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거리 214.2km=한남/210km+마루금어프로치/4.2km]
[산 43개, 봉14개, 고개/嶺 39개]
한남정맥 길을 마무리하며…
놀멍 쉬멍 간 길이 이제 끝났다고 하네요.
거기 산 길이 있어서 걸었는데
그 산길이 길 같이 않아서 투덜거리고
날씨가 더워서 헉헉거리고
엊그제 은행잎 떨어진 어느 초등학교 앞을 지나는가 싶더니
어느덧 사계절이 바람처럼 지나고 다시 한 해의 말미에서
또 한 길에 작은 쉼표와 마침표를 찍게 되었습니다.
누군가 그랬지요
한남길 뭐 볼게 있어서 가냐고…?
거기 길이 있어서 갑니다.
잘려나가고 파헤졌을 망정 내 사는 세상 가운데로 난 길입니다.
그 길에서 내 가슴에 출렁이는 바다를 만납니다.
우리가 걸었던 수 많은 길
또 우리가 걸어가야 할 수 많은 길
그 가운데 하나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걷는게 그저 좋다고 하면 이상하게 들릴까요?
내가 사계절의 능선에서 만난 건 아름다운 풍경뿐이 아니었습니다.
살아가는 날의 기쁨과 희망
무수한 아름다운 시와 인생의 교훈이었습니다.
길을 걸으면 행복해 집니다.
내 영혼은 춤을 춥니다.
내 삶의 신명나는 노래를 듣습니다.
낙남 길에서 팔을 다쳐서 종주를 유보했고
호남길에서 중간 쯤에서 허리를 다쳐서 주저 앉았었습니다.
지난해 낙동길을 마무리하고 올해 한남길에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우리 삶의 동력이라는 도전과 성취
단지 그 해냈다는 기쁨에 들뜨는 것이 아닙니다.
자연 속을 소요하는 당연한 기쁨을 잃어 본 적이 있나요?
햇빛 따뜻한 봄날의 주말을 도서관 귀퉁이 앉아 보내며
몇 시간 책을 읽고도 그 내용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던 때가 있나요?
내겐 길을 걸을 수 있음이
길을 걸으며 만났던 무수한 기쁨과 행복을 다시 찾을 수 있음이 감동입니다.
지금도 어딘가에 두손모아 소망하는 이 있을 겁니다.
몇 년 전의 나처럼
“다시 그 길을 걸을 수만 있다면 바랄게 없다.” 라고 말하는 누군가가 …
우리는 지금 떠나지 못하는 이유를 오만가지도 넘게 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나고 나면 어디에도 그 실체와 근거는 남지 않습니다.
단지 떠나지 못했다는 사실과
그냥 떠나지 못한 날들이 구름처럼 쌓여서
세월에 늘 허덕이는 바보 하나 덩그러니 서 있을 뿐입니다.
기다려 주지 않는 것이 두 개 있다지요
떠나간 여자와 세월
세월은 바람처럼 빨라서 정작 떠나고 싶은 날에는 떠날 수 없을 지도 모릅니다.
떠나기 좋은 날은 좀더 어린 날입니다..
어제 떠나지 못했다면
지금이 가장 적당할 때일 것입니다.
아프면서 생각했습니다.
병이 나으면 하고 싶은 거 하고 먹고 싶은 거 먹고 가고 싶은데 가자고…
춤추고 싶을 때 춤추고 노래하고 싶을 때 노래하자고
남들이 돼지 멱따는 내 소리가 싫다 해도 내가 부르고 싶은 노래를 부르자고….
한남길은 거기 있었고
함께할 산 친구들이 있었고
그리고 10년을 함께한 귀연이 있었고
나는 다시 거친 길을 걸을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혼자 그 길을 걸으려면 시간도 돈도 더 들고 심심하고 재미가 없지 않겠습니까?
김치찌개 맛있게 끓여놓고 차가운 맥주 한잔 따라주며 반겨줄 산 친구가 없는
한남길은 삭막하겠지요
그래서 함께 걷다 보니 1년이 훌쩍 지났고 벌써 그 길이 끝났다고 합니다.
백두대간 때는 감격의 눈물이 저절로 흘렀는데
한남 졸업은 그렇게 벅찬 감동이 아니라 즐거운 축제로 다가 왔습니다.
당당함 ,자신감 그리고 나에 대한 끝없는 신뢰
지금도 조용한 감동이 밀려 옵니다.
다시 그 길을 걸을 수 있었던 내가 자랑스럽습니다.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느낄 수 있고
먼 길을 걸을 수 있는 건강과 떠날 수 있는 시간과 자유가 있으니
인생은 아름다운 여행길입니다.
무수한 오늘이 과거로 가게 되고
내일 내가 다치고 병들거나 늙어서 의욕이 사라져 갑자기 걸을 수 없을 때
다시는 떠나지 못한 시간을 후회하고 싶지 않습니다.
길을 걸을 수 있음에 늘 감사합니다.
아직 아이의 호기심과 젊은이의 열정을 잃지 않음에 감사합니다.
세상의 아름다운 풍경에 쉽게 흔들리는 가슴과 새로운 길에 대한 갈망을 간직할 수 있음에
감사합니다.
세상에는 아직 무수히 많은 길이 남아 있고 내일 그 길을 걸어가고자 하는 기대와 설레임이
있어 난 오늘도 기꺼이 배낭을 메고 새벽의 들창을 열어젖힙니다.
내 길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내 길은 1대간 9정맥을 넘어
밀포드와 마추피츠 그리고 세상의 아름다운 길로 이어질 것입니다.
나는 오늘도 설레입니다.
“내일은 어떤 길을 걸어갈까?”
다소 삭막한 길을 즐겁게 걸었던 나에게 박수를 보내고
그리고 함께한 산친구들에게 감사드립니다.
무릉객만세 …!