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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영화

달빛구두

성마르게도 벌써 눈이 기다려집니다. 전방부대 앞 민박집들, 쌓인 눈 때문에 되돌아갈 수 없었던 면회객들이 묵었던, 허름한 방안에서 역사는 이루어집니다. 인간의 원초적인 본능에는 피학성 쾌감이 도사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약한 인간들은 불가항력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는, 그래서 “우리 사이는 그렇게 됐다”는, 운명론적 사랑 이야기를 쓸 수 있는 것입니다.

 

 만화가 정연식 씨의 ‘달빛구두’(전3권·휴머니스트)를 권해드립니다. 거의 3대에 걸친 사랑 이야기를 엮어가고 있으면서 세 권으로 깔끔하고 뭉클하게 엮어낸 작가의 솜씨가 돋보입니다. 주인공은 70년대 후반 혹은 80년대 전반에 대학을 다닌 것으로 추정되는 한 남자와 그의 친구, 그리고 한 여성입니다. 사랑하지만 말을 하지 못하는 남녀, 그들 사이에 우정과 애정의 다리를 놓고 있는 또 다른 남자가 있습니다.

 

 인생의 진리는 통속적인 이야기 속에 숨어 있습니다. 조폭의 우두머리를 대신해서 살인을 저지르는 남자, 적들의 추적, 숨가쁜 사랑과 도피, 그러다가 남자는 여자에게 도망가자고 제안을 합니다. 망설이던 여자가 따라 나서겠다고 결심하는 순간, 약속은 어깃장 나고 맙니다. 여자의 몸 속에는 남편의 아이가 아니라, 한때 눈 내리는 전방으로 같이 면회를 갔던 남편의 친구의 아이가 자라고 있습니다. 찐한 주말연속극 보다 훨씬 인간적입니다. 탄탄한 취재와 발품도 돋보입니다. 이번 주말은 TV를 끄시고 모처럼 만화에 빠져봄 직 합니다.

 

 

 영국 최고의 이야기꾼 로알드 달 단편집 ‘기상천외한 헨리 슈거 이야기’(강)도 너무 재미있습니다. 모두 7편의 이야기가 실려 있는데요, 만약 당신이 지하철로 출퇴근 하시는 분이라면 그때마다 내리기 싫어질 정도로 흥미진진합니다. 책 제목으로 뽑힌 첫 작품은 두 눈을 감고도 사물을 식별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 어떤 사나이의 이야기입니다. 돈은 많지만 인생을 낭비하면서 허랑방탕하게 살고 있는 마흔한 살의 그는 인도에서 어떤 사람이 그런 능력을 갖게 됐다는 것을 알고 나서 자신도 훈련에 훈련을 거듭합니다. 그리고 드디어 사물을 꿰뚫어 볼 수 있게 됩니다.

 

 당신 같으면 그 능력으로 무얼 하시겠습니까. 이 소설의 주인공은 그 능력으로 전세계 21개 국가에 있는 371개의 카지노를 돌아다니면서 20년 동안 1억4400만 파운드의 돈을 벌어들입니다. 주로 블랙잭을 하는데 딜러가 다음에 나누어줄 카드를 읽을 수 있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승률 100%입니다.

 

 

 프랑스에서 76세에 아카데미 프랑세즈 상을 받으며 화려하게 등단한 베르나르 뒤 부슈롱 장편 ‘짧은 뱀’(문학세계사)은 조금 묵직한 작품입니다. 14세기 스칸디나비아 반도를 기점으로 일종의 종교적 원정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북유럽의 가톨릭 종교와 에스키모인의 속세가 서로 충돌하면서 문명과 야만의 갈등을 그리고 있다고 일단 상상하시면 됩니다. 이 작품의 무게는 성과 속이라는 거창한 주제뿐만 아니라 작가의 능력에 경외감을 갖게 하는 고증학적 지식들, 그리고 고풍스럽고 품격 높은 문체에 있습니다. 아울러 인간의 신념과 상식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력한 것인가를 어처구니없을 만큼 희화적으로 보여주는 대목들이 작품의 묘미를 한껏 고양시킵니다. 번역은 오히려 원작자가 빚졌다고 할 만큼 압권입니다.

 

모두 잠든 밤, 혼자서 불 켜고 읽을 책입니다. 첫 부분을 조금만 참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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