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 <시>신춘문예 당선작
조선일보/폐(廢)타이어
문화일보/시월의 잠수함
국제 신문/4월
경향신문/가스통이 사는 동네
경인일보/진혼제
대구 매일/조용한 가족
부산일보/눈물길
경남신문/풍향계가 있는 오후
--------------------------------------------------------
조선일보
폐(廢)타이어
김종현
아파트 공터 한 귀퉁이
속도를 잊은 폐타이어
땅속에 반쯤 묻힌 깊은 침묵 속
햇빛을 둥글게 가두어 놓고
동그랗게 누워 있다
그가 그냥 바퀴였을 때는 단지
속도를 섬기는 한 마리 검은 노예일 뿐이었다
날마다 속도에 사육되고
길들어 갔다
다른 속도가 그를 앞질러 갈 때
그는 바르르 떨며
가속 결의를 다져야 했다
자주 바뀌는 공중의 표정 앞에서는
잽싸게 꼬리를 사려야 했다
검고 딱딱한 세계 위에서 세월을 소모하며
제한된 영역만 누려야 했다
지금 저 동그라미는 자신의 일생이
얼마나 속도에 짓눌려 왔는지 기억하고 있을까
튕겨 나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 번쯤은 했으리라
예약된 모든 속도들 다 빠져나가고
속도는 한 줌 모래처럼 눈부신 한계였을 뿐
얼마?어지러웠을까
속도에서 벗어나기 위해 속도에 매달린 세월
그가 속도의 덫에서 풀려나던 날
온몸이 닳도록 달려온 일생을 위로하듯
바람은 그의 몸을 부드럽게 핥아주었다
잠시 뒤의 어떤 바람은 풀씨랑 꽃씨를
데리고 와서 놀아주었다
벌레들의 따뜻한 집이 되었다
잃어버린 속도의 기억 한가운데
초록의 꿈들이 자란다
노란 달맞이꽃은 왕관처럼 환히 피어 있다
문화일보
시월의 잠수함
김지훈
구름이 입술 위에 달라붙는
이 자리는 북한산 어디쯤일까. 지닌 것 없이
숲만 가득 담아둔 나무 그늘에 앉아
기어이 가져온 새 책에 손가락을 베고 말았다
혈이 탁 트이고서야 내 온몸이 잠망경으로 솟아오를 수 있었다
작은 물줄기 속에서도 잘 돌아가는 스크루
사방 가득한 수억 燭의 소리가 큰 닻이 되어
산봉우리들이 신들의 전함으로 불리었던 그 바다 위에 박혀 있다
밤낮이 한꺼번에 몰아오는 내연기관의 큰 울림
그 안에는 칼 대신 나뭇잎 들고 싸우던 날도 있다
힘줄 선명한 잎 하나가 공기를 잘게 저미며 내려온다
신들은 어디에서 배를 만드는 중일까
베어낸 나무 밑동에 그려진 선명한 음파탐지기 자국
나는 녹슨 쇠를 털며 가라앉고 있는 배들의 그림자를 본다
나뭇잎을 칼처럼 쥐고 싸우던 시절
앙상해진 주물기계들이 나뭇가지에 붙어 있다
바람이 떠미는 결이 물 속인 줄 알고
낙엽이 벗었다가 도로 신는 잠수화를 본다
아직도 능선에는 사나운 기운이 넘친다
신들의 칼을 나는 나뭇잎이라고 고쳐 부르고 싶다
이 배를 붙들며 한 자리에서 먼바다를 돌아오는 사계절
내 고함으로 한 방의 어뢰를 뭉쳐
사령관의 함교가 있는 백운대를 한 방 때릴 셈이다
갑판이 낙엽을 털 듯 몸을 털며 다시금 방향을 잡고 나아갈 때
수리공들이 큰배를 향해 떼지어 몰려가는 항로를 따라
푸른 위장을 한 잠수함이 쫓아오는 소리가 들린다
국제 신문
4월
- 최미경
벚꽃이 전쟁처럼 흩날리는 저녁
바그다드 도서관이 불에 탄다
길 위에 사람들은
낡은 책 안으로 사라져가고
죽음은,
검은 주머니 가득
모래 폭풍을 싣는다
어둠을 달리던 바람의 마차들
달빛아래 드러나는 폐허의 이빨들
희망도
절망도
깨진 꽃잎을 주워 담으며 중얼거린다
…봄은,
학살이다
홀쭉해진 계절을 틈타
별빛도 마른 티그리스 강가
어린 소녀들의 물동이 안에서도
달은 자라고
포탄이 떨어진 자리마다
흰 꽃이 선다
2004 신춘문예 시 당선작 - 4월] 심사평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오른 작품은 17명의 91편이었다. 엄선에 엄선을 거듭한 것이었으므로 다들 일정 수준을 상회하는 것은 당연하였다. 난형난제에다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바람에 실로 자웅을 결하기가 어려웠다. ‘소리도에서’‘옷 만드는 여자’ ‘누드’ ‘부활’ ‘사자가족’ ‘막차’‘아버지의 겨울’‘남산동 2가’‘도배를 하며’‘4월’ 등 10편이 남아 한판 겨루기를 계속하였다.
설왕설래 끝에서야 어느 정도 윤곽이 잡히기 시작하였는데, 압축력이 약해 느슨해진 것, 너무 사변적이고 설명적인 것, 시적 변용에만 겉멋을 부린 것, 지나치게 표피적이고 감각적인 것, 감상적인 색칠하기에 급급한 것, 가식적 위장술로 교묘히 포장한 것, 시류에 편승한 산문적 억지를 고집한 것 등의 이유를 들어 얻어낸 결과였다.
결국 마지막까지 남아 끝까지 일전을 겨룬 작품은 ‘아버지의 겨울’ ‘남산동 2가’‘4월’등 3편이었다.
‘아버지의 겨울’은 그의 다른 작품들과 함께 흠잡을 데 없는 완성도에다 기성 시인의 냄새가 너무 짙은 나머지 오히려 낡은 매너리즘을 자초하고 있다는 점이 지적되었고 역으로 ‘남산동 2가’는 용기와 열기를 앞세운 젊은 혈기와 현실 재단적 안목은 대단했으나 그만큼 거칠고 미완적이라는 점이 지적되었다.
이러한 점까지 참작하여 작품 ‘4월’을 당선작으로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당선작 ‘4월’은 다소 소품적인 데가 있으나 그만큼 군더더기가 없는 언어 구사 능력이 뛰어나고 행과 연 구분의 탄탄한 구성력과 참신성이 돋보이는 데다 공교롭게도 최종심에서 겨루다 탈락하게 된 두 작품의 장단점을 무리 없이 절충하고 있는 것 같다는 점 또한 크게 참작되었음은 물론이다. 서정의 본령과 시적 정공법을 지속적으로 살려 앞으로 좋은 작품 많이 써 주기를 바란다. / 심사위원 김용택 김창근
경향신문
가스통이 사는 동네
안성호
빈집의 풍경을 텔레비전이 우주로 송출한다. 텔레비전 위로 유리컵이 있고 그 속에서 감자가 싹이 나고 잎이 나서 나무가 되었다. 유리컵 속에서 감자는 죽고 감자만한 유리컵이 나무에 열렸다. 그 유리컵마다 바다가 출렁인다. 푸른 바다를 가르며 달력 속으로 노란 수상스키 한 대가 사라진다. 손을 흔들어대는 벌거벗은 남녀의 벗어 놓은 옷이 달력 곁, 행거에 걸려 있다. 여자의 빨간 치마를 남자의 양복 上衣가 껴안고 있다. 벗어 놓은 양말이 화장실로 걸어가고 화장실에 놓인 세탁기에선 양복 下衣가 길거리에서 묻혀온 노래를 쿨렁거린다 똑똑, 세일즈맨이 빈집에 노크를 하고 돌아선다. 똑똑, 물탱크에 물소리가 들린다. 수압은 낮고 지붕은 점점 무거워진다.
노란 물탱크와 가스통이
퇴락한 집 모퉁이를 돌아오는 빛을 베고 지붕에 누워 하늘을 본다.
오백 마리의 양
구백 마리의 흰 오리가
줄을 지어
하늘을 걸어간다
경인일보
진혼제/ 성유리
어머니 삼베치마를 입은 가오리연이
꼬리로 허공을 치며 솟구쳤다
네 귀퉁이 지느러미를 파닥이며 연은
서쪽으로 서쪽으로 길 떠나고 있었다
모든 걸 놓아버리고
가슴까지 휑하니 비운 모습이
추워보였다
지상과 하늘을 연결하고 있는 가는 끈만은
서로 놓아버리지 못하고
한참을 그렇게
우리를 목 아프도록 바라보고만 있었다
난 칼을 꺼내 팽팽한 순간을 그었다
사선으로 끊었다
연은 비로소 가볍게 너울너울 춤을 추었다
그래 보였다
그런 줄 알았다
아침 까치소리에
창문을 열어보니 감나무 가지 꼭대기에
연이 걸려 있었다
이슬에 온통 젖어
날 보고 있었다
대구 매일
조용한 가족
이동호
무상 임대 아파트 8층 복도,
한 덩이 어둠을 치우고 걸어 들어간다.
복도가 골목 같다.
이 골목은 일체의 벗어남을 허용하지 않는다.
복도가 직장이기도 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복도를 벗어나고 싶지만 그게 잘 안 된다.
이곳에서 사표를 낸다는 것은
極貧의 뜻이고,
담을 뛰어넘는다는 것은
일층으로라는 의미를 지닌다.
저승은 주로 일층에 국한되어 있었으므로,
고층에 가까운 사람일수록 상시 죽음과 내통하는 셈이다.
작년, 두 사람이 일층으로 순간 이동했다.
올해는 벌써 두 명분의 숟가락이
고층에서 주인을 퍼다버렸다.
몇 사람 더 복도를 서성이고 있었으니
한 두 집 더 빈 공간이 늘어날 것이다.
밤하늘은 눈치가 빠르다.
미리 弔燈을 내걸었다.
사람들은 아파트 속에 조의금처럼 들어 앉아있다.
일부는 여전히 복도를 서성이다가
아무런 말없이 일층을 내려다보곤 한다.
이곳에서는 침묵도 하나의 宗派가 된다.
사람들은 침묵을 광신도들처럼
따른다.
[심사평-담담한 필치 · 적절한 언어 돋보여]
예심을 거쳐 온 40여 편의 작품에서 최후까지 남은 것은 '이월의 우포늪' '소백산엔 사과가 많다' '조용한 가족' '밥 나르는 여자' '새들은 날아간다' '술래잡기' '통장정리' '공단 세탁소' '신라 주유소' '파장' '소문' 등이었다. 모두들 그만그만한 목소리로 자기나름의 색깔을 지니고 있어 선뜻 이것이다 라고 손을 들어주기에는 몹시 망설이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중에서도 정서의 구체화된 표현의 적절성을 염두에 두고 고심한 결과 '소백산엔 사과가 많다' '이월의 우포늪' '조용한 가족' '새들은 날아간다'로 압축되었다.
'소백산엔 사과가 많다'는 그 짜임새나 이미지 처리의 깔끔함이 흠잡을 데가 없었으나 신인다운 에너지가 상대적(?)으로 덜한 점이 아쉬운 것이었다. '이월의 우포늪'은 고대와 연결시킨 상상력의 확대가 우포늪의 분위기를 돋보이게 하는 솜씨가 주목을 끌었으나 그것을 어떤 인생론적 내용으로 좀더 구체화 시켰으면 하는 지적이 있어 다음으로 미루기로 하였다.
'새들은 날아간다'는 신인다운 활달한 감성과 거침없는 이미지 구사가 호감이 가는 작품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시속에 지닌 내용과 엇박자 되는 구절들이 있어 보여 이것 역시 다음으로 미루기로 하였다.
'조용한 가족'은 가난이 빚는 아픔을 얄밉도록 담담한 필치로 그려나가고 있는 시선이 돋보인다. 시니컬한 이런 시선은 자칫 격정의 목소리로 떨어지기 쉬운데 끝까지 제3의 눈으로 이끌어 가는 능력이 호감이 갔다. 또한 작품을 이끌어가는 적절한 언어 구사도 마음을 끌었다. 그래서 당선작으로 결정하였다.
거듭 말하지만 예심에 올라온 앞의 열 한 편들은 보기에 따라 어디에 내어놓아도 당선작에 손색이 없는 작품들이었다. 더욱 분발을 바라며 정진을 빌 따름이다. /권기호(시인, 경북대 명예교수) / 정호승(시인)
부산일보
눈물길
기가 막혔다. 눈물길이 막혔으니….
길은 어디에나 있다고 하더라만,
미처 몰랐다.
눈물에게도 길이 필요한 줄은 정말 몰랐다.
무심코 사는 것도 바빠서
세례만 받고 교회에 안 나가는 신자처럼
눈물의 존재를 잊고 산 지도 꽤 오래된 것 같다.
곰팡내 나는 일기장을 들추어보니,
'눈물은 나의 신앙'이라는 얼룩진 표현도 눈에 띈다.
가뭄에 메말라버린 골짜기의 저수지처럼
가슴 속 밑바닥의 뻘이 드러나면, 그 속은
흉물스러운 쓰레기들이 방치되어 있을 테지.
이마며 가슴에 환경보호 띠를 두르고
환경 지킴이로 동분서주
개발이냐,환경이냐를 역설하였는데….
건조주의보의 나이에 들면서
먼 곳의 우포늪은 잘 보여도 정말 가까운
눈물샘은 돌보지 않았다.
고도근시와 난시를 동반한 마른 가슴은
어이없게도 눈물길을 막아버렸다.
물론 수술만 하면 간단히 끝날 일이지만,
마음이 담수되지 않고서는
길이 있어도
눈물은 결코 가지 않으리라.
눈물은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수몰된 고향과 같은 것.
인생의 이정표에 없는 눈물샘으로 가는 길은
육안으로 볼 수 없는 좁은 길
잡초에 묻혀 있던 고향 가는 길에 눈물길은 있으리.
2004 신춘문예]시 심사평
형상성에서 오는 울림
강은교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눈물길 외 4편''물 한 잔과 자전거 외 2편''금성 라디오 외 4편''밤깎기 외 5편'이었다. 이 중 '금성 라디오'와 '밤깎기'는 그 상상력의 전개는 좋으나 형상성의 부족에서 오는 '얹기'의 결핍은 '울림'과 그로 인한,정서와 사유의 '교환'을 불가능하게 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눈물길'과 '물 한 잔과 자전거'의 두 편이었다. 이 중 '물 한 잔과 자전거'의 언어는 맛깔스럽고 재기에 넘치나,약간의 작위가 '교환'을 가로막고 있었으며 시의 '울림'을 이루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비해 '눈물길'은 형상성에서 오는 '울림'이 시읽기를 유혹하고 있었고,이 유혹은 감동으로 이어지고 있었으며 그것은 구체적 삶의 경험에서 길어올린 것이었으므로 더욱 강한 호소력을 지니고 '교환'을 가능하게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미덕 중의 또 하나는 그 감동의 수준이 시 5편을 골고루 흐르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눈물길'을 당선작으로 하기에 심사위원들은 합의하였다. '재기'보다 '얹기'와 '교환'에서 오는 '형상성의 울림과 감동'을 택하기로 한 것이다. 모든 이들,정진을 바란다. /시인 강은교·최승호
경남신문
풍향계가 있는 오후
- 남화정
아이들을 하교시킨 학교 혼자 풍향계를 돌린다 빨갛고 하얀 네개의
숟가락이 바람을 퍼 먹으며 잘도 돈다 먹성으로 치면야 담장 너머
까치들만 하리 감홍시 진즉 다 털어먹고서 양푼 만한 알전구에
들러붙어 퍼벅 입이 터지는 뜨거운 밥숟가락질의 새들, 너흰 알는지
多産의 복 하나는 타고났던 너희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굴뚝 아득히
탯줄 묻어 지킨 고향 재 되어 풀풀 흩날릴 위기를
이곳은 채소 하나, 나무 한 그루 맘대로 캘 수 없는 택지개발시범지구,
초겨울 볕을 등마다 지고 아, 모포처럼 비닐을 펴 유골을 줍던
사내들 어떻게 되었을까 풍향계 너머 기와집들 감나무들, 아직은
파헤쳐지지 않는 들녘과 학교만이 유적이 되어 떠도는, 해체된 숲 속에서
붉게 살갗이 패인 산들이 피를 쏟고 있다 잘가라 새여 나무여
낼 아침도 재재거리며 교문 들어설 삼천 아우들 위해 풍향계, 바람
한 하늘 남겨두는 것 잊지 않는다
# 심사평
「공단세탁소」·「삼월, 튀밥 같은」·「제비꽃」·「늦은 점심」·「풍경」·「풍향계가 있는 오후」, 모두 여섯 분의 여섯 편이 뽑는 이들 손에 마지막으로 남았다. 어느 작품을 당선작으로 밀어도 될만했다. 시를 끌어올리는 눈길이나 다듬어낸 솜씨에서 남다른 노력의 흔적이 역력하다.
「공단세탁소」는 도시 근교의 세탁소 풍경을 빌려 고단한 삶을 위한 긴 헌사를 마련했다. 시를 끌어가는 집중력은 볼 만했으나, 발상법에서는 새로움이 덜했다. 게다가 시인의 의도가 너무 시의 앞쪽으로 드러나 버렸다. 「덕지덕지 파리똥처럼/배설된 꿈」이라는 첫머리부터 마무리까지 덕지덕지 올라붙어 있는 군더더기를 가지치기 할 수 있는 한 단계 높은 통어력이 아쉬웠다.
「삼월, 튀밥 같은」은 「삼월의 속살이/소란스럽게 터지고」 있는 아파트 담장 풍경에 대한 시인의 따뜻한 눈길이 잘 살아나고 있는 작품이다. 그러나 그 발상의 즐거움을 오롯이 읽는이의 즐거움으로 되살려주는 집중된 힘이 모자랐다.
「제비꽃」도 아쉬움이 남기는 마찬가지다. 버려진 시골집 섬돌을 안고 핀 제비꽃에 대한 상상적 긴장이 시 뒤쪽으로 가면서 풀려버렸다. 「마음은 기다림 짙은 잉크빛」과 같이 서툰 시줄들 탓이다.
이들에 견주어 「늦은 점심」·「풍경」·「풍향계가 있는 오후」는 소품에 가까운 간결함을 미덕으로 지녔다. 군더더기가 적은 만큼 시에 손쉽게 다가서고 있다는 지적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어느 것 없이 그 나름의 진지한 집중력이 돋보였다. 「풍경」이 맨 먼저 당선권에서 밀려났다. 시줄을 더 가다듬어 거듭되고 있는 꾸밈말을 잘 펴 내렸더라면 아름다운 한 편의 수작을 얻을 뻔했다.
「늦은 점심」과 「풍향계가 있는 오후」를 두고 마지막으로 고심했다. 「풍향계가 있는 오후」에 견주어 「늦은 점심」이 더 젊고 참신한 쪽이다. 「늦은 점심을 둘러앉아 먹는」 가난한 이웃에 대한 눈길이 집요했다. 숟가락과 젓가락이라는 두 낱말의 변주로 한 편의 시를 끌고 나간 솜씨는 쉬 얻을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거적자리에 둘러앉은 늦은 점심은 둘러앉은 사람들을 마구 퍼먹는다」라는 마지막 시줄의 언어 전도도 맛깔스럽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말의 재미를 넘어서는 통찰력이 모자랐다. 감동이 덜할 수밖에 없다.
「풍향계가 있는 오후」는 「늦은 점심」에 견주어 낡은 옷을 입고 있는 듯 싶다. 그러나 그 속은 보다 구체적이고 단단한 미덕을 갖추었다. 「택지개발시범지구」로 대표되는 삶에 대한 눈길이 섬세하다. 오랜 시력을 무리없이 녹여냈다. 장차 좋은 시인이 될 재목임을 아낌없이 보여주고 있는 작품인 셈이다. 따라서 「풍향계가 있는 오후」를 당선작으로 민다. 부디 겉멋에 빠지지 말고 삶에 대한 구체적인 감각을 힘껏 키워나가기 바란다.
심사위원=박태일(시인·경남대 교수), 유재천(문학평론가·경상대 교수)
조선일보/폐(廢)타이어
문화일보/시월의 잠수함
국제 신문/4월
경향신문/가스통이 사는 동네
경인일보/진혼제
대구 매일/조용한 가족
부산일보/눈물길
경남신문/풍향계가 있는 오후
--------------------------------------------------------
조선일보
폐(廢)타이어
김종현
아파트 공터 한 귀퉁이
속도를 잊은 폐타이어
땅속에 반쯤 묻힌 깊은 침묵 속
햇빛을 둥글게 가두어 놓고
동그랗게 누워 있다
그가 그냥 바퀴였을 때는 단지
속도를 섬기는 한 마리 검은 노예일 뿐이었다
날마다 속도에 사육되고
길들어 갔다
다른 속도가 그를 앞질러 갈 때
그는 바르르 떨며
가속 결의를 다져야 했다
자주 바뀌는 공중의 표정 앞에서는
잽싸게 꼬리를 사려야 했다
검고 딱딱한 세계 위에서 세월을 소모하며
제한된 영역만 누려야 했다
지금 저 동그라미는 자신의 일생이
얼마나 속도에 짓눌려 왔는지 기억하고 있을까
튕겨 나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 번쯤은 했으리라
예약된 모든 속도들 다 빠져나가고
속도는 한 줌 모래처럼 눈부신 한계였을 뿐
얼마?어지러웠을까
속도에서 벗어나기 위해 속도에 매달린 세월
그가 속도의 덫에서 풀려나던 날
온몸이 닳도록 달려온 일생을 위로하듯
바람은 그의 몸을 부드럽게 핥아주었다
잠시 뒤의 어떤 바람은 풀씨랑 꽃씨를
데리고 와서 놀아주었다
벌레들의 따뜻한 집이 되었다
잃어버린 속도의 기억 한가운데
초록의 꿈들이 자란다
노란 달맞이꽃은 왕관처럼 환히 피어 있다
문화일보
시월의 잠수함
김지훈
구름이 입술 위에 달라붙는
이 자리는 북한산 어디쯤일까. 지닌 것 없이
숲만 가득 담아둔 나무 그늘에 앉아
기어이 가져온 새 책에 손가락을 베고 말았다
혈이 탁 트이고서야 내 온몸이 잠망경으로 솟아오를 수 있었다
작은 물줄기 속에서도 잘 돌아가는 스크루
사방 가득한 수억 燭의 소리가 큰 닻이 되어
산봉우리들이 신들의 전함으로 불리었던 그 바다 위에 박혀 있다
밤낮이 한꺼번에 몰아오는 내연기관의 큰 울림
그 안에는 칼 대신 나뭇잎 들고 싸우던 날도 있다
힘줄 선명한 잎 하나가 공기를 잘게 저미며 내려온다
신들은 어디에서 배를 만드는 중일까
베어낸 나무 밑동에 그려진 선명한 음파탐지기 자국
나는 녹슨 쇠를 털며 가라앉고 있는 배들의 그림자를 본다
나뭇잎을 칼처럼 쥐고 싸우던 시절
앙상해진 주물기계들이 나뭇가지에 붙어 있다
바람이 떠미는 결이 물 속인 줄 알고
낙엽이 벗었다가 도로 신는 잠수화를 본다
아직도 능선에는 사나운 기운이 넘친다
신들의 칼을 나는 나뭇잎이라고 고쳐 부르고 싶다
이 배를 붙들며 한 자리에서 먼바다를 돌아오는 사계절
내 고함으로 한 방의 어뢰를 뭉쳐
사령관의 함교가 있는 백운대를 한 방 때릴 셈이다
갑판이 낙엽을 털 듯 몸을 털며 다시금 방향을 잡고 나아갈 때
수리공들이 큰배를 향해 떼지어 몰려가는 항로를 따라
푸른 위장을 한 잠수함이 쫓아오는 소리가 들린다
국제 신문
4월
- 최미경
벚꽃이 전쟁처럼 흩날리는 저녁
바그다드 도서관이 불에 탄다
길 위에 사람들은
낡은 책 안으로 사라져가고
죽음은,
검은 주머니 가득
모래 폭풍을 싣는다
어둠을 달리던 바람의 마차들
달빛아래 드러나는 폐허의 이빨들
희망도
절망도
깨진 꽃잎을 주워 담으며 중얼거린다
…봄은,
학살이다
홀쭉해진 계절을 틈타
별빛도 마른 티그리스 강가
어린 소녀들의 물동이 안에서도
달은 자라고
포탄이 떨어진 자리마다
흰 꽃이 선다
2004 신춘문예 시 당선작 - 4월] 심사평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오른 작품은 17명의 91편이었다. 엄선에 엄선을 거듭한 것이었으므로 다들 일정 수준을 상회하는 것은 당연하였다. 난형난제에다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바람에 실로 자웅을 결하기가 어려웠다. ‘소리도에서’‘옷 만드는 여자’ ‘누드’ ‘부활’ ‘사자가족’ ‘막차’‘아버지의 겨울’‘남산동 2가’‘도배를 하며’‘4월’ 등 10편이 남아 한판 겨루기를 계속하였다.
설왕설래 끝에서야 어느 정도 윤곽이 잡히기 시작하였는데, 압축력이 약해 느슨해진 것, 너무 사변적이고 설명적인 것, 시적 변용에만 겉멋을 부린 것, 지나치게 표피적이고 감각적인 것, 감상적인 색칠하기에 급급한 것, 가식적 위장술로 교묘히 포장한 것, 시류에 편승한 산문적 억지를 고집한 것 등의 이유를 들어 얻어낸 결과였다.
결국 마지막까지 남아 끝까지 일전을 겨룬 작품은 ‘아버지의 겨울’ ‘남산동 2가’‘4월’등 3편이었다.
‘아버지의 겨울’은 그의 다른 작품들과 함께 흠잡을 데 없는 완성도에다 기성 시인의 냄새가 너무 짙은 나머지 오히려 낡은 매너리즘을 자초하고 있다는 점이 지적되었고 역으로 ‘남산동 2가’는 용기와 열기를 앞세운 젊은 혈기와 현실 재단적 안목은 대단했으나 그만큼 거칠고 미완적이라는 점이 지적되었다.
이러한 점까지 참작하여 작품 ‘4월’을 당선작으로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당선작 ‘4월’은 다소 소품적인 데가 있으나 그만큼 군더더기가 없는 언어 구사 능력이 뛰어나고 행과 연 구분의 탄탄한 구성력과 참신성이 돋보이는 데다 공교롭게도 최종심에서 겨루다 탈락하게 된 두 작품의 장단점을 무리 없이 절충하고 있는 것 같다는 점 또한 크게 참작되었음은 물론이다. 서정의 본령과 시적 정공법을 지속적으로 살려 앞으로 좋은 작품 많이 써 주기를 바란다. / 심사위원 김용택 김창근
경향신문
가스통이 사는 동네
안성호
빈집의 풍경을 텔레비전이 우주로 송출한다. 텔레비전 위로 유리컵이 있고 그 속에서 감자가 싹이 나고 잎이 나서 나무가 되었다. 유리컵 속에서 감자는 죽고 감자만한 유리컵이 나무에 열렸다. 그 유리컵마다 바다가 출렁인다. 푸른 바다를 가르며 달력 속으로 노란 수상스키 한 대가 사라진다. 손을 흔들어대는 벌거벗은 남녀의 벗어 놓은 옷이 달력 곁, 행거에 걸려 있다. 여자의 빨간 치마를 남자의 양복 上衣가 껴안고 있다. 벗어 놓은 양말이 화장실로 걸어가고 화장실에 놓인 세탁기에선 양복 下衣가 길거리에서 묻혀온 노래를 쿨렁거린다 똑똑, 세일즈맨이 빈집에 노크를 하고 돌아선다. 똑똑, 물탱크에 물소리가 들린다. 수압은 낮고 지붕은 점점 무거워진다.
노란 물탱크와 가스통이
퇴락한 집 모퉁이를 돌아오는 빛을 베고 지붕에 누워 하늘을 본다.
오백 마리의 양
구백 마리의 흰 오리가
줄을 지어
하늘을 걸어간다
경인일보
진혼제/ 성유리
어머니 삼베치마를 입은 가오리연이
꼬리로 허공을 치며 솟구쳤다
네 귀퉁이 지느러미를 파닥이며 연은
서쪽으로 서쪽으로 길 떠나고 있었다
모든 걸 놓아버리고
가슴까지 휑하니 비운 모습이
추워보였다
지상과 하늘을 연결하고 있는 가는 끈만은
서로 놓아버리지 못하고
한참을 그렇게
우리를 목 아프도록 바라보고만 있었다
난 칼을 꺼내 팽팽한 순간을 그었다
사선으로 끊었다
연은 비로소 가볍게 너울너울 춤을 추었다
그래 보였다
그런 줄 알았다
아침 까치소리에
창문을 열어보니 감나무 가지 꼭대기에
연이 걸려 있었다
이슬에 온통 젖어
날 보고 있었다
대구 매일
조용한 가족
이동호
무상 임대 아파트 8층 복도,
한 덩이 어둠을 치우고 걸어 들어간다.
복도가 골목 같다.
이 골목은 일체의 벗어남을 허용하지 않는다.
복도가 직장이기도 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복도를 벗어나고 싶지만 그게 잘 안 된다.
이곳에서 사표를 낸다는 것은
極貧의 뜻이고,
담을 뛰어넘는다는 것은
일층으로라는 의미를 지닌다.
저승은 주로 일층에 국한되어 있었으므로,
고층에 가까운 사람일수록 상시 죽음과 내통하는 셈이다.
작년, 두 사람이 일층으로 순간 이동했다.
올해는 벌써 두 명분의 숟가락이
고층에서 주인을 퍼다버렸다.
몇 사람 더 복도를 서성이고 있었으니
한 두 집 더 빈 공간이 늘어날 것이다.
밤하늘은 눈치가 빠르다.
미리 弔燈을 내걸었다.
사람들은 아파트 속에 조의금처럼 들어 앉아있다.
일부는 여전히 복도를 서성이다가
아무런 말없이 일층을 내려다보곤 한다.
이곳에서는 침묵도 하나의 宗派가 된다.
사람들은 침묵을 광신도들처럼
따른다.
[심사평-담담한 필치 · 적절한 언어 돋보여]
예심을 거쳐 온 40여 편의 작품에서 최후까지 남은 것은 '이월의 우포늪' '소백산엔 사과가 많다' '조용한 가족' '밥 나르는 여자' '새들은 날아간다' '술래잡기' '통장정리' '공단 세탁소' '신라 주유소' '파장' '소문' 등이었다. 모두들 그만그만한 목소리로 자기나름의 색깔을 지니고 있어 선뜻 이것이다 라고 손을 들어주기에는 몹시 망설이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중에서도 정서의 구체화된 표현의 적절성을 염두에 두고 고심한 결과 '소백산엔 사과가 많다' '이월의 우포늪' '조용한 가족' '새들은 날아간다'로 압축되었다.
'소백산엔 사과가 많다'는 그 짜임새나 이미지 처리의 깔끔함이 흠잡을 데가 없었으나 신인다운 에너지가 상대적(?)으로 덜한 점이 아쉬운 것이었다. '이월의 우포늪'은 고대와 연결시킨 상상력의 확대가 우포늪의 분위기를 돋보이게 하는 솜씨가 주목을 끌었으나 그것을 어떤 인생론적 내용으로 좀더 구체화 시켰으면 하는 지적이 있어 다음으로 미루기로 하였다.
'새들은 날아간다'는 신인다운 활달한 감성과 거침없는 이미지 구사가 호감이 가는 작품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시속에 지닌 내용과 엇박자 되는 구절들이 있어 보여 이것 역시 다음으로 미루기로 하였다.
'조용한 가족'은 가난이 빚는 아픔을 얄밉도록 담담한 필치로 그려나가고 있는 시선이 돋보인다. 시니컬한 이런 시선은 자칫 격정의 목소리로 떨어지기 쉬운데 끝까지 제3의 눈으로 이끌어 가는 능력이 호감이 갔다. 또한 작품을 이끌어가는 적절한 언어 구사도 마음을 끌었다. 그래서 당선작으로 결정하였다.
거듭 말하지만 예심에 올라온 앞의 열 한 편들은 보기에 따라 어디에 내어놓아도 당선작에 손색이 없는 작품들이었다. 더욱 분발을 바라며 정진을 빌 따름이다. /권기호(시인, 경북대 명예교수) / 정호승(시인)
부산일보
눈물길
기가 막혔다. 눈물길이 막혔으니….
길은 어디에나 있다고 하더라만,
미처 몰랐다.
눈물에게도 길이 필요한 줄은 정말 몰랐다.
무심코 사는 것도 바빠서
세례만 받고 교회에 안 나가는 신자처럼
눈물의 존재를 잊고 산 지도 꽤 오래된 것 같다.
곰팡내 나는 일기장을 들추어보니,
'눈물은 나의 신앙'이라는 얼룩진 표현도 눈에 띈다.
가뭄에 메말라버린 골짜기의 저수지처럼
가슴 속 밑바닥의 뻘이 드러나면, 그 속은
흉물스러운 쓰레기들이 방치되어 있을 테지.
이마며 가슴에 환경보호 띠를 두르고
환경 지킴이로 동분서주
개발이냐,환경이냐를 역설하였는데….
건조주의보의 나이에 들면서
먼 곳의 우포늪은 잘 보여도 정말 가까운
눈물샘은 돌보지 않았다.
고도근시와 난시를 동반한 마른 가슴은
어이없게도 눈물길을 막아버렸다.
물론 수술만 하면 간단히 끝날 일이지만,
마음이 담수되지 않고서는
길이 있어도
눈물은 결코 가지 않으리라.
눈물은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수몰된 고향과 같은 것.
인생의 이정표에 없는 눈물샘으로 가는 길은
육안으로 볼 수 없는 좁은 길
잡초에 묻혀 있던 고향 가는 길에 눈물길은 있으리.
2004 신춘문예]시 심사평
형상성에서 오는 울림
강은교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눈물길 외 4편''물 한 잔과 자전거 외 2편''금성 라디오 외 4편''밤깎기 외 5편'이었다. 이 중 '금성 라디오'와 '밤깎기'는 그 상상력의 전개는 좋으나 형상성의 부족에서 오는 '얹기'의 결핍은 '울림'과 그로 인한,정서와 사유의 '교환'을 불가능하게 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눈물길'과 '물 한 잔과 자전거'의 두 편이었다. 이 중 '물 한 잔과 자전거'의 언어는 맛깔스럽고 재기에 넘치나,약간의 작위가 '교환'을 가로막고 있었으며 시의 '울림'을 이루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비해 '눈물길'은 형상성에서 오는 '울림'이 시읽기를 유혹하고 있었고,이 유혹은 감동으로 이어지고 있었으며 그것은 구체적 삶의 경험에서 길어올린 것이었으므로 더욱 강한 호소력을 지니고 '교환'을 가능하게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미덕 중의 또 하나는 그 감동의 수준이 시 5편을 골고루 흐르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눈물길'을 당선작으로 하기에 심사위원들은 합의하였다. '재기'보다 '얹기'와 '교환'에서 오는 '형상성의 울림과 감동'을 택하기로 한 것이다. 모든 이들,정진을 바란다. /시인 강은교·최승호
경남신문
풍향계가 있는 오후
- 남화정
아이들을 하교시킨 학교 혼자 풍향계를 돌린다 빨갛고 하얀 네개의
숟가락이 바람을 퍼 먹으며 잘도 돈다 먹성으로 치면야 담장 너머
까치들만 하리 감홍시 진즉 다 털어먹고서 양푼 만한 알전구에
들러붙어 퍼벅 입이 터지는 뜨거운 밥숟가락질의 새들, 너흰 알는지
多産의 복 하나는 타고났던 너희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굴뚝 아득히
탯줄 묻어 지킨 고향 재 되어 풀풀 흩날릴 위기를
이곳은 채소 하나, 나무 한 그루 맘대로 캘 수 없는 택지개발시범지구,
초겨울 볕을 등마다 지고 아, 모포처럼 비닐을 펴 유골을 줍던
사내들 어떻게 되었을까 풍향계 너머 기와집들 감나무들, 아직은
파헤쳐지지 않는 들녘과 학교만이 유적이 되어 떠도는, 해체된 숲 속에서
붉게 살갗이 패인 산들이 피를 쏟고 있다 잘가라 새여 나무여
낼 아침도 재재거리며 교문 들어설 삼천 아우들 위해 풍향계, 바람
한 하늘 남겨두는 것 잊지 않는다
# 심사평
「공단세탁소」·「삼월, 튀밥 같은」·「제비꽃」·「늦은 점심」·「풍경」·「풍향계가 있는 오후」, 모두 여섯 분의 여섯 편이 뽑는 이들 손에 마지막으로 남았다. 어느 작품을 당선작으로 밀어도 될만했다. 시를 끌어올리는 눈길이나 다듬어낸 솜씨에서 남다른 노력의 흔적이 역력하다.
「공단세탁소」는 도시 근교의 세탁소 풍경을 빌려 고단한 삶을 위한 긴 헌사를 마련했다. 시를 끌어가는 집중력은 볼 만했으나, 발상법에서는 새로움이 덜했다. 게다가 시인의 의도가 너무 시의 앞쪽으로 드러나 버렸다. 「덕지덕지 파리똥처럼/배설된 꿈」이라는 첫머리부터 마무리까지 덕지덕지 올라붙어 있는 군더더기를 가지치기 할 수 있는 한 단계 높은 통어력이 아쉬웠다.
「삼월, 튀밥 같은」은 「삼월의 속살이/소란스럽게 터지고」 있는 아파트 담장 풍경에 대한 시인의 따뜻한 눈길이 잘 살아나고 있는 작품이다. 그러나 그 발상의 즐거움을 오롯이 읽는이의 즐거움으로 되살려주는 집중된 힘이 모자랐다.
「제비꽃」도 아쉬움이 남기는 마찬가지다. 버려진 시골집 섬돌을 안고 핀 제비꽃에 대한 상상적 긴장이 시 뒤쪽으로 가면서 풀려버렸다. 「마음은 기다림 짙은 잉크빛」과 같이 서툰 시줄들 탓이다.
이들에 견주어 「늦은 점심」·「풍경」·「풍향계가 있는 오후」는 소품에 가까운 간결함을 미덕으로 지녔다. 군더더기가 적은 만큼 시에 손쉽게 다가서고 있다는 지적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어느 것 없이 그 나름의 진지한 집중력이 돋보였다. 「풍경」이 맨 먼저 당선권에서 밀려났다. 시줄을 더 가다듬어 거듭되고 있는 꾸밈말을 잘 펴 내렸더라면 아름다운 한 편의 수작을 얻을 뻔했다.
「늦은 점심」과 「풍향계가 있는 오후」를 두고 마지막으로 고심했다. 「풍향계가 있는 오후」에 견주어 「늦은 점심」이 더 젊고 참신한 쪽이다. 「늦은 점심을 둘러앉아 먹는」 가난한 이웃에 대한 눈길이 집요했다. 숟가락과 젓가락이라는 두 낱말의 변주로 한 편의 시를 끌고 나간 솜씨는 쉬 얻을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거적자리에 둘러앉은 늦은 점심은 둘러앉은 사람들을 마구 퍼먹는다」라는 마지막 시줄의 언어 전도도 맛깔스럽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말의 재미를 넘어서는 통찰력이 모자랐다. 감동이 덜할 수밖에 없다.
「풍향계가 있는 오후」는 「늦은 점심」에 견주어 낡은 옷을 입고 있는 듯 싶다. 그러나 그 속은 보다 구체적이고 단단한 미덕을 갖추었다. 「택지개발시범지구」로 대표되는 삶에 대한 눈길이 섬세하다. 오랜 시력을 무리없이 녹여냈다. 장차 좋은 시인이 될 재목임을 아낌없이 보여주고 있는 작품인 셈이다. 따라서 「풍향계가 있는 오후」를 당선작으로 민다. 부디 겉멋에 빠지지 말고 삶에 대한 구체적인 감각을 힘껏 키워나가기 바란다.
심사위원=박태일(시인·경남대 교수), 유재천(문학평론가·경상대 교수)
출처 : 달밭산장
글쓴이 : 진란 원글보기
메모 :
'좋은글(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2006 신춘문예 당선작 (0) | 2007.01.22 |
---|---|
[스크랩] 2005 신춘문예 당선작 (0) | 2007.01.22 |
[스크랩] 2003 신춘문예 당선작 (0) | 2007.01.22 |
[스크랩] 2002 신춘문예 당선작 (0) | 2007.01.22 |
[스크랩] 2001 신춘문예 당선작 (0) | 2007.01.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