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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글(펌)

황희 정승의 못말리는 아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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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喜, 1363~1452)

조선시대 대표적인 재상,하면 누구나 황희(黃喜) 정승을 떠올리게 됩니다. 태종과 세종 시대 24년간 재상을 지냈으며 그 중 18년을 영의정의 자리에 있었던 황희는 세종을 보필해 조선이 발전할 토대를 만들어낸 장본인이었지요.

분명 능력있는 정치인이자 관료였음에는 틀림없지만, 황희 정승을 '청백리의 표상'으로 보는 것은 후대의 포장 덕분입니다. 권력의 중심에 있었던 만큼 다양한 비리 사건으로 탄핵을 받기도 했었지요.

조선왕조실록에는 그가 뇌물수수, 관직알선으로 탄핵을 받았던 기록이 여러 건 남겨져 있습니다.

세종실록에는 "황희는 부모로부터 물려 받은 재산도 별로 없고, 장인으로부터도 노비 셋을 물려 받았을 뿐이데, 집 안팎에 부리는 노비가 많은 것은 매관매직(賣官買職)하고, 형옥(刑獄)을 팔아서 마련한 것이다."라는 기록이 남아있을 정도였는데요.

유명한 사건으로는 사위의 살인사건을 은폐, 조작하려 시도했다가 파직을 당했던 것(금방 복귀되었습니다만)과 친구였던 박포(제2차 왕자의 난의 주모자로 몰려 참형당함)의 아내와 간통한 사실이 적발된 것 등이 있었지요.

그럼에도 황희의 정치적 수완과 포용력을 높이 산 세종대왕은 매번 서슬 퍼런 사헌부에게서 황희를 구출(?)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도덕적인 흠결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동반자로서의 능력을 중시한 실용적인 판단이었지요. 황희 스스로도 워낙 처세에 능하여 비리 사건에도 불구하고 일 잘하는 관료로서의 이미지를 잃지 않았고요.

경기도 파주 황희 선생의 묘

이런 황희에게도 생각대로 되지 않아 속앓이를 해야 했던 문제가 있었으니, 바로 말썽꾼 아들들이었습니다.

병진년(1436년)에 내탕고의 금잔과 광평대군의 금띠를 잃어버렸으나 훔친 자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였는데, 이때(1440년)에 이르러 또 동궁이 쓰던 이엄(일종의 방한구)을 잃어버렸다. 중생(仲生)이 한 짓으로 의심하여 삼군진무를 시켜 그 집을 수색하게 하매, 이엄을 잠자리 속에서 얻게 되어 의금부에 내려 추국하였더니, 그전에 잃어버렸던 금잔과 금띠도 모두 중생이 훔친 것으로 자복하였다.   -《조선왕조실록》<세종실록> 22년(1440) 10월 12일 기록 중

위 글에 등장하는 황중생(黃仲生)은 황희가 첩으로 삼은 내섬시(內贍寺)의 여종에게서 얻은 아들이었습니다.

서얼인데다 문무에 모두 소질이 없었던 중생이었지만, 아버지의 '백' 덕분에 동궁전 사환으로 취직할 수 있었지요. 머지않아 왕위에 오를 동궁의 시중을 드는 자리라 사환 중에서도 요직으로 꼽히는 자리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버지 후광으로 어렵게 얻은 자리에서 중생이가 한 짓은 도둑질. 그것도 동궁전 내탕고에서 보관하던 금잔, 금띠, 동궁의 물품 등 왕실의 재산을 빼돌리는 엄청난 범죄를 저지릅니다. 

의금부의 조사로 모든 혐의가 사실로 드러났는데, 중생의 집에서 나온 금잔이 절반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나머지 절반을 어찌했느냐 문초하자, 중생은 '적형(嫡兄) 황보신(黃保身)에게 주었다'고 털어놓습니다.

 황희 정승의 영정

바로 여기서 문제가 커지기 시작했는데요. 보신은 황희의 본처 소생 3형제 중 둘째였습니다.

중생이까지는 서자여서 대충 넘어갈 수 있다 해도, 적자까지 왕실 재산 도둑질에 관여했다는 것이 드러나면, 그야말로 가문에 먹칠을 하는 셈이었지요. 더군다나 이복동생이 빼돌린 금붙이를 나눠가진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황보신 역시 떳떳한 생활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습니다.

보신은 당연히 '그런 적 없노라' 딱 잡아떼었으나, 중생과 의금부에서 실랑이를 하던 과정에서 그만 이전에 보신이 저지른 다른 비리 사건들까지 줄줄이 발각됩니다. 보신이 의금부 지사로 있을 때 첩에게 주려고 상습적으로 관의 재산을 빼돌린 것이 드러난 것이지요.

워낙에 죄상이 명확했던 덕에 황희의 아들일지라도 벌을 면치는 못했습니다. 물론 다른 사람이었다면 유배를 당했을 중죄였건만 보신은 장 몇대 맞고 보석금 좀 내는 것에 그쳤습니다.

어쨌거나 사건이 여기서 마무리되는가 했더니, 이번에는 적자 중 첫째, 치신(致身)이가 치워 나가는 밥상에 한술 걸치고 듭니다.

보신이 죄를 짓고 파직된 탓에 연봉으로 받았던 과전을 반납해야 했는데요, 당시 호조 참판의 자리에 있던 형 치신이 동생의 위치 좋은 땅 대신 자기 소유의 거친 땅을 대신 반납합니다.

즉, 나라에서 내린 땅을 간 크게도 멋대로 바꿔치기 해버린 것이지요. 중죄를 지은 동생이 아버지 덕분에 겨우 풀려났건만, 눈치를 보고 몸을 낮추기 보다는 이 때를 노려 또 한 건의 사기를 치려 했다니, 어이없음을 넘어 감탄이 나올 배포(?)랄까요.

결국 어찌해서건 황희의 이름을 세워주려 했던 세종도 포기하고, 황치신을 파직시켰다고 합니다.

분노한 황희는 형제들이 줄줄이 벌을 받게 된 원인을 제공한 중생을 "이제 내 아들이 아니다"라고 내쳤고, 이후 중생은 황씨 성을 쓰지 못해 '조중생'으로 이름을 바꾸게 됩니다. 반면, 적자인 보신의 경우에는 이후 황희가 직접 문종에게 청해 직첩을 돌려받았습니다.

황수신의 글씨 <근묵>

한편, 위 사건에는 관련이 없었던 셋째 황수신(黃守身)은 이후 영의정에 올라  2대에 걸쳐 최고의 관료 자리를 지키는 영광을 누렸으나(황희의 세 아들은 모두 과거가 아닌 음서로 관직에 진출), 그 역시 형들을 닮은 구석(?)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친분이 있는 임원준을 의서찬집관(醫書撰集官)으로 부정 발탁했다가 삭직당하는가 하면, 아산의 전토를 멋대로 농장으로 만들었다가 여러 차례 탄핵당한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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