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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기

지리산 깊은 곳 (반야봉-묘향대-폭포수골-뱀사골)

 

 

 

산은 내가 좋아서 부르는 노래 입니다.

지리산이란 노래는 내 18번 이지요.

 

이글거리는 태양이 이젠 정말 꼴보기 싫습니다.

아침 출근 시간되기 전에 벌써 떠올라 하늘 한 가운데 버티고 선 모습에 숨이 막힐 지경이지요.

오늘도 엔간히 내뿜게 생겼군

 

여름을 난다는 말이 맞을까요?

아님 여름을 즐긴다는 표현이 맞습니까?

올핸 매미도 폭염에 질려버린 탓인지 잘 울지도 않습니다.

날이 덥다고 내 삶의 노래도 멈추어야 하나요?

 

 

 

 

 

 

주말에 고민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뜨거운 날이라고 에어컨 키고 집에서 빈둥거리는 건 질색이고

낯선 곳으로의 여행과 산이 부르는 소리엔 구태여 폭염과 혹한을 따지지 않는 태생이다보니...

 

그냥 단순한 삶이 좋습니다.

정말 무시무시하게 중요한 일들이 내 황금 같은 주말을 가로 막지 않고

미치고 팔딱 뛸 고민에 가슴이 새까맣게 타 들어 갈 큰 일도 없고

어디를 가고 싶다거나 무엇을 먹고 싶다거나 그런 실현 가능한 기본적인 욕구 외에

거창한 욕심과 집착이 날 괴롭히지 않으니

 

 

 

 

 

 

다음주면 말복

이젠 슬며시 풀죽어 갈 뜨거운 여름과의 이별이 다가옵니다.

조금은  아쉬워 집니다.

세월이 이리 빠르니

머지 않아 2012년 뜨거운  여름과의 치열한 교전도 전설로 남겠지요?

 

그 어느 해 보다도 뜨거운 여름 덕분에 더 멋진 추억을 많이 만들었습니다.

 

삼복 무더위의 한남정맥 길과 시경계길

안개 흐르던 칠보산 산행 길

좋은 친구들과  함께한 대청 호반 길

지리산 천왕봉과 청내골 산행

폭우 경보 속의 지리산 선유폭포와 속리산 

마눌과 함께한 부여 궁남지와 축령산 편백나무 숲 길 여행

친구들과의 염천시하 광덕산행

그리고 이번의 지리산 반야봉과  폭포수골 산행

 

 

 

 

 

 

 

 

 

반야봉 가는 길

역시 큰 산이여 !”

임걸령 가는 숲길은 태양이 들어오지 못하고 바람만 지나 다녔습니다.

1300 고지 그늘에서는 전혀 더위가 느껴지지 않습니다.

 

누군가 그랬습니다.

“8월의 지리산 능선은 뒹굴고 싶을 만큼 아름답다.”

이름 모를 무수한 야생화가 길섶 어디에나 피어 납니다.

나와 누군가 무더운 산 길을 걷듯이

꽃들은 폭염에도 꽃 잎을 닫지 않았습니다.

 

 

 

 

 

 

 

 

 

 

 

 

산 행 일 : 20128 5일 일요일

산 행 지 : 지리산

산행코스 : 성삼재-노고단-반야봉-묘향대-박영발비트-폭포수골-뱀사골

산행거리 : 잘 모르갔슈

산행시간 : 9시간 30

    : 덥다/ 도심은 37도 까정 올라감

    : 귀연 26

 

경유지별 시간

시간

경유지

비고

09:00

성삼재 출발

 

09:50

노고단

 

10:00

노고단 출발

 

10:38

돼지령

 

10:50

피아골 삼거리

 

11:04

임걸령

 

11:35

노루목

 

12:10

반야봉

20분 휴식

13:47

묘향대

중봉에서 약 30분 식사

14:30

박영발 비트

 

15:24

폭포수골 절벽

 

15:30

주폭포

 

16:15

합수점(폭포수골,뱀사골)

화개재2.0km,반선7.2km

16:23

간장소

 

17:36

탁용소

 

17:42

뱀사골 들머리

반선 2.1km

18:09

계곡 입구(뱀사골 표석)

간이 탐방소

18:30

뱀사골주차장

베이스캠프

 

 

 

 

 

 

 

 

 

 

 

 

 

 

 

 

 

 

 

임걸령

감동 입니다.

폭염에도 마르지 않는 1300 고지의 샘물

가슴 저리는 차가운 물맛은 그대로 입니다.

지리산이 변함없이 산꾼들의 마음의 고향인 것처럼 ….

지리산 종주에 무더위의 기억이 별로 없는 건 숲과 바람과 차가운 샘물 때문입니다.

 

 

 

 

 

 

 

 

 

 

 

 

 

 

 

 

 

 

반야봉

오랜만에 반야봉을 올라보니 기억이 가물거립니다.

예전에 해돋이를 본다고 한달음에 달려 올랐고

몇 년 전인가 묘향대와 이끼폭포를 처음 만나던 날에도  별로 힘든 기억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어느 여름날 반야봉 일출을 기대하며 열심히 걷다가 노루목에서 붉게 떠오르던 태양을

만났던 아쉬운 기억이 떠오릅니다.

허리 다치기 전 연례행사로 했던 지리산 종주에서 늘 지나쳐 버리는 고립된 섬 같은 산

반야봉은 고고하고 우아한 기품의 여인 같습니다.

그렇게 힘들지는 않는데  햇빛에 노출된 등산로 때문이지 그 거리가 멀어 보였습니다.

힘든 건 더운 날씨 탓이 아닙니다.

힘든 건 나이들기 때문이 아닙니다.

힘든 건 정상에 더 가까이 다가가기 때문일 뿐입니다,

 

 

 

 

 

 

 

 

 

 

높은 곳에서 드넓은 지리산을 바라 봅니다.

뜨거운 여름날에도 감동은 남아 있습니다.

우리가 찾으려고만 한다면 세상의 무수한 감동은 어디에서도 손을 흔듭니다.

내가 오늘 배낭에 가득 담아가는 기쁨은

거친 세월을 물살을 가르는 내 삶의 동력 입니다.

 

 

 

 

 

 

 

 

 

 

 

묘향대

빛 바랜 사진첩을 들춰보는 것과 같습니다.

나무의 칠이 벗겨진 오두막 하나  그리고 삼베 옷을 걸친 친절한 노스님 한 분

멀리 천왕봉 능선은 말없이 흐르고 뒤꼍에  샘물은 지나는 나그네를 위한 달디단  해갈

 

 

 

 

 

 

 

 

박영발 비트

별장을 짓자니 돈이 없고 어디 저런 근사한 비트 하나 없을까?”

빨지산 조선노동당 전남도당 위원장 박영발이  비서와 통신병을 데리고 4개월 간 은신했던

비트라 하는데 그 천혜의 요새 같은 은신처가 교묘하기 짝이 없습니다.

끝까지 올라가서 카메라후렛쉬를 비춰 보았습니다.

절벽지대 중간에 동굴 같은 공간이 있고 그 곳에서 사다리로 올라간 곳에 두 사람 정도 기거

할 공간이 있습니다.

비서와 통신병이 은거하는 공간도 따로 있다 합니다.

사다리만 치우고 필요할 때 밧줄을 내리고 출입하면 아무리 근처를 수색해도 발견할 수 없을

것 같은 깊고  내밀한 곳입니다..

게다가 그 함박골 아래 좀더 내려가면 물이 흐르는 계곡 물이 있으니 절박한 생존을 위한 최소한

의 요건을 구비한 참으로 절묘한 곳이라 아니할 수 없었습니다.

언제 시간 내서  지리산 풍광 좋은 곳에 정말 멋진 내 비트 하나 만들어야 겠습니다.

 

 

 

 

 

 

 

 

 

폭포수 골

발바닥이 불편 했습니다.

시르다. 이런 길은 시르다.”

가물어 수량은 많지않아 폭포는 이름값을 못하고 돌은 들뜨고 이끼 낀 계곡 길은 미끄러웠

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길을 내었겠지만 세월과 비와 바람 그리고 흐르는 물은 자꾸 그 흔적을

지우려 무던히 노력했습니다.

어쩌면 사람의 냄새가 싫었겠지요

 

한 가닥 매여 있는 로프가 아니면 내려갈 수 없는 그런 길도 있었습니다.

계곡이 깊어 흐린 날 인 듯 햇빛을 구경하기는 힘들긴 한데 거칠고 조심스런 길이라 땀이 많이

흘렀 습니다.

 

머리를 감고 세수를 하다가

웃통을 벗어 물에 담그고 젖은 옷으로 뜨거운 몸을 닦아냈습니다.

젖은 옷을 짜서 입으니 시원합니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푸른물이 담긴 소가 자꾸 커지고

그 차가운 물길의 유혹도 커져만 갔지요

쳐다보는 동료들이 있어도

그냥 팬티만 입고 뛰어 물에 뛰어 들었습니다.

 

오늘은 내가 빨지산 이었습니다.

폭염과 시간에 쫒기는 빨지산

 

뜨거운 8월의 폭염은 한 시간도 안되어 젖은 옷을 말려주었고

저는 틈만 보이면 아이처럼 물속으로 뛰어 들었습니다.

이런 무더위에 교전의 수칙은 수정되어야 합니다.

"더위와 전면전은 피하라!

  몸이 뜨거워지면 참지말고 수냉식으로 식혀라!"

 

처음 걸어보는 폭포수 골을 그렇게 물과 함께 흘러 내렸습니다.

 

 

 

 

 

 

 

 

 

 

아래 사진은 물 많은 때의 폭포수골 사진임 

  

 

 

                 지리산 폭포수골 사진 (발췌)

 

 

 

지리산 이끼폭포 사진 (발췌)

 

 

 

 

 

 

 

 

 

뱀사골

인적없는 곳의 맑고 푸른 물에 나뭇꾼처럼 첨벙 뛰어들어 들었습니다.

가슴까지 잠기는 맑은 청수에 오래 몸을 담그고 지리산이 주는 가슴 후련한 세례를 받고 나자

오늘 하루가 꿈처럼 몽롱해 집니다.

 

여름 계곡 산행은 바로 이 맛 입니다.

힘겨움과 고통은 차가운 물에 씻기어 맑고 투명한 추억과 기쁨으로 정제되었습니다..

 

내가 마지막으로 알탕한 곳이 폭포수골과 뱀사골 물길이 합해지는 곳이었습니다.

예정된 시간표 대로라면 이제 목적지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알탕소에서 나와 넓어진 계곡 길을 건너자 잘 정리된 길이 나옵니다.

알몸으로 가슴까지 차는 차갑고 맑은 계곡물서 성스런 알탕 의식까지 치루고 싱싱해진 터라

날아갈 것 같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콧노래를 부르며 내려 갑니다.

차가운 맥주와 함께하는 기분 좋은 마무리를 생각하면서 말이죠...

 

 

길 옆에 이정표 하나 떡허니 버티고 있습니다.

반선 7.2km / 화개재 2.0km

오잉

"이게 몹니까?"

눈을 비비고 다시 보았는데 남은 길이 2.7km가 아니라 분명 7.2km 입니다.

밥먹고 세시간을 쉬지 않고 내려왔는데 주릉에서 이제 2km 내려 왔고

베이스 캠프 까지는 아직 8km 이상 더 가야 한다고요…?

 

말문이 막히고

어안이 벙벙하고...

.

처음에는 이정표가 잘못된 줄 알았습니다.

혹시 제가 길을 잘 못 잡아 계곡의 엉뚱한 날머리로 나온 줄 의심했습니다.

이게 아닌데…”

 

잠시 패닉에 빠졌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럴 수 밖에 없는 길이었습니다.

여긴 지리산이고 우린 반양봉 까지 올라 비등을 탔던거지요

 

끝난다고 생각한 길에서 다시 두 시간 반을 더 걸어야 하는 황당하고도 고통스런 현실과

대면하는 순간 산전수전 다 겪은 제가 잠시 실망과 충격에서 정신을 수습하지 못했는데

처음 오신 산님들은 오죽 했을까요?

 

만나는 산님들의 푸념과 불평을 들었습니다.

이게 널널 계곡산행이유? 극기 훈련이지

 

다 제 잘못입니다.

숱한 날 지리산을 다니고도 시간 개념이 그렇게 희박합니다.

늘 새로운 길에 대한 호기심과 기쁨에 들떠 항상 시간은 뒷전 이었습니다.

지리산에 푹 빠져서 시간의 무의미함을 깨우치던 도인으로부터 전해 받은 산행시간이니

속세의 범인들에게 맞을 리가 있나요?

 

 

 

 

 

 

역시 지리산 이지요?

주릉 까지 올라 갔다가 어느 길로 흘러 내려도 9시간 이상이 걸리는 큰 산

세시간을 걸어 고작 해발 2km를 낮출 수 있었던 산

 

힘들었지요?

애초부터 그리 얘기했으면 차라리 마음의 각오를 다단단히 했을텐데....

 

살아감이 늘상 그렇지요...

삶이란 녀석이 곧잘 시간표와 계획을 무시 하잖아요

그래서 또 재미 있기도 하구요

 

끝나고 나니 우린 멋진 길을 걸었습니다.

수 많은 이름 모를 들꽃을 만나고

차가운 임걸령과 묘향대 샘물을 마셨습니다.

반야봉에 올랐고

묘향대 스님과 말씀도 나누었습니다.

거친 폭포수계곡 길도 알탕도 좋았지요?

 

모두 대단들 하십니다.

무더운 염천에 9시간 동안 그 험하고 거친 길을 아무런 사고 없이 걸으셨습니다.

 

30년 산을 탄 제가 처음 걸었던 그 길을

일천한 경력으로 단박에 그 길을 걸으셨군요

 

많은 사람들이 걸어 보지 못한 길입니다.

이번 귀연과 함께한 시간이 아니었으면 평생 미답으로 남기고 떠나야 할지도 모르는 길

그런 길을 걸어보신 겁니다.

 

푸른 물에 하루의 땀과 피로를 날려 버리고 마신 한 잔의 차가운 맥주 맛이 어땠습니까?”

괜찮았지요?”

끝이 좋으면 다 좋은 겁니다.

힘들었지만 그래서 또 오래 기억에 남을 겁니다.

 

오늘의 멋진 동행이었던 당신을 위해 아낌없는 박수를 보냅니다.

정말 대단했던 당신 스스로에게 큰 박수 한 번 쳐주세요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아윌비백

안뇽 지리산!!!

 

 

 

 

 

 

 

 

 

 

 

 

통일뉴스는 7∼8일 비전향장기수들의 모임인 '통일광장'이 주최한 '지리산 역사기행'을 동행 취재해 한국전쟁당시 조선노동당 전남도당 박영발 위원장이 은신처로 활용한 '비트'를 탐사했다.

박영발 위원장의 '비트'는 지난 2월 처음으로 발견됐으며, 광주지역 인터넷신문 '시민의 소리'가 이를 최초 보도했다.

이번 탐사에선 박영발 위원장이 '조선출판사'를 운영하며 북에서 내려온 지령을 담아 유인물을 만들 때 사용한 등사기가 이곳 비트에서 새롭게 발견되기도 했다.

빨치산 출신 비전향장기수들과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이 함께 한 '지리산 역사기행'의 여정을 가능한 자세하게 소개한다. <편집자 주>

 


▶8일 지리산 중턱에 위치한 한국전쟁 당시 조선노동당 전남도당 위원장이었던
박영발의 은신 ‘비트’를 탐사했다. [사진 - 통일뉴스 김규종기자]
▶50년전 주인을 잃은 고무신 한짝. [사진 - 통일뉴스 김규종기자]
“지리산 능선마다, 골짝마다 돌부리 풀뿌리마다. 아지트에서 붉은 피로 물들이며 흙 한 줌으로 변하여간 혁명열사 동지들이여!”

지금은 백발이 성성한 빨치산 출신들이 한국전쟁 당시 조선노동당 전남도당 위원장이었던 박영발의 은신 ‘비트’를 찾아 옛 동지를 추모하는 위령제를 올렸다.

'비트'는 한국전쟁 당시 빨치산들이 은신처로 활용하던 공간으로 동굴이나 지상에 위치한 은신처를 말하며, 지하에 만든 은신처는 '아지트'란 말로 구분해 부른다.

8일 오전 8시 30분 경 12명 가량의 빨치산 투쟁 당사자들과 공작원 출신의 비전향장기수들, 시민사회단체 활동가 등 50여명은 지리산 성삼재 고개에 모여 빨치산 비트를 찾아 지리산 뱀사골 반야봉 함박골로 향했으며 연로해 산을 오르지 못하는 원로들은 성삼재에 남아 심장 속에 깊숙이 자리 잡은 ‘어머니 산’ 지리산을 바라봤다.

▶'비트' 안에는 아직도 당시의 유품들이 남아있어 역사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사진 - 통일뉴스 김규종기자]
그러나 70대 후반의 일부 빨치산 출신들은 몸이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지리산 굽이굽이에 서려있는 빨치산 흔적들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 약 2시간 가량을 걸어 임걸령샘까지 동행하기도 했다. 일행 중 젊은 층들은 그칠 줄 모르는 이들의 열정에 숙연함 마저 느꼈다.

지워진 '반쪽' 역사의 숨결, 비트에 그대로 남아

박영발 위원장과 함께 일했던 박남진 선생의 증언을 바탕으로 지난 2월, 두 차례의 탐사 끝에 소년빨치산 출신인 김영승(73세) 선생이 찾아낸 박 위원장의 ‘비트’는 반야봉 중허리 ‘함박골’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묘향암을 찾는 스님들만 주로 이용하는 길이라 인적도 뜸했다.

함박골에 들어서려면 이 길의 막다른 곳에서 방향을 돌려 수풀이 우거진 오른쪽 비탈길로 내려가야 하는데, 길이 험하기 때문에 산을 잘 타지 못하는 몇몇 일행은 이 곳에서 다시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탐사대는 험준한 지리산 산세를 헤치며 목적지에 도달했다.
[사진 - 통일뉴스 김규종기자]
김영승 선생과 기세문, 양희철 선생 등 젊은 층에 속하는 비전향장기수들과 민가협양심수후원회 권오헌 회장, 전국연합 노수희 공동의장, 그리고 광주지역 시민사회단체 활동가 등 20여명은 수풀을 헤치고 썩은 나무를 치워 길을 만들면서 비탈길을 내려갔다.

날랜 동작으로 산비탈을 내려가는 김영승 선생을 따라 사납게 돋아난 풀들이 정강이를 베는지도 모르고 약 40여 분간을 정신없이 걷자 박 위원장이 은신처로 사용한 천연동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치처럼 엉킨 수풀이 시야를 가려 동굴이 아니라 보통 검은 빛깔의 큰 바위라고 생각될 정도로 박영발 위원장이 53년 10월부터 54년 2월 22일, 군경에 의해 사살될 때까지 약 4개월 간 사용한 이 동굴은 완벽한 은신처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비트로 들어가기 위해선 높이 3m 가량의 미끄러운 벽을 타고 내려가거나 동굴 아래쪽에 있는 하수관 모양의 터널을 지나야 한다. 하수관 모양의 터널은 표준체형의 성인남성이 낮은 포복 자세로 기어가기에 알맞은 크기다.

▶높이 3미터가량에 위치한 은신 '비트'.
[사진 - 통일뉴스 김규종기자]
▶'비트' 는 좁은 틈새를 사이에 두고 주거 공간과 통신용 공간으로 나뉘어 있었다.
[사진 - 통일뉴스 김규종기자]
▶통신용 공간은 성인 남자 2명이 누울 수 있을 정도였다. [사진 - 통일뉴스 김규종기자]
그러나 동굴이 워낙 미끄럽고 균열도 심해, 50여년 전 빨치산 역사와 만나는 설레는 순간에 일행은 한발자국 내딛을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연신 탄성만을 질렀다.

간이 사다리를 타고 동굴안 은신처로 올라가자 컴컴한 어둠이 50년을 묵은 듯한 퀴퀴한 냄새와 함께 온몸을 휘감는다. 초여름인데도 불구하고 은신처 안에 들어가자 하얗게 입김이 뿜어져 나왔으며 2평 가량의 좁은 공간에 허리를 펼 수 없는 낮은 천장이 위압감을 줬다. 은신처 벽은 차가운 물기로 흥건했으며 토벌대가 던진 수류탄에 맞아 여기저기 무너진 돌무더기가 뒹굴었다.

불을 비추자 돌무더기 사이로 무전을 하는데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전깃줄이 보였으며 바닥에는 흰색 주사용 앰플, 깨진 갈색 병, 깡통, 50여 개의 배터리 그리고 바닥이 반으로 갈라진 검푸른 고무신 한 짝이 주인을 잃고 잠들어 있었다.

▶빨치산 부대원 치료용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주사약이 발견됐다.
[사진 - 통일뉴스 김규종기자]
▶무전 통신용으로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는 전기줄과 스피커가 어지럽게 흩어져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규종기자]
▶무전 통신에 사용됐을 수십개의 전지들이 '비트' 안에 그대로
있었다. '비트' 내벽 일부에서는 물이 흐르고 있었다.
[사진 - 통일뉴스 김규종기자]
은신처는 둘로 나뉘어져 있었으며 성인남성 4명이 누울 수 있는 공간에 약품, 병, 깡통, 고무신, 전깃줄이 집중적으로 놓여있었던 걸로 보아 은신처 입구는 주거 공간, 그리고 더 깊숙한 내부는 50여 개의 배터리와 전깃줄이 많이 놓여있었던 걸로 보아 통신을 위한 공간으로 사용됐을 것이라 추정할 수 있었다.

이 두개의 공간은 성인이 두 무릎을 모으고 머리를 숙여 오리걸음으로 걸어야 지날 수 있는 통로로 연결돼 있었으며 통신을 위한 공간은 두 사람 정도의 성인남자가 누울 수 있는 정도의 크기였다.

김영승 선생의 설명에 의하면 이 굴은 박영발 위원장을 호위하고 있는 보위대가 반야봉 중허리를 훑어 발견한 천연동굴로 박 위원장 외에 무전사, 여성비서, 견습무전사 의료병 등 8명이 생활하며 북측 방송에서 흘러나오는 지령 등을 모아 유인물을 만드는 ‘조국출판사’ 일을 하고 있었다.

김영승 선생은 “적들이 없을 때는 동굴 및 구들장터에 천막을 치고 생활하고 적들이 가까이 있을 때는 동굴에서 생활하곤 했다”고 전했다.

▶발견된 '비트'에서 10여미터 떨어진 곳에는 평상시 빨치산 주거공간으로 사용된
구들장 아궁이가 발견됐다. [사진 - 통일뉴스 김규종기자]
▶아궁이에 불을 지펴 따뜻해진 바닥에 천막을 치고 겨울을
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 - 통일뉴스 김규종기자]
실제 동굴을 빠져나와 5m 내려가니 3층으로 쌓아올린 돌 위에 흙을 얹어 평평하게 다진 '구들장터’가 있었으며 구들장터에서 오른쪽으로 10m 더 가자 불을 땐 아궁이도 발견됐다. 아궁이에 불을 때면 돌과 흙이 달아올라 따뜻해진다. 여기에 천막을 세우면 추운 겨울도 날 수 있다.

구들장터에선 인쇄하는데 사용했던 등사기가 새롭게 발견됐다. 등사기와 함께 발견된 잉크통에는 검은색 잉크가 고스란히 담겨있어 일행을 다시 한번 놀라게 했다.

모든 생활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으나 이 곳에서 생활한 빨치산의 유골은 흔적도 남아있지 않았다. 토벌대가 시신을 모두 끌어다 인근 산내면 초등학교에 전시한 뒤 체포당한 빨치산을 불러 신원을 확인하고 처분했기 때문이다.

김영승 선생은 “언젠가 시간이 되면 70.80대 노인들에게 수소문해서 그때 당시 상황과 시신들을 어떻게 처분했는가를 물어볼 생각이다”고 밝혔다.

▶이번 탐사에서 당시 유인물을 인쇄했던 등사기, 롤러, 잉크가 새롭게 발견됐다.
[사진 - 통일뉴스 김규종기자]
▶잉크 뚜껑을 열어보니 잉크가 마르지 않은 채 가득 차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규종기자]
이 곳에서 생활하던 이들은 54년 2월 22일, 동굴을 발견한 군경이 수류탄을 던져 동굴 안에서 목숨을 잃었으며 이 중 박 위원장의 여성비서 이정례 만이 숨이 끊어지지 않은 채 사경을 헤매다 빨치산 이주현에게 발견된다. 이정례와 이주현은 이후 빨치산 활동을 전개하던 중 화개재를 넘어오다 토벌대에 의해 사살당한다.

주위에서 잠복을 하며 매일 토벌대의 동태를 감시하던 보위대는 전라도에서 활동 중이던 다른 보위대와 결합해 55년까지 전라도 조계산에서 싸우다 전멸한다.

"두 번 다시 비극적 역사 되풀이되지 않기를..."
지리산에 울려 퍼진 살아남은 빨치산의 노래

분단으로 생긴 갈등 때문에 그간 묻혀져 왔던 반쪽 역사의 흔적들이 그대로 남아있는 이 곳에서, 일행은 마치 50여년 전 그 때로 돌아간 듯 굳은 표정을 풀지 못했다. 빨치산 출신들은 ‘동지’들의 흔적들을 어루만지며 기억을 반추했고 젊은이들은 경건한 마음으로 구들장 위에 젯상을 차렸다.

▶빨치산들이 사용했던 구들장 위에 죽은 영령들을 달래는 젯상이 차려졌다.
[사진 - 통일뉴스 김규종기자]
굴비, 완두콩밥, 돼지고기, 과일, 떡 등 정성스럽게 마련한 음식이 올라간 제상에는 마지막으로 조국의 통일을 보지 못하고 지리산에서 숨을 거둔 넋을 위로하려는 듯 ‘백두산 불로초’술이 바쳐졌다.

김영승 선생은 ‘살아남은 빨치산 전사들’을 대표해 먼저 간 ‘동지’들에게 “우리는 앞으로 두 번 다시 미제에 의한 학살만행의 비극적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게 하기 위해 이 곳에서 산화하여 간 혁명열사 영령들의 뜻을 받들어 ‘우리민족끼리’란 이념의 기치 하에 민족공조로 6.15공동선언 고수 이행 투쟁을 힘차게 벌려 나갈 것입니다”라고 추모의 말을 건넸다.

직접 빨치산 활동을 하진 않았으나 빨치산과 관계를 가져왔다고 자신을 소개한 비전향장기수 양희철 선생은 동굴을 둘러보고 “그 시기에 얼마나 치열했겠는가를 느꼈다”며 “강고한 투쟁을 전개한 그 분들의 숨결을 반추해 볼 수 있었다”고 말했다.

▶지리산 산행로에서 발견된 실탄. 지리산은 아직도 전쟁의 상처가 아물지 않았다.
[사진 - 통일뉴스 김규종기자]
민가협 양심수후원회 권오헌 회장도 착잡한 표정으로 “그 추운 겨울날 어떻게 지냈을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며 “그 투쟁의 치열함을 짐작케 한다”고 말했다.

비전향장기수들과 시민사회단체 인사들은 자신의 청춘과 생명을 바쳐 싸운 영령 앞에 고개를 숙이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빨치산 투쟁을 되새기는 노래 '지리산'을 불렀다. 54년 2월 이후 시간이 멈춘 듯한 숲 속의 정적을 깨며 울린 살아남은 빨치산의 노래가 먼저 간 빨치산의 넋을 보듬는 듯 했다.

미 발견 빨치산 '비트' 지리산 곳곳에

김영승 선생은 박영발 위원장의 비트 외에 백운산, 지리산 문수골, 피아골, 천운사골, 장흥 유치내산 등 곳곳에 숨겨져 있는 비트를 찾고 있다. 지리산 뱀사골 주변에 방준표 조선노동당 전라북도당 위원장이 은신한 아지트가 있다는 사실도 확인했으나 아직 정확한 위치는 찾지 못했다.

김영승 선생은 “전북 빨치산 친구들이 그걸(방준표 아지트) 찾으려고 몇 년을 다녔는데 그곳을 알만한 사람은 다 죽고 한 사람이 알고 있는데 치매에 걸려 정신이 오락가락해 오리무중이 되지 않을까 걱정이다”고 조바심을 냈다.

▶지도를 펼쳐 들고 빨치산 '비트'를 탐색하고 있는 탐사대.
[사진 - 통일뉴스 김규종기자]
전국에 확인된 빨치산 생존자는 30여명, 물론 전력을 숨기고 사는 빨치산까지 포함되면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되나 이들 대부분이 70-80세 가까이 된 노인들이라 사라져 가는 반쪽 역사를 복원할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

복원을 하더라도 아직 이념갈등이 잔존해 있는 우리 사회가 이 역사를 어떻게 받아들일지도 미지수다. 김영승 선생은 빨치산 유적지를 촬영한 자료들을 모아 역사자료로 활용할 계획이나 “사회적 여건이 성숙될 때까지” 동굴 개방은 하지 않기로 했다. 훼손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다만 동굴에서 발견된 유품들은 그대로 두어 역사기행을 위해 비트를 찾고자 하는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위령제를 마치고 일몰시간 전에 하산하기 위해 일행은 부리나케 능선을 달려 3시간 30분만에 노고단에 도착했다. 이미 어둑어둑해진 노고단에는 한국전쟁 당시를 마지막으로 재연하듯 포연 같은 안개가 습기를 가득 머금은 채 짙게 깔려 있었다.

살아남은 빨치산과 후손, 죽은 넋이 함께 한 지리산 기행

▶옛 빨치산 동지들이 한자리에 모여 술잔을 높이들고 만남을 기뻐하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규종기자]
비전향장기수들의 모임인 '통일광장'이 주최한 '지리산 역사기행'에 참석한 빨치산 출신들과 시민사회단체 인사들은 7일 저녁, 숙소인 지리산 피아골 부근 산장에 여정을 풀고 미리 도착해 대기하고 있던 정운창 선생 등 전남 빨치산 출신들과 만나 해후를 나눴다.

저녁 9시부터 시작된 모임에서 빨치산 출신들은 자신들이 활동한 지역과 당시 전투상황을 소개했으며 빨치산들이 즐겨 부르던 '태백산에 눈 나린다'를 합창하기도 했다.

사전모임에는 전남도당에서 활동했던 정운창(78, 구례) 선생과 남편을 따라 입산해 이현상 부대에서 활동한 이옥자(79, 남부군) 선생 등 '부부 빨치산'이 참석해 눈길을 끌었으며 비전향장기수 김용성 선생의 아들 경제 씨와 전라도당에서 활동했던 빨치산 양해정(본명 양인승) 선생의 아들 근서 씨 등 빨치산의 후손들도 자리를 함께 했다.

▶여성 빨치산 전덕례(왼쪽) 선생과 당시 함께 빨치산 활동을 벌였던 전영선(오른쪽)
선생이 오랜만에 만나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사진 - 통일뉴스 김규종기자]
정운창 선생과 이옥자 선생은 출소 후 만나 가정을 꾸렸으며 딸 정지아 씨가 이들 부부의 증언을 토대로 '빨치산의 딸'이란 책을 집필하기도 했다. 이옥자 선생은 지리산에 입산해 갓난아기를 업고 토벌대에게 쫓기던 도중 아이를 잃고 후에 남편마저 잃어버린 가슴 아픈 사연을 갖고 있다. 정운창 선생은 두 부부의 삶, 그리고 빨치산의 삶을 책으로 남긴 딸 정지아 씨가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부모의 삶을 일찍 전해들은 정지아 씨와는 달리 대부분의 빨치산 후손들은 반공이데올로기에 젖은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성인이 돼서야 부모가 어떤 활동을 했는지 전해듣는 경우가 다반사다.

▶빨치산 박남진(오른쪽) 선생이 동료 빨치산 양혜정 선생의 아들 근서 씨를 알아보고
반가운 악수를 나누고 있다. [사진 - 통일뉴스 김규종기자]
아버지 양혜정 선생이 별세한 뒤에야 아버지가 빨치산 활동을 했던 사실을 알았다는 근서 씨는 비전향장기수들 바로 옆에 앉아 빨치산 이야기를 들으며 후손들에게 조차 쉬쉬해야만 했던 아버지의 삶을 반추했다.

양근서 씨는 "한 쪽 팔이 불편한 아버지를 보며 어렸을 때부터 사연이 궁금했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이유를 알지 못했다"며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빈소를 찾아오신 비전향장기수 선생님들로부터 아버지의 삶을 전해들었다"고 말했다.

살아남은 빨치산과, 그 후손들 그리고 먼저 간 빨치산의 넋이 서린 지리산 아래에서 이들은 밤새도록 역사가 남긴 생채기를 서로 보듬으며 자신들에게 남겨진 '과업'들을 되새겼다.

<미니인터뷰> '박영발 비트' 발견한 김영승 선생


▶기억을 되새기며 '비트'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 '소년 빨치산' 김영승 선생.
[사진 - 통일뉴스 김규종기자]
조선노동당 전남도당 박영발 위원장의 '비트'를 찾아 나서는 길에 김영승 선생과 만나 당시 전투상황과 박영발 위원장의 활동경력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김영승 선생은 박영발 위원장과 함께 활동했던 빨치산 박남진 선생의 증언을 토대로 두 차례의 탐사 끝에 비트를 찾아낸 장본인이다.

김영승 선생은 소년빨치산으로 활동하다 54년 3월, 전남 광양 백운산 옥룡골 부근에서 육군 5사단에 의해 총을 맞고 사로잡혔으며, 국방경비법 32조 이적행위혐의로 사형을 선고받고 수형 생활을 시작했다. 총 35년 9개월 간 복역했으며, 89년 9월에 출소한 뒤에는 비전향장기의 모임인 '통일광장'에서 활동하며 빨치산 유적지를 탐사하고 있다.

다음은 인터뷰 전문이다.

□ 통일뉴스 : 박영발 위원장이 활동의 거점으로 삼았던 지리산 '비트'에 대해 설명해 주십시요.

■ 김영승 : 지리산 반야봉 중허리에 묘향암이 있거든. 거긴 정식 등산로가 아니라 스님들이 다니는 길이야. 그 중허릿 길을 타고 뱀사골에서 가장 큰 골짝, 거기를 함박골이라고 그래. 그 함박골을 타고 우리가 비트로 가는 거야.

53년 9월 중순에, 내가 그때 백운산에 있었을 땐데 우리는 전라남도 빨치산 총사령관 김선우 동지하고 같이 박영발 동지하고 이현상 동지를 만나 하룻밤 잤어. 그리고 박영발 동지를 보위하고서 이쪽 뱀사골로 넘어왔어. 이현상 동지는 53년 9월 18일날, 빗점골이란 데가 있는데 거길 건너다가 매복에 걸려서 일행이 10여명 됐는데 한 사람만 남기고 다 희생됐거든. 이현상 동지는 거기서 돌아가셨고... 박영발 위원장은 우리가 모셔와 가지고 바로 토끼봉 밑에 임시 비트를 썼어. 이때 박영발 위원장 동지의 보위대 동지들이 반야봉 중허리를 전부 다 뒤져서 천연 동굴을 발견한 거여. 그래서 그리로 옮겼어.

그 때가 53년도 10월경이었지. 그 곳에서 생활을 하다가 54년 2월 22일에 족적 때문에 동굴이 발견돼서 희생된 거여. 그 안에 인자 무전사도 있었고 간호사, 수습 무전사도 있고 4명이 있었는데 다 죽었지. 거기에 이정례 동지라고 있었어. 박 위원장 비서 했던. 수류탄이 안에서 터져 부상당해 사경을 헤매고 있었는데 이주현 동지가 밥을 해가지고 오니 이정례 동지 하나만 살아있었던 거여. 굴 안에서.

그 여성동지하고 이주현 동지 두 분이 살아가지고 화개재라고 있어. 그 고개를 넘어오던 중 하산해 내려가던 토벌대들이랑 부딪힌 거여. 그래서 거기서 다 희생이 됐지.

10월부터 그 이듬해 2월까지 동굴을 이용한 거여. 그리고 그 동굴 옆에 구들장터가 있어. 그 구들장터가 있는데 적들이 없을 때는 구들장터에서 생활하고 적들이 있을 때는 동굴에서 생활한 거여. 보위대 동지들은 그 주위에서 잠복을 해. 매일매일 적들의 동태라든가 이런 걸 보고하고 밥을 짓고 했었거든.

거기서 살아남은 동지들이 한 60여명이 됐었거든. 그 양반들이 다시 규합이 돼서 야산으로 들어갔어요. 전라도 조계산이라고 있어. 거기서 있다가 55년도에 마지막까지 적들하고 싸우다가 전부다 전멸했어.

그리고 그 비트 안에서 뭘 했냐하면 조국출판사를 만들어서 거기서 등사를 했어. 거기 무전기도 있거든. 거기서 공화국 방송은 다 들어. 그 방송을 듣고 등사 다 해서 각 도로 알리는 일을 하다가 마지막 공세로 희생돼 종막을 고하고 만 거야.

남로당 조직 일꾼들에게 보내는 과업 등을 다 잡아서 다 내려보낸 것이야. 거기에 보면 투쟁 과업이라든가 그게 다 제시가 되거든.

▶'비트'가 있는 곳을 가리키며 설명하고 있는 모습.[사진 - 통일뉴스 김규종기자]
□ 빨치산 활동을 했던 박남진 선생이 증언을 토대로 탐사했다고 하는데, 박남진 선생은 박영발 위원장과 같이 활동을 했던 빨치산 출신인지요?

■ 그 분은 박영발 위원장 비트에서 일상적으로 같이 생활은 않고 굴속에서 몇 일 잠을 같이 자며 기거를 했어. 굴이 어느 근방이라고 아는 분은 박남진 선생밖에 없어요. 박남진 선생을 처음부터 알았더라면 빨리 굴을 발견했을 수 있었을 텐데... 나도 안지가 얼마 안 돼. 박남진 선생은 전라도당에 있었고 박영발 위원장이랑 같이 있었어. 출판일을 담당했고.

그 분이 반야봉 어느 근방이라는 것은 아는데 정확히 어디라는 거는 모른단 말야. 지도를 사다가 대강 어느 지점이다 해서 작년 11월 달 1차 갔을 때는 못 찾고 실패했죠. 그때 박남진 선생하고 같이 갔었거든. 그러고 나서 또 한번을 갔어. 기세문, 박동기 선생, 나, 나승하, 조성봉 등 5명이 갔거든.

함석골 부근에 가서 팀이 갈라지게 된 거야. 나는 우측을 수색하고 나머지는 좌측을 수색하고. 그러고 보니까 나하고 본 대열하고 떨어져 버렸어. 난 우측의 어느 지점일거라 확신을 했거든. 틀림없이 요 근방일 거다. 그래서 혼자서 갈지자로 큰 바위를 수색했거든. 찾아보니 굴이 있는 것을 발견했어.

그런데 들어가 보지는 못했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야 돼서. 그 분(빨치산)들이 있었을 때는 사다리를 만들어서 밖에서 두드리면 사다리를 내려주고 그랬거든. 그걸 알고 있어서 틀림없이 여기일 거다 했지. 박남진 선생도 구들장 터가 있다고 얘기를 하더라고. 내가 구들장 터를 먼저 발견했거든. 거기서 몇 미터 올라가 보니 굴이 나온 거여.

그래가지고 금년 2월 달에 광주 시민의소리 기자들이랑 같이 가서 위치를 한번 찾았기 때문에 나무하고 톱을 가져와 사다리를 만들었지. 그래서 굴 안에 들어가 촬영을 한 거야.

□ 처음 비트를 발견했을 때 어떤 느낌이 들었는지요?

■ 우리 동지들이 조국해방을 위해 투쟁했던 동지들이 가고 없지만 그 분들이 사용한 유품들은 산산조각이 나 있었기 때문에 그 분들의 손때가 어려있는 게 아니여. 그 분들이 바라던 통일은 아직 되지 않고 있는 마당이기 때문에 그분들의 정신을 계승해서 남과 북이 하나가 되고 자주 독립국가를 만들어 대국 강성해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그런 통일을 이뤄야 하겠다는 마음을 다지는 계기가 됐지.

그리고 또 하나는 이걸 우리 당대에서 끝나도록 할 것이 아니라 후대에 계승시켜 통일 사업에 열정적으로 뛰어들 수 있도록, (비트를)역사적 현장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이죠.

▶'비트'를 출입하는 좁은 통로에서 나오고 있다.[사진 - 통일뉴스 김규종기자]
□ 비트에 유골은 없었는지요?

■ 그 놈들이 유골을 다 가져가 버렸어. 얘기 듣기로는 산내면 초등학교에 시신을 갖다놨데. 그리고 이게 누구 시체인지는 모르니까, 체포된 사람을 불러다 놓고 누구냐고 확인을 했다고 그래. 그 시신을 어떻게 처분했는지는 아직도 모르고 있고, 언젠가 시간이 되면 70.80대 노인들 수소문해서 그때 당시 상황과 시신들을 어떻게 처분했는가 답사를 할까 생각 하고 있지.

□ 비트 안에 있는 유물들은 어떻게 처리할 계획인지요?

■ 고무신하고 전선줄, 배터리, 약병 등 이런 것들은 굴 안에 있는 것은 그대로 놔두려고 그래. 다음 역사기행에서 가더라도 현장의 유품들을 볼 수 있도록. 썩지는 않을 테니깐. 다만 등사기만 가져오려고.

□ 비트는 어떻게 보존할 계획인지요?

■ 동굴 보존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은 없는데 현재 상황 속에서 너무 까발려 버리면 이게 훼손될 우려도 있고 해서 사회적 여건이 성숙될 때 까지는 개방하지 않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 이런 생각을 갖고 있어.

▶[사진 - 통일뉴스 김규종기자]
□ 지리산에 있는 박영발 위원장의 비트 외에 현재 발견된 비트는 몇 군데인지요?

■ 백운산에도 비트가 골짝마다 여러 개 있어. 그리고 지리산 문수골에도 있는데 하나는 아는데 하나는 몰라. 장흥 유치내산에도 비트가 있어. 지리산 피아골도 있고 천운산골도 있거든. 경상도쪽은 잘 모르고 뱀사골 쪽에도 방준표 전라북도당 위원장이 썼던 아지트가 있어요. 그 아지트를 아직도 발견 못하고 있어. 그리고 전북 빨치산 친구들이 그걸 찾으려고 몇 년 했었는데 그걸 알만한 사람들은 죽고, 한 사람이 알고 있는데 정신상태가 치매 걸려 왔다갔다해서 오리무중이 되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어.

그 다음에 충남도당 위원장이 희생된 비트도 다녀왔어. 음성인데. 내가 촬영도 다 해왔거든. 지금 천연동굴로서는 박영발 위원장 비트가 최초지. 남쪽 땅에서 빨치산 투쟁을 하면서 그분들이 썼던 유품이 남아있는 곳은 유일하게 뱀사골, 오늘 가는 동굴인 것으로 알고 있어요.

□ 빨치산 유적지를 촬영한 자료들은 어떻게 활용할 계획인지요?

■ 하나의 역사적인 자료가 아녀. 필요한 경우에는 편집도 계획하고 있고 내가 해야 할 일이 뭘까 생각하는 과정에서 사진도 많이 찍었거든. 내가 죽더라도 자료는 남잖아. 해서, 이 역사적인 자료를 후대에 물려줘야겠다는 생각으로 찍고 있지.

□ 현재 남아있는 빨치산은 몇 명인지요?

■ 아직도 묻혀서 자기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분들이 사회 일각에 많이 있어요. 같이 체포를 당한 사람도 있고. 중간에 병들어 죽은 사람도 있겠지만. 살아남은 사람들이 더 많으리라고 생각하고 있어. 현재 빨치산 활동을 한 사람으로서 자기 정체를 드러내고 통일운동을 하고 있는 분들은 내가 알기로는 30여명 가까이 되지 않을까 이렇게 추산을 하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