거운 명절, 아름다운 가을날이 되기를 기원하며....

 

 

달 뜨면 오시마고 임은 말했죠            
달 떠도 우리 임은 아니 오시네
아마도 우리 임 계시는 곳엔
산 높아 저 달도 늦게 뜨나 봐

郞云月出來 月出郞不來
想應君在處 山高月上遲

 

조선시대 능운(凌雲)이라는 기생이 오지 않는 임을 그리며 지었다는 한시다.
달 뜨면 오겠노라는 철석 같은 다짐을 두고 간 임 이었다.
하지만 저 달이 중천에 이르도록 오마던 임은 오실 줄을 모른다.
그녀는 저녁 내내 조바심이 나서 달만 보며 마당에 나와 서 있다.
왜 안 오실까?
저 달을 못 보신 걸까?
혹시 마음이 변하신 것은 아닐까?
조바심은 점차 의구심으로 변해
자칫 그리움의 원망이 쏟아지고 말 기세다.
그러나 그녀는 슬쩍 말머리를 돌렸다.
오지 않는 임에게 푸념을 늘어 놓는 대신 오히려 무심한 체 임을 두둔해 주기로 한다.
아마 지금 임이 계신 곳에는 산이 하도 높아서
내게는 훤히 보이는 달이 아직도 산에 가려 보이지 않는 모양이라고 말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임이 내게로 오시지 않을 까닭이 없다.
설령 임이 나와의 언약을 잊고 안 오시는 것이라 해도
나만은 그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가 않은 것이다.
여기에는 또 혹시 이제라도 오시지 않을까 하는 안타까운 바람도 담겨 있다.
임을 향해 직접적으로 원망를 퍼붓는 것보다
곡진한 표현속에 읽는 이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더 큰 매력이 있음을 느끼게 된다.

멀리 함경도 안변 땅에 벼슬 살러 가 있던 양사언(楊士彦)이
한양의 벗 백광훈에게 편지를 보내왔다.
그립던 벗의 편지라 반가워 뜯어 보니 사연이라고는


"三千里外, 心親一片雲間明月
 
삼천리 밖에서
한조각 구름 사이 밝은 달과 마음으로 친히 지내고 있소."


 라는 딱 열두 자뿐이었다.
그래 이만 사연 전하자고 그 먼천릿길에 편지를 부쳤더란 말인가?
그러나 들여다보면 그대가 보고 싶어 저 달을 보고 있는데
흐미한 조각달인 데다가 그나마 자꾸 구름속에 숨어 보이지 않으니 안타깝더란 말이다.
백마디 보고 싶다는 말을 적은 편지보다 훨씬 더 짙은 정이 느껴진다.
이 편지를 손에 들고 달을 올려다보며 역시 그 친구를 그려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을 백광훈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직접 다 말해야 맛이 아니다.
말하지 않아도 마음으로 통하고 행간에 고여 넘치는 정이 있다.

말의 값이 땅에 떨어진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러니 어딜 가나 소음뿐이다.
휴대전화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여기저기서 마구 울려댄다.
옆의 사람은 아랑곳 않고 제 목소리만 높여댄다.
마음에 고이는 법 없이 생각과 동시에 내 뱉어지는 말
이런 말 속에는 여운이 없다.
들으려고는 않고 쏟아 내기만 하는 말에는 향기가 없다.
말이 많아질수록 어쩐 일인지 공허감은 커져만 간다.
무언가 내면에 충만하게 차오르는 기쁨이 없다. 왜 그럴까?

이백(李白)의 시에 왜 푸른 산에 사느냐는 물음에
씩 웃고 대답하지 않았다고 노래한 것이 있다.
산이 좋아서 사는 사람에게 산에 사는 이유가 달리 있을 까닭이 없다.
그 까닭을 말로 설명할 재간도 없거니와 설령 말한다고 한들 그가 알아듣기나 하겠는가?
이것은 침묵의 언어가 지닌 힘이다.
추사 김정희의 글씨 가운데


"小窓多明 使我久座
 
작은 창에 햇볕이 가득하여
나로 하여금 오래 앉아 있게 한다."


 라고 쓴 것이 있다.
세간도 없이 책상 하나 놓이 방안으로 다스한 햇볕이 쏟아져 들어온다.
그 볕이 고마워서 말없이 오래도록 꼼짝않고 앉아 있었다는 말이다.
문득 물질의 풍요는 비록 지금만 못했지만
정신만은 넉넉하고 풍요로웠던 선인들의 체취가 그립다.
말을 아껴 언어가 지닌 맛을 음미할 줄 알았던 그 정신을 이제 어디 가서 찾을 수 있을까?

자료출처 : 책 읽는 소리 중에서..

< http://myhome.naver.com/softfinger/Music/dream.wma width=286 height=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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