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4월 20일
비가 추실거리는 날
이승헌 아버님 부고
개고기 먹었던 일요일 까정 아무 이야기 없더니 갑자기 돌아 가셨다.
회원들과 옥천 장례식장으로 갔다.
몇몇은 오전에 다녀가고 4명만 함께였다.
그 옛날 빈소는 12시 넘게 까지 지키고 장지까지 동행하는 이야기도 나왔는데
그간 세상은 많이 변했고 전인회는 힘이 많이 빠졌다.
그래도 여긴 시골이라 한 켠에서 고스톱을 치는 사람들이 있다.
송사장님도 바쁘다 하고
미안하긴 하지만 우린 9시 반쯤 되어 나왔다.
세월은 자꾸 살벌하게 바뀌고
합리화의 기치아래 사람들은 이기적이 되고
미풍양속은 사라져 간다.
요즘은 으례 장례식장 가면 인사치레만 하고 나오고
우린 사라져 가는 것들을 개탄하면서도
살아 있는 자 또한 바쁘니 그게 편하다고 생각한다.
망인의 저승 가는 길을 옆을 뜬 눈으로 밝혀주는 우리의 문화가 사라진 것처럼
온라인 부조가 보편화될 날도 멀지 않았다.
2009년 4월 22일
천안 갔다.
위원장 만나러
물밑교섭이라고나 할까?
그래도 봄날 일 안하고 놀러가는 기분 좋다.
천안 이부장과 함께 일식집에서 만나 점심하고
약간 숨죽여 오십세주로 발동걸고
2차 지리를 까페로 옮겨 이러저러 이야기 나무며 산사춘에 맥주에
8시까지 꽤 마시다.
동료와 함께 즐기는 술자리로 생각해야지
그러다 보니 마시는 족족 죄 살로 가는 모양이다.
안 그러면 스트레스 오히려 쌓이고 제명에 죽지 못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취한 듯 하던 이부장 다시 살아나고
다시 한량끼 발동한다.
오랜만에 왔는데 노래방도 가고 한잔 제대로 하자고
어둠도 깔리고 분위기도 좋으니 자구 내일 가라는데 극구 사양하구 돌아오다.
“오늘은 수요일인데 내일 일은 안 해도 되남요?”
오며 가며 다비드 르 브르통의 “걷기예찬” 읽다.
2009년 4월 24일 (금)
또 술자리
여긴 원시인들의 모임이다.
우총회 모임 동방명주에서 7시 9명 참석 / 권차장 유사
양장피외 몇가지 요리와 고량주 소주
그리고 2차 1000cc 맥주 새우 ,햄 등의 안주
3차 천복순대빕에서 순대 두 사라 / 권차장과 신사장 강추
엄청 먹었다.
이렇게 먹고 다니면서 살 빼기를 바라니 당초 말이 안 되는 소리다.
접입가경
다음 번 강이사 유사 때는 상신리에서 1박 2일로 개한마리 잡기로 전격 결정했다.
이 모임은 나이도 많은 사람들이 2~3차를 불사하는 완죤 90년대 먹자판이다.
순배가 돌아오진 않는 잔은 일부러 돌리지 않아 다행히 술은 자제한 편이지만
토탈 섭취한 칼로리 계산불가
앉아 있어도 그냥 살찌는 소리 들린다.
집에 돌아 가니 12시다
2009년 4월 25일 (토)
비가 오고 피할 수 없는 어제의 술자리 때문에
방랑을 유보 할 수 밖에 없었다.
우총회와 전일 늦게 까지 술마신 피로를 풀 겸 사우나에 다녀왔다.
체중은 임계치를 넘어서고 있다.
79.5kg
두 번의 술자리의 영향은 체중 1.5kg 인상의 즉각적인 결과로 나타났다.
술도 술이지만 술과 함께 안주를 많이 먹는 나의 음주 습관도 문제이다.
이발소 아저씨가 지난 번 모친상을 당하시는 바람에
이발소는 초만원
예약하여 어렵게 이발하고 아버님 면회가다.
주은 병원을 가는 길은 늘 우울하다.
잘 드시는 삼계탕과 죽을 쑤어서 아버님을 뵈러 다녀왔다.
아버님은 이젠 내게도 존대말을 하신다.
어머니는 몰라볼 때도 마지막 까지 난 알아봐 주시더니
지난 번 면회 때부터 존대말을 하시기 시작하셨다.
그래도 중간에 이러저런 말을 걸면 조금 기억이 살아 나시는 듯
반말로 돌아오시더니
이번에 처음부터 끝까지 존대말을 쓰신다.
복지과장이 날 보며 이사람 누구냐고 물으니 망설이듯 ‘우리아들’
이라고 하시는데 주야장창 존대말을 쓰던 은비엄마한테도
‘딸’이라 하신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기억력 마저 바람에 날린다.
드시는 건 여전히 잘드신다.
간간히 정신이 돌아오면 입버릇처럼 하시던 “이래 살아 뭐하나?
니들 고생 안 시키려면 내가 빨리 죽어야지” 하시는 말씀도 이제 안 하신다.
인간의 존엄성이 허물어 지는
당신의 삶을 바라보면
가슴 한 켠에 쾡한 바람이 인다.
어머님이 늘 찾으시는 부처님께서 그냥 이제 그만 데려가셨으면 싶다.
아버지를 보면 삶이 두려워진다.
열심히 살았던 시절은 온데간데 없다.
당신에게서는 모든 것이 사라졌다.
아내와 아들과
함께 웃고 떠들던 친구들 모두가…
존재의 근원도 모른 채
살아가는 이유도 모른 채 ….
박탈된 자유조차 아무런 의미가 없다.
바람에 흩어져간 그 기억들처럼
아버지의 하루하루는 모래시계처럼
메마르게 흘러내린다.
내가 기억하는 모든 것이 사라진다면?
내가 걸었던 고원의 아름다운 풍경과 깨달음
내가 기쁨을 위해 찾았던 모든 것들
그리고 훗날을 위해 쌓아 놓은 그 수많은 추억들
내가 기억하려 노력했던 많은 것들이
물거품처럼 사라진다면
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살아 가야 한다면
삶이란 얼마나 황당하고 허망한 것인가?
4월 26일 (일요일)
날씨는 좋고 컨디션 개털
어제 머리 깎으면서 고장난 바리캉 소음에 노출된 것이 치명적
이런 날은 훌쩍 떠나서 기분을 푸는 것이 상책이다.
마눌은 태현이 시험 때문에 동행 유보
과일 두개 땅콩한 봉 , 물 한 병 , 그리고 책 한 권
봄빛 속으로 떠난다.
오늘은 대청호반 비밀의 정원으로 간다.
비가 봄 오긴 했어도 대청호는 목마르다.
오래 잠겨 있었던 산허리 속살이 허옇게 드러나고
그 옛날 베어져 물 속에 잠겼던 뿌리들은 그 상처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그 곳에서는 늘 마음이 정돈되고 가라 앉았다.
도로변에서 가까운 곳에도 아름다운 곳이 있다.
몇 번인가 떠나지 못한 어느 날
혼자 호반을 이곳 저곳을 배회하면서 만난 풍경들이다.
풍경을 따라 왔음인지 큰 카메라를 든 아저씨 물가로 내려와 열심히 셔터를 누른다.
나의 평화는 이방인과 중장기 소음으로 깨어졌다.
묘지를 조성하는지 불도저 굉음과 아이들의 모습에 슬며시 차를 타고
나의 비밀의 정원으로 떠난다
중간 기착지로 내려섰다.
아마도 묘지조성 때문이겠지만 길 없던 산등성이에 나무를 죄 베어 길을 만들었다.
나의 비밀의 영지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가뭄으로 인해 물이 많이 빠져서 호안을 따라 비밀의 정원으로 갈 수 있다.
이상기온과 물부족이 계속되어 물이 길을 감추어주지 않으면
어쩌면 이 새로운 길은 계속 유지되기 어려울 지도 모른다.
원치 않은 새로운 길로 인하여 내 비밀의 정원은 사라질지 모른다.
사월의 태양은 나른하다.
태양은 구름 안팎을 드나들어 호수의 명암을 조절하고
바람은 서늘히 불어 온다.
버드나무 나무 아래 앉아 두 시간 쯤 읽던 책을 끝냈다.
늘 그러하듯이 책이 졸음을 불러내기도 하여 30분 쯤 졸았다.
찰랑거리는 물소리 이외의 모든 문명의 소리가 사라진 곳이다.
침묵과 고요는 사색과 명상을 불러내고
그 느릿느릿한 시간의 마음의 평화와 기쁨을 가져다 준다.
길게 드러난 모래톱을 따라 가다 보니
짐승 발자국 옆에 사람의 발자국이 나 있다.
늘 새나 짐승발자욱 밖에 없는 곳인데
내 비밀의 정원에는 누군가 침입자가 있었다
그 표식을 모두 떼어냈다.
비밀이 정원으로 인도하는 듯한 징표는 모두 지워 버렸다.
리본도
나뭇가지에 매 놓은 표식들도.
훗날 모험가와 약탈자들이 다시 들이닥치겠지만
내가 할 방도는 다한 셈이다.
이젠 비가 비밀의 정원으로 난 길을 막아주는 일만 남았다.
백인에게 유린되는 땅들을 고통스럽게 바라보던 인디언의 마음이 그랬을까?
나를 위해 피어나는 꽃을 바라보며
적막 속에서 세상의 시름을 잊을 수 있는 나만의 영토가 사라짐을 슬픈 일이다.
바람소리와 찰랑이는 물소리만 있는 곳
혼자만의 황홀한 고독을 느낄 수 있는 곳이 사라짐은
조용히 나를 돌아 보고
내 마음에 쌓인 삶의 찌거기 같은 걸 비어낼 곳이
하나 사라진다는 거
나만의 사색과 명상의 공간이 사라진다는 거
나의 영지를 돌아 나와 어머님 댁에 들렸다.
모처럼 내려온 여동생과 조카와 함께 저녁식사를 했다.
여동생은 천태산에 다녀 왔다고 했다.
8시 10분 열차를 예매한 동생을 역 까지 바래다 주고 돌아 왔다.
책을 읽으며 나와 비슷한 동류의 인간들을 만난다.
류시화가 그랬고
피에르 상소가 그랬다.
걷기예찬은 내가 숱한 날을 걸으며 느꼈던 것들을 감상을 기록해 놓은 것과 같았다.
그것은 논리와 이론을 바탕으로 걷기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이 가져다 주는 기쁨의
실체를 섬세하고 세밀하게 묘사한다.
나는 무릎을 쳐야 했다.
그럴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한 것들에 대하여 핵심을 파고들어 예리한 직관과 관찰력으로 묘사한 그의 글쓰기에
사소한 것들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는 그의 상상력은 대단하다.
별다른 호기심이 발동할 수 없는 주제에 관한 책임에도 걷기에 우호적이 많은 사람들의 서술을 방대한 책에서 찾아내어 증거로 제시함으로써 읽어 볼만한 가치 있는 책으로 만들었다.
언어의 마술처럼 풀어내는 그의 표현력은 기발하고 재기발랄하여 걷기를 건강차원을 넘어서 세상과 교류하며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으로 격상시킨다.
내 삶의 방식이 전혀 특이할 것도 없었고 내가 걷기와 산행을 통해 느끼는 것들이 정신적 안정과 기쁨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많은 사람들이 함께 공감하고 있음을 확인하니 뿌듯하다.
내 삶에서 그것들이 통해 누려왔던 기쁨과 가치들을 되돌아 보니 모든 것이 뚜렷해지고 한편으론 피할 수 없이 닥쳐 온 상실이 아쉬워진다.
서언에서 그는 갈파한다.
“걷기는 세계를 느끼는 관능에로의 초대다.
걷는다는 것은 세계를 온전하게 경험하는 것이다.
이때 경험의 주도권은 인간에게 돌아온다.
우리는 목적 없이 그냥 걷는다.
지나가는 시간을 음미하고 존재를 에돌아 가서 길의 종착역에 더 확실하게 이르기 위하여 걷는다.
전에 알지 못했던 장소들과 얼굴들을 발견하고 몸을 통해서 무궁무진한 감각과 관능의 세계에 대한 지식을 확대하기 위하여 걷는다.
아니 길이 거기 있기에 걷는다.
걷기는 시간과 공간을 새로운 환희로 바꾸어 놓는 고즈녘한 방법이다.
걷는 사람은 시간의 부자다.
그에게는 한가로이 어떤 마을을 찾아 들어가 휘휘 둘러보며 구경하고 호수를 한 바퀴 돌고 강을 따라 걷고 야산을 오르고 숲을 통과하고 짐승들이 지나는 길목을 지키거나 혹은 어느 떡갈나무 아래서 낮잠을 즐길 수 있는 여유가 있는 것이다.
그는 자기 시간의 하나 뿐인 주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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