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까페에 들렀더니 예천으로 여행 간다 하네요…
한번 합류할 기회를 보고 있었는데 더 이상 좋은 기회가 없을 것 같습니다.
문화답사에 산행은 3시간 30분
그 동네는 내가 잘 아는데 웬만한 높이의 산이란 없으니 산행은 산보 수준일테구요
뭐 그렇게 무리한 수준은 아니었지만 솔직히 널널하지 만은 않았지요…
그 동안 전투력이 많이 약화되어 있구
문화답사와 야산산보라 믿고 마음이 해이해진 상태에서 마주한 무더운 날의 산길이
호락호락 하지만은 않았습니다.
석송령(石松靈)
그렇게 멋진 소나무는 처음 보았습니다.
거기가 내 고향에서 얼마 떨어진 곳도 아닌데 600년을 한결 같이 그 자리를 지키고 선
그 나무를 천명을 알 나이 쯤에서야 만났습니다.
수령(首領)입니다.
품어져 나오는 대단한 카리스마 그리고 위엄과 기품
600년 긴 세월 세상의 변화와 질곡을 지켜 온 유구함과 만나는 시간은 경건함과 숙연함이
느껴집니다.
600년 전 풍기지방에 큰 홍수가 졌을 때 석관천을 따라 떠낼 오던 것을 지나가던 과객이
건져 심었다고 하구요.
그 후 1930년 경 이 마을에 살던 이수목이라던 사람이 영험한 나무라하여 石松靈이라 이름짓고
자기 소유의 토지 300평을 상속 등기해 주었다 합니다.
저 보다 부동산세금을 더 많이 내는 부자 나무지요
재산을 소유한 세계 최초의 나무로 기네스 북에 등재될 날이 멀지 않은 것 같습니다.
좌청룡 우백호
또 몇백년의 세월이 흘러도 가문의 영광을 재현할 석송령 2세는 화단 양편에서 때깔 좋게 잘 자라고 있습니다.
예천에 도청도 들어오고 부동산 값도 많이 오르겠지요
부모 잘 만나서 벌써부터 주목받고 떼 부자 될 행복한 넘들 입니다.
참 좋습니다.
마치 문화유적 관광단인 듯 합니다.
유적지를 구경하고 차를 타면 다음 관광지로 이동하고 문화재와 유적지에 해박한 청산님의
청산유수가 곁들여 집니다.
한나절 역사공부 시키고 또 체력단련 시키고 특미메밀소바에 뒤풀이 까지해서 단돈 2만원
고품격 문화유적답사 왕창세일…. ㅋㅋㅋ
세일기간 놓치면 훗날 비싸게 사는 수밖에 없지요
초간정
먼 발치에서 은둔과 유유자적의 퓽류가 느껴집니다.
냇가의 바위를 이용해 그 위에 돌담을 쌓고 정자를 얹었습니다.
물 맑고 산 좋은 시절 천혜의 절경에 자리잡은 셈입니다.
옛날 양반들은 좋았겠어요
벼슬길에 나가 가문을 빛내다 으례껏 그러하 듯 정치에 염증과 신물이 나면 슬며시
낙향해서 풍광 좋은 곳에서 풍류와 가무를 즐기면 그만이니…
아줌만 누구신지?
초간정은 초간 권문해가 1582년에 지은 별채정자로 심신을 수양하던 곳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
격인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을 집필한 곳이라 합니다.
매봉과 국사봉 사이로 해서 동남 방향의 예천읍으로 흐르는 금곡천가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49세에 낙향하여 초간정을 지었다는데 처음에는 작은 초가집으로 초간정사라 했다 합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병화를 입고 다시 세워지길 거듭하다 1870년 초간의 현손이 중수하여 권문해의 유고를
보관하는 전각으로 삼았습니다.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143호로 지정되어 있고 초간의 1580~1591년 까지의 주변일들을 기록한 초간일기는
보물 제 879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주변의 경관과 조화가 그만 입니다.
자료사진
<대동운부군옥>은 중국 송나라 음시부의 <운부군옥>을 본떠서 '운자(韻字)'에 따라 차례대로 쓴, 우리나라에서
가장 처음으로 만들어진 '백과사전'이랍니다.
목판본으로 만들어진 이 책은 모두 20권이나 되는데요.
본디 처음에는 권문해가 선조 임금한테 바쳐 나라에서 펴내려고 했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오랜 시간이 흐른 뒤, 1798년(정조 22년)에 권문해의 7대손인 '진락'이 초판을 펴냈다 하구요
그 뒤로도 1913년에 최남선이 이끄는 광문회에서 9권을 간행하고 마지막으로 1957년에 '정양사'(강원도 금강산에
있는 절)에서 그 나머지를 펴냈다고 합니다.
민박집
초간정 옆 한옥에서 민박도 가능합니다.
꼬모님 명함 뭉텅이로 받아 왔으니 필요하신 분 꼬모님께 연락바람
선비의 고향 예천은 걸출한 문화유적과 향토색 짙은 풍물들이 즐비하고 마을마을 마다 멋진 소나무의 자태들이
우아하여 관광자원이 무한한데 관광상품화와 문화재 관리는 아주 소홀한 듯 합니다.
초간정 앞 묘소 앞에는 가족들이 텐트를 치고 야영하고 있고 초간정 청소는 기가 막힘니다.
봉걸레 자루를 끈으로 묶어 금천물에 담구었다가 끌어 올려 바닥을 한번 닦아내면 그만 입니다.
물의 오염도 그렇고 아름드리 나무로 만들어진 정자는 물걸레가 아니고 우리 옛날 초등학교 마룻바닥 광내듯
피마자 열매 정도로 닦아야 하는 건 아닌지….
용문사
원래 오후 회룡포 산행 때문에 예정에 없던 곳인데 허여사님의 발의로 전격조정되었습니다.
녹음 짙은 길이 유서 깊은 고찰을 기대를 일깨워 줍니다.
일주문에 떡하니 써 있습니다.
‘소백산 용문사’
“여기가 소백산이라고요? “
“그럼 소백산 줄기가 에천까지 뻗어 있는 겁니까?”
신라 경문왕 10년(870) 예천군 용문면 두천리 출신의 두운(杜雲)대사가 당나라에 들어가 도를 깨친 후 귀국하여 창건한
법보사찰 입니다.
이곳 주지스님인 청안스님은 모 이동통신사의 광고에 영화배우 한석규와 차밭을 거니는 스님으로 등장해 세인의 관심을
끌었던 분이라 합니다.
건물이 모두 신식이라 외연만으로는 세월과 불심의 깊이를 담아내는 고찰의 풍모가 느껴지지 낳지만 용문사가 대단한
절이네요
짧은시간 돌아보기 바빠 궁금했는데 그 이유를 찾아보니 1984년 화재 때문입니다.
1984년 초파일 다음날 화재로 많은 건물이 전소되었습니다.
초파일의 뒷설거지를 하던 신도들이 연등을 수거하는 과정에서 촛불이 연등 더미에 넘어져 순식간에 5동의 건물을
태웠다 합니다.
그러나 불행 중 다행으로 1,000도가 넘은 화마에 대장전 건물은 온전하였습니다.
당시 응향각에는 조선 세조 때 스님들의 잡역을 면제케 해준 교지가 대형 금고 속에 있었는데 이 절에서 공부하고 있던
20세의 학생이 초인적인 힘으로 요사채 안방에서 문턱을 넘어 마당에 굴러 떨어뜨려 구했다 합니다.
금고는 장정 4명이 목도를 이용해도 억지로 들 수 있는 정도의 무게였다는데 부처님이 공력으로 청년을 움직여 귀중한
문화재를 구한 건 아닐련지요
신축건물들이 유서 깊은 고찰에 좀 부조화 스럽지만 또 어떻습니까?
절은 불심의 도량이고 우리가 꿈꾸는 현실의 극락은 내 안에 무엇인가를 채우기보다는 비워내야 더 가까이 갈 수 있고
부처님은 늘 내안에 있음이니요…
“나무아미타불 ”
아는 것 만큼 보인다고 했지요? .
알려는 열정 만큼 더 보입니다..
그 열정은 마음을 늙지 않게 하는 마법이고 즐거운 인생을 만드는 주술이지요..
나이가 늙어감에도 전혀 젊은이 다운 혈기를 잃지 않는 늙은 오빠 언니들을 만나는 것은 즐거운 일입니다.
그들의 에너지와 활력이 느낌으로 전해와 나 또한 혈기방장해 집니다..
갑자기 따라 붙느라고 오늘의 답사에 대해 미리 알아보지 못하고 왔는데 강회장님은 인터넷에서 사전 공부하고 왔다
합니다..
허여사님은 용문사와 윤장대를 훤히 꿰고 있고 청산님은 온 산천을 걸어다니는 역사사전이니 더 할말이 없구요
귀연 모두가 내공이 출중한 풍류객들입니다..
전 원래 뒷북을 좋아합니다.
항상 건들거리며 다니다가 지나고 나서 추억을 정리하면서 놓친 많은 것들을 늘 애석해 하지요
천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용문사에는 보물이 다섯개나 있다는 것도 나중에사 알았습니다.
대장전,윤장대, 목불좌상과 목각탱화, 용문사교지, 팔상탱화가 그것입니다.
<보물 1>대징전 (大藏殿)
대징전 (大藏殿)
보물 제 145호로 지정된 대장전은 고려시대 명종 3년(1173)에 건축된 맞배지붕 건축물 입니다.
면에 새겨진 조각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기둥 위에 연꽃, 붕어, 귀면이 있다는데 사진을 보고서야 뒤늦게 고개가 끄덕여 집니다.
대장전 외부공포 단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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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외 경북 문화재 자료 169호 자운루와 천불을 봉안한 극락보전,해운루 등이 있습니다.
자운루(慈雲樓)는 임진왜란때 승병(僧兵)들의 회담장이자 지휘소였으며,승속(僧俗)들이 승병들을 돕기위해
짚신을 만들어 조달한 호국(護國)의 얼이 서린 곳입니다..
극락보전
극락락보전(極樂寶殿)은 용문사 경내가 한눈에 들어오는 절터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중앙의 비로자나불을 주불(主佛)로 좌우에 석가모니불과 약사여래불을 모시고 천불(千佛)을 봉안 하고 있습니다
해운루
해운루 또한 1984년 화재때 소실되었다가 1990년에 복원된 건물입니다.
사천왕상
병암정, 선봉대 삼강주막 등
아직 돌아볼 곳이 많이 남아 있는데 훗날을 위해 남겨두고 회룡포로 갑니다.
장안사 까지 차로 오르렸더니 날씨탓인지 차가 힘들어 합니다.
주차장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청산님의 등산 개념도 설명을 듣고 장안사로 향합니다.
동행(사진 청산님)
천상의 정기 서린 곳에 비룡(飛龍)이 꿈틀거리는 장안사
천년 신라에 학이 춤을 추듯 뭇 봉우리들이 힘차게 굽이치고, 구름을 담아 놓은 듯 비룡이 꿈틀거린다는 비룡산(飛龍山)
회룡포는 비룡산을 품고 정상 가까이에 장안사가 있습니다.
겉보기와 다르게 여기도 유서 깊은 고찰 이네요.
금강산과 양산의 장안사야 유명하지만 별로 들어본 용궁의 장안사도 신라시대 창건된 절입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 국태민안을 염원하여 전국 세 곳의 명산에 장안사를 세웠는데, 금강산 장안사, 양산 장안사,
그리고 국토의 중간인 이곳 용궁면 용궁리 비룡산 장안사가 그 하나라 합니다.
1300여년의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지만 아직까지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은 곳입니다.
지금으로부터 2000여년전의 장안사(長安寺)는 허물어질대로 허물어진 쇠락한 절이었는데 어느 날 두타(頭咤) 스님이라는
분이 젊은 나이로 전국을 행각하던 중 이곳 장안사의 빼어난 산세를 보고 들어오셔서 혼자 괭이로 산길을 내고 우마차로
들보를 옮기며 새롭게 가람을 중수하셨다 합니다..
기와를 머리에 이고 흙을 지고 나르는 스님의 모습에 마을주민들도 감복해서 스님을 도와 불사를 거들었고 모두의 간절한
원력으로 마침내 장안사가 옛 모습을 보이고 다시 신도들이 찾아들자 두타(頭咤) 스님은 홀연히 절을 떠나셨하지요
오실 때의 모습 그대로 걸망 하나만 매고 조용히 떠난 스님은 출가 때 세운 서원을 이루기 위해 지금까지 태백산 어디선가
공부만 하고 계신다고 전합니다.
이규보는 이곳 장안사에 오래 머물면서 글을 지었으며 만년에는 불교에 귀의하였고 또한 이 지역의 많은 인물들이 이
장안사 도량에서 원(願)을 성취하고 밖으로 역량을 발휘했다고 합니다.
절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허여사님 기와에다 가족의 이름을 올립니다.
돌아와 장안사 입구 안내문을 읽으니 이렇게 적혀있습니다. “사바세계의 크고 작은 번뇌를 잠시 벗어두고 조용히 천년의
소리와 가신 선인들의 은밀한 말씀에 귀 기울여 보소서.”
옆엔 순치황제 출가시도 적혀 있습니다.
天下叢林飯似山(천하총림반사산) 도처에 총림이요, 쌓인 것은 밥이어니
鉢盂到處任君餐(발우도처임군찬) 발우 들고 가는 곳에 밥 세 그릇 걱정하리!
黃金白璧非爲貴(황금백벽비위귀) 황금과 백옥만이 귀한 줄 알지 마소.
惟有袈裟被最難(유유가사피최난) 가사 장삼 얻어 입기 무엇보다 어렵다오.
朕乃山河大地主(짐내산하대지주) 내 자신이 이 국토의 주인 노릇 하느라고
憂國憂民事轉煩(우국우민사전번) 나라와 백성 걱정, 마음 더욱 더 시끄럽네.
百年三萬六千日(백년삼만육천일) 백 년을 산다 해도 삼만육천 날이건만
不及僧家半日閑(불급승가반일한) 풍진 떠난 이 산 속의 한나절에 비할 손가!
悔恨當初一念差(회한당초일념차) 당초에 부질없는 한 생각 잘못으로
黃袍換却紫袈裟(황포환각자가사) 가사 장삼 벗어놓고 곤룡포를 둘렀다네.
我本西方一衲子(아본서방일납자) 이 몸은 그 옛적에 서천축 중일러니
緣何流落帝王家(연하류락제왕가) 그 어떤 인연으로 제왕가에 떨어졌나?
未生之前誰是我(미생지전수시아) 이 몸을 받기 전에 무엇이 내 몸이며,
我生之後我爲誰(아생지후아위수) 세상에 태어난 뒤 내가 과연 누구런가!
長大成人纔是我(장대성인재시아) 자라서 성인 됨에 잠깐 동안 나라더니
合眼朦朧又是誰(합안몽롱우시수) 눈 한 번 감은 뒤엔 내가 또한 누구런가?
百年世事三更夢(백년세사삼경몽) 백 년의 세상일은 하룻밤 꿈과 같고
萬里江山一局碁(만리강산일국기) 수만 리 산과 들은 한판의 바둑이라.
禹疏九州湯伐桀(우소구주탕벌걸) 대우 씨는 9주 긋고, 탕 임금 걸을 치며
秦呑六國漢登基(진탄육국한등기) 진시황 6국 먹자, 한 태조가 새 터 닦네.
兒孫自有兒孫福(아손자유아손복) 자손들은 제 스스로 제 복 타고 났으니
不爲兒孫作馬牛(불위아손작마우) 후손을 위한다고 마소 노릇 그만하소.
古來多少英雄漢(고래다소영웅한) 유구한 역사 속에 많고 많은 영웅들도
南北東西臥土泥(남북동서와토니) 푸른 산 저문 날엔 한 줌 흙이 되는 것을!
來時歡喜去時悲(내시환희거시비) 날 적엔 기뻐하고 죽을 땐 땐 슬퍼하나
空在人間走一回(공재인간주일회) 덧없는 인간 세상 한 바퀴 도는 것 뿐.
不如不來亦不去(불여불래역불거) 애당초 안 왔다면 갈 일조차 없는 것을,
也無歡喜也無悲(야무환희야무비) 기쁨이 없었는데 슬픔 또한 있겠는가!
每日淸閑自家知(매일청한자가지) 나날이 한가로움 내 스스로 알고 보니
紅塵世界苦相離(흥진세계고상리) 이 풍진 세상 속의 온갖 고통 여의는 것.
口中吃的淸和味(구중흘적청화미) 입으로 맛들임은 시원한 선열미(禪悅味)요,
身上願被白衲衣(신상원피백납의) 몸 위에 입고픔은 회색의 가사일세.
五湖四海爲上客(오호사해위상객) 5호와 4해 안에 가장 높은 손님 되어
逍遙佛殿任君棲(소요불전임군서) 부처님 도량에서 마음껏 노닐 적에
莫道出家容易得(막도출가용이득) 세속을 떠나는 일, 하기 쉽다 말을 마소.
昔年累代重根基(석년루대중근기) 숙세에 쌓아놓은 선근 없이는 아니 되네.
十八年來不自由(십팔년래부자유) 18년 재임 동안 자유라곤 없었노라.
山河大戰幾時休(산하대전기시휴) 땅 뺏는 큰 싸움을 어느 때나 그치려나.
我今撤手歸山去(아금철수귀산거) 내 이제 손을 털고 산 속으로 돌아가니
那管千愁與萬愁(나관천수여만수) 천만 가지 근심 걱정, 아랑곳 할 것 없네!
속세의 범부에게 작은 깨우침을 주려 주지스님이 인용한 순치황제 출가시 입니다.
찬찬히 읽어보니 한귀절 한귀절이 마음에 와 닿네요
황제의 부귀영화를 버리고 세속의 굴레를 훌훌 벗어 던지고 끝없는 사유와 깨달음의 바다를 향해 흔쾌히
나서는 구도자의 모습입니다.
사념의 자유를 찾은 자의 평화와 마음의 기쁨이 전해집니다.
우리가 드른 절과 회룡포 그렇게 바쁘게 지나칠 곳이 아니었습니다
다음엔 좀더 여유롭고 허허로운 마음으로 다시 찾을 수 있겠지요
장안사 위 불상
잠시 올라가니 회룡대 입니다.
장안사 뒷길을 따라 잠시 오르면 10분 정도 오르면 회룡대가 서는데 이곳에서 내려다보는 비경은 신비하고도
아름답습니다. 한폭의 그림 같은 정경입니다.
팔각정 안에는 고려시대의 문관이며 재상이었던 이규보가 장안사에 머물면서 장안사에 대해 쓴 시가 걸려있습니다.
아름다운 우리의 산과 강 입니다.
폭염을 가리운 흐린 날이라 유적답사에도 산행에도 좋은 날입니다.
우스운 일입니다.
예천에서 태어났고 매년 할아버지 묘소 벌초를 오면서도 지나온 유적지나 회룡포를 가보지 못했습니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이 딱 맞습니다.
봉화대 점심 먹으러 가는 길 (배가 겁나게 고픔)
사진 (청계님)
산상일식
불쌍하게 기다리는 산꼭대기와 무릉객
밥먹을 때 개기다림 정말 싫음
이왕 늦은거 천천히 기다리다 남실장과 함께 먹었으면 제대로 먹을 수 있었는데
완죤 속만 내보인 하루
봉수대에서 식사를 했습니다.
모두들 준비한 성찬으로 맛난 야외식사를 하고 산상에서 모밀소바 까지 먹는 호사를 누렸습니다.
남실장께는 예전 지리산 천왕봉에서 회무침을 얻어먹은 적이 있는데 오늘도 그 많은 장비와 부수재료들을 지고 와서
많은 사람들을 미각을 행복하게 해주었습니다.
좌우당간 귀연을 따라 다니면 먹는 것 하나는 제대로 먹지요
압력밥, 오징어데친것, 홍탁 그런것도 먹을 수 있습니다.
먹었으니 또 가야지요
봉수대에서 원산성 가는 내림길
봉수대에서 원산성 가는 길은 2.2km 입니다.
낙차가 크지 않은 완만한 산길 입니다.
원산성에서 성저마을은 1.2km , 배골은 0.8kn, 제2전망대는 1.2km 입니다.
원산성은 주변의 지형을 이용한 혼축성이라 합니다.
배골 0.5km 남긴 갈림길 까지 가는 원산성길 인데 자연 능선에 가미된 인공의 축성이 절묘합니다.
배골로 떨어지는 갈림길에서는 긴 다리와 삼강주막이 내려다 보입니다.
원산성 끝머리에서 배골은 0.5km 성저마을은 2km입니다.
배골
삼강 앞봉 가는 길
배골쪽 내림 길에 그간 올라왔던 아까운 고도를 모두 반납했습니다.
산 밑에 까지 떨어지자 삼강앞봉 0.8m 표지판이 서고 일대에는 거대한 뽕나무 군락이 있습니다.
다시 삼강 앞봉 올라 가는 길이 아주 가파라 집니다.
다음을 기약한 삼강주막을 내려다 보며 오름 길을 올라 갑니다.
날씨는 흐려도 은근한 무더위가 바람 없는 날을 힘들게 합니다.
길은 숲이 울창하고 가끔 나무 숲 사이로 그림 같은 전망이 있어 걷기 좋은 길입니다.
오르막이 있긴 하지만 낙차가 완만한 오솔길이 많아 거친 산길에서 단련된 귀연산우들이라면
편안한 길일 법 한데 유적답사란 이유로 마음이 해이해진 탓인지 그다지 가벼운 발걸음은 아닙니다.
삼강주막 마을
함께 산행하는 속도가 빠르고 시간 소요가 꽤 된 것 같은데 허여사님의 GPS는 전체 9km 구간을 마음만큼 빨리 따라잡아
주지 않습니다.
집나간 바람은 돌아올 마음 없고 멀리 삼강주막에서 철철넘칠 탁배기는 그림에 떡이지만
조금 더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보는 마을과 강의 그림 같은 평화가 마음을 차분하게 하고 여행의 기쁨을 불러줍니다.
삼강앞봉에서 바라본 삼강주막과 마을
삼강앞봉에서 다시 사림골로 내려 서면서 돼지감자 꽃이 흐드러지고 코 앞에 강이 나타납니다.
적석봉 가는 길 풍경
후미는 빠른 길로 하산하기로 하고 우린 사림봉 방향으로 진행하여 용포마을로 내려섰습니다.
용포마을 가는 길 풍경
날머리에는 감나무와 서 있는 곳에 돼지감자 꽃이 흐드러지고 폐가가 한 채 서 있습니다.
그 앞에는 새로 집을 짓느라 한창이고 유유히 감돌아 흐르는 내성천 굽이를 사이로 초록의 들판이
싱그러운 8월 입니다.
뿅뿅다리
그림 같이 평하로운 내성천에는 사람이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후미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마을 어귀 둑방 길에 자라는 복숭아를 깎아먹고 베이스캠프가 기다리는 주차장으로 돌아왔습니다.
내성천 물굽이가 돌아 나가는 곳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옷을 훌훌 벗고 조용히 흐르는 물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몰카 - 매암님.갓바위님, 산꼭대기
몰카 - 산꼭대기
속 보이는 내성천
용궁순대 집 원조
원래 원조집은 늘 붐비고 허름하고
시설 좋은 그 앞집은 파리날리고
자리가 없어서 우린 앞집으로 왔습니다.
간만에 큰 손님으로 아줌마 눈 튀어나올 지경
양조장에서 막걸리 가져오고 , 저녁에 장사할 순대도 모자랄 판 입니다.
나오는데 "순대 국밥 안시켜서 고마워유" 하십니다.
싸고 맛있는 뒤풀이
즐거운 산행 길이었습니다.
살아 가면서 잃고 싶지 않은 기쁨들
오래 세월의 향기에 취하고 아름다운 내고향의 산하의 아름다음에 취한 시간이었습니다.
다시 귀연과 함께 한 시간의 의미도 각별했습니다.
시간이 빠르단 말 실감합니다.
지난 해 오월 중국 무이산 다녀오고 귀연과 함께 산행하지 못한지가 1년이 훌쩍 넘었습니다.
그 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지요
서브프라임 모기지로 촉발된 세계 경제 붕괴의 공포
경제의 황혼이 깃들면서 미네르바의 부엉이가 날아 오르고
노대통령은 “삶과 죽음은 다 한 조각이다.”란 회한의 말과 함께 부엉이 바위에서 삶과 이상을
떨구었습니다.
회장님외 몇몇 귀연산님들 사고의 소식도 있었네요
아작날 것 같은 세상은 그래도 잘 돌아 갑니다.
부동산 가격은 다시 꿈틀거리고 증시는 연고점은 지속 갱신중입니다.
세상이 바뀌어도 국회의 전사들은 더 강해졌습니다.
의사봉을 향한 인간폭탄 그리고 해머와 전기 톱 까지….
강 회장님, 꼬모는 완전 회복되에 예전과 다름없이 귀연과 발걸음 가볍게 자연과 속세를
넘나듭니다.
삶에 경배하고 오늘의 자유를 감사하세요
어려운 시기를 버티지 못하고 직장에서 짤리거나
재수없는 년도에 걸려 취업의 기회를 놓치거나
한번의 어이없는 사고에서 회복을 못하는 사람들
나만 당하고 세상은 아무렇지도 않음에 비감하고
남들 다 원금 회복하는데 내 계좌는 여전히 텅 비어 있어 혼자만 망한 느낌이 드는
사람들도 많이 있지요.
덕분에 그 동안 잘 지냈습니다.
원금회복의 기회는 요원하지만 어짜피 사람은 적응하는 동물이라 최선이 아니면 차선을
찾게 되지요
아얘 등이 절단 나버렸으면 딴생각 안하고 다른 길을 찾았겠지만
구들장 지고 누을 수준은 아니고 놀던 가락에 잊지 못할 추억들이 남아 있으니
산의 언저릴 떠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나름의 차선책으로 타협점을 찾은 건 산행 시간을 줄이고 속도를 줄이고 사람을 바꾼 거
아직 내동 기상청의 오명을 벗지 못하고 눈에 뛰는 진전은 없지만 그래도 무리하지 않아
더 악화되지 않는 게 위안이라면 위안 입니다.
최악의 경우 평생을 끼고 갈 각오를 하니 마음이 편하긴 한데 들개처럼 산야를 종횡하던
날의 추억들이 늘 아쉬움으로 남는 건 어쩔 수 없네요
아직은 제 몸의 자정능력과 산과 자연이 치유해줄 거란 믿음과 기대를 잃지 않고 있습니다..
마눌과 100대 명산 주유즁이고 이제 나이들어 동네 산을 깔짝거리는 소원했던 친구들과
근교산에도 많이 다녔습니다.
답답할 때엔 혼자 훌쩍 산행을 떠나기도 했구요
아직은 산행 때 체력보다 허리부담이 더 크긴 하지만…
걸어서 회사에 출근하는 것은 엄두도 못 내다가 서너 달 전부터 대안을 찾았습니다.
비싼 아디다스 특허 운동화를 신고 시내 아스팔트 대신 갑천 변 우레탄 길을 따라
출근하는 거지요
뻐근하고 가끔 시큰거리지만 딱딱한 도로를 걸을 때와는 양상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얘기가 길어졌네요
하여간 귀연 막간을 이용해서 귀연 여행길에 합류해서 즐거웠습니다.
세월이 많이 흐르고 수 많은 변화가 있었어도 한결같이 그 자리를 지키고선 귀연과 산친구들
보면 마음이 뿌듯합니다.
세상을 떠돌다 지친 몸으로 고향으로 돌아온 탕아를 반갑게 맞이하는 가족들처럼
변함없는 미소와 따뜻함으로 맞이해주는 귀연과 산친구들이 있어 가소롭게도 늘
뻔뻔하고 이기적이기만 합니다.
항상 너그러움과 사람 사는 정을 느끼게 해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몇몇 분들은 애경사 때 뵙긴 했지만 마치 지난주에 함께 산행하고 다시 일주일 만에
산에 가는 듯 편안하고 자연스러워 세상의 변화와 일년의 공백이 오히려 무상합니다.
그 동안 운동량이 적어 몸매무새가 많이 망가졌다가 걷기를 시작하고 나서 배도 들어가고
체중도 좀 빠졌는데 만나자 마자 너무 놀아서 젖이 많이 튀어나왔다는 회장님 말에 다소
실망했지만 지금보다는 더 좋아질 것 같기도 하구요.
허리란게 한번 심하게 다치고 나니 조금 나아진 듯 하다가도 어느날 갑자기 안 좋아 지기도
합니다.
가끔 들락날락 하면서 심기를 어지럽혀도 이해하소서
함께 희히낙락 하다가 슬그머니 또 꼬리를 내리면 상태가 안 좋은 줄 알아 주소서
미안한 마음에 인연을 끊었다가 혹여 허리가 다 낳아 예전처럼 동행하고 싶을 때 받아주지
않으면 그 땐 억울해서 속병이 날 겁니다.
이젠 내공이 쌓여가니 까페를 통해서라도 자주 만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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