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으로 갔다.
마눌과 둘이
긴 겨울의 장막을 걷고 신생하는 삶의 기쁨이 넘치는 바다.
파도에 실려 수런거리는 봄의 소리를 듣고 싶었다.
은둔의 갈색을 벗고 푸른 빛으로 대지를 물들여 가는 초원의 빛과
해사한 노랑과 연분홍으로 수줍게 피어 오를 어느 섬의 봄을 만나고 싶었다.
새벽 4시 45분에 새벽을 가르며 대전을 떠난다.
그렇게 서둘렀는데도 아침밥을 먹지도 못하고 배에 오르고 말았다.
우린 새벽 같이 어둠을 가르고 통영으로 내려왔는데
선실은 이미 등산복 차림의 사람들로 입추의 여지가 없다.
봄을 사람들을 부지런하게 한다.
봄이다.
바람의 날은 부드러워지고 바닷내음에는 봄향기가 실려 있다.
방향을 분간할 수 없는데 수평선의 섬 위로 태양이 떠오른다.
큰 배가 지나고
작은 배는 시원하게 푸른 물살을 가른다.
아! 바다란 가슴을 후련하게 한다.
겨우내 내가 바라보았던 풍경이라고는 우울한 경제에 그늘진 회색도시
답답하고 슬퍼하는 사람들
그리고 잎을 모두 떨어뜨린 채 칼 바람에 소리내어 울던 나무와
눈덮힌 황량한 골짜기
그 잿빛 둥지에서 다람쥐처럼 일상을 반복하던 나
메말라 가는 가슴에 붉은 피가 돌고
푸른 빛 역마살이 기지개를 켠다.
마치 얼어 붙은 땅을 밀고 새싹이 돋아 오르 듯
마음이 먼저 봄을 마중하러 떠날 때 임을 알았다.
섬이란 늘 교통이 불편해서
여객선이 들어와야 버스가 운행되는데
포구에서 아침을 먹을 시간은 고사하고 충무김밥을 사서 챙길 시간도 없었다.
통영의 굴해장국으로 시원하게 시작할 하루를 염두에 두었는데
시간 계산이 어긋나서 우린 바람 부는 선상에 쪼그리고 앉아 컵라면과 라면을 먹는다.
게다가 부리나케 내려 김밥을 사고 버스에 올라야 산을 탈 수 있다.
포구가 낯익은 섬에 도착했다.
2년 전 어느 여름에 이 섬에 올라 해풍을 맞은 적이 있다.
섬을 한 바퀴 돌며 푸른 바다를 바라본 것 만으로 섬이 고요한 평화를
내 마음으로 실어냈다.
섬에서 산객들이 앞다퉈 오르는 우린 버스에 오르지 못했다.
과일 말고 아무런 준비가 없이 여정에 오를 수가 없었다.
콩나물 시루 같은 버스를 떠나 보내고 우리는 둥그러니 부두에 남겨졌다.
단체 여행객 중 몇 분 때문에 버스가 다시 오긴 한다는데 산을 오르려는 사람은
우리 말고 없다.
산행 들머리 까지 이동이 걱정이다.
점심식사는 내려와서 하기로 하고 마트에서 빵을 몇 개 사서 넣었다.
농협의 화장실을 다녀오고 천천히 부두로 가니 섬 일주 관광을 하시려는 몇 분이
부두에 앉아 있다.
잠시 후 산객을 내려 놓은 버스가 다시 돌아 왔다.
그래서 가끔은 바람 불어 재수 좋은 날이 있다.
우리는 하마트먼 욕지도로 가는 첫 배의 물 꼬리를 허망하게 바라볼 뻔 했고
아침을 준비하지 못했던 탓에 아쉽게도 떠나는 섬마을 버스에 손을 흔들어야 했다.
그런데 없다던 버스가 몇몇 단체 산객 중 산을 못 타는 사람들을 위해 다시
돌아와 준 덕분에 섬을 한 바퀴 드라이브하는 행운을 누렸다.
버스는 여유롭게 우리가 상상하는 섬의 모습을 구체화하고
그 아름다움을 파노라마처럼 엮어 주었다.
우린 출발부터 늦어지는 바람에 2000원으로 40분간의 섬 일주 관광을 여유롭게
즐기는 선물을 받았다.
버스로 섬을 둥둥 떠가며 바라보는 마을과 바다의 풍경은 마음을 들뜨게 했다.
나야 재작년에 차로 오르거니 내리거니 하면서 경치 좋은 곳에서는 내려 걷기도 했지만
마눌은 섬 일주 여행이 처음이다.
이렇게 화창한 봄날 둘이 함께 섬을 훨훨 날고 있으니 세상 부러운 게 그 무엇이랴.
버스가 좀더 천천히 달렸으면 싶었다.
아저씨는 빨리 의무에서 벗어나려 함인지 구불구불한 산길을 바람처럼 달려가면서
멋진 해안이 풍광에 탄성을 올리는 우리를 아랑곳 하지 않는다.
섬처럼 말없고 무뚝뚝한 아저씨는 묻는 말에만 간신히 대답을 하신다.
우리야 산을 오르며 다시 바다와 포구를 내려다 보겠지만 차를 가져 오지 않아
버스로 관광 하려는 사람들은 한 시간이 채 안되어 일주가 끝나면 한적한 이 섬에서
무얼할까?
이렇게 좋은 날 포구에서 바다와 뭍으로 오르는 봄을 바라보면서 술이나 한 잔 치고
있을텐가?
산행일 : 2008년 3월 28일
날 씨 : 맑고 화창한 봄날
산행지 : 욕지도 종주
동 행 : 마눌과 마티즈 몰고…
경유지별 시간
07:50: 통영발 욕지도 카페리호 승선
08:35 : 욕지도 도착
10:04 : 바다가 보이는 능선 망대봉 800m 전방
10:30 : 야포 1.5KM 지점
11:00 : 노적마을 길
12:06 : 천왕봉 등산로 들머리
12:40 : 능선 정상 대기봉 200M
12:50 : 대기봉
13:10 : 천왕봉
13:22 : 태고사
13:50: 마을
14:00: 용천사
14;10: 선착장
욕지도 산행
아저씨는 야포 산행 들머리에 우리 둘을 내려 주셨다.
먼저 오른 산객들은 한시간 만큼 앞서 가고 있겠다.
섬에서 우리 둘만이 호젓하게 산길을 걷는다.
들풀들은 길섶에 돋아 나고
진달래는 활짝 피었다.
가시 많은 두릅도 벌써 새순을 올렸는데 한 무리의 산객들이 먼저 지나 가고도
아직 순이 달린 두릅이 여기 저기 남아 있다.
우린 보이는 대로 두릅을 따서 배낭에 넣었다.
우리가 누리는 행복은 어쩌면 적은 것과 작은 것에 있는지 모른다.
작은 것과 적은 곳 속에 삶의 향기와 아름다움이 숨어 있다.
덜 갖고도 행복할 수 있는 인생을 비밀을 알고 있으니 삶이 아니 즐거우랴?.
새벽의 창을 열고 작은 차를 몰아
남해의 어느 섬에서 흰파도가 바위에 부딪치는 모습을 바라보고
벌써 이 꽃 저 꽃으로 포르락 거리며 경쾌한 나비의 율동을 감상한다.
봄의 마술이다.
한 입 베어 문 빵이 도심의 스카이라운지에서 화려한 네온싸인을 내려다보며
즐기는 값비싼 식사보다 더 달고 감미로움은….
봄에 만나는 어느 섬이나 다 그렇듯이
가슴이 후련하고 머리가 맑고 깨끗해진다.
욕지도의 등산로는 거칠지 않고 부드럽다.
등산로는 산길로 이어지다가 도로와 만나 바다로 난 길을 걷기고 하고
밭이랑을 따라 걷다가 랄 아래로 내려서서는 섰다가 올라가기도 하는
여유롭고 아름다운 길이다.
이랑을 뒤집어 놓은 황토색과 새 생명의 푸른 빛 위로 햇살이 나른하고
봄은 잔잔한 파도를 타고 어깨춤을 덩실거린다.
아름다운 바다와 섬이 그려낸 그림에 봄이 생명의 활기를 불어 넣었다.
그 길을 걸어 가는 것 만으로도 바다는 가슴을 적시고 봄의 기쁨은 푸른
이랑을 따라 내 몸을 타고 오른다.
아직 맑고 때묻지 않은 섬에서
아름답고 싱그러운 날을 선물로 받은 오늘은 소중한 날이다.
발걸음 가볍게 해안 길을 걷고 마음은 바다 위를 훨훨 날아 다녔다.
섬에서는 늘 생각이 단순해 진다.
우리가 기억하는 아름다운 것들
우리가 사랑하는 것들
우리가 꿈꾸는 것들
그런 상념들이 파도처럼 조용히 밀려왔다 밀려 간다.
오랫동안 되풀이 된
어느 섬에서 봄을 맞이하는 나만의 의식은 어쩌면
연어나 철새의 프로그램된 회귀본능과 같은 것 일지 모른다.
어쨌든 그건 봄을 보내는 가장 나다운 방식임에 틀림없다.
누구에게나 좋아하는 일이 있듯이
봄이 오르는 길을 따라 이렇게 걸어 가는 것이
이렇게 즐거운 걸 보면
그 단조로운 유희가 내겐 가치 있고 행복한 일임에 틀림없다.
봄이 지나는 섬에 서면
마음이 너그러워 진다.
우리가 충혈된 두 눈으로 쫓았던 세상의 일들이 무상해 지고
이젠 돌아보아야 할 것들이 뚜렷해진다.
더 기다릴 수 있고
흔쾌히 포기할 수 있고
잃는 것에 대한 상심과 얻고자 하는 것의 집착도 버릴 수 있을 것 같다.
봄이 오르는 섬을 마눌과 둘이 걸어갈 수 있는 것 만으로
난 살아가는 날의 소박한 기쁨을 노래한다.
봄이 오른 섬의 멋진 마술이다.
우린 섬에서 무얼 만났나?
무뚝뚝한 기사 아저씨를 만났고
이름 모를 야생화의 미소와 폴폴 거리는 나비의 춤을 보았다.
정말 풍경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던 소를 만났고
소를 줄 푸른 보리를 베느라 바쁜 섬 아저씨를 만났다.
대기봉을 오르는 내내 길가에 흐드러지게 핀 진달래는 수줍은 듯 해사하게 웃고
염소 똥 냄새는 산길을 흔든다.
능선 위에 서서 바라보는 다도해는 아름답다.
우리가 포구를 들어가며 바라보는 섬의 모습과
산 위에서 내려다 보는 섬의 모습이 다르다.
가까이 가면 우리가 살아가는 진솔한 삶의 모습이 보이고
멀리서 바라보면 우리가 찾고자 하는 실락원이 거기 있다.
어쩌랴 !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고픈 욕심나는 곳들이지만
머물고자 하는 마음보다 늘 떠나고자 하는 열망이 더 커서
내가 머물 꿈의 정원은 한참 더 세월이 지난 후라야 할 것 같다.
대기봉은 능선에서 좌측으로 200미터 정도 가야 한다.
커다란 바위 벼랑에 소나무가 서 있고
해안의 절경이 내려다 보인다.
내려다 보는 섬의 모습이 아름다운 곳이다.
우리 말고는 아무도 없는데
바위절벽에서는 바람이 제법 거세게 불고
태양은 어둠 속에 숨어 버려
분위기가 장중해 진다.
우리가 걸어 왔던 길이 아래로 뚜렷이 보이고
항공사진처럼 섬의 윤곽이 뚜렷하고 오밀조밀 하다.
세상은 거리를 두고 바라보면 아름다워 진다.
우리 사는 곳에서 한 발자욱 더 멀리 나가면
새로운 아름다운 풍경들을 바라볼 수 있고
잊고 살았던 소중한 것들을 다시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봄에 떠나는 여행은 스스로를 찾아 가는 값진 여행길이 된다.
섬을 종주하면서 섬의 모양이 그려진다.
자연이 그린 그림 위에
4시간 반 쯤이면 돌아볼 수 있는 섬에는 한나절 봄이 졸고
긴 겨울을 벗어 던진 춘정이 망아지처럼 달뜬다.
마을은 온통 꽃 천지다.
동백꽃,유채꽃 백일홍 그리고 목련 까지
바다를 바라보며 내려 가는 길에는 오래된 집들이 올망졸망 서 있고
있으나 마나 한 담 뒤로 이름 모를 수 많은 꽃 들이 웃고 있다.
우린 봄이 머무는 섬에서 한바탕 신명난 나비 춤을 추고 내려 왔다.
눈부신 바다와 푸른 하늘은 마음껏 가슴에 들이고
싱싱한 회로 우리의 봄 여행을 자축하면서
잘 접혀진 추억을 남긴 채 그렇게 섬을 떠났다.
아직 꽃샘 추위가 기승을 보이는 날에 따뜻하고 포근한 봄날을 만났고
계절에 들뜬 섬의 차분한 기쁨을 만났다.
우린 멀리 떨어진 섬에서 봄이 주는 선물을 듬뿍 받고 일상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