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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글(펌)

[스크랩] 2005 신춘문예 당선작

2005년 신춘문예 당선작

한국일보/나무도마
조선일보/소백산엔 사과가 많다
서울신문/토우
매일신문/집시가 된 신밧드
경향신문/오페라 미용실
문화일보/즐거운 제사
서울신문/흔한 풍경
세계일보/母女의 저녁식사
동양일보/구두코에 걸린 달빛이 흐리다
경인일부/철거지역
동아일보/단단한 뼈(표절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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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나무도마
신 기 섭


고깃덩어리의 피를 빨아먹으면 和色이 돌았다
너의 낯짝 싱싱한 야채의 숨결도 스미던 몸
그때마다 칼날에 탁탁 피와 숨결은 절단 났다
식육점 앞, 아무것도 걸친 것 없이 버려진 맨몸
넓적다리 뼈다귀처럼 개들에게 물어뜯기는
아직도 상처받을 수 있는 쓸모 있는 몸, 그러나
몸 깊은 곳 상처의 냄새마저 이제 너를 떠난다
그것은 너의 세월, 혹은 영혼, 기억들; 토막 난
죽은 몸들에게 짓눌려 피거품을 물던 너는
안 죽을 만큼의 상처가 고통스러웠다
간혹 매운 몸들이 으깨어지고 비릿한 심장의
파닥거림이 너의 몸으로 전해져도 눈물 흘릴
구멍 하나 없었다 상처 많은 너의 몸
딱딱하게 막혔다 꼭 무엇에 굶주린 듯
너의 몸 가장 자리가 자꾸 움푹 패여 갔다
그래서 예리한 칼날이 무력해진 것이다
쉽게 토막 나고 다져지던 고깃덩이들이
한번에 절단되지 않았던 것이다
너의 몸 그 움푹 패인 상처 때문에
칼날도 날이 부러지는 상처를 맛봤다
분노한 칼날은 칼끝으로 너의 그곳을 찍었겠지만
그곳은 상처들이 서로 엮이고 잇닿아
견고한 하나의 무늬를 이룩한 곳
세월의 때가 묻은 손바닥같이 상처에 태연한 곳
혹은 어떤 상처도 받지 않는 무덤 속 같은
너의 몸, 어느덧 냄새가 다 빠져나갔나 보다
개들은 밤의 골목으로 기어 들어가고
꼬리 내리듯 식육점 셔터가 내려지고 있었다


<심사평>
존재론적인 고통 생동감있게 풀어 내
심사= 김정환 장대송 함민복

당선작을 선정하는 동안, 언어를 다루는 능력과 구성력이 뛰어난 시들이 많아 그 가치를 어디에다 두느냐에 대한 고심이 많았다. 결국 아름답거나 쓸쓸한 것들을 얘기하는 것만이 아닌, 뭔가 고통스러워도 육화되어 있어 속이 후련해지는 작품에 심사의 척도를 두는데 이견이 없었다.

그런 맥락에서 신기섭의 ‘나무도마’를 올해의 당선작으로 뽑는다. 존재론적인 고통을 풀어냄에 있어서 고통의 근육을 느끼게 하는 생동감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미지가 서로 오가는데 걸림 없어 자연스러웠다. ‘칼날도 날이 부러지는 상처를 맛봤다/ 분노한 칼날은 칼끝으로 너의 그곳을 찍었겠지만/ 그곳은 상처들이 서로 엮이고 잇닿아/ 견고한 하나의 무늬를 이룩한 곳’ 같은 표현에서 볼 수 있듯이 통찰이 있을 뿐만 아니라, 무겁고 진지한 주제를 형상화하는 솜씨가 시를 오래 써온 장인의 결을 느낄 수 있었다. 당선을 축하하고, 시의 길을 가는데 있어 몸을 끝까지 싣기를 기대한다.

이번 응모작품들을 통해 한국 시의 현주소를 가늠해보았는데, 예술에 온 정신이 팔려 지극히 자아적인 것에 머물러 있거나 언어를 다루는 세련미에 몰두한 흔적들이 엿보여 보는 이의 마음을 아쉽게 했다. 함께 응모한 심은섭의 ‘북쪽 새떼들’과 ‘몸의 악보를 더듬어’의 박신규, ‘대마찌’의 조길성, 등도 최종까지 논의되었음을 밝힌다.


<조선일보>

소백산엔 사과가 많다
김 승 해


소백산엔
사과나무 한 그루마다 절 한 채 들었다
푸른 사과 한 알, 들어올리는 일은
절 한 채 세우는 일이라
사과 한 알
막 들어올린 산, 금세 품이 헐렁하다

나무는 한 알 사과마다
편종 하나 달려는 것인데
종마다 귀 밝은 소리 하나 달려는 것인데
가지 끝 편종 하나 또옥 따는 순간
가지 끝 작은 편종 소리는
종루에 쏟아지는 자잘한 햇살
실핏줄 팽팽한 뿌리로 모아
풍경 소리를 내고
운판 소리를 내고
급기야 안양루 대종 소리를 내고 만다

어쩌자고 소잭산엔 사과가 저리 많아
귀 열어 산문(山門) 소실 엿듣게 하는가


심사평
“水壓 센 한국詩의 바다서 보물 건질 능력있어”

김승해 ‘소백산엔 사과가 많다’, 장성실 ‘소금쟁이 메모’, 이병일 ‘빈집에 핀 목련’, 이다연 ‘가설무대’를 최종심 대상작으로 좁혀가는 데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이는 이들 네 작품이 최소한, 누가 읽어봐도 “이게 시야?” 하는 의문이 들지 않게끔, ‘스스로 시를 성립시키는’ 구성의 내구력을 지녔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 당선작을 고르는 일은 오랜 시간이 걸렸고, 결정을 두 번이나 번복할 정도로 우리 두 심사자들을 꽤 괴롭혔다. 이들 네 작품이 두루 괜찮았다는 말도 되겠지만, 동시에 눈에 확 띄게 스스로를 구별시키는 작품이 없었다는 말도 된다. 결국 우리가 이번 심사에서 기대하고 예감하고자 한 것은 누가 보다 오랫동안 시를 쓸 수 있겠는가, 수압이 센 한국시의 해저에 누가 더 오랫동안 잠수하여 보물을 건져올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김승해 ‘소백산엔 사과가 많다’를 당선작으로 최종 결정했다. 이 시가 그 자체로 잘 다듬어진 작품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과 대등한 수준의 다른 응모작들을 고루 보여줌으로써 앞으로도 그가 계속 시를 쓸 수 있을 것 같다는 믿음을 주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그가 한 권의 시집을 가지고 나타나서 우리의 눈을 황홀하게 부릅뜨게 해 주길 바란다.(문정희·황지우(시인))



<서울신문>

토우
권혁제



평택 三里에 비가 내렸다
저탄더미 속에 들어간 빗물이
검은 까치독사로 기어 나왔다
석탄재 날린 진흙길 따라
드러누운 경부선 철길
裸女가 흘린 헤픈 웃음 위로
금속성 거친 숨을 몰아 쉬며
기차가 얼굴 붉히며 지나갔다
한 평 쪽방의 몇푼어치 사랑에
쓸쓸함만 더해주는 汽笛소리
누이의 嬌聲이 흘러다니는 三里
누이의 꿈은 거기에 있었다
밤마다 사랑 없는 사랑이
하늘로 가는 문턱을 움켜 잡고
비명을 질러댔다
축축한 신음소리만 되돌아 오는
갈 길 먼 꿈들은,驛廣場에 쏟아져 나와
가슴 뚫린 퍼런 그림자로 떠돌아 다녔다
갈 수 없는 가난한 어머니의 품을 찾아서
무뚝뚝한 하행선 열차가 떠나가고
반 시간쯤 후에 비가 내렸다
부활의 율동으로 옷을 벗는 누이,
三里에 내리는 비릿한 土雨


토우-심사평

본심으로 넘겨진 20여 분의 응모작들을 찬찬히 읽어보고 우리가 공통으로 느낀 것은 개성이 눈에 확 띄는 작품이 없다는 거였다.(하긴 그런 작품을 선자로서 만나는 것도 복이다.)대신 오랜 연마기가 느껴지는 상당한 ‘수준’의 작품들은 꽤 있었다.

우리는 다섯분의 작품들을 놓고 토론을 시작했다.박성희의 ‘유년의 계단’은 얼핏 담박하면서도 어릴 적 기억과 어른의 일상의 어울림이 만만찮게 복잡하지만 후속작은 추억과 일상으로의 2분법이다.김경진의 ‘달팽이가 무섭다’는 자연과 자아의 관계가 절묘하지만 후속작에서는 무너진다.‘전남성로원’을 쓴 김창헌은 많은 가능성을 갖고 있으나 아직은 그 가능성들의 온전하고 총체적인 주인이 아니다.

천서봉의 ‘나무에게 묻다’는 자연과 일상과 종교적 신비의 구경이 산 속의 고요 속에 절묘하게 녹아 들어있으나 심상 사이 모호한 주름이 장식적이며 화려한 수사의 찌끼가 아닐까 하는 의심을 끝내 지울 수 없다.선자들로서 매우 안타까운 대목이었음을 굳이 적어둔다.

‘토우’외 3편을 투고한 권혁제는 ‘토우’ 첫 2행의,버려진 도시의 향토적이기까지 한 정서(평택 三 里에 비가 내렸다/저탄더미 속에 들어간 빗물이/검은 까치독사로 기어 나왔다)를 ‘누이의 嬌聲’을 통해 한반도 전체의 아픔으로 끌어올리는 광경이 흥건하고 또 흥건하다.그리고,‘토우=웃음=비명’의 등식이 만만찮은 복잡성을 시의 육체에 부여한다.‘밀물’과 ‘우기’에서도 ‘흥건=복잡’은 적당하다.우리는 이 광경을 뽑아 선에 들지 못한 사람을 적셔주는 방식을 택하기로 하였다.-김명인 김정환



<매일신문>

집시가 된 신밧드
서영식

대리석 바닥 틈으로 발을 밀어 넣은 이끼
널브러진 빵조각을 뜯어먹는 푸른 곰팡이
빌붙어 사는 것들도 푸르를 수 있는 그 곳
서울역 지하도 바닥에 사내가 잠들어 있다
종일토록 모래를 이고 날랐을 머리칼 사이
탈출한 사막의 알갱이들도 빌붙어 잠잔다
맹독의 백사처럼 또아리 틀고 치켜든 고개
수건 하나만 사내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
신밧드처럼 사내는 저 수건을 머리에 감고
대 낮 온통 사막을 짊어 날랐을 것이다

신밧드를 태우고 날던 양탄자 끝이 풀려있다
드문드문 찢어진 흔적, 상처들이 선명하다
갑자기 들이닥친 어둠에 길을 잃은 양탄자
캄캄한 비행, 도시 어느 빌딩 숲을 헤치다
빌딩을 박고 도시 아래로 추락했을 것이다
사고는 어린 신밧드의 꿈들을 바스러뜨리고
양탄자의 나는 기능을 상실케 했던 것이
영혼은 밤이면 막차를 타고 어디로 떠나는가
멀리 해가 뜨는 사막을 비행하는 꿈으로
양탄자를 돌돌 말고 잠든 신밧드

그가 따뜻해 보이는 이유는 무언가



[2005년 경향신문]

오페라 미용실
윤석정


능선으로 몰려든 검은 구름이
귀밑머리처럼 삐죽삐죽 나온 지붕에 한발을 걸친다
그 사이, 좁다란 골목길이 계단을 오르며 헉헉 숨 내쉬는 곳에
할아범 측백나무와 오페라 미용실이 마주 서 있다
그는 매일 미용실 바깥의 오페라를 감상한다
미용실 눈썹처마에 모아둔 나뭇잎 음표들이 옹알거릴 때
가위를 갈다가 번뜩이는 악보의 밑동,
백지에 오선을 긋던 어머니는 병세를 자르지 못해
머리에 자란 음표를 모두 빼내 옮겨 적었고
연주가 서툰 아버지는 가파른 골목길로 내려가 돌아오지 않았다
그해 오페라를 관람하려고 모여든 사람들은
측백나무에서 음표를 떼어 내던 앙상한 어머니를 목격하였다
어머니를 마구 흔들고 지나간 바람이 옥타브를 높이며
구름 떼를 몰고 오기도 했다
미용실 문이 열리자 그는 내내 벌려 예리해진 가윗날을 접는다
머?♣?적은 손님의 머리카락이 잘려나갈 때마다
음치인 울음이 미용실에서 뛰쳐나간다
동네 아이들이 집으로 가는 길에선
울음이 두근거리는 아리아로 변주해 울려 퍼지고
측백나무에서 마지막 남은 음표가 눈썹처마에
떨어질 때
낮은 지붕 위로 함박눈이 음계 없이 쏟아진다
나뭇가지 오선지 끝에 하얀 음표가
대롱대롱 매달리고
악보에 없는 동네 사람들이 돌림노래처럼
몰려나와
희희낙락 오페라를 구경한다



[2005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심사평]

“발랄한 상상과 비유 돋보여”

예심을 넘어온 시편들의 기교적 수준은 일반적으로 높았으나 개성과
다양성이 조금 부족한 듯한 느낌이었다. 한 편의 시란, 아무리 작은 규모의 작품이라 할지라도, 재현(현실)의 축과 표현(개성)의 축, 그리고 언어(기호)의 축을 가지고 있게 된다. 어느 한쪽이 너무 과부하를 받거나 결핍되면 진정한 시의 역동적인 생명감이 태어나지 않는다. 시 텍스트는 그러한 삼위일체 긴장의 아비투스 속에서 고유한 생명의 빛을 발하게 된다. 많은 응모작 중에서 심사위원은 최명희의 ‘비닐 하우스’와 이해존의 ‘이곳은 난청이다’, 윤석정의 ‘오페라 미용실’에 주목했다.

‘비닐하우스’는 현실감각과 현실의식은 뛰어난데 시속에 들어있는 이야기와 이미지의 전개에서 조금 상투성이 엿보였다. 누군가 한번 해본 소리 같다. 아니 누군가 한번 해본 소리라 하더라도 자기만의 상상력과 언어의 힘으로 표현해낼 때 새로운 자기 작품이 태어난다. ‘이곳은 난청이다’는 아주 단단한 작품이다. 그러나 상상력에 한계가 있는 것 같고 ‘나는 비참하다’라는 엄살기가 조금 엿보인다. 그러나 이미지의 전개에 밀도가 높고 단단해서 적지 않은 재능을 느낄 수 있다.

윤석정의 ‘오페라 미용실’을 당선작으로 선택하는데 두 심사위원은 전혀 주저하지 않았다. ‘오페라 미용실’은 ‘늙은 측백나무’와 ‘미용실’이 마주 보고 서있는,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을 것만 같은 낯익은 마을 풍경을, 신선한 상상력과 생생한 비유로 하나의 생동감 있는 음악 공간으로 변형시킨다.

현실 감각도 없지 않고 그렇다고 해서 진부한 재현의 세계는 아니며, 아주 발랄하고 풍부한 상상력인데 그렇다고 낯설게 멀리 나아가지도 않았다. 말하자면 재현의 세계와 표현, 언어의 세계가 잘 어울려 아주 맛있게 배합된 시의 맛을 그득하게 한 상(床) 잘 차려 놓았다. 어디까지나 요약과 압축을 전제로 하는 한 편의 시는 잘 차려낸 ‘모국어의 한 상 (床) 성찬이어야 한다’는 시의 매력을 잘 보여준 이 시인은 다른 응모작인 ‘마늘’에서도 그 섬세하고도 단단한 재능을 보여준다. “만삭인 나는 아랫배 쓸어본다./ 아기는 얼마나 여물었을까/ 어머닌 내가 태아였을 때도 씨 뿌려두고/ 탯줄이 잘 이어졌는지, 더듬이가 돋은 마음/ 자라는 것에 먼저 닿게 했으리라”와 같은 아름다운 섬세함과 상상력의 고요한 역동성은 살아 있다. 더욱 정진하여 대성하기를 기대한다. <심사위원 / 신경림·김승희>



[2005년 문화일보]

즐거운 제사
박 지 웅


향이 반쯤 꺾이면 즐거운 제사가 시작된다.
기리던 마음 모처럼 북쪽을 향해 서고
열린 시간 위에 우리들 一家는 선다

음력 구월 모일, 어느 땅 밑을 드나들던 바람
조금 열어둔 문으로 아버지 들어서신다
산 것과 죽은 것이 뒤섞이면 이리 고운 향이 날까
그 향에 술잔을 돌리며 나는 또
맑은 것만큼 시린 것이 있겠는가 생각한다

어머니, 메 곁에 저분 매만지다 밀린 듯 일어나
탕을 갈아 오신다 촛불이 휜다 툭, 툭 튀기 시작한다
나는 아이들을 불러모은다 삼색나물처럼 붙어 다니는
아이들 말석에 세운다. 유리창에 코 박고 들어가자
있다가자 들리는 선친의 순한 이웃들

한쪽 무릎 세우고 편히 앉아 계시나 멀리 山도 편하다
향이 반쯤 꺾이면 우리들 즐거운 제사가 시작된다
엎드려 눈감으면 몸에 꼭 맞는 이 낮고 포근한,




[2005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시 심사평]

감칠맛 나는 문장 묘한 울림

예심을 통과한 열다섯 명의 작품이 심사의 대상이 되었다. 예년과 비교해 볼 때 응모량이 크게 늘어난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내용면에서는 전체적으로 삶의 궁핍과 고단함의 구체적 경험을 다룬 시가 의외로 많았다. 형식은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경향보다는 무난한 스타일이 대부분이었다. 신인다운 패기와 독특한 개성이 느껴지는 작품이 쉽게 눈에 띄지
않았던 것은 아쉬운 일이다. 마지막까지 논의된 것은 박지웅과 노양식씨의 작품이었다. 노양식씨의 ‘푸른, 복어의 집’ 외 2편은 시적 형상화의 능력이 탁월하다는 점에서는 주목을 받았으나 의미의 귀결이 단조로운 것이 흠이었다. 한 편의 시에 담겨야 하는 것은 분명한 결론이 아니라 음미할 만한 어떤 것이다. 이미지와 리듬, 사유 혹은 심리의 전개 과정, 그리고 말을 넘어서는 침묵과 여백까지, 그 모든 것이 언어예술로서의 시에서는 음미를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박지웅씨의 ‘즐거운 제사 ’외 6편은 섬세하면서도 격조있는 언어감각으로 눈길을 끌었다. ‘기리던 마음 모처럼 북쪽을 향해 서고/…/산 것과 죽은 것이 뒤섞이면 이리 고운 향이 날까/ 그 향에 술잔을 돌리며 나는 또/ 맑은 것만큼 시린 것이 있겠는가 생각한다/…/삼색나물처럼 붙어다니는 아이들’ (즐거운 제사)에서 보듯 감칠맛이 나는 문장, 마음이 스며 있는 언어, 한 편의 묘한 분위기를 빚어내는 솜씨는 보기 드문 것이다. 다른 시 ‘대관령옛길’도 언어에 대한 빼어난 감각을 뒷받침하고 있다. ‘제 짝 앞에 찰랑거리는 곤줄박이의 저 맑은, 흥분/… /명자나무의 몹시 아름다운 한때’. 이견 없이 박지웅씨의 ‘즐거운 제사’를 당선작으로 뽑는다. 당선을 축하한다. (시인 황동규·최승호)



[2005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흔한 풍경
김미령


시청 앞 작은 연못에 기억상실증에 걸린 비단잉어가 산다
몰락한 귀족처럼 느릿느릿 헤엄치면
양귀비꽃 수면에 비쳐온다
우리는 그걸 주홍빛 슬픔이라 부른다
허기진 햇빛이 정수리 위에 어른거린다
메마른 광장의 오후 2시가 아가미 속을 들락날락하는
지루한 염천(炎天)의 대낮
살아있다는 걸 확인하기 위해 벽을 두드려보듯 지느러밀 움직여
물의 파동을 느껴본다
배에 와닿는 물의 감촉이 따스하다
눈앞이 침침해지고부터는 소리에 집착하게 된다 좁고 가늘어진 바람소리
공중에 박음질하듯 이따금 지저귀는 새소리
무수한 소문들이 물기를 머금고 부풀었다 사라진 벤치에
빈 종이컵이 실신할 듯 입벌리고 있다
새우깡을 무심히 던지던 손이 오래 들여다보고 있었던 건 무엇일까
生의 마지막 들숨을 쉬듯 물위로 솟구칠 때 무심코
돌아서던 누군가의 하얘진 귓불을 보았을 수도 그때 잠깐 흔들린 듯
눈을 깜빡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 서로가 엿본 것은 아무 것도
들킨 것 또한 아무 것도 없다 다만 그 동안에도
애초에 누구의 관심거리도 아니었다는 듯
개미들이 떨어진 여치 다리를 십자가처럼 옮기고 있었고
체인을 오래 매만지고 있던 자전거 옆으로 은색 승용차가
서류뭉치를 신생아처럼 안고 급히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모두 외로움을 흙먼지처럼 껴입고 있지만
삶의 균형을 유지하는 법을 누구나 알고 있는 것이다
벤치 밑에 조금 구부러진 쇠뜨기풀이 다시 일어서는 동안
내 어슬렁거림은 어떤 사소함에 비유될 수 있을지 생각해본다
보이지 않게 어긋나도록 돼있는 정교한 교차로 같은 일상 속에서도
무언가에 열중하는 순간 누구나
제 몸에 딱 맞는 표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므로
모두 서로에게 그림 속 배경일 뿐이라는 듯
과자 부스러기들이 바람에 흩어진다



[2005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심사평]

예심을 거쳐 두 선자에게 전해진 작품들은 다 일정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다수 응모작들에 결정적인 그 무엇이 모자란다는
인상을 주었다. 발상의 참신성이 돋보이는 작품은 흔히 언어의 밀도가
따라주지 않았고 감각적인 이미지가 돋보이는 작품은 호흡이 짧다는
인상을 주었다. 무엇보다 새로운 시정신을 엿볼 수 있는 패기를 찾아보기 힘들다는 아쉬움을 주었다. 치열함이나 당돌함이 제거된 시적 수련이란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상념에 젖게 했다.

결국 선자들은 최종적으로 당선권에 근접했다고 여겨지는 네 명의 응모자의 작품을 추려내 논의를 거듭했다. 그 결과 김미령의 ‘흔한 풍경’ 이 마지막으로 낙점을 받게 되었다. 얼핏 보아서 무더운 날의 나른한 도시 풍경을 그리고 있는 이 작품은 현대인의 소외와 고독을 별 무리 없이 부각시키는 데 성공하고 있다.

제목 그대로 ‘흔한 풍경’에 지나지 않는 현실의 단면에 대한 담담한 소묘가 돌연 삶의 무상함을 환기시키는 절실성을 획득하고 다가온다.
“공중에 박음질하듯 이따금 지저귀는 새소리”나 “보이지 않게 어긋나도록 돼 있는 정교한 교차로 같은 일상”같은 표현도 대범하게 씌어진 듯하지만 응모자의 만만치 않은 내공을 짐작하게 한다. 함께 투고한 다른 작품들도 다 일정한 완성도를 보여주고 있어 한층 믿음이 갔다. 앞으로 자기만의 개성적인 시세계의 구축에 보다 신경을 쓴다면 한 뛰어난 신인의 탄생을 기대해도 좋을 것 같다.

최종심에서 논의된 작품 가운데 김영수의 ‘들키지 않은 걸음걸이’나 ‘어두운 독서’는 선자들을 오랫동안 망설이게 했다. 시에 담긴 사유의 깊이가 만만치 않았으나 그것이 시를 너무 건조하게 만든 감이 있고 불필요한 추상어의 남발도 거슬렸다. 이밖에 ‘오징어 등불’을 투고한 이병일과 ‘사나운 연어떼가 밀려갔다’의 박성현도 숙련된 솜씨를 선보이고 있지만 충분한 신뢰감을 주지 못하고 있다.

당선자에게 축하를 전하고 다른 응모자들에게도 분발과 정진을 부탁드린다. (김명인·남진우)


[2005년 세계일보]

母女의 저녁식사
윤진화


배추김치.... 파김치.... 상추겉절이.... 오이소박이.... 어머니.....
.... 어머니.... 우리 집 식탁에는 온통 풀뿐이네요
우리의 저녁 식사는 말들이 좋아하겠어요
보세요? 하얀 접시 위에 그려진 말이 우리보다 먼저
우리의 저녁 식탁에 와 있잖아요. 그래요. 거기요. 가만히,
아이처럼 귀를 기울이면,
어디선가 또 다른 말이 들길을 지나 마을 건너
가난한 우리 식탁으로 달려와요. 들리세요?
주인을 버리고 달려오는 말울음 소리요
저기 먼 곳에서는,
젖가슴 하나 달린 여자들이
안장도 없는 말을 타고
드넓은 대지를 흔들며 산다던데... 히잉! 어머니
주홍빛 하늘이 몰려와 대지를 덮으면
동그랗게 몸을 웅크린 여자들이
말갈기 같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우리 식탁을 향해 자신의 말들을 찾아
고단한 하루치 태양을 쉬게 하고 달려와요
... 히잉! 어머니
당신이 좋아하는 딸기 아이스크림이 녹을 때처럼
하늘이 물들어갈 때, 그녀들이 달려와요
가슴 하나를 도려낸 그녀들이, 자꾸만 자꾸만
초대받은 손님처럼 달려와요
어머니, 유방암에 걸린
아마존의 여왕, 히폴리테여
듣고 계신가요?
전사들이
우리의 밀림으로 몰려오는 소리,
그 침묵의 소리들이요
… 히잉! 어머니.


[2005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시 심사평]

당선작 발상탁월… 우리詩 지평 넓힐것
마지막 후보작 2편도 만만찮은 솜씨

윤진화, 강호정, 이우경의 시들을 가장 재미있게 읽었다. 윤진화의
‘母女의 저녁 식사’는 발상이 아주 신선하다. 풀뿐인 식탁-말-아마존의 여왕 히포리테-유방암에 걸린 어머니의 연상도 재미있지만, 이미지가 청승맞거나 구질구질하지 않고 쌈박하고 날렵한 점도 호감을 갖게 한다. 많은 사람들의 시가 내용이나 형식에서 서로 닮아 있는 데 반하여
이 시는 다른 사람의 시와 전혀 같지가 않다. 사물을 보는 시각이 다른 사람과는 본질적으로 같지 않음을 말해주는 대목이리라.

역시 어머니의 잃음을 노래한 ‘두 개의 꿈’도 뛰어난 시다. 슬픔이니 아픔이니 하는 직접적인 표현 한마디 없이도 더 강하게 그것을 느끼게 하는 점, 시인의 만만치 않은 솜씨를 보여 주고 있다.

강호정의 시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시다. 시를 통해서 삶과 죽음의 문제며 진실을 찾아가는 자세도 돋보인다. ‘몸을 들여다보는 순간’이며 ‘선언에 대하여’는 시적 완성도나 안정감에 있어 결코 손색이 없지만, 다 죽음을 다룬 시여서 신춘시로서는 좀 무겁다. 당선 여부에 관계없이 좋은 시인이 될 자질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이우경의 시 중에서는 소시민의 삶의 모습이 잘 드러난 ‘문패’가 가장
뛰어나다. 이미지도 선명하고 표현도 아주 매끄럽다. 그러면서도 억지가 없고 자연스럽다. 흠잡을 데 없이 날씬하게 빠진 시라는 칭찬이 조금도 과하지 않을 것이다. 한데 다른 시들이 뒤를 받쳐주지 못한다. 너무 편차가 심한 점은 조금 안심이 되지 않는다.

이상 세 사람의 시 중에서 윤진화의 ‘母女의 저녁 식사’를 당선작으로 뽑았다. 이 시가 가진 분방하고 건강한 상상력은 우리 시의 지평을 크게 확대할 것으로 기대되는바, 앞으로의 활동에 크게 기대를 건다.
(유종호 문학평론가·신경림 시인)


[2005 동양일보]

구두코에 걸린 달빛이 흐리다
하봉채


하룻밤이면 달이 차겠다
비우는 일만 남겠다
곁눈질 모르고 달렸어도
여전히 의문투성?불혹의 세월
강가를 서성이다 구두를 벗는다
조심스럽게, 강물도 호흡을 멈춘다
온쉼표 하나 없던 일상으로
굽이 낮아지고 한쪽으로 기우는 구두
가죽이 닳고 헐거워져 모양 잃은 구두를
시멘트 둑에 가지런히 놓는다
풍덩, 몸을 던지면 꺾이던 순간마다
마디마디 스며든 악취를 씻어 낼 수 있을까
저리 잔잔하게 살아낸 날은 얼마였던가
양말을 벗으니 울퉁불퉁한 굳은 살
군데군데 각질이 일어나는 발이
놀란 듯 움츠린다. 양말은 구두에게
한 짝씩 나눠주고, 일상을 통째로 감아 쥔
넥타이와 채찍질만 일삼아 온
시계를 푼다, 디지털 포위망을 좁혀 오는
핸드폰도 내려놓는다
한여름인데 시멘트 강둑은 차갑다
한 쪽 발을 내 딛는다, 남은 발을
마저 들여 놓는다, 강물은 더 차갑다
한 걸음 두 걸음 흔들리는 횡보에 달빛이
흔들린다, 줄 선 빛고드름이
사납게 일그러진다
풍덩!
강 가운데 떠 있던 바지선에서
개구리 한 마리가 먼저 뛰어든다
처음부터 지켜보고 있었을까
발목을 간질이는 파문은
짧다
이내 고요하다

구두코에 걸린 달빛이 흐리다



시 심사평/망가짐 미학속 참신성 넘쳐나

이번 동양일보 신인문학상에는 모두 1000여 편이 응모됐다. 무엇보다 반가운 일이다. 시편들을 대하는 순간 다양해지고 참신성이 보여서 더 더욱 반가웠다. 그러나 아직도 신인상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응모한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작품들도 더러 보였다. 그래서 심사에 앞서 어떤 기준을 두고 작품을 고를까 생각했다.
이야기를 앞세워 의미만을 앞세운 시, 주제가 보이지 않는 시,
아름다운 말만 늘어놓은 시는 우선 골라내기로 했다.
그러다 보니 남은 것은 17편.
1차 관문을 통과한 셈이다
하루 이틀을 두고 감동이 남아있는 작품은 어떤 것인가를 생각했다.
그리고 나서 이번에는 새롭고도 변화를 주는 시, 최선을 다한
흔적이 보이는 시, 해학과 새로운 리듬감으로 엮어낸 시,
무엇보다 앞으로 가능성이 엿보이는 시를 찾아보기로 했다.
고정관념을 망가뜨린 시는 없을까 였다.
최종적으로 하재봉채씨의 ‘구두코에 걸린 달빛이 흐리다’,
심민정씨의 ‘조팝나무 새끼를 치자’가 눈에 들어왔다.
이 두 작품을 놓고 오랜 시간 뒤척이다가 긴장감이 다소 떨어진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였으나 모든 면에서 하봉채씨의 작품이 앞선다고 보아 당선작으로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정진을 빌며 축하를 보낸다. /심사위원:한평호(시인)


<2005 경인일보>
철거지역
-정경미-


 굴피집 처마 끝에서 포크레인이 홰를 친다
 노란 살수차가 산동네의 새벽을 깨우며
 을씨년스런 거리를 적신다
 콘크리트 더미에서 요란하게 터져 나오는
 철지난 전화부가
 다이얼을 돌리며 안부를 묻는 동안
 재개발 택지 분양 프랭카드는
 부푼 몸을 날리는 햇살에 눈을 뜬다
 비닐 하우스의 골담초는
 봄을 기다리며 세간들을 살피고
 떠도는 개똥지빠귀새 추운 어깨에
 살풀이구름이 내려앉는다
 찢긴 연체료 고지서가 수화를 건네며
 검은 입술에 묻은 상처를 펄럭이고
 왼쪽 어깨가 밀려나간 외등이
 백밀러 속으로 뒷걸음질 친다
 멈춰버린 괘종시계는 언제나
 뜨거운 한낮에도 저무는 하늘을 가리킨다
 팽팽한 오후가 하수도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
 골목길은 말 잔등처럼 출렁거리며
 어두운 길목에서
 희미한 등불을 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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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시 표절론

단단한 뼈
이 영 옥


실종된 지 일년 만에 그는 발견되었다 죽음을 떠난
흰 뼈들은 형태를 고스란히 유지하고 무슨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독극물이 들어 있던 빈 병에
는 바람이 울었다 싸이렌을 울리며 달려온 경찰차
가 사내의 유골을 에워싸고 마지막 울음과 비틀어
진 웃음을 분리하지 않고 수거했다 비닐봉투 속에
들어간 증거들은 무뇌아처럼 웃었다 접근금지를 알
리는 노란 테이프 안에는 그의 단단한 뼈들이 힘센
자석처럼 오물거리는 벌레들을 잔뜩 붙여놓고 굳게
침묵하고 있었다


<심사평>
짧은 분량에도 많은 것 담아내

(본심=황동규 정진규) / (예심=반칠환 박형준)

예심에서 올라온 상당한 수준의 작품들을 거듭 읽고 검토한 끝에 남은 작품이 배대호의 ‘알타미라 동굴벽화 코드(CODE)’ 외 9편과 이영옥의 ‘단단한 뼈’ 외 4편의 시들이었다. 다른 응모시들이 지니고 있는 상대적 결함들이 이들 시에서는 극복되고 있었다.

이들은 나름대로 분명한 개성을 지니고 있으며, 까닭 없는 우회나 굴절이 야기하는 몽상의 어눌한 언어들을 자제하고 있어 다행이었다. 특히 이른바 화자 우월주의에 빠져 시를 수다스러운 설명으로 이끌거나, 대상과의 교류를 차단하는 독단의 왜소성으로부터 깔끔하게 벗어나 있었다.

장고 끝에 우리는 이영옥의 ‘돛배 제작소’와 ‘단단한 뼈’로 의견을 압축했다. ‘돛배 제작소’의 다음과 같은 대목에선 안과 밖을 하나로 짚어가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아 호감이 갔다. ‘설계도면에는 오래된 고뇌까지 꼼꼼히 그려져 있었고/돛배가 하나씩 완성될 때마다/그의 환멸은 정교해져 갔다’ 같은 대목 말이다. 그러나 ‘단단한 뼈’에서 더욱 중요한 대목들을 확인했다. 짧은 분량으로도 많은 것을 담아내는 자재로움과 절제된 감정이입을 통해 죽은 것들을 또 다르게 살려내는 전환의 힘, 그 핵을 이 시는 지니고 있다. ‘마지막 울음과 비틀어진 웃음을 분리하지 않고 수거했다’는 비극적 삶의 전력에 대한 암시도 놀랍지 않은가. 이 시를 읽고 나면 ‘섬쩍지근한’ 침묵 같은 것이 남는다.

배대호의 ‘알타미라 동굴벽화 코드(CODE)’ 등은 언어의 활달성, 또는 뜨거움을 지니고 있었다. 순수한 원시적 생명력에 대한 천착도 돋보였다. 그러나 표현의 조밀함이 모자라 적잖이 설명으로 기운 흠이 있었다. 지니고 있는 정열의 운용에 따라서는 새로운 시를 열 가능성이 보인다


<원조 시!>
사랑에 대한 짤막한 질문
최 금 진


차는 계곡에서 한달 뒤에 발견되었다
꽁무니에 썩은 알을 잔뜩 매달고 다니는
가재들이 타이어에 달라붙어 있었다
너무도 완벽했으므로 턱뼈가 으스러진 해골은
반쯤 웃고만 있었다
접근할 수 없는 내막으로 닫혀진 트렁크의
수상한 냄새 속으로 파리들이 날아다녔다
움푹 꺼진 여자의 눈알 속에 떨어진 담뱃재는
너무도 흔해빠진 국산이었다
함몰된 이마에서 붉게 솟구치다가 말라갔을
여자의 기억들은 망치처럼 단단하게 굳었다
흐물거리는 지갑 안에 접혀진 메모 한 장
'나는 당신의 무엇이었을까'
헤벌어진 해골의 웃음이
둘러싼 사람들을 물끄러미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무엇, 무엇이었을까 …… 메아리가
축문처럼 주검 위에 잠시 머물다가 사라져갔다

- 제 1회 창비신인시인상 당선작,『창작과비평』 2001년 겨울호


<2005년 동아일보 시당선작>
단단한 뼈  
- 이 영 옥


실종된 지 일년 만에 그는 발견되었다 죽음을 떠난
흰 뼈들은 형태를 고스란히 유지하고 무슨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독극물이 들어 있던 빈 병에
는 바람이 울었다 싸이렌을 울리며 달려온 경찰차
가 사내의 유골을 에워싸고 마지막 울음과 비틀어
진 웃음을 분리하지 않고 수거했다 비닐봉투 속에
들어간 증거들은 무뇌아처럼 웃었다 접근금지를 알
리는 노란 테이프 안에는 그의 단단한 뼈들이 힘센
자석처럼 오물거리는 벌레들을 잔뜩 붙여놓고 굳게
침묵하고 있었다


2004년 계간「 시작 」가을호 신인상 당선작
생일전야
-이영옥 <2005년 동아신춘 시 당선자>

남자는 달려오는 빛을 향해 몸을 날렸다 다급한 순간에는 어떤 기억도 저항하지 못한다 남자의 몸이 파닥거리다가 이내 조용해졌다 남자의 주변으로 살비듬같은 햇살이 잠시 푸슥그렸다 호주머니 속에서 끌려나온 유서는 창백했다 세상의 고통들은 왜 똑같은 모서리를 가질까 남자의 절망은 여러번 접혀진 채 천천히 닳아왔을 것이다 휘갈겨 쓴 모음과 자음들이 더듬거리며 남자를 변명했다 생일전날 날짜가 맞아 떨어진 것은 순전히 남자의 수학적 강박 때문이었다 TV를 켜자 아홉시 뉴스앵커가 알맞게 경직된 하루를 부검하고 있다 어두운 터널은 놀란 동공처럼 아득히 뚫려 있고 남자의 반 지하 단칸방에는 미역이 양푼을 검게 부풀리고 있었다
출처 : 달밭산장
글쓴이 : 진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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