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은 내가 좋아서 부르는 노래 입니다.
지리산이란 노래는 내 18번 이지요.
이글거리는 태양이 이젠 정말 꼴보기 싫습니다.
아침 출근 시간되기 전에 벌써 떠올라 하늘 한 가운데 버티고 선 모습에 숨이 막힐 지경이지요.
“오늘도 엔간히 내뿜게 생겼군”
“여름을 난다”는 말이 맞을까요?
아님 “여름을 즐긴다”는 표현이 맞습니까?
올핸 매미도 폭염에 질려버린 탓인지 잘 울지도 않습니다.
날이 덥다고 내 삶의 노래도 멈추어야 하나요?
주말에 고민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뜨거운 날이라고 에어컨 키고 집에서 빈둥거리는 건 질색이고
낯선 곳으로의 여행과 산이 부르는 소리엔 구태여 폭염과 혹한을 따지지 않는 태생이다보니...
그냥 단순한 삶이 좋습니다.
정말 무시무시하게 중요한 일들이 내 황금 같은 주말을 가로 막지 않고
미치고 팔딱 뛸 고민에 가슴이 새까맣게 타 들어 갈 큰 일도 없고…
어디를 가고 싶다거나 무엇을 먹고 싶다거나 그런 실현 가능한 기본적인 욕구 외에
거창한 욕심과 집착이 날 괴롭히지 않으니…
다음주면 말복
이젠 슬며시 풀죽어 갈 뜨거운 여름과의 이별이 다가옵니다.
조금은 아쉬워 집니다.
세월이 이리 빠르니
머지 않아 2012년 뜨거운 여름과의 치열한 교전도 전설로 남겠지요?
그 어느 해 보다도 뜨거운 여름 덕분에 더 멋진 추억을 많이 만들었습니다.
삼복 무더위의 한남정맥 길과 시경계길
안개 흐르던 칠보산 산행 길
좋은 친구들과 함께한 대청 호반 길
지리산 천왕봉과 청내골 산행
폭우 경보 속의 지리산 선유폭포와 속리산
마눌과 함께한 부여 궁남지와 축령산 편백나무 숲 길 여행
친구들과의 염천시하 광덕산행
그리고 이번의 지리산 반야봉과 폭포수골 산행
반야봉 가는 길
“역시 큰 산이여 !”
임걸령 가는 숲길은 태양이 들어오지 못하고 바람만 지나 다녔습니다.
1300 고지 그늘에서는 전혀 더위가 느껴지지 않습니다.
누군가 그랬습니다.
“8월의 지리산 능선은 뒹굴고 싶을 만큼 아름답다.”
이름 모를 무수한 야생화가 길섶 어디에나 피어 납니다.
나와 누군가 무더운 산 길을 걷듯이
꽃들은 폭염에도 꽃 잎을 닫지 않았습니다.
산 행 일 : 2012년 8월 5일 일요일
산 행 지 : 지리산
산행코스 : 성삼재-노고단-반야봉-묘향대-박영발비트-폭포수골-뱀사골
산행거리 : 잘 모르갔슈
산행시간 : 약 9시간 30분
날 씨 : 덥다/ 도심은 37도 까정 올라감
동 행 : 귀연 26명
경유지별 시간
시간 |
경유지 |
비고 |
09:00 |
성삼재 출발 |
|
09:50 |
노고단 |
|
10:00 |
노고단 출발 |
|
10:38 |
돼지령 |
|
10:50 |
피아골 삼거리 |
|
11:04 |
임걸령 |
|
11:35 |
노루목 |
|
12:10 |
반야봉 |
약 20분 휴식 |
13:47 |
묘향대 |
중봉에서 약 30분 식사 |
14:30 |
박영발 비트 |
|
15:24 |
폭포수골 절벽 |
|
15:30 |
주폭포 |
|
16:15 |
합수점(폭포수골,뱀사골) |
화개재2.0km,반선7.2km |
16:23 |
간장소 |
|
17:36 |
탁용소 |
|
17:42 |
뱀사골 들머리 |
반선 2.1km |
18:09 |
계곡 입구(뱀사골 표석) |
간이 탐방소 |
18:30 |
뱀사골주차장 |
베이스캠프 |
임걸령
감동 입니다.
폭염에도 마르지 않는 1300 고지의 샘물
가슴 저리는 차가운 물맛은 그대로 입니다.
지리산이 변함없이 산꾼들의 마음의 고향인 것처럼 ….
지리산 종주에 무더위의 기억이 별로 없는 건 숲과 바람과 차가운 샘물 때문입니다.
반야봉
오랜만에 반야봉을 올라보니 기억이 가물거립니다.
예전에 해돋이를 본다고 한달음에 달려 올랐고
몇 년 전인가 묘향대와 이끼폭포를 처음 만나던 날에도 별로 힘든 기억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어느 여름날 반야봉 일출을 기대하며 열심히 걷다가 노루목에서 붉게 떠오르던 태양을
만났던 아쉬운 기억이 떠오릅니다.
허리 다치기 전 연례행사로 했던 지리산 종주에서 늘 지나쳐 버리는 고립된 섬 같은 산
반야봉은 고고하고 우아한 기품의 여인 같습니다.
그렇게 힘들지는 않는데 햇빛에 노출된 등산로 때문이지 그 거리가 멀어 보였습니다.
힘든 건 더운 날씨 탓이 아닙니다.
힘든 건 나이들기 때문이 아닙니다.
힘든 건 정상에 더 가까이 다가가기 때문일 뿐입니다,
높은 곳에서 드넓은 지리산을 바라 봅니다.
뜨거운 여름날에도 감동은 남아 있습니다.
우리가 찾으려고만 한다면 세상의 무수한 감동은 어디에서도 손을 흔듭니다.
내가 오늘 배낭에 가득 담아가는 기쁨은
거친 세월을 물살을 가르는 내 삶의 동력 입니다.
묘향대
빛 바랜 사진첩을 들춰보는 것과 같습니다.
나무의 칠이 벗겨진 오두막 하나 그리고 삼베 옷을 걸친 친절한 노스님 한 분
멀리 천왕봉 능선은 말없이 흐르고 뒤꼍에 샘물은 지나는 나그네를 위한 달디단 해갈
박영발 비트
“별장을 짓자니 돈이 없고 어디 저런 근사한 비트 하나 없을까?”
빨지산 조선노동당 전남도당 위원장 박영발이 비서와 통신병을 데리고 4개월 간 은신했던
비트라 하는데 그 천혜의 요새 같은 은신처가 교묘하기 짝이 없습니다.
끝까지 올라가서 카메라후렛쉬를 비춰 보았습니다.
절벽지대 중간에 동굴 같은 공간이 있고 그 곳에서 사다리로 올라간 곳에 두 사람 정도 기거
할 공간이 있습니다.
비서와 통신병이 은거하는 공간도 따로 있다 합니다.
사다리만 치우고 필요할 때 밧줄을 내리고 출입하면 아무리 근처를 수색해도 발견할 수 없을
것 같은 깊고 내밀한 곳입니다..
게다가 그 함박골 아래 좀더 내려가면 물이 흐르는 계곡 물이 있으니 절박한 생존을 위한 최소한
의 요건을 구비한 참으로 절묘한 곳이라 아니할 수 없었습니다.
언제 시간 내서 지리산 풍광 좋은 곳에 정말 멋진 내 비트 하나 만들어야 겠습니다.
폭포수 골
발바닥이 불편 했습니다.
“시르다. 이런 길은 시르다.”
가물어 수량은 많지않아 폭포는 이름값을 못하고 돌은 들뜨고 이끼 낀 계곡 길은 미끄러웠
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길을 내었겠지만 세월과 비와 바람 그리고 흐르는 물은 자꾸 그 흔적을
지우려 무던히 노력했습니다.
어쩌면 사람의 냄새가 싫었겠지요
한 가닥 매여 있는 로프가 아니면 내려갈 수 없는 그런 길도 있었습니다.
계곡이 깊어 흐린 날 인 듯 햇빛을 구경하기는 힘들긴 한데 거칠고 조심스런 길이라 땀이 많이
흘렀 습니다.
머리를 감고 세수를 하다가
웃통을 벗어 물에 담그고 젖은 옷으로 뜨거운 몸을 닦아냈습니다.
젖은 옷을 짜서 입으니 시원합니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푸른물이 담긴 소가 자꾸 커지고
그 차가운 물길의 유혹도 커져만 갔지요
쳐다보는 동료들이 있어도
그냥 팬티만 입고 뛰어 물에 뛰어 들었습니다.
오늘은 내가 빨지산 이었습니다.
폭염과 시간에 쫒기는 빨지산…
뜨거운 8월의 폭염은 한 시간도 안되어 젖은 옷을 말려주었고
저는 틈만 보이면 아이처럼 물속으로 뛰어 들었습니다.
이런 무더위에 교전의 수칙은 수정되어야 합니다.
"더위와 전면전은 피하라!
몸이 뜨거워지면 참지말고 수냉식으로 식혀라!"
처음 걸어보는 폭포수 골을 그렇게 물과 함께 흘러 내렸습니다.
아래 사진은 물 많은 때의 폭포수골 사진임
지리산 폭포수골 사진 (발췌)
지리산 이끼폭포 사진 (발췌)
뱀사골
인적없는 곳의 맑고 푸른 물에 나뭇꾼처럼 첨벙 뛰어들어 들었습니다.
가슴까지 잠기는 맑은 청수에 오래 몸을 담그고 지리산이 주는 가슴 후련한 세례를 받고 나자
오늘 하루가 꿈처럼 몽롱해 집니다.
여름 계곡 산행은 바로 이 맛 입니다.
힘겨움과 고통은 차가운 물에 씻기어 맑고 투명한 추억과 기쁨으로 정제되었습니다..
내가 마지막으로 알탕한 곳이 폭포수골과 뱀사골 물길이 합해지는 곳이었습니다.
예정된 시간표 대로라면 이제 목적지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알탕소에서 나와 넓어진 계곡 길을 건너자 잘 정리된 길이 나옵니다.
알몸으로 가슴까지 차는 차갑고 맑은 계곡물서 성스런 알탕 의식까지 치루고 싱싱해진 터라
날아갈 것 같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콧노래를 부르며 내려 갑니다.
차가운 맥주와 함께하는 기분 좋은 마무리를 생각하면서 말이죠...
길 옆에 이정표 하나 떡허니 버티고 있습니다.
반선 7.2km / 화개재 2.0km
오잉
"이게 몹니까?"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았는데 남은 길이 2.7km가 아니라 분명 7.2km 입니다.
밥먹고 세시간을 쉬지 않고 내려왔는데 주릉에서 이제 2km 내려 왔고
베이스 캠프 까지는 아직 8km 이상 더 가야 한다고요…?
말문이 막히고
어안이 벙벙하고...
.
처음에는 이정표가 잘못된 줄 알았습니다.
혹시 제가 길을 잘 못 잡아 계곡의 엉뚱한 날머리로 나온 줄 의심했습니다.
“이게 아닌데…”
잠시 패닉에 빠졌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럴 수 밖에 없는 길이었습니다.
여긴 지리산이고 우린 반양봉 까지 올라 비등을 탔던거지요
끝난다고 생각한 길에서 다시 두 시간 반을 더 걸어야 하는 황당하고도 고통스런 현실과
대면하는 순간 산전수전 다 겪은 제가 잠시 실망과 충격에서 정신을 수습하지 못했는데
처음 오신 산님들은 오죽 했을까요?
만나는 산님들의 푸념과 불평을 들었습니다.
“이게 널널 계곡산행이유? 극기 훈련이지”
다 제 잘못입니다.
숱한 날 지리산을 다니고도 시간 개념이 그렇게 희박합니다.
늘 새로운 길에 대한 호기심과 기쁨에 들떠 항상 시간은 뒷전 이었습니다.
지리산에 푹 빠져서 시간의 무의미함을 깨우치던 도인으로부터 전해 받은 산행시간이니
속세의 범인들에게 맞을 리가 있나요?
역시 지리산 이지요?
주릉 까지 올라 갔다가 어느 길로 흘러 내려도 9시간 이상이 걸리는 큰 산
세시간을 걸어 고작 해발 2km를 낮출 수 있었던 산
힘들었지요?
애초부터 그리 얘기했으면 차라리 마음의 각오를 다단단히 했을텐데....
살아감이 늘상 그렇지요...
삶이란 녀석이 곧잘 시간표와 계획을 무시 하잖아요
그래서 또 재미 있기도 하구요
끝나고 나니 우린 멋진 길을 걸었습니다.
수 많은 이름 모를 들꽃을 만나고
차가운 임걸령과 묘향대 샘물을 마셨습니다.
반야봉에 올랐고
묘향대 스님과 말씀도 나누었습니다.
거친 폭포수계곡 길도 알탕도 좋았지요?
모두 대단들 하십니다.
무더운 염천에 9시간 동안 그 험하고 거친 길을 아무런 사고 없이 걸으셨습니다.
30년 산을 탄 제가 처음 걸었던 그 길을
일천한 경력으로 단박에 그 길을 걸으셨군요…
많은 사람들이 걸어 보지 못한 길입니다.
이번 귀연과 함께한 시간이 아니었으면 평생 미답으로 남기고 떠나야 할지도 모르는 길
그런 길을 걸어보신 겁니다.
“푸른 물에 하루의 땀과 피로를 날려 버리고 마신 한 잔의 차가운 맥주 맛이 어땠습니까?”
“괜찮았지요?”
끝이 좋으면 다 좋은 겁니다.
힘들었지만 그래서 또 오래 기억에 남을 겁니다.
오늘의 멋진 동행이었던 당신을 위해 아낌없는 박수를 보냅니다.
정말 대단했던 당신 스스로에게 큰 박수 한 번 쳐주세요…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아윌비백
안뇽 지리산!!!
지금은 백발이 성성한 빨치산 출신들이 한국전쟁 당시 조선노동당 전남도당 위원장이었던 박영발의 은신 ‘비트’를 찾아 옛 동지를 추모하는 위령제를 올렸다. '비트'는 한국전쟁 당시 빨치산들이 은신처로 활용하던 공간으로 동굴이나 지상에 위치한 은신처를 말하며, 지하에 만든 은신처는 '아지트'란 말로 구분해 부른다. 8일 오전 8시 30분 경 12명 가량의 빨치산 투쟁 당사자들과 공작원 출신의 비전향장기수들, 시민사회단체 활동가 등 50여명은 지리산 성삼재 고개에 모여 빨치산 비트를 찾아 지리산 뱀사골 반야봉 함박골로 향했으며 연로해 산을 오르지 못하는 원로들은 성삼재에 남아 심장 속에 깊숙이 자리 잡은 ‘어머니 산’ 지리산을 바라봤다.
지워진 '반쪽' 역사의 숨결, 비트에 그대로 남아 박영발 위원장과 함께 일했던 박남진 선생의 증언을 바탕으로 지난 2월, 두 차례의 탐사 끝에 소년빨치산 출신인 김영승(73세) 선생이 찾아낸 박 위원장의 ‘비트’는 반야봉 중허리 ‘함박골’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묘향암을 찾는 스님들만 주로 이용하는 길이라 인적도 뜸했다. 함박골에 들어서려면 이 길의 막다른 곳에서 방향을 돌려 수풀이 우거진 오른쪽 비탈길로 내려가야 하는데, 길이 험하기 때문에 산을 잘 타지 못하는 몇몇 일행은 이 곳에서 다시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날랜 동작으로 산비탈을 내려가는 김영승 선생을 따라 사납게 돋아난 풀들이 정강이를 베는지도 모르고 약 40여 분간을 정신없이 걷자 박 위원장이 은신처로 사용한 천연동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치처럼 엉킨 수풀이 시야를 가려 동굴이 아니라 보통 검은 빛깔의 큰 바위라고 생각될 정도로 박영발 위원장이 53년 10월부터 54년 2월 22일, 군경에 의해 사살될 때까지 약 4개월 간 사용한 이 동굴은 완벽한 은신처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비트로 들어가기 위해선 높이 3m 가량의 미끄러운 벽을 타고 내려가거나 동굴 아래쪽에 있는 하수관 모양의 터널을 지나야 한다. 하수관 모양의 터널은 표준체형의 성인남성이 낮은 포복 자세로 기어가기에 알맞은 크기다.
간이 사다리를 타고 동굴안 은신처로 올라가자 컴컴한 어둠이 50년을 묵은 듯한 퀴퀴한 냄새와 함께 온몸을 휘감는다. 초여름인데도 불구하고 은신처 안에 들어가자 하얗게 입김이 뿜어져 나왔으며 2평 가량의 좁은 공간에 허리를 펼 수 없는 낮은 천장이 위압감을 줬다. 은신처 벽은 차가운 물기로 흥건했으며 토벌대가 던진 수류탄에 맞아 여기저기 무너진 돌무더기가 뒹굴었다. 불을 비추자 돌무더기 사이로 무전을 하는데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전깃줄이 보였으며 바닥에는 흰색 주사용 앰플, 깨진 갈색 병, 깡통, 50여 개의 배터리 그리고 바닥이 반으로 갈라진 검푸른 고무신 한 짝이 주인을 잃고 잠들어 있었다.
이 두개의 공간은 성인이 두 무릎을 모으고 머리를 숙여 오리걸음으로 걸어야 지날 수 있는 통로로 연결돼 있었으며 통신을 위한 공간은 두 사람 정도의 성인남자가 누울 수 있는 정도의 크기였다. 김영승 선생의 설명에 의하면 이 굴은 박영발 위원장을 호위하고 있는 보위대가 반야봉 중허리를 훑어 발견한 천연동굴로 박 위원장 외에 무전사, 여성비서, 견습무전사 의료병 등 8명이 생활하며 북측 방송에서 흘러나오는 지령 등을 모아 유인물을 만드는 ‘조국출판사’ 일을 하고 있었다. 김영승 선생은 “적들이 없을 때는 동굴 및 구들장터에 천막을 치고 생활하고 적들이 가까이 있을 때는 동굴에서 생활하곤 했다”고 전했다.
구들장터에선 인쇄하는데 사용했던 등사기가 새롭게 발견됐다. 등사기와 함께 발견된 잉크통에는 검은색 잉크가 고스란히 담겨있어 일행을 다시 한번 놀라게 했다. 모든 생활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으나 이 곳에서 생활한 빨치산의 유골은 흔적도 남아있지 않았다. 토벌대가 시신을 모두 끌어다 인근 산내면 초등학교에 전시한 뒤 체포당한 빨치산을 불러 신원을 확인하고 처분했기 때문이다. 김영승 선생은 “언젠가 시간이 되면 70.80대 노인들에게 수소문해서 그때 당시 상황과 시신들을 어떻게 처분했는가를 물어볼 생각이다”고 밝혔다.
주위에서 잠복을 하며 매일 토벌대의 동태를 감시하던 보위대는 전라도에서 활동 중이던 다른 보위대와 결합해 55년까지 전라도 조계산에서 싸우다 전멸한다. "두 번 다시 비극적 역사 되풀이되지 않기를..." 지리산에 울려 퍼진 살아남은 빨치산의 노래 분단으로 생긴 갈등 때문에 그간 묻혀져 왔던 반쪽 역사의 흔적들이 그대로 남아있는 이 곳에서, 일행은 마치 50여년 전 그 때로 돌아간 듯 굳은 표정을 풀지 못했다. 빨치산 출신들은 ‘동지’들의 흔적들을 어루만지며 기억을 반추했고 젊은이들은 경건한 마음으로 구들장 위에 젯상을 차렸다.
김영승 선생은 ‘살아남은 빨치산 전사들’을 대표해 먼저 간 ‘동지’들에게 “우리는 앞으로 두 번 다시 미제에 의한 학살만행의 비극적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게 하기 위해 이 곳에서 산화하여 간 혁명열사 영령들의 뜻을 받들어 ‘우리민족끼리’란 이념의 기치 하에 민족공조로 6.15공동선언 고수 이행 투쟁을 힘차게 벌려 나갈 것입니다”라고 추모의 말을 건넸다. 직접 빨치산 활동을 하진 않았으나 빨치산과 관계를 가져왔다고 자신을 소개한 비전향장기수 양희철 선생은 동굴을 둘러보고 “그 시기에 얼마나 치열했겠는가를 느꼈다”며 “강고한 투쟁을 전개한 그 분들의 숨결을 반추해 볼 수 있었다”고 말했다.
비전향장기수들과 시민사회단체 인사들은 자신의 청춘과 생명을 바쳐 싸운 영령 앞에 고개를 숙이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빨치산 투쟁을 되새기는 노래 '지리산'을 불렀다. 54년 2월 이후 시간이 멈춘 듯한 숲 속의 정적을 깨며 울린 살아남은 빨치산의 노래가 먼저 간 빨치산의 넋을 보듬는 듯 했다. 미 발견 빨치산 '비트' 지리산 곳곳에 김영승 선생은 박영발 위원장의 비트 외에 백운산, 지리산 문수골, 피아골, 천운사골, 장흥 유치내산 등 곳곳에 숨겨져 있는 비트를 찾고 있다. 지리산 뱀사골 주변에 방준표 조선노동당 전라북도당 위원장이 은신한 아지트가 있다는 사실도 확인했으나 아직 정확한 위치는 찾지 못했다. 김영승 선생은 “전북 빨치산 친구들이 그걸(방준표 아지트) 찾으려고 몇 년을 다녔는데 그곳을 알만한 사람은 다 죽고 한 사람이 알고 있는데 치매에 걸려 정신이 오락가락해 오리무중이 되지 않을까 걱정이다”고 조바심을 냈다.
복원을 하더라도 아직 이념갈등이 잔존해 있는 우리 사회가 이 역사를 어떻게 받아들일지도 미지수다. 김영승 선생은 빨치산 유적지를 촬영한 자료들을 모아 역사자료로 활용할 계획이나 “사회적 여건이 성숙될 때까지” 동굴 개방은 하지 않기로 했다. 훼손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다만 동굴에서 발견된 유품들은 그대로 두어 역사기행을 위해 비트를 찾고자 하는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위령제를 마치고 일몰시간 전에 하산하기 위해 일행은 부리나케 능선을 달려 3시간 30분만에 노고단에 도착했다. 이미 어둑어둑해진 노고단에는 한국전쟁 당시를 마지막으로 재연하듯 포연 같은 안개가 습기를 가득 머금은 채 짙게 깔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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