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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통신 트랜드

영어 공용어 시대

연암 박지원은 청나라 고종의 70세 진하사절(使) 수행원으로 넉 달간 중국을 다녀오고 충격을 받았다.

 청은 변방의 오랑캐 소수민족이 세운 나라인데다 치욕스러운 침략까지 당했기에 적대적 감정이 있었는데 막상 유럽과의 교류로 개화된 중국을 접하고서는 ‘우물 안 개구리’였던 자신이 부끄러웠던 것이다. 이른바 실학사상의 전도사가 된 연암은 “조선이 선진국 대열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중국어를 공용어로 사용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기까지 했다.

 그로부터 220여년이 지난 오늘날 지구촌 시대를 맞아 이제는 영어 공용어 주장이 대두되고 있다. 우선 관광특구로 개발되는 제주도나 인천을 비롯한 몇몇 경제특구만이라도 영어를 함께 쓰자는 절충안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영어 열풍이 전국을 휩쓸어 유아원부터 영어 과외를 받고 대학생 해외 어학연수가 필수가 됐으며 심지어 발음 교정을 위한 혀 수술까지 등장하고 있다.

 영어는 영국의 식민지 확장과 산업혁명 선도에 힘입어 전 세계로 침투되기 시작했으며 신대륙의 미국 의회가 1표 차이로 독일어를 제치고 영어를 공용어로 채택함으로써 위력을 발휘하게 됐다. 국제기구의 85%가 영어를 공용어로 쓰고 있고 중동 산유국 중심의 석유수출기구(OPEC)조차 영어가 공용어다.

 21세기 정보화사회에서는 인터넷 활용 여부에 따라 삶의 수준이 구분되는 ‘디지털 디바이드(digital divide)’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영어사용 능력에 따라 삶의 수준이 구분되는 ‘잉글리시 디바이드(english divide)’가 새롭게 등장한 것이다. 심지어 3차대전은 세계화전쟁이자 영어전쟁이라는 말도 있다. 우리나라도 1945년 해방 직후 한반도에 진주한 미군 주도의 임시정부 공식언어는 영어였다. 사실 지주 집안으로 구미유학의 기회를 잡은 사람이나 미국 선교사와 자주 어울린 사람이 영어를 무기로 권력의 핵심에 다가갔기 때문에 중국과 극동아시아 전문 기자인 에드거 스노는 우리 해방정국을 ‘통역관 정치’라고 비꼬기도 했다.

 일찌감치 영어를 공용어로 채택한 네덜란드가 유럽의 허브가 돼 세계 강국으로 부상한 것이 부럽기는 하지만, 문제는 영어가 너무 어렵다는 것이다.

 교육열 세계 1위인 우리나라도 영어에 친숙해지기 위해 15만여명의 학생이 어학연수차 해외에 나가 있고 국내에서도 영어 사교육비가 8조원에 육박하는데도 토플 성적이 세계 119위로 중국이나 말레이시아보다 낮은 것을 보면 영어야말로 고비용 저효율의 표본인 것 같다. 그나마 이 같은 교육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사람과의 빈부나 계층 간 갈등이 더욱 심화될 우려도 있다.

 이처럼 세계가 영어를 못 해서 안달하고 있는데 막상 미국에서는 “영어를 살려내자”고 아우성이다. 아시아와 스페인계 사람 때문에 유럽계 백인문화의 상징인 영어의 정체성이 흔들린다는 것이다. 과거 우리 선조는 한자 공용어 시대를 살았고 일제 시대는 일본어가 그리고 미군정 시대는 영어가 공용어였다. 이번 기회에 어쩌면 세계 도약을 위해 영어에 한번 도전해봄 직하다. 그러나 영어 공용화의 전제 조건은 국어의 기초를 튼튼히 다져야 한다는 것이다. 지난해 문화관광부의 조사에 따르면 우리 국민의 국어 실력은 100점 만점에 30점이 채 안 되며, 해마다 국어 점수가 떨어지고 있다고 하니 우선 내부 정비부터 해야겠다. 유능한 통역가나 번역가는 외국어보다 우리말을 정확하게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국가 간의 각종 장벽이 무너지고 있는 글로벌시대에서 영어만 제대로 하면 시공을 초월해서 취업할 수 있다. 미국과 정반대에 있는 인도는 영어가 가능하기 때문에 미국인이 퇴근하고 난 후 인도인이 출근해서 온라인상으로 작업을 계속한다. 피자가게 주문까지 인도에서 받는 경우가 많다. 이처럼 인도에 살면서 미국회사에 근무하는 인도인이 이미 30여만명이다. 언어나 문화·제도의 차이는 관세 70%에 해당하는 무역장벽이라는 주장도 있다.

 어쨌든 이제는 영어권 주변국에서 영어권 중심국가로의 진입을 고려해볼 때가 된 것 같다. 최근 토플대란을 보면서 영어가 새로운 ‘교육권력’의 형태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 김동현 한국광고단체연합회 부회장 dhkim@a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