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절경을 돌아 보고 오는 길에 착잡한 마음을 떨칠 수 없었다.
돌아 볼 세상의 아름다움은 아직 너무 많은데 한 번 다친 허리는 작은 무리에도 노파심을 감추려 않는다.
답답한 마음에 거금을 들여 MRI 까지 찍었는데 괜찮다 한다.
허리는 다른 사람 보다 더 튼튼하다고 하니 더 할말이 없다..
그래서 한편으로 안도하면서도 한편으로 답답해 진다.
2주를 푹 쉬었다.
금요일 2008년 5월 30일
덕유산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아직 고산에 머무르는 봄을 생각을 하면 조용히 휴면하던 방랑벽이 고개를 든다.
아침 이슬에 씻기운 청명한 고원의 새벽과 능선을 줄달음치는 연초록의 파도를 만나고 싶었다.
토요일 새벽에 혼자 떠나 향적봉 해돋이를 보고 덕유의 잔등을 타고 남으로 내려가려던 계획은 수포로 돌아 갔다.
두 번이나 모임을 펑크 낸 전과가 있어 금주의 날인 금요일에 주당들과의 자리를 피할 수 없었다.
자제한다고 했는데 결국 다국적 음주로 음풍농월의 풍류를 무기력한 수면으로 맞바꾸어야 했다.
소주로 시작하여 안동소주와 양주를 마시고 그리고 맥주 까지….
토요일
오월의 마지막 토요일은 고등학교 동창회 날이다.
규환이 녀석이 동기회장이 되는 바람에 모임에 꼬박꼬박 나가고 30주년 행사 거금을 웃는 낯으로
쾌척할 수 밖에 도리가 없었다.
잊었던 친구들과 은사님들을 만났다.
“그래 시간이 지나도 만날 사람들은 만나게 되어 있다.”
3학년 담임선생님을 날 기억하고 있었다.
“영욱이 많이 컸네”
처음에 그 말이 어리둥절 했는데 작았던 내 키는 사실 대학 때 많이 컸다.
같은 반 대전 친구들은 동창회가 파하고 2차 모임을 가기로 했는데 어제 전작이 너무 과한 터라 쉬고 싶었다.
서울 친구들을 배웅하고 봉규와 걸어 가는데 녀석은 지리산엘 간단다.
나더러 함께 가잔다.
중산리에서 천왕봉에 올라 장터목산장과 세석산장을 경유하여 거림으로 하산 한단다.
일 자 : 2008년 5월 31일
산행루트 : 중산리-천왕봉-장터목-세석-거림
동 행 : 봉규와 송암산악회
날 씨 : 맑음
소요시간 : 약 8시간 40분
거 리 : 중산리 -법계사 3.4Km
법계사 – 천왕봉 2.0km
천왕봉- 세석 5.1km
세석 – 거림 6.0km
총 16.5km
경유지별 시간
02:46 중산리 매표소
04:29 법계사
05.25 천왕봉 400m아래 해돋이
05:47 천왕봉
06:45 장터목
08:28 촛대봉
08:49 세석산장
10:35 거림 1km위 소
11:00 하산완료
지리산…
1년 반 동안 멀어 있었다.
해마다 떠났던 순례의 종주여정도 말없이 세월에 묻었다.
가슴에 간직했던 추억과 남겨진 의미도 애써 들추어 내지 않았다.
다시 먼 산의 언저리를 돌아 내리면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지리산을 잊었다.
어떻게 지리산을 잊을 수 있었을까?
내가 늘 고향이라 하던 산
어머님의 품이라던 위안과 치유의 그 산
잠시 혼란스러웠다.
회복기의 컨디션으로 올 봄 쯤엔 가리라 생각은 했었는데
다시 악화된 몸으로 그 길을 갈 수 있을까?
다시 천왕봉에서 그 세찬 바람과 마주할 수 있을까?
두려움 보다는 갈망이 더 스멀거리는 밤이다.
다시 설레임의 옛 마음으로 지리산으로 떠났다.
굉음을 내며 달려가는 고속도로에서 봉규의 송암산악회 버스에 올랐다.
천왕봉 가는 길
이 길이 내가 숱하게 올랐던 구도와 순례의 길이다.
그 가슴에 얼굴을 묻고 꺽꺽이며 울기 위해 떠났던 길이다.
함께 가던 일행들을 하나씩 둘씩 어둠 속으로 먼저 보내고
희미한 등불을 걸고 법계사로 간다.
오랜만에 두런두런 세상사는 이야기 좀 하렸더니 봉규는 새처럼 어둠 속을 날아 갔다.
천왕봉 해돋이를 다시 보고 싶었다.
삼대가 덕을 쌓아야 한다는데 늘 마음먹고 떠난 날이면 어김없이 그 붉은 축복과
마주했었다.
오늘 잊혀진 그 감동을 다시 만나고 싶다.
그냥 답답한 것들이 많은 가슴을 풀어 놓고 싶었다.
일출 시간을 잘 몰랐다.
2시 46분에 출발하니 서두르면 해돋이를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법계사를 들러서 늘 세시간 거리에서 기다리던 천왕봉이었다.
너무 힘이 들었다.
요즘의 과음과 체중 증가가 오르는 길을 고통스럽게 했다.
마음을 쉽사리 비워내지 못하면서 고뇌와 상심의 편주에 기대어 밤바다를 유영했다.
새벽이 오는 감동도 느끼지 못했다.
길섶에 피고 있는 철쭉의 화사한 웃음을 우수에 찬 눈으로 바라 보았다.
법계사를 보고도 그냥 지나쳤다.
허리보다도 다리가 무거웠다.
오래지 않아 어두운 동편하늘에 여명이 성호를 긋고
새벽은 놀란 토끼처럼 그렇게 빨리 달려 왔다.
5시 34분
천왕봉 400미터 아래에서 구름을 뚫고 힘차게 솟구친 붉은 태양을 만났다.
다시 대하는 천왕봉의 태양에 가슴에 뜨거워 진다.
바위 위에서 오래도록 지리세상과 그 위에 떠오른 태양을 바라 보았다.
복받치는 설움도 없었고 토해 내고 싶던 울음도 남아 있지 않았다.
표석 위에 서서 그냥 마음이 편안해졌다
떠날 때는 그 품속에서 펑펑 울고 싶을 것 같았다.
막상 지리산에 들면 마음이 편안해 진다.
그 품에서 세상의 독과 화를 모두 쏟아내고 빈 마음으로 돌아 오게 된다.
그래서 지리산을 늘 잊지 못하는지 모른다.
법계사를 지나쳤는데도 3시간 걸렸다.
천왕봉에서 잠시 15분 시차의 아쉬움이 일었지만 그것은 내가 할 수 있었던 최선 이었다.
오늘은 나의 탁월한 선택의 하루였다.
나는 다시 천왕봉에 섰고 잊었던 감동과 전율을 다시 느낄 수 있었다.
다시 돌아 오지 않을 유월 첫날에 지리산 위에서 만난 숙연함이었다.
봉규와 선두 그룹의 자취가 없다.
천왕봉에는 세찬 바람이 불어 간다.
바람결이 그리 차지는 않지만 막힘 없는 산정에서 센 바람을 오래 맞으니 추워 진다.
둘러 보는 지리산 세상은 장엄하다.
푸름이 달려 가는 능선위로 붉은 아침 태양이 쏟아진다.
장터목 가는 길
어두운 길을 오르던 부담감을 떨쳐내고 붉은 햇살이 쏟아 지는 길을 경쾌하게 걸어 내렸다.
그림 같은 초록의 고원도
묵묵한 고사목도 그대로였다.
장터목에서
먼 길을 걸어와서 뿌듯함과 피곤함 속에 혼곤히 잠들던 장터목
간밤의 바람과 이슬을 걸러 지리의 영험한 정기로 길손의 영혼을 정화하던 장터목은
장날처럼 들썩이고 있다.
어느 산님이 다쳤는지 헬기가 프로펠러의 굉음과 모래폭풍으로 산정의 평화를 깨드리고
나는 동행 없는 길손처럼 바람부는 장터목에서 홀로 아침을 먹었다.
세석 가는 길
어둠은 걷힌 후 세상은 영롱한 초록으로 빛나고
눈길은 멀리까지 막힘이 없다.
첩첩이 흘러가는 능선은 세월의 고독과 힘겨움을 견디는 법에 관해 이야기 하고
바람은 살아가는 삶의 방식에 관한 교훈을 들려준다.
산상의 새벽은 불면의 피로를 걷어 가고 지리산의 정기는 지치고 무거운 다리에 새 힘을 불어 넣었다.
가파른 오름 길에서 벗어나 능선을 조망하며 여유롭게 걸어 가는 길에서 잊혀진 추억이 되살아 났다.
거침없이 산야를 종횡 하던 그날이 자꾸 아쉬워진다.
산릉을 지나는 바람처럼
아무런 흔적과 미련이 남기지 않는 삶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촛대바위에서 오래 머물렀다.
그 동안 오르지 않았던 좌측편 바위 지대에 올라 초록의 빛 가운데 앉아 있는 세석산장과 지리세상을 내려다 보았다.
세석고원
고원의 봄은 아직 지나지 않았다.
고원은 연초록 봄을 마중하고 있다.
세석은 초록에 묻혀 막 피어나는 철쭉의 웃음으로 푸근하고 편안했다.
아는 이 하나도 없는 세석
마치 혼자 온 여행길처럼 호젓함이 어쩌면 더 좋다.
거림하산 길
처음 가는 길이다.
풍경 없는 돌길에 거친 길을 오랫동안 내려가야 했다.
아래로 내려가면서 계곡은 점차 장대해지고 물소리 높게 울린다.
길에서 멀리 떨어진 계곡으로 내려 갔다.
연어처럼 계곡을 따라 올라야 계곡의 아름다움을 가슴에 담을 수 있는데…
늘 비경은 인간의 길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혼자 절경의 한가운데 남겨진 기쁨을 누리며 기꺼이 탕탕한 푸른 물속으로 뛰어 들었다.
바램이었다.
영험한 지리의 정기로 씻은 듯 허리가 나아
새롭게 만나는 아름다운 세상의 감동을 돌려 받기를 염원하는 마음
탕탕한 계곡물은 엄청나게 차가워 채 3분을 견딜 수 없었다.
거림골에서
의식처럼 몸을 씻고 내려가는 길은 날아갈 것 같았다.
송암산악회 60세가 넘는 분과 동행을 했다.
서울 북한산만 타다가 지리산에 두 번째 오는데 지리산이 이렇게 멋진 산인지
몰랐다 한다.
서울에서 오랜 산과의 인연으로 늦은 나이에 백두대간을 시작 했는데 잘 할 수 있을지
걱정스럽다고 했다.
좀더 이른 나이에 멋진 산을 주유하는 기쁨을 누렸으면 좋았을 걸 그랬다.
글을 쓰시는 분이라 했는데 지리산에 감동으로 글의 영감이 살아난다고 했다.
올라 올 때마다 시를 한편 씩 쓴다는데 그럴 만도 하다.
지리산은 늘 쌓인 무언가를 내어 놓게 하고 속세의 번잡과 시름을 풀어 놓게 했다.
그냥 바라보는 것 만으로 편안해지고 그 길을 걷는 것 만으로 현자의 법열을
느끼게 한다.
그 위에서 가끔은 살아가면서 정말 소중한 것들을 깨우치곤 한다.
밥집 앞에서 봉규가 하산하는 송암 회원들의 교통정리를 하고 있다.
두 시간 쯤 일찍 내려 왔단다.
꼬맹이의 전투력이 대단하다.
백두대간에 정맥에 지맥에
그것도 모자라 다시 백두대간을 시작한다 하니 가히 입신의 경지가 아니랴?
배고파서 비빔밥을 순식간에 비우고 봉규와 냉막걸리 한잔을 했다.
아직 하산하지 못한 산님들이 많아서 거림계곡의 물가 나무아래 앉아서 나른하고
편안한 날의 오후를 보냈다.
버스에 올라서는 어떻게 잠들었는지 무주까지 아무런 기억도 남아 있지 않았다.
봉규는 내 회비 까지 모두 부담하고도 자리가 없어 통로의 보조의자에 기대어
불편한 여행을 감수하고 난 친구란 이름으로 편안하게 여행길을 마무리 했다.
허리의 부담도 생각보다 크게 느껴지지 않았던 가슴 뿌듯한 여행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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