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추위에 꼭 해돋이를 봐야 하느냐는 말이다.
마치 인내를 실험하는 듯 갑자기 표변한 그 매서운 한파 속을…
하던 건 해야지
하물며 그것이 나쁜 습관이 아닌 다음에야…
사실 떠나지 못하고 이불 속에 남으면 후회할 것이다.
그리고 떨어지는 열정과 의욕으로 늙어감을 인정하고 싶지 않다.
그래도 허리핑계로 굳이 무리한 출정을 안 해도 되는데
그냥 덕유의 장쾌한 설국이 보고 싶었다.
20년 넘은 계룡산 해맞이의 전통을 오늘에야 깬다.
내 인생에서 가장 통절했고 뼈아펐던 계룡산
애정과 배반의 잔인한 1월은 벌써 2년이 다되었지만
그 서러움과 상처는 아직 아물지 않았다.
역마살은 잠들어 있을 뿐이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혼자의 여행길을 미루지만
주술과 같은 감동의 기억들은
때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1월 1일은 그 빌미를 준다.
새해의 의미에 기대어
더 이상의 핑계와 합리화로
시간을 미룰 명분이 희석된다.
차를 달리면서 하늘은 바라 보는데 별이 보이지 않는다.
떠오르는 새해의 태양은 만나지 못할지 모른다.
하지만 늘 그러하듯이 예기치 않은 기쁨과 희망을 만날 것이다.
다시 힘내어 한 해를 살아 갈 이유 같은 걸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휴게소에서 라면 하나를 먹고 보온 통에 뜨거운 물을 채우고 무주 리조트로 갔다.
자로잰 듯 도착시간은 5시 30분
7시 40분에 해가 뜨니 슬루프를 따라 향적봉에 올라가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4시 대전출발
인삼랜드에서 라면 하나 먹고 보온물통 채우고
5시 30분에 무주 리조트 도착
설천벌로 나가니 냉기와 바람이 장난이 아니다.
개장한 스키장 슬루프는 조명이 휘황찬란하고 벌써 성급한 해맞이 객들은
곤도라를 타기 위해 긴 줄을 만들고 있다.
보아라 우린 심산의 가슴까지 이렇게 유린했다.
자연의 얼굴을 한 야만
적막과 어둠의 명상에서 조용히 깨어 찬란한 태양의 빛을 받아야 할 계곡엔
난장과 소란이 가득하다.
아무 생명을 만들 수 없는 불모의 흰 슬루프를 위해
몇 백 그루의 주목이 뽑혀 나가고 몇만의 풀벌레들은 짧은 울음을 포기 했을까?
심산의 고요는 사라졌다.
흉포한 인간의 길이 난 그날
계곡에 성채와 인파가 들이 닥친 그날
덕유의 영혼과 대자연의 신비는 그렇게 사라졌다.
갈등이 생긴다.
조용한 날에는 슬루프를 따라 올라가면 신경 쓸 사람이 없는데
오늘 슬루프를 따라 설천봉으로 가자니 중간에 모터스키 요원에게 끌려 내려 올 것 같다.
그러면 밀려드는 인파 때문에 곤도라도 못하고 해맞이도 꽝이다.
혼자 가면서 곤도라를 타기는 처음이다.
TV 다큐멘터리에서 많이 본 풍경이다.
북풍한설 몰아치는 남극에서 강추위를 피하기 위해 옹기종기 모여 있는 펭귄들
뚝 떨어진 기후와 매서운 설천의 바람은 기다리는 40분을 고통스럽게 했다.
아이들까지 몰고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며 새해소망을 빌려고 했던 사람들은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당황스러운 기색이 역력하다.
설천하우스는 그래도 양반이다.
냉기가 히프에서 허리를 따고 뼛속까지 오르는 곤도라를 타고
캄캄한 계곡을 따라 설천봉에 올라 곤도라 밖으로 나가자
설천봉의 숨막히는 냉기와 차가운 바람은 아찔하고 섬뜩하다.
중무장한 백전노장이 이럴진대 아아들과 여자들은 단박에 기가 꺾일 수 밖에 없는
일찍이 경험하기 힘든 그런 강추위.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지도 못하고 조용히 기다려야만 하는 시간을 유린하는
설천의 테러에 모두들 무방비였고 속수무책이었다.
발은 깨어질 듯 시리고 두건위로 나오는 입김은 그 자리에서 두건을 얼어붙게 한다.
인파로 가득한 설천봉 휴게소 안에서 시간 계산을 하고 덕유산에 올랐다.
미리 올라간 사람들은 추위를 견디지 못해 내려온다.
온통 흐린 채 눈보라가 날리는 덕유 산정은 해돋이의 작은 희망마저 매몰차게 닫아 버렸다.
찬바람에 볼이 얼얼하고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몸을 움직이지 않고 고원의 찬 바람에 그대로 노출된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
산허리를 통째로 잘라내 놀이터를 만들어 내는 광기에도
인간은 대자연 앞에서 보잘것없는 존재일 뿐이었다.
아직 어둠이 깨어나지 않은 산정에서 신은 경고하고 있었다.
“여기는 나의 권역이다.”
“대자연에 경배하고 나의 권능에 엎드려 자비를 구하라!”
칼바람이 난무하고
바닥에서 일어난 눈과 하늘에서 내리는 눈이 허공에서 춤춘다.
어지러운 한 해가 갔지만
여전히 혼돈이 지배하는 세상의 모습이다.
잔뜩 흐린 채 동터오는 하늘과 어둠 속에 흩어지는 운무는
태양이 떠오르는 하늘조차 가늠하기 어렵게 한다.
기다리던 사람들이 하나 둘 내려가고
남은 사람들의 체념 가까운 안타까운 기다림 속에서
7시 40분이 넘어서서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 났다.
구름 사이로 잠시 붉은 빛이 내비치다 이내 사라지더니
눈바람이 소용돌이 치는 하늘 위로 붉은 태양이 떠오른다.
기축년 새해 칼바람과 눈보라 위로 힘차게 떠오르는 붉은 태양이
새해의 희망을 말하고 있다.
경제위기 속에서 더 먼저 피폐해진 인간성의 상실
자산의 상실보다 더 뼈아픈 정신의 상실이 삶을 더 공허하게 했던
2008년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세월은 얼마나 빠른지
그 짧은 시간 속에 아버님의 기억은 바람 타고 훨훨 날아 가고
지칠 줄 모르던 나의 체력과 열정은 두려움 속에 동면하고 있다.
의구심은 여전히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다..
“아직 남아 있는 신명 나는 춤을 마저 출 수 있을까?”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내 가슴은 감동의 울림을 느낄 수 있을까?”
“삶에 관하여 신에 관하여...”
그리고 행복에 관하여 듣지 못한 이야기를 마저 들을 수 있을까?”
“위대한 스승으로부터… 자연으로부터 산으로부터”
“이 또한 지나 가리라.”
시간의 역사가 말하는 진리처럼
무자년 쥐의 해가 가고 새로운 희망으로 기축년 새해가 밝아 오듯이
“지난해의 고생을 옛이야기로 할 날이 꼭 오리라”
덕유의 찬란한 빛과 저 세찬바람에
세상의 답답함은 모두 날려 버리자
당연히 나으리라 했던 몸이 여전히 회복되지 않음으로 해서 느껴야 했던
실망과 두려움도 이젠 훌훌 털어 버리자 ..
인생은 고통보다 더 가치 있어야 하는 것
오늘은 빛이 주는 소리를 들은 것 같다.
“모든 것이 잘 될거야 !”
고집 세고 겁 많고 우둔한 소가 아니라
태평성대에는 평화롭고 묵묵하지만 비상시에는 호랑이에게 맞서는 용감한 황소처럼
강세 주식사장을 상징하는 BULL MARKET 처럼
CATTLE 이나 CAPTIAL이나 유사 어원이 듯 모두들 돈 걱정 없는 한 해가 될 수 있기를
나이를 먹어갈수록 더 필요해 지는 건
너그러운 얼굴로 자신을 돌아 보는 것 아닐까?
정갈한 마음의 평화와 고요한 기쁨
스스로를 등불 삼아 자기를 찾아라
진리를 등불 삼아 진리를 구하라
自燈明 自歸依 法燈明 法歸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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